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226 살든지 죽든지 (빌 1:19~26)
성경본문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으니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니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라이언 일병 구하기>하는 영화를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이죠. 첫 대목은 바로 6년 동안 지속된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인 분수령을 이루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그 영화의 첫 장면으로 나옵니다. 저도 영화를 어지간히 좋아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장면이 나오는 영화들을 많이 본 기억이 있습니다만 이 영화만큼 사실적으로 처절한 해변가 전투를 그린 영화가 없습니다. 참으로 처절한 전쟁이었어요. 대부분 20대 젊은이들이 그 전투에서 쌍방간에 수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쟁은 개인의 일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립니다. 전쟁이 났다고 한다면 구구한 이유를 붙일 필요가 없어요. 나가 싸우든지 피난을 가든지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되요. 전쟁에 패하게 되면 전쟁으로 겪은 참혹한 피흘림과 고통이 몇 년, 몇 십 년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군인이라면 전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게 군인의 미션, 목표요 사명이죠.
안타깝게도 역사는 이런 전쟁으로 가득 들어차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 세대가, 그야말로 전쟁과 다음에 있을 알지 못할 그 전쟁 사이에 태어나서 자라나고 이런 평범한 일상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은총이 아닐 수 없어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경은 영적전쟁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은 영적전쟁이라고 하는 거예요. 연약한 우리들이 교회에서 의사 대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을 정결하게 고침 받는 병든 자로 우리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또 하나 성경은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말해요. 그래서 강한 군사가 되어서 영적전투에서 승리하라고 말합니다. 이 영적전쟁의 모습은 시대마다 모습을 달리 할 수 있지만 본질은 같아요.
오늘 빌립보서에 나오는 사도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감옥에 붙들린 것입니다. 끝내 그는 로마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순교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달라졌어요. 환경이 달라졌어요. 그러나 사도바울이 로마의 핍박 속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과 똑 같은 마음, 똑 같은 자세, 똑 같은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돼요. 오늘 우리의 세속사회는 그야말로 특정한 적이 어느 고정된 지역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지난 번 911사태 이후에 전쟁의 개념 자체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미국 사람들은 이제까지 다 본토 밖에 나가서 싸웠어요. 그러나 자기네 땅, 뉴욕 한복판에서 그렇게 빌딩이 무너지고 수천 명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어요. 적은 이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곳에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사람을 더 두렵게 만드는 것이죠. 오늘 우리 세속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눈에 보이는 순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전쟁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사도바울을 보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땅끝까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사명을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이 사명을 붙들고 살아가게 됐어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로 인해서 베드로를 위시한 정통파 유대인들로부터 썩 달가운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요. 그리고 무시당하게 되요. ‘네가 무슨 사도냐?’ 이런 말을 자기가 개척한 교회의 사람들에게조차 듣게 되요.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야말로 정통파 유대인이요, 신앙에 철저한 바리새인이요, 그 열심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고 그의 학문은 최고였어요.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나도 좀 어리석게 자랑을 한다면 내가 누구에게 뒤지겠느냐고 말해요. 자기 자랑으로 말하면 사도바울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완전히 가치관이 바뀌게 됩니다. 이제까지 자기가 그토록 자랑했던 가문과 학벌과 그의 열심과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내 눈을 가로막는 것들이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요. 그것은 거칠게 뭐라고 말하냐 하면 ‘배설물 같았다.’ 똥 같았다고 얘기해요. 똥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있습니까?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그 생명이 귀하고 놀라웠으면 이제까지 자기가 그토록 자랑했던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길 만큼 그런 주님을 발견해요. 그리고 이제까지 자기의 열심, 학문, 집안, 이 모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했던 자기의 의가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시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붙들게 되요.
여러분, 아직도 내가 뭘 자랑할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거예요. 자랑할 것 없어요.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행하시는 이 아름다운 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이 놀라운 생명의 사건, 그것만을 자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이 좋은 것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서 따라가는데 왠 걸,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은 고난과 조롱과 무시와 핍박인 것이죠. 사람이니까 왜 흔들리지 않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응원하시느라고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에게 천국을 경험하게 하셔요.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인간의 말로는 뭐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놀라운 비밀을 보았노라.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를 주셔서 나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므로 나는 내 목숨을 다하여 달려가노라.’ 그리고 오늘 드디어 로마감옥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이라면, 더구나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학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최고로 떠받드는 사람이 사도바울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잘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장 명료하게 신학적으로, 실제적으로 펼쳐서 우리들에게 보여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이건 다 후대의 평가에요. 그는 죽는 날까지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요.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도끼로 목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는 아픔과 고통만 끌어안고 살아가야 했어요. 사람이 어찌 힘들지 않겠습니까? 저도 로마에 갔을 때에 사도바울이 마지막으로 갇혀있었던 감옥에 가보고 사도바울이 순교했던 그 자리를 가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세상 사람은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응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디모데후서에요.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어둡고 추운 로마감옥에서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는 사도바울의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어요. 아들같이 여겼던 디모데에게 편지를 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 너를 보고 싶구나. 빨리 와라.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와라. 그리고 올 때에 내 겉옷을 가지로 오라.’ 너무 추우니까 그런 얘기를 했겠죠. 또 이제 마지막 순간을 맞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겠죠. 비록 육신의 아들은 아니지만 아버지같이 따랐던 디모데에게 마지막 자기의 유언을 남겨주고 자기가 못다한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디모데에게 맡기고 싶어서 디모데를 찾는 것이죠. 이런 인간적인 모습이 여기에 배어 나와요. 그러나 오늘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 높아지기를 원하노라. 내가 이 땅에서 이렇게 고통을 당하느니 어서 빨리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어서 하나님의 천국에 가서 행복을 누리는 길을 정말 원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내가 차갑고 어두운 감옥에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오직 여러분의 믿음을 격려하고 세워주어서 여러분에게 유일한 자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하고 여러분의 삶의 기쁨을 넘치도록 하는 것, 그것만이 오늘 내가 사는 이유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주시는 사명이었어요.
우리가 오늘 3.1절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동시에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죠. 지난 날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억압을 겪었을 때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 눈물로 간구했습니다. 그 역사 속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저는 주기철 목사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경남 웅천 사람이고 13살에 교회를 처음 나오기 시작하고 18살에 정신차려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평안북도 정주에 있었던 오산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을 했어요. 그리고 연희전문 상과에 들어갔는데 1년도 되지 않아서 중퇴했어요. 가서 공부해보니 자기와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내려오게 됐어요. 고향에 내려왔다가 유명한 이적을 베풀었던 김익도 목사의 부흥회에서 큰 회심을 하게 되요. 세례를 받았었습니다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었습니다만 이제까지의 시원찮은 신앙을 떨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회심을 하게 되요. 그 삶을 내어드리는 고백을 하고 결단을 하게 되요. 이게 23살 때에요. 그리고는 평양신학교에 들어갑니다.
목사가 되고 나이 서른에 부산에서 가장 처음 세워진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기게 되요. 5년 간 섬기게 되요. 초량교회를 잘 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시 5년간은 마산에 있는 문창교회, 당시에 시끄러운 문제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쪽 노회에서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주기철 목사밖에 없다고 해서 이쪽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는 사람을 문창교회로 보냅니다. 그곳에 가서 문제들을 잘 수습합니다. 그리고 서른아홉에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로 가게 됩니다. 당시에 평양에는 장대현교회가 있었고 산정현교회가 있었어요. 비교하자면 장대현교회는 평양 최초의 교회요, 영락교회 같은 교회에요. 반면에 산정현교회는 소망교회 같은 교회에요. 색깔이 다른 거예요. 엘리트들이 모인 교회였단 말이에요. 산정현교회가 그때 교회건축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어요. 그런 교회에 서른아홉 젊은 목사가 가서 교인들의 마음을 잘 수습하고 2년 만에 큰 교회를 건축합니다. 정말 자타가 공인할 만큼 엘리트목사요, 가장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목회의 성공을 이룬 목사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이 있었어요. 그가 산정현교회에 가서 목회를 시작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은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됩니다. 드디어는 노회에서,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요.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기에 대하여 경례하는 것 같은,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하나의 의례라고 이유를 붙입니다. 한국교회의 아주 부끄러운 역사가 되는 거죠. 여기에 반대하는 양심 있는 성도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게 됩니다. 1940년 현재, 한국 기독교의 성도수는 34만 명이었어요. 신사참배에 반대해서 연행되고 조사받던 사람은 5,000명이었어요. 그 가운데 마지막까지 옥중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한 사람은 200명이었어요. 그 가운데 가장 앞장 선 사람이 주기철 목사였어요. 그는 이제까지 자기의 목회 속에 하나님이 도우신 은혜로 말미암아 가장 잘 나가는 목사요, 가장 큰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요, 가장 성공가도를 달린 목사였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이 잘 나가는 목사로 인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신사참배, 우상숭배에 반대하고 거기에 목숨을 걸도록 하는 것이죠.
그는 무려 6년 동안 7번이나 감옥에 붙들려 가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1944년 4월21일, 마침 고난주간의 성금요일이었는데 그날에 마지막 면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면회합니다. 그는 너무나 고문을 당해서 스스로 일어설 수가 없어 면회하는 자리에 간수의 등에 업혀서 실려 나옵니다. 오정모 사모가 남편 주기철 목사를 보는 순간 이렇게 말합니다. 아픈 마음을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말합니다. “당신은 꼭 승리하여야 합니다. 당신은 결코 살아서 이 감옥문을 나올 수 없습니다.” 아내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이지만 이를 악물고 이 말을 하는 것이죠. 주 목사님이 그 말을 받아서 말합니다. “나 역시 내가 살아나갈 것을 기대하지 않소.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오. 나는 곧 주님 나라에 갈 것이오. 내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을 당신에게 부탁하오. 나는 이제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될 것이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오.” 짧은 면회가 끝납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없나요?” 그 말에 주 목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은데.” 그리고는 들어가셨어요. 어찌 그분이라고 신앙의 말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육신을 입었기에 모진 고문으로 그가 마지막 내뱉은 말은 오히려 따뜻한 숭늉 한 그릇, 그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죠. 그러나 죽으나 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셨고 주님이 붙들어 주신 것이죠.
주기철 목사님이 마지막 옥중에서 설교하신 내용이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이제 곧 마지막 날 주님이 나를 만나실 터인데 그때 주님께서 너는 어떤 십자가를 지고 왔느냐 물으실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내가 세상 목사로서 이 부귀와 영광을 누리고 칭찬과 명예와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이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가겠는가? 말할 수 없는 은혜를 힘입고 이런 목회의 성공을 이루었으니 이제는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이 마지막 사명, 십자가의 사명을 붙들고 가겠노라. 이런 분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교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벌써 두 세대 전의 얘기라고 할 수 있어요. 세대마다 사명이 달라요. 우리 부모 세대는 어떠하였습니까? 이번 수요예배 때 이은진 선교사님을 모시고 간증을 들으려 합니다. 그분은 이명박 대통령의 여동생입니다. 알고 보니 그 집안이 5남매인데 이대통령이 넷째이고 선교사님은 막내입니다. 제가 그분의 간증을 며칠 전 다른 교회에 가서 먼저 들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듣던 수많은 간증 가운데 그렇게 제 마음을 울리는 간증이 없었어요. 우리 부모세대의 신앙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줘요. 전쟁 이후에 그 말할 수 없는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끝까지 소망을 놓지 않고 기도하면서 자녀를 믿음으로 길렀던 어머니의 기도, 여러분이 직접 와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또 세대가 바뀌어서 부유를 누리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떤 사명을 하나님이 맡기고 계시는가? 적어도 이곳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이 시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것을 맡기시는가? 저는 이런 믿음의 선배들, 부모세대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한편으로 감사한 것 밖에 없습니다. 부모세대의 기도와 신앙과 고통을 발판으로 해서 이렇게 남부러울 것 없이 공부하고 배우고 가정을 이루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어떤 사명을 감당하고 살고 있는가? 결코 우리의 삶이 길지 않아요. 수많은 전쟁 속에 20대, 30대 수많은 젊은이들은 왜 이렇게 싸우고 죽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한 잎, 꽃잎이 되어서 죽었어요. 오늘 우리는 단 하루를 살아도 우리의 사명을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사사시대에요. 사사시대라는 것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판단대로, 자기 주장대로, 자기 멋대로 사는 거예요. 하나님도 그렇게 믿고 사는 거예요. 내 맘에 안 드는 하나님은 필요 없는 거예요. 영적인 암흑기에요. 자카르타 한인사회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었던 해골이 가득한 골짜기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요. 하루를 더 살아야 된다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고집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오늘 이렇게 산다면 더 이상 내가 10년을 살고 20년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마치 노르망디 상륙작전, 그 많은 피흘림을 통해서 6년 동안의 전쟁의 결정적 분수령을 이루어요. 1944년 6월6일, D-Day였어요. 바로 그날이 공개되면서 그날의 전투로 인해서 연합군이 결정적으로 승리의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죠. 그 다음 전개된 1년 동안의 전쟁은 이미 결정된 승리를 확인하는 전쟁이었을 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위한 영적전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이루셨어요. 그리스도께서 대장이 되셔서 앞장 서서 나가시는 거예요. 우리는 그분을 따라 나가는 거예요.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전쟁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승리해놓으신 전쟁이에요. 그것을 우리가 따라가는 거예요. 이미 이긴 싸움을 따라가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그걸 알았고 주기철 목사님도 그걸 알았던 거예요. 심지어는 배우지 못하고 한평생 가난 속에서도 주님을 붙들었던 이름없는 한 여인도 그것을 알고 기도했던 거예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올바로 발견해야 되요. 그래야 저 사도바울의 수고와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이름없는 한 여인의 기도까지 다 흘러내려온, 우리에게 머문 이것을 우리가 올바로 붙들고 다음세대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거예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교회를 욕하고 비난하고 있습니까? 또 어찌 보면 그게 터무니 없는 주장이 아니에요. 그게 사실이에요. 그게 오늘 우리의 현실인걸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함께 그것을 손가락질하며 비난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우리 한마음교회의 사명은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속에서 묵묵히 오늘 이곳에 교회를 세우시고 이곳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게 하시는 그 뜻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에요. 그것만이 저와 여러분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붙들고 나아가야 할 오늘 우리의 사명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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