110911 추석의 성경적 이해 (전 9:7~10)
성경본문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네 손이 이를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Idul Fitri 이 나라 명절 연휴가 끝나고 또 지금은 우리의 추석명절이요 연휴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좋은 명절이지만 젊은이들은 오히려 고민이 더 많다고 합니다. 모처럼 고향에 돌아가고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서 듣는 물음이 말이죠 젊은이들을 아주 곤혹스럽게 한다는 거예요. “어떤 직장에 들어갈건가?” 이런 물음도 어렵고 “앞으로 어떻게 할건가?” 또 “어느 학교에 갈건가?” 이거 하나하나 다 어렵죠. 또 “살 빼야 될텐데” 이런 것도 아주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 간다고 해요. 그런 점에서 비단 꼭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명절을 맞아서 모처럼 삶의 위로를 얻고 또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데 음식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많은 것도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내 마음속에 지난 일들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는 소망과 기대, 이것을 말할 수 있다면 이게 진정한 기쁨의 명절이겠다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추석 선물로 이제까지 지나온 추석들 가운데 기억되는 추석이 있어요.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죠.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죠.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갈피를 잘 못 잡았어요. 준비를 못해서 고3 9월인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눈에는 말이죠 햇빛이 안 보이더라고요. 온통 먹구름이에요. 희망과 소망이 없었죠. 그러다가 신문기자를 하던 삼촌이 한 번 저희 집에 들리면서 던져주고 간 말 한마디에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 소망을 가지고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그 9월 마지막 날이 바로 그 추석이었던 걸 기억해요. 그래서 저는 10월 초부터 서울에 올라가서 공부하기로 계획을 가지니까 그 마음에 소망이 있더라고요. 자그마한 소망을 가지고 추석을 보내니까 뭐 맛있는 걸 먹은 기억은 없는데 모처럼의 기억이 나는 추석으로 제 마음에 남아 있어요. 소망이 필요한 거죠.
또 하나, 제가 9년 전에 여기 한마음교회와 연결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9월 초에 한마음교회 얘기를 듣게 됐고 청빙 요청을 받았고 하나님께 받은 바 나름의 증거가 있었기에 ‘하나님이 나를 이곳 자카르타로 부르시는 구나’ 하고 “내가 그곳에 가겠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는 추석 연휴를 이용해서 조용히 와서 자카르타 상황이 어떤지 한 열흘간 머물고 처음 만나는 우리 교우들하고 서로 인사를 하고 지나간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와서 보니까 저는 이곳 자카르타가 그저 반둥 정도 되려니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왔었는데 와서 상황을 보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은 정말 너무나 정확하시구나. 이제까지 나에게 주셨던 그 많은 훈련과 모든 것들은 바로 이곳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준비해 놓으셨구나.’ 9년 전에 추석에 제가 받은 선물이 그것이었어요. 아, 이렇게 절묘하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구나. 잊을 수 없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이번 추석 연휴에 필요한 게 많이 있지만 저와 여러분이 모두 다 새롭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을 가지고 이 연휴를 보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추석의 성경적인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추석을 지킬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초막절이에요. 지금 한 주간 그 사람들은 초막절이라고 하는 명절을 지키고 있어요. 우리는 이제 고향으로 흩어져 가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명령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모여서 초막절 한 주간을 같이 지키는 것이죠. 그래서 1년에 세 차례 명절이 있다고 했죠. 유월절이 있고, 오순절이 있고, 초막절이 있어요. 그들의 유월절은 우리의 구정하고 대응하는 거죠. 또 그들의 오순절은 우리로 말하면 지금은 사월초파일이 됐죠. 그 절기와 맞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초막절은 우리의 추석과 맞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다 농사절기에 맞추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유대인들은 유월절에는 보리추수를 하고 오순절에는 밀추수를 하고 초막절에는 벼농사추수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벼농사추수를 지키는 이 절기를 초막절이라 이름하게 한 것은 하나님은 초막을 지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자기집 앞에 임시로 일주일 동안 머물 수 있도록 초막을 짓습니다. 나뭇가지들로 장식을 하고 해서 가족이 다 자기집 앞의 초막 안에 들어가서 일주일을 지내요. 예루살렘에 가보면 많은 아파트들이 우리와 달리 번듯하게 올라가지 않고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층마다 베란다를 만들어서 베란다에다가 초막을 짓도록 했어요. 그래서 초막에 들어가 가족들이 누워서 그 지붕을 보면 지붕 사이로 하늘이 보이도록, 그리고 별 세 개는 보여야 되요. 그게 기준이에요. 누워서 온 가족이 터진 지붕 사이로 하늘의 별을 세 개는 볼 수 있도록 만들어요. 얼마나 엄격하게 하나님의 규율을 지키려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초막을 짓는다는 말은 뭐냐? 지난 날 광야시대에 그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와 이 모든 것으로 함께 하셨던 그것을 기억하라. 그 광야시대의 그 어려움에 비교한다면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 정착하고 벼농사를 짓고 먹을 것을 얻게 된 이 모든 것은 얼마나 풍성한 은혜인가 하는 것이죠.
여러분, 감사의 방법이 두 가지가 있죠. 원하고 바라던 것을 얻을 때에, 꿈을 이루고 성취할 때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죠. 그러나 그것보다 더 깊은 감사가 있어요. 어떤 감사냐? 이는 평범한 일상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고 아주 어려움에 빠졌을 때, 아주 병에 든다든지 사업에 실패한다든지 하는 이런 아주 깊은 어려움 가운데 있다가 일상으로 회복되었을 때 어떻게 되요. 얼마나 이 한 끼 식사가 은혜롭고 건강한 몸으로 일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진정한 감사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을 짓고 그 불편한 초막에 들어가서 한 주간 지내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거죠.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혹 내 뜻대로 사업이 잘 안 된다고 근심하고 걱정하기도 하지만 마음을 비우세요. 마음을 비우세요. 오늘 이렇게 우리가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와 때로는 근심하고 염려하는 속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이 이상의 은혜가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로 모일 때마다 함께 하나님께 제사도 지내고 또 성전이 다 무너졌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회당에 모여 성경을 읽는데 초막절에 읽는 성경이 있어요. 그게 바로 전도서에요. 오늘 우리가 전도서의 본문을 읽었어요. 전도서는 솔로몬이 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시대가 어지러워요.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지극히 불확실한 시대에요. 그래서 전도서 첫머리에 솔로몬은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무슨 말이에요. 지극히 세상 살아가는 게 불투명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솔로몬이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7장 16절에서 17절에 보니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지 말라’ 뭐 안다고 얘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다 뒤집어 진다 이거예요. 또 ‘지나치게 우매자가 되지도 말라’ 그렇다고 허랑방탕하게 살지도 말라는 거예요. 오직 오늘 네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땀 흘리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고 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오늘 하나님이 주신 포도주를 마시고 떡을 떼면서 기뻐하며 오늘을 살아라.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라고 말해요. 왜, 세상이 어지럽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이제 전도서니까 구약적인 초막절의 이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지나치게 의인도 되지 말고 지나치게 악인도 되지 말고 뭐 안다고 떠들지 말고 오늘 주시는 그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그것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이죠.
그러나 초막절을 가장 정확하게 우리들에게 해석해주시고 그 길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죠. 신약에서 신약에 비추어 초막절을 다시 해석해야 되요. 초막절의 의미는 유월절에 보리추수를 하고 오순절에 밀추수를 하고 마지막 초막절에 벼농사추수를 함으로 인해서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거예요. 끝내는 거예요. 종말의 의미가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살다가 우리가 육신을 벗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을 누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 세 절기에 대비시켜 말해요. 그래서 유월절은 뭘 말합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말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이다 그렇게 말하죠. 오순절은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과 그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우리들에게 부어주시는 성령께서 오셔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사건이죠. 그리고 그렇게 예수 믿고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살다가 초막절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느 날 홀연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는 육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 이게 종말이에요.
종말에는 세 가지가 있겠죠? 우리 각자 개인의 종말이 있어요. 이것만큼은, 태어난 것만큼 확실한 사건이에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분명한 사건이에요. 개인의 종말이 있어요. 또 역사를 보면 나라와 민족의 종말이 있어요. 한민족이 이렇게 살고 있는 것, 이것 기적인줄 아세요. 역사를 보면 역사 속에 나왔다가 흩어진 민족들이 많아요. 없어진 민족들이 많아요. 그리고 마지막, 세계의 종말이 있어요. 인류의 종말이 있어요. 그 세상의 종말은 반드시 있죠. 그러나 그 날이 언제인지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어요. 마치 구약에 수천 년 동안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가지고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그렇게 얘기했지만 언제 어떻게 올는지는 잘 알지 못했어요. 베들레헴에 오시리라고 까지는 알았지만 언제 오실는지는 몰랐어요. 그러나 약속하신 대로 그 누구도 알지 못한 그날 홀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계획을 펼치셨듯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에 종말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종말은 어떤 것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오늘이 나의 종말이다.’ 모든 인생은 종말을 살고 있는 거예요. 병원에 가면 시한부인생들이 많이 있어요. 의사가 진단해요. 당신은 6개월입니다. 요즘 의사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에 6개월이라고 하면 6개월이에요. 정확해요. 통계가 있고 데이터가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만 시한부라고 생각해요. 아니요, 시편 90편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입을 통해 이미 말씀하셨잖아요. ‘인생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수고와 슬픔 뿐이요 그마저도 활같이 흐르는 물같이 지나가는 구나.’ 여러분, 백 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이잖아요. 또 그것도 확률일 뿐이잖아요.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에요. 오늘이 나의 종말이에요. 현재적인 종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있어야 되요. 종말론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되요. 저는 늘 잠자리에 들 때마다 가슴 설레임이 있어요. 사실 내일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난다는 것은 나의 기대일 뿐이지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그건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잖아요. 그렇게 새 날을 보는 것이야말로 우리 손을 떠난 일이죠. 오늘 어떻게 살 것이냐?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초막절을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영원히 생수가 솟아나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상황, 이스라엘의 배경이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절에 다 예루살렘에 모이는데 그 예루살렘 성전에는 함부로 못 들어가요. 구별이 엄격해서 이방인의 뜰이 있어요. 이방인들이 나아가는 뜰이 있어요. 그렇지만 이방인들은 그 이상은 절대 못 들어가요. 성전 안에는 못 들어가요. 멀리서 이방인구역에서만 구경할 수 있어요. 조금 더 나아가면 여인의 뜰이 있어요. 여인들은 여인의 뜰까지 갈 수 있어요. 그 다음에는 남자들의 뜰이 있어요. 남자들은 거기까지 갈 수 있어요. 이렇게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요. 그런데 초막절 때만은 제사장들이 일하는 곳까지 들어갈 수 있어요. 어릴 때 제가 오산 비행장 있는 곳에 살았는데 1년에 한 번 미국 독립기념일에 부대를 오픈해요. 그러면 그때가 6~70년대니까 미군부대에 들어가면 뭐 그리 재미있다고 벼르고 있다가 들어가서 비행기도 구경하고 돌아다니면서 PX에 들어가서 물건도 사고 재미가 있더라고요. 유대사람들은 1년에 한 번 초막절에 성전을 여는 거예요. 제사장들이 일하는 제사장뜰까지 들어오게 했어요.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희생제물을 불태워 바치는 번제단이 있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막 무질서하게 들어가는 게 아니고 제사장들과 함께 버드나무가지 등의 가지를 준비해서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대열을 맞추어서 노래를 하면서 도는 것입니다. 찬송을 하면서 도는 거예요. 그때 부른 찬송이 뭐냐? 시편 118편의 ‘호산나’찬송이에요. ‘호산나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이사야 12장 2절에서 3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요 나의 구원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런 노래가 있어요.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도는데 그 초막절 7일동안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실로암 연못에 가서 제사장과 순례자들이 함께 물을 길어 나릅니다. 번제단까지 물을 길어 와서 번제단에는 원래 희생제물과 함께 기름을 붓는데 그날은 기름뿐만 아니라 물도 같이 붓는 거예요.
여기엔 의미가 있어요. 이건 말하자면 기우제에요. 그러니까 한 해 농사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이제 한 해 농사는 끝났고 오늘부터 다시 새 해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때가 이제 이른 비가 올 때에요. 지금 건기 아닙니까. 건기 마지막이잖아요. 조금 있으면 비 오지 않겠어요. 우기가 들어서 비가 제대로 와야 그 다음 해 농사가 제대로 되죠. 여기하고 똑같아요. 이 나라 건기, 우기와 그 중동의 건기, 우기가 똑 같은 거예요. 건기 막바지에요. 물을 부으면서 ‘하나님, 새해에도 이렇게 비를 주십시오. 때를 맞춰서 이른 비도 주시고 늦은 비도 주셔서 새해에도 풍성한 수확을 주십시오.’ 하는 뜻으로 백성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거예요. 특별히 하루에 한 바퀴씩 번제단을 돌았는데 명절 끝날 마지막 날은 큰 날이라고 해서 일곱 바퀴를 돌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거예요.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바퀴 돌다가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외치는 순간에 성이 무너진 것 같이 제단을 일곱 바퀴 도는 거예요. 그리고 집으로 흩어지는 거예요.
그 무리들이 돌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시간, 장소를 잘 선택하셔요. 결정적인 시간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셔요.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실로암 연못의 물을 길어와 번제단에 물을 부으면서 “새해에도 우리에게 비를 주셔서 풍성한 수확을 주시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소원하는 사람들에게 목마름을 진정으로 해결하려면 하늘로부터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덧입어야 한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실 때 우리 삶에 넘치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라는 거예요.
회교를 믿다가 예수를 만나서 개종한 사람들의 DVD가 있어요. 그걸 보면서 참 많은 걸 느꼈습니다. 5편의 단편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인도네시아, 터키, 이란, 이집트,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다 회교도국가에요. 각자 처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신을 찾아요. 알라여 살아계시다면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요. 혹은 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요. 왜? 그 주위에는 기독교인이 없으니까. 심지어 터키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주위에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어요. 그 사람이 신약성경을 손에 쥐고 읽기까지 2년이 걸렸어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하나님, 하나님을 좀 알게 해주세요.’ 그렇게 갈망하고 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라디오를 돌리다가 기독교 방송을 듣게 되죠. 그리고 나에게 성경을 하나 보내주세요. 그러니 2년 만에 간절히 기다리다가 받은 성경을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고이 접어서 선반 위에 올려놓을 것 같아요? 아니요. 그냥 다 삼켜버리듯이 성경을 읽는 거예요. 내게 나타나셨던 예수님이 이런 분이로구나.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듯이.
여러분,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의 고백이 똑같아요. 나라와 각자의 상황은 달랐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심지어는 이집트인의 경우는 알 카에다 같은 사람이에요. 학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같이 불 붙는 열정을 가지고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서 군사훈련을 받아요. 기독교 지도자들을 테러해요. 교회를 불살라요. 그를 아는 주위의 기독교인들이 그를 피하고 도망가요. 어느 날 그에게 본부에서 지령이 떨어졌어요. 이렇게 테러만으로는 안 된다. 성경을 연구해서 기독교의 허구성을 밝혀라. 그 과제가 떨어졌어요. 지도자가 이 사람에게 성경을 구해주니까 이 사람이 막 거부하는 거예요. 이 저주의 책을 내가 만질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시켜라. 난 할 수 없다. 네가 가장 똑똑하니까 본부에서 너에게 주는 과제다. 막대한 돈을 주면서 성경을 연구하게 해요. 이 사람이 성경 속에서 기독교의 허구성을 찾으려고 연구합니다. 그렇게 연구하고 공부하다가 그는 오히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경험하게 되요. 이제는 반대가 됐어요.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데도 그는 복음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요.
여러분, 우리가 명절을 맞아서 어떻게 살 것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주위에 기독교인도 없고 성경말씀도 없고 아무런 방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직접 가셔요. 환상 가운데 그를 만나주셔요. 그러나 여러분은 아니에요. 여러분은 예배가 있고 말씀이 있어요. 여러분 손에 말씀이 있어요. 여러분이 직접 펴서 말씀을 읽으세요. 가난한 마음으로 말씀을 읽으세요. 그럴 때에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셔요.
여러분, 초막절은 종말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오늘 종말을 살고 있어요. 내일을 장담할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은 종말이 몇 월 몇 일인지 궁금해해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는 그 때에 종말이 오리라. 이게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이에요.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아직 때가 낮이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육체 가운데 살고 있을 때 내게 맡겨 주신 이 일을 하면서 살리라. 이게 종말의식이에요.
사도 바울은 임박한 종말을 생각했어요. 살아생전에 주님이 오실지도 모른다는 긴박한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았어요. 그것은 두려움의 종말이 아니에요. 주님이 오시기 전에 빨리 내가 만난 예수를 사람들에게 전해야지. 로마서 1장에 보면 나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복음에 빚진 자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구나.
회교도 개종자들 5명의 경우 모두 똑같아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예수 믿게 된 사람은 아버지가 얼마나 엄격했던지 동네 지도자들을 불러가지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독약을 타서 아들에게 줘요. “먹어라. 너는 이것을 먹고 죽어라.” 처음으로 예수를 만난 아들이 부모의 말에 순종해서 독약을 받아서 마셔요.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습니다. 기도하게 해주십시오.” 기도하고 받아 마셔요. “주님, 나를 만나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 생명을 주님께 맡깁니다.” “먹고 누워 자라. 독이 퍼질 테니까.” 자고 일어났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안 되겠구나.’ 하고 쫓아냈어요. 신발도 벗기고 바지도 벗기도 쫓아냈어요. 사람을 시켜서 숲 속에서 독화살을 쏴서 죽이도록 했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그를 끝까지 지켜주셔요.
여러분, 여기에 생명의 은혜가 있어요.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으로 약속하셨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땅끝이라고 여겨지는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라고 했던 것 같이, 아름다운 종말을 꿈꾸며 내게 주신 생명의 약속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명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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