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1016 마음을 새롭게(롬 12:1-5)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0. 15. 18:07

111016 마음을 새롭게(12:1-5)

성경본문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지낸 분들이라면 소풍 때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에 가본적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태릉이나 광릉에도 갔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다 무슨 무덤 입니까? 조선시대 왕들의 무덤이지요. 동구릉에는 조선왕조를 열었던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아홉 개의 능이 있다고 해서 동구릉이지요. 광릉은 수양대군 세조의 무덤이지요. 태릉은 문정왕후의 능이지요. 선릉은 성종의 무덤이지요. 우리나라의 조선왕조 519년간 27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모두 42기가 있고 그 가운데 2기는 북한 개성에 있고요. 나머지 40기는 서울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지난 2009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지요. 그동안 소풍장소로만 알았지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휴! 가보니 별 것 아니더라. 듣자하니 저 중국에 진시황릉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고 하더라. 1974년에 진시황릉과 그 옆에 있는 병마용 갱이 발견됐어요. 그것을 발굴 했더니 그 안에 사람 실물 크기의 흙으로 빚어 만든 군대가 묻혀 있었지요. 발굴된 것만 8000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건 진시황의 무덤을 지키는 부대의 무덤이고 진짜 무덤은 1.5킬로 떨어져 있는데 그건 아직 발굴 못하고 있어요. 지금 중국의 기술로는 발굴한다고 뒤집었다가 망칠까봐 심지어는 300년 후에나 발굴해야 된다고 하는 말이 나오는 거에요. 그 높이가 200미터나 되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지요.

 

그런 규모에 비하면 조선왕릉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너무 작지요. 마치 중국 북경의 자금성을 본 사람이 우리나라 경복궁을 보고는 아이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규모만 가지고 얘기 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인 거예요. 조선왕릉의 비밀은 정작 어디에 숨겨져 있느냐 하면 인공적인 어마어마한 조형물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중국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는 차원이 다른 거죠.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있는, 흔히 풍수지리로 얘기 하지 않습니까? 산을 등지고 물이 흐르는 곳에 산수와 조화를 이룬 신의 정원을 만들었다이렇게 표현을 해요. 전문학자들이 와서 우리나라의 무덤이라니까 웅장한 인공적인 건축물을 생각했다가 보고 나서 하는 말이에요. 깜짝 놀라는 것이죠.

 

여러분도 한번 가봤다면 잘 기억을 해보세요. 구부러진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돌판이 깔려 있습니다. ‘금천교에요. 이제부터 속세와 신성한 공간을 구분한다고 하는 거에요. 구부러진 숲길을 따라 빙 돌면 그제서야 전경이 쫘악 펼쳐지는데 거기에 붉은 홍살문이 있어요. 원래 붉은 색이라고 하는 것은 귀신을 내어쫓는다는 뜻이잖아요? 자 이제 정말 신성한 공간이죠. 그 앞에 돌길이 쫘악 깔려있고 저 앞에 정자각이 있습니다. 돌길도 재미있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한쪽이 약간 높아요. 죽은 왕의 혼령이 걷는 길과 그를 받드는 신하들이 걷는 길로 구분되어 있어요. 정자각에 올라가는 계단도 죽은 왕의 혼이 올라가는 계단과 신하들이 올라가는 계단이 달라요. 정자각의 뒷문을 열면 언덕 위에 능이 저 멀리 보이지요. 정자각은 제사 지내는 공간이잖아요. 제사 지내고 내려오는 계단은 하나에요. 신하들만 내려오고 죽은 왕은 신의 공간 속에 저 능침에 누워있다 이런 의미이지요. ‘신의 정원이라는 거예요. 자연과 절묘하게 하나가 된, 고상한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나타내고 있지요.

 

보통 왕의 장례가 보통 5개월 걸린대요. 왜 그러냐? 그런 무덤을 축조하고 다 준비하는데 5개월이 걸린대요. 보통 백성들을 징발해서 그 일을 하면 평균 100명 내지 200명이 죽었대요. 돌에 깔려 죽고 사고로 죽게 되요. 그래서 세조가 유언으로 더 이상 무거운 돌을 이용한 공사는 하지 말라 하고 근본적으로 형식을 바꿨다고 합니다. 광릉 세조의 무덤은 정작 검소하다고 해요. 겉모습만 가지고 얘기를 하면 안 되요. 또 다른 눈을 열어야 되는 거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현실을 살아갈 때 예수 믿는다고 해서 남보다 더 돈을 많이 벌고 모든 일이 행복하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거기엔 아주 오묘한 새로운 삶의 비밀이 있어요. 거기에 눈이 열려야 되요.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2 1절 첫 대목에 그러므로라고 말해요. ‘그러므로’… 1장부터 11장까지 설명한 것을 그러므로이 한마디에 다 담고 있어요. ‘이제 알아 들었으니그럼 그 앞에서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진정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거에요.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비밀을 설명하고 있어요.

 

첫째는 죄인이 어떻게 죄 용서함을 받을 것인가? 십자가로만 죄를 용서함 받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는다. 의인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의인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 사람이 의인이에요. 그것을 칭의라고 말해요. 하나님이 하신 일을 ! 하나님, 이렇게 멋있게 하실 줄 몰랐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나를 구원하실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나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주실 줄 몰랐습니다. 정말 멋있습니다.’ 하나님을 의롭다고 할 때 하나님이 기뻐서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너 정말 생각 잘했다하시는데 그게 칭의예요. 도덕적 행위 이전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듣고 깜짝 놀라고 그것을 선물로 기쁘게 받는 사람, 그 사람이 의인이라는 거에요.

 

두 번째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이냐? 세상 살아가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 거예요. 하나는 육신적으로 사는 거에요. 여기서 말하는 육신이라는 것은 몸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본성대로 자기 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자기 동기와 욕심을 따라서 사는 거예요. 자기의 능력과 자원을 동원해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을 육신적으로 사는 거라고 말해요.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그 객관적 사실을 인정해야지요. 성령께 내 마음을 맡기는 거지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눈이 맞는 사람을 만나서 연애하며 살아가듯이. 연애하며 사는 사람은 더 이상 환경을 보지 않아요. 그 둘만의 사랑 속에 만족이 있어요. 그게 바로 성령을 좆아 살아가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성령을 따라 살아가요.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기뻐하게 되고 쫓아가게 되요. 이것을 성화라고 말해요. 그리스도인이 거룩해진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보다 더 순수해진다, 온전해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은 결과에요.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성령께 내 모든 것을 내어 놓고 그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게 신앙 생활이에요. 몇 년을 사느냐? 얼마나 돈을 벌고 사느냐? 그건 다 그 다음 문제에요. 중요한 것은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거예요.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거예요. 언젠가 종말이 있어요. 종말이 오기 전까지 역사는 우리가 풀 수 없는 너무나 많은 모순이 있어요. 미스터리에요. 사도바울은 말하잖아요.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주셨는데 유대인이 어리석어 자기 의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이 구원의 물줄기가 이방인에게 흘러갔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어요. 유대인은 지금 버려진 자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내 민족 유대인은 과연 완전히 버려질 것이냐? 사도바울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내가 하나님의 구원에서 끊어질지라도 내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간구하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셨죠? 언젠가 다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진 다음에 구원의 물줄기가 다시 유대인에게로 돌아오리라. 그제서야 알았어요. 유대인이 구원받는 마지막 때가 오리라고 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자 사도 바울이 노래하지요. ‘! 하나님의 구원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지, 누가 하나님의 생각을 엿보기라도 하겠는가? 모든 만물과 인생들이 주님께로부터 나오고 주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마지막에는 주님께로 돌아가리라.’ 이게 로마서 11장 끝에 나오는 바울의 찬송이잖아요. 찬송을 부른 다음에 말합니다. ’그러므로이제 개인과 가정과 기업과 역사에 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을 알았으니 이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거예요. 이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많은 일이 있어요.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도 있고요. 오늘 골프대회를 한다고 하는데 서로 교제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교제가 중요하잖아요. 눈을 밖으로 돌려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구제도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아니어도 봉사단체가 많이 생겼어요. 교회가 아니어도 서로 친교하는 모임들은 교회 밖에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예배에요. 그래서 예배가 중요해요.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정작 예배를 놓치기 쉬워요. 교회의 본질은 예배에요. 그러므로 예배를 놓치면 한 주간 실패한 거예요. 예배를 잘 드려야 해요.

 

그러나 이제 성경은 말합니다. 한주간 나가 사는 삶이 또한 예배에요. 하나님께로부터 예배를 통해서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일상적인 모든 생활, 가정과 기업,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이 다 예배가 되요. 삶이 예배에요. 성경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라.’ 하나님의 뜻대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예배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영적인예배다. 사실 정확한 번역은 아니에요. ‘Reasonable’ ‘합당한예배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것이냐!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야 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라.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지 말아라.

 

피터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요. 미국의 로렌스 피터교수가 연구한 건데 개인의 삶을 들여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요. 높은 데로 올라가려 해요. 회사에서 승진하려 해요. 대학에서 교수가 되려 해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올라가려고 막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능력이 안되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교수되려고 학력을 위조한다든지 논문을 표절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드러나요. 회사에서도 어떡하던지 남을 밟고 올라가려고 애를 써요. 그런데 참, 사람이 어리석지요.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자기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자리까지 올라가요. 올라갈 때는 몰랐어요. 올라가면 그게 성공인줄 알았어요. 올라가보니 자기로서는 너무나 아찔한 절벽이에요. 자기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자기가 잘 알아요. 올라가 서는 순간부터 불안과 두려움이 있어요. 이것을 감추려고 애를 써요. 그러다가 어느 날 만천하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며 추락한다는 거예요. ‘피터의 법칙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인생을 낭비한다는 거예요.

 

또 하나 있어요. ‘파킨슨의 법칙이라는 건데 영국의 사회생태학자인 파킨슨 교수가 조직을 들여다 보니 공무원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기업도 마찬가지로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변화를 거부한다는 거예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고 하는 독창적인 사람들을 자꾸 내몬다는 거예요. 조직에 순종적인 사람들에게 후한 보수를 주면서 그런 사람들로 조직을 둘러싸게 하고 몸집을 불려 안정을 유지하고 이만하면 됐다고 스스로를 속인다는 거예요. 이게 파킨슨의 법칙이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죠. 먼저 왔네 늦게 왔네 따지는 교회 치고 제대로 된 교회가 없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의 교회에요. 제가 고향 교회를 보면 참 실감해요. 저 어린 시절의 목사님, 장로님들은 다 돌아가셨어요. 세월이 흘러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다 들어와 앉아있어요. 그걸 볼 때마다 교회는 정말 하나님의 교회다. 하나님의 교회에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어요. 그걸 잊어서는 안 되요. 절대로 교회에서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되요. 누구도 주인이 아니에요.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에요. 생각이 열려있어야 되요.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요. 그걸 같이 봐야 되는 거예요. ‘비전을 놓치면 백성들이 방자하게 된다고 잠언에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 마음을 새롭게 하라.’ 헬라어로 누스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것은 이성적 판단과 의지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말이에요. 열려있는 생각이에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느 교회에서는 나이가 50이 넘은 분들은 성경공부도 별로 시키지 않는대요. ? 50이 넘는 분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된대요.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성경공부는 들여다 봐도 기억도 안되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 게 현실이지만 좀 눈을 들어서 저 멀리 하늘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한 번 헤아려보세요. 50이 넘으신 분들은 성경공부를 젊은 사람같이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해서는 생각이 확 열려야 되지 않겠어요?

 

누구나 자기 한계를 좀처럼 벗어날 줄 모르는 거예요. 신앙이란 다른 게 아니에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신앙이에요. 이사야 55장에 하나님이 말씀 하시잖아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그렇게 다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변화를 받는 것인데 그것은 어떤 것이냐?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내 경험과 한계에 매여있던 것들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거예요.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가르쳐준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뭐냐? 첫째는 믿음의 분량대로 다 부르심이 달라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목사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평신도로 부르시고, 또 목사로 부르셨더라도 어떤 사람은 한인 목회를 맡겨주시고, 어떤 사람은 현장선교사가 되게 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중국으로 보내시고 일본으로 보내시고 인도네시아로 보내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중보기도 사역에 헌신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북한 사역 탈북자 사역에 헌신하게 하시고 다 다른 거예요.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게 가장 중요해요. 그렇지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걸 어떻게 목숨 걸고 하겠어요. 하나님이 그 일에 부르신 거에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 다른 거에요.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이 그렇게 쓰시는 거예요. 감옥에서 예수 믿고 회심한 사람은 대개 갇혀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역하잖아요. 갇혀 있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니까. 이해해야 말 한마디를 해도 그들과 소통할 수 있죠. 하나님이 그렇게 쓰시는 거예요. 믿음의 분량대로 부르심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되요.  두 번째는 분수에 맞게사람마다 적성과 기질과 은사와 경험이 다 달라요. 축구팀을 구성했어요. 시합에서 이기겠다고 수비하는 사람이 수비는 하지 않고 나도 골을 넣겠다고 자꾸 앞에 나와서 얼쩡거리면 이길 수 있겠어요? 모든 사람이 스트라이커를 하겠다고 하면 되겠어요? 아니잖아요. 정확하게 자기 위치를 지켜야지요. 사람들은 골 넣는 스트라이커만 잘 한다고 칭찬하는 게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억울하다고 나도 스트라이커 하겠다고 수비고 뭐고 골키퍼까지도 골을 넣겠다고 앞에 나온다면 어떡하겠어요. 그러면 팀이 무너지잖아요. 그거 어리석은 거예요. 분수에 맞게 역할이 다른 거예요. 기능이 다른 거에요. 오늘 말하잖아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이루는 지체다. 코가 하나인데 어떤 지체가 나는 발뒤꿈치 하기 싫다고 나도 코가 되겠다고 코 옆에 또 코로 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기형이잖아요. 그게 바로 교회의 원리에요. 자기 분수에 맞게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요한복음 3 26절에서 30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참 멋있는 고백을 했어요. 세례요한이 그동안 세례를 주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세례를 주니까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몰려가잖아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화가 나가지고 세례요한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 예수라는 친구가 나타나서 세례를 주니까 사람들이 다 저리로 몰려갑니다. 이거 좀 어떻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가서 따지든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을 때 세례요한이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니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다. 신부를 맞아서 결혼하는 것은 신랑이지만 신랑의 친구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듯이 나는 신랑의 친구의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만 살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일들을 아름답게 다 이루어 주세요. 우리 앞에서 잘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박수치고 축하해 주고 슬픈 사람 위로하는 것보다 잘하는 사람 격려하고 인정해주고 박수 치기가 더 어렵대요. 스트라이커가 있어야 팀이 이길 것 아니에요.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의 한계가 스트라이커가 없다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요? 열심히 90분을 뛰었는데 누구 하나 골을 넣어줘야 될 것 아니에요. 잘 나가는 스트라이커가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교회를 위해서 그런 사람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하나가 되어서 같이 나아갈 때 승리의 영광과 기쁨을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누리는 것이지요. 마음을 새롭게 세례요한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갈 때,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