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925 한 알의 밀알 (요12:23-27)[쿼 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0. 15. 14:47

110925 한 알의 밀알 (요12:23-27)

성경본문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지난 주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서 이메일을 열어보니까 '한인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전날 이메일에는 화재로 인해서 전신 80% 화상을 입어 긴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니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벌써 돌아가셨다는 것이지요.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에 시내 큰 병원 영안실에서 입관예배가 있었습니다. 가보니까 선교사 몇 분하고 달랑 가족들만 있고요. 연합교회 경조팀들이 오셨더라고요.

그 다음 날 자카르타 북부 딴중뿌리옥 화장터에 가서 마지막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는 선교사 다섯 명과 가족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고 정성국 선교사의 이야기를 유족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다가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일단 돈을 벌어 가지고 공부해야 되겠다 해서 이십 여 년 전에 이곳 인도네시아에 들어와서 자카르타 근교 구눙뿌뜨리에 있던 완구회사에 취직해서 일했다고 합니다. 헤아려 보니까 올해 고인이 마흔여덟이니까 그때 나이가 스물다섯이더군요.

그곳에 일하다가 인도네시아 아가씨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결혼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서 17년 동안 세 자녀를 낳고 살았습니다. 계속 신학공부를 하면서 인도네시아 선교의 비전을 꿈꾸다가 작년 5월에 고향교회로부터 후원을 약속받고 이곳에 들어온 것이죠. 먼저 반둥에서 언어공부를 하고 예전에 자기가 일했던 동네로 돌아와서 사역을 펼치려 했던 것이죠. 입국한 지 채 일 년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뜻하지 않게 전기누전 화재로 인해서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얼마 전 화재 현장에 가서 불탄 집을 둘러보면서 가족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파송교회의 후원이 넉넉치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난 5월로 거주 비자(KITAS 끼따스)가 만료되어 연장해야 하는데 그 비용을 어떻게든지 줄이려고 아내는 한국 국적이지만 인도네시아 사람이고 여기서 살 계획이니까 KITAS 연장을 안하고 지냈던 거지요. 화재 순간에 아이를 피신시키고 자기도 피했습니다만 집안에 여권을 비롯한 서류 비용이 아까워서 다시 뛰어 들었다가 나무지붕이 무너지면서 그만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화장도 끝났고 이제는 유가족이 한국대사관과 이민국을 찾아다니면서 행정 절차를 다 밟아서 곧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예배 때 교우들에게 그런 내용을 전해드렸는데 즉석에서 헌금도 모아주시고 옷가지도 모아 주셔서 그 유족에게 전해드렸고, 시골에 사는 그들이 대사관과 이민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짧은 기간에 일을 끝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였기에 같이 다니면서 이모저모 도와주어서 차질 없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입니다.

그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일을 도우면서 제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물음은 이것입니다. '하나님!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젊은 시절부터 나이 마흔여덟이 되도록 오직 이것 하나 붙들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초라하게 세상을 떠나게 하십니까? 사람들이 이걸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혹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은 아닙니까?‘ 제 물음은 한마디로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것과 똑같아요. '주여!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 주님께서 제 마음에 주시는 말씀이 있어요. '사명이다'

여러분!세속적인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판단해서는 안 돼요. 그가 사명을 붙들고 살았는가? 말씀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이야기 합니다. '쿼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요한복음 13장 36절에 베드로가 주님께 던진 물음이지요. 주님께서 자꾸 어디론가 가시겠다고 말씀하시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쿼 바디스 도미네' 라틴어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나를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말합니다. "아니. 주님!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제 목숨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이 얼마나 패기와 열정과 확신이 넘치는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이 베드로의 다짐을 들으면서 말씀하셔요. "네가 과연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바치겠느냐? 똑바로 들어라. 너는 오늘 이 밤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결국 그날 밤 그 화려했던 장담과는 전혀 딴판으로 그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저주합니다. 그리고는 도망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 사실을 확인했을 때 베드로는 더 괴롭습니다. 자기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곳이 바로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서는 자리에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착각하면 안 돼요. 내가 뭘 한다고 '내가'가 나오면 그건 이미 틀린 거예요. 뭘 했습니까? 또 뭘 할 것 같습니까? 아니요.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일부러 찾아가셔요. 베드로는 주님이 부활하셨지만 감히 얼굴을 들고 주님 앞에 나갈 수 없어서 멀리 도망가 버렸어요. 옛 생활로 돌아갔어요. 고기잡이로 돌아갔어요. 그럴지라도 주님이 거기까지 찾아가셔서 베드로를 만나주셔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대답하지 못합니다. "내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대답하지 못해요. "내양을 치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셔요. 베드로를 괴롭게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은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노라'는 주님의 마음을 바꿔 표현한 것뿐이에요. 베드로가 결국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주님만이 제 마음을 아십니다." 그때 놀라운 말씀을 하셔요. "너는 나를 따르라. 네가 젊은 날에는 네 마음대로 휘젓고 돌아 다녔지만 이제는 남이 너에게 허리띠를 띠우고 너를 이끌어 가리라." 성령께서 베드로를 이끌어 가실 것을 예고하신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은 내가 계획하고 궁리한 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에요. 얼핏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요? 거기에 속으면 안돼요. 성령께서 우리의 허리띠를 묶으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그것을 깨닫고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인도하시는 은총에 감사하며 따라갈 때 내 마음과 삶이 완전히 바뀌는 거예요. 왜? 나는 한마디 말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의 부르심을 새롭게 받는 엄숙한 그 순간 옆에 요한이 있어요. 동생 같은 요한은 도망갔던 자기와는 달리 십자가 아래까지 가서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네 어머니로 모셔라"하시는 주님의 당부까지 들었거든요. 그래서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저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셔요. "내가 그를 오래도록 살게 한다고 한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여러분, 우리 이웃을 돌아보는 것, 그건 우리의 의무이죠. 그건 기독교인의 윤리죠. 그러나 순서가 있어요. 다른 사람을 돌아보기 전에 할 일이 있어요. "너는 나를 따르라.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먼저 순서가 있다는 말이에요. '너는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온전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따르라' 교회 안에서도 경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이곳에선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 주신 은혜와 지혜대로 마음과 생각을 열고 손을 펴서 연약한 자를 돕는 거예요.

알고 보면 교회는 병원이잖아요. 다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갈등하며 사는 거잖아요. 공동묘지는 조용해요. 거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거기야말로 평화가 있어요. 그러나 사람이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에요. 또 문제가 있음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자기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거예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시시비비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거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 해결할 문제에요. 나 역시 하나님과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꿈은 야망입니까 사명입니까? '내가 뭘 하겠다.' 이건 야망이에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것, 사명이에요. 여러분에게 사명이 있습니까? 나는 오늘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또 어떤 분들은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신학교 가야 한다고 그래요. 아니요. 그거 잘못 알아들은 거예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물론 때론 여러분의 인생 행로를 바꾸어야 할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환경과 직업을 바꾸기 전에 먼저 삶의 태도를 바꿔야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님께서 호산나 입성을 하셨어요. 나사로를 살리시고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성에 나귀를 타고 들어 가셨어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찬송을 하면서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왕이 왔다고 흥분하자 예루살렘성이 한바탕 혼란이 일어났어요. 심지어 이방인인 헬라 사람까지 "여기 새 왕이 왔구나! 우리가 그 분을 한번 만나봐야 되겠다." 제자들에게 줄을 대가지고 예수님에게 면담을 요청했어요.

그 소식을 전해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셔요. "이제 드디어 인자(사람의 아들/ Son of Man)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구나!"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키며 말할 때 늘 인자라고 하셨죠.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오해하기 쉬워요. 예수님이 “내가 이제 왕의 보좌에 앉아야 되겠구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그 말이 아니에요. "내가 이제 십자가에 죽을 때가 왔구나!” 백성들의 헛된 기대를 냉정하게 외면하시고 담담히 십자가를 지고 죽기로 작정하셔요. 야망을 좇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굳게 붙들었어요. 그리고 말씀하셔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여러분, 얼마 전에 독도에 관한 영상물을 하나 봤어요. 독도 밑 바다에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져 있어요. 별의별 물고기와 생물들이 가득 살고 있어요. 거기 망상어라는 물고기는 알이 잡아 먹히지 않도록 뱃속에서 부화를 해요. 뱃속에서 부화를 시키고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 배가 막 터질 것 같은데도 참고 견뎌요. 마지막 순간에 많이 자란 새끼를 밖으로 내보내요. 그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에요. 십여 마리의 새끼들을 풀어 놓고는 그길로 밑바닥에 떨어져서 죽습니다. 그대로 지쳐 죽어요.

여러분, 가시고기는 수컷이 또한 그러잖아요. 심지어 어떤 물고기는 수컷이 자기 아가리 속에다가 알을 품고 있어요. 알들이 부화할 때까지 수컷이 입에 담고 있어요. 새끼들을 다 부화시키고는 그대로 바닥에 가라앉아 죽어요. 그러면 새끼들이 그 죽은 수컷을 뜯어 먹어요. 여러분, 뭐 자식들을 위해서 크게 고생한다고 절대 말하지 마세요. 물고기가 더하더라고요. 우리는 약과에요. 이 놀라운 원리를 보세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건 고통 속의 신비에요.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셔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어려운 고난을 면하게 하옵소서! 이 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도 고통스러워 그 아픔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마지막 말이 중요해요. '그러나 내가 이것을 위하여 왔나이다.'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삽니다. 이게 사명이에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일을 주셨든지 그 안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사명이 있어요. 그 일을 내 생각 내 뜻대로만 하려 하면 야망으로 변질되요.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음성을 들으면서 기업을 운영하면 사명이 되요. 기도하면서 자녀를 바라보면 그 속에 사명이 있어요. 여러분, 주님이 말씀하셔요.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를 섬기는 자가 나 있는 곳에 함께 있으리라. 그럴 때 아버지께서 저를 귀하게 여기시리라'

<쿼 바디스> 라는 소설이 있지요. 폴란드의 셴케비치가 쓴 소설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마지막 대목이 있지 않습니까? 네로 황제시대 로마에 큰 박해가 일어났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 죽었지요. 교회의 지도자인 사도 베드로에게 성도들이 간청합니다. “당신이 여기서 잡혀 죽으면 교회는 무너질 것입니다. 오늘 죽는 것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일단 몸을 피하시고 이 어려운 때가 지나간 다음에 교회를 붙들어 일으켜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른 아침에 한 소년을 데리고 로마를 빠져 나갑니다. 걸음을 재촉합니다.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뭔가 사람의 형체가 빛을 등지고서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어요. 베드로가 같이 가는 소년에게 말합니다. "애야, 너는 저게 보이지 않느냐? 뭔가 사람 같은 형체가 밝은 빛을 띠고 이리로 오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소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점점 가까이 옵니다. 주님이에요. 베드로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쓰러집니다. 죽은 자 같이 엎드러집니다. "오!주님 쿼 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이 말씀하셔요. '네가 내 양떼를 버렸으니 내가 다시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하노라' 소년은 아무런 음성을 듣지 못해요. 그저 베드로가 땅바닥에 죽은 자 같이 엎드러져 있는 것을 볼 뿐이에요. 그때 베드로가 몸을 일으킵니다. 몸을 돌이켜서 로마를 향하여 갑니다. 소년이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쿼 바디스 도미네, 선생님, 갑자기 어디로 가십니까?" "로마로 가자꾸나!" 다시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를 피신 시켰다고 생각한 성도들 앞에 나타나니 모두들 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이제는 근심어린 생각으로 염려 걱정하던 베드로가 아니에요. 담대하면서도 평안하고 환한 얼굴로 말합니다. "내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성도들과 예배드리다가 붙들려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습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에겐 근심하고 염려할 걱정거리가 많이 있어요. 때로는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돌리며 애를 쓰지요. 그러나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될게 하나 있어요. "내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주의 음성을 들어야 되요. 주의 얼굴을 바라보고 주의 음성을 들으며 기도하다가 응답을 듣는 순간 모든 염려와 걱정은 사라지는 거예요. 햇빛같이 주님의 지혜와 평강이 임하는 거예요.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지 마세요. 그 고통 속에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있어요. 잘 들어보세요. 오늘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터와 가정과 환경과 상황 속에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사명이 있어요. 먼저 주님께 조용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쿼 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 말씀하셔요. '네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시리라' 지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5장 2절에 '성전에 들어갈 때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고 급한 마음으로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