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002 부활에 이르는 길 (빌 3:5~12)
성경본문
나는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집트,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저도 성지순례 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주셨던 시내산을 오른 경험이 있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높은 산 꼭대기 위에 모세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어요. 해가 뜨거운 지역이니까 보통 밤 12시에 낙타를 타고 올라갑니다. 깜깜한 밤에 안내원을 따라서 그저 낙타를 타고 흔들흔들하면서 한 시간 반 올라갑니다. 그 다음에는 끝도 없이 산꼭대기까지 이어지는 계단을 묵묵히 한발한발 조심조심 올라갑니다. 정상에 올라가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면 드디어 동이 틉니다. 그러면서 한순간에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는데 그때 ‘아!’하고 감탄사가 나오더라고요. 그 바위산 꼭대기에 나무 한 그루 없어요. 황량한 바위뿐이에요. 시선을 방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 이런 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지.’ 현란하고 복잡한 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겠어요. 거기 아무것도 없어요. 시내산에서 느꼈던 감동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시내산도 그렇다면, 천국을 갔다 온 사람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세세한 내용이야 다 다르지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불 붙는 마음이 있어요. 그 모든 이야기의 핵심이 뭐냐? 내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 죽음을 경험하고 천국을 보고 다시 생명을 부여 받았으므로 이제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이죠.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다. 내가 듣고 본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아주 확신하면서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다 천국을 경험하게 하시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또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또스토예프스키’라고 러시아의 유명한 소설가를 아실 겁니다. 그의 인생 스토리를 읽어보면 그가 젊었을 때에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타락에 반발하며 반정부투쟁을 하죠. 그러다가 붙들려요. 황제가 물정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좀 혼내주라고 해요. 그래서 ‘모의사형’, 죽이지는 않지만 감쪽같이 사형집행 순간까지 연출하게 되었어요. 감옥에 붙들려 간지 8개월이 되는 어느 날 갑자기 호출당했어요. 감옥 밖으로 끌려 나왔어요. 크리스마스를 앞둔 추운 겨울 아침이에요. 느닷없이 마차에 태우고는 도시 한복판 광장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우리가 어디로 가는 걸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거기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있는 거예요. 사형집행을 하려고 하는 거죠. 기둥에 묶습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정교 신부가 와서 신앙고백을 듣습니다. 드디어 호령과 함께 군인들이 총을 겨눠요.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계획된 각본대로 그 순간 황제의 사절이 나타나서는 “황제폐하의 명령이다”라고 하면서 사형 대신에 시베리아 강제노역 10년형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순간 소식을 듣는 젊은이들의 반응은 너무나 다양한 거예요. 황제폐하에게 감사의 노래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을 잃고 기절하는 사람도 있는 거죠. 또스토예프스키는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해요. “나는 그때 죽었다가 살아났다. 삶은 선물이다. 삶은 행복이다. 단 1분간의 삶일지라도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는 시베리아로 끌려갑니다. 그곳에 먼저 와있던 정치범들의 가족들, 그들을 돌보는 여인들을 만나게 돼요. 그 여인들이 붙들려온 청년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을 위로합니다. 한 여인이 또스토예프스키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전해주면서 “이 책을 읽으세요. 이 책 속에는 10루불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책 안에 돈이 끼워져 있다고 말했죠. 물론 돈은 없었지만 그는 죽었다 살아난 감격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요.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아름답고 심오하며 사랑이 넘치며 온전하신 분이다. 누가 나에게 와서 그가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를 들이민다 할지라도 나는 그 진리를 따르기보다 차라리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기를 택하겠노라’ 그 정도로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깊이 발견해요. 사실 또스토예프스키는 귀족출신이지만 몰락한 귀족이요 평생 간질을 앓았어요. 무절제한 사람이었어요. 주정뱅이였어요. 겉보기에는 버려진 자였지만 그러나 이 경험과 말씀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자로 세상을 살면서도 범사에 감사하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아마도 우리의 경험은 천국에 갔다 온 사람과 지옥을 경험할 뻔했던 사람 사이에 놓여져 있어요. 크고 작은 경험이 있겠죠. 한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있어요. 주관적인 경험이 있고 객관적인 말씀이 있어요. 이것은 서로 상호작용해요. 천국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국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죠.
여러분은 축구를 좋아하십니까, 야구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프로야구가 훨씬 팬이 많죠. 얼마 전에 보니 6백만을 돌파했다고 하는데 그 차이가 뭐겠습니까? 프로야구가 훨씬 더 다양한 작전이 있고 그것을 읽는 재미가 있다고 그러잖아요. 축구식 신앙이냐, 야구식 신앙이냐? 축구도 작전이 있지만 훨씬 단순하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겪는 체험을 반영한다면 신앙 안에 하나님의 교묘한 작전이 있는 거죠. 말씀 속에는 수없이 많은 인생들을 다루신 하나님의 오묘한 손길, 인간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식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 이게 인간의 지혜 아니겠어요. 우리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을 읽고 삶의 공식을 발견하고 그 공식을 모든 상황 속에 대입해서 내가 체험했던 은혜를 재생산하고 확대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방식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그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모든 체험과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않으면 우리는 길을 잘못 든 거예요.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요. 그 순간 눈 먼 자가 되어 엎드러졌어요.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그날 쓰러졌다기보다 이미 스데반을 돌로 쳐죽일 때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 자랑은 내 앞에서 하지도 말라. 나야말로 하나님의 율법대로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이고 왕족인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사람 중에 정통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고 교회를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율법을 지키려고 했노라. 얼마나 완벽하게 지켰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흠이 없었다. 이게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조건이에요. 사도 바울 앞에 나설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나 이런 화려한 배경과 열심과 지식과 이 모든 조건을 가지고도 그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해요. 예수 믿는 자들을 끌어내가지고 재판하고 돌로 쳐죽이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때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바로 스데반이었어요. 그런데 스데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사도 바울은 충격을 받았어요.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그의 얼굴은 너무나 환하게 빛나고 있었어요.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하늘을 향하고 있었어요. 스데반이 죽을 때에 매맞는 고통과 아픔으로 몸부림치지 않았어요.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보좌가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데반의 죽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던지 자리에서 일어나셨어요. 두 팔을 벌리고 스데반을 맞이하고 계셨어요. 이 놀라운 사실을 보는 순간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도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르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나를 맞으시는 주님 앞에 삶을 드리는 그 모습을 사울이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아요. 나는 이제까지 화려한 가문과 노력과 열심과 율법을 가지고도 분노에 가득 차서 사람을 쳐죽이고 있는데 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하늘을 바라보고 천사의 얼굴을 하면서 세상을 떠나고 있구나. 도대체 이 비밀은 무엇이냐? 그는 패배자가 돼요.
제 개인적인 기도제목과 소원이 있다면 그런 거예요. 세상을 떠날 때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다 이루어진 채 세상 떠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렇지는 않거든요. 그러나 한순간 나의 마지막이 올지라도 하나님 이런 기회 한 번만 주십시오. 죽는구나 하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환한 얼굴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뒤에 남겨진 일들은 하나님 손에 내어 맡기고 떠나기를 원한다는 것이죠.
사울이 발견한 게 바로 그거에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자랑하던 것으로 그를 쳐죽였어요. 분노에 가득 차서 그를 죽였다는 말은 곧 나를 죽인 거예요. 자기 자신을 죽인 거예요. 그러나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모든 자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봤어요. 그 비밀이 무엇인가? 다메섹 도상에서 엎드러지며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순간 아, 이게 바로 그거였구나. 이게 바로 스데반이 발견했던 그것이었구나. 그 경험을 한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면서 오늘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내가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놓치게 했구나. 엉뚱한 것을 붙들고 내가 인생의 자랑으로 삼았구나. 주님을 발견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여러분, 그리스도를 놓치면 다 놓친 거에요. 그래서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열심히 봉사하세요. 그러나 절대로 놓쳐서는 안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복음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인데 그것은 가장 고상한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 계획된 일이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 정말 잘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을 지킴으로 쌓아가는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이다.
1930년대, ‘세기의 사랑’으로 이름 붙여진 사건이 있었어요. 영국의 에드워드8세가 한 여인을 만났어요. 이 여인과 대화하다가 사랑하게 됐어요. 그리고 끝내 결혼하기로 했어요. 그러나 그 여인은 이미 두 번이나 이혼한 사람이었어요. 영국 법에 영국 국왕은 이혼녀와 결혼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어요. 그는 고민에 빠졌어요. 그러나 결단을 내리죠. 내가 이 여인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왕위도 아무 의미가 없노라. 왕위를 버렸잖아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불완전한 인간도 때론 사랑 때문에 이렇게 한다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럼 신앙이란 뭐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신앙이에요. 세상은 철저히 율법이에요. 생존경쟁이에요. 자기 능력대로 벌어먹고 사는 삶이에요. 잘 하는 사람은 보상하고 못 하는 사람은 벌을 주는 세상이에요. 이런 세상 속에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모순이에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예요. 이 모순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요 신비로 받아들이는 것, 그게 신앙이란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해석하는 열쇠는 뭐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인간구원의 길이다 라는 거예요. 이런 것을 날마다 누리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절대로 율법에 빠져서 율법을 쫓아가면 안돼요. 본문 말씀 3장 2절에 보니까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망가뜨리는 일을 삼가라.’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던 거예요. 사도 바울이 말해요. 아니다.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기에 어떤 행위를 더 덧붙이려 하는 것은 거짓이다. 누가 참된 할례자냐? 누가 참된 하나님 앞의 신앙인이냐?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고 예수만 자랑하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요 참된 할례자다.
‘아이디어를 얻는 3B법칙’이라는 게 있어요. 첫째는 ‘Bath’ 목욕하는 것, 둘째는 ‘Bed’ 침대, 그리고 ‘Bus’. 이게 다 무슨 얘기에요? 사람이 목욕하다가 번쩍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잖아요. 모처럼 쉬는 날 침대에서 뒹굴뒹굴 하다가 번쩍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잖아요. 버스 타고 가면서 눈을 들어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에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잖아요. 아이디어에요. 그게 다 뭐냐?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접하는 순간 새로운 아이디어가 일어난다는 거죠.
세상은 율법으로 꽉 차있어요. 우리가 율법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 결과, 먼저 그를 죽이게 되고 그건 곧 나를 죽이는 일이다. 성경은 새로운 눈을 열라고 해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에 대해서 눈을 열라. 사도 바울의 소망이 있습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날마다 맛 보며 살겠노라. 부활을 맛보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노라.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늘 주님께로 향하면서 사는 것, 그것은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삶,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은 날마다 부활을 경험한 삶으로 넓어지고 모든 것을 다 포용할 수 있는 거죠. ‘바다 같은 사람이 되라’ 그렇게 얘기해요. 세상에서 흘러내려오는 오물까지도 묵묵히 끌어안고 정화시켜요.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아요. 비난이 있을지라도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묵묵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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