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7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선교
요한일서 4:7~15)
성경본문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항하는 자 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얼마 전에 <Danau Toba 토바호수>를 다녀왔습니다. 얼마나 큰 호수인지 그 안에 <사모시르>라고 하는 큰 섬이 있죠. 2박 3일 짧은 일정으로 움직이다가 보니까 정작 <사모시르섬>에 들어갈 때에 오후 늦은 5시에 배를 타고 6시에 도착을 했습니다. 저희를 가이드 하는 분이 인도 분이었는데 제가 만난 인도사람 중에 가장 멋진 분이었습니다. 아주 자유로운 영혼이고 가이드경력이 40년이나 되는 아주 노련한 분이었어요. 일정을 좇아서 우리를 안내를 해주는데 벌써 그 사모시르에 <또목>이라고 하는 자그마한 항구랄 것도 없이 배 대는 곳에 도착하니까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런데 꼭 가봐야 될 곳이 있다하고 저희를 안내했습니다. 차로 십여분 가서 어두운 밤에 골목을 찾아들어가 보니까 옛날에 거기도 크게 보면 <바딱족>이니까 그 섬에 살고 있던 바딱 주민공동체의 족장들이 모이는 그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거기를 보니 돌 탁자가 있고 돌로 만든 의자가 있어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죠. 그리고 그 옆에 그렇게 넓지 않은 공간이 있어요. 그러면서 설명을 들어보니 부족의 남자들이 다 모여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곳이라는 거예요. 여기는 여자나 어린아이들은 못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 한 복판에 돌로 만든 넓적한 돌 판이 있어요. 그게 뭐냐 그랬더니 섬 밖에서 외부인이 들어오거나 또는 혹 전투를 해서 포로를 붙들어 오거나 하면 그 돌 판에 엎어놓고 곤장을 치는 게 아니라 때려서 죽이는 거예요. 사람을 때려죽이는 돌판 이더라구요. 그러면서 사람을 죽일 때 그냥 막 피를 철철 흘리겠죠. 심하지만 가이드가 얘기한 그대로 하면 거기다 나름대로 자기들 양념도 뿌려가면서 죽인다는 거예요. 사람이 죽으면 그 옆에 목을 베는 자리가 있어 목을 떼 내고 그 자리에 모여 있는 남자들이 다 먹는 거예요. 인육을 먹는 거예요. 그런데 1843년 그 기록이 정확한지 제가 책을 뒤져도 아직 확인은 못했습니다만 그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1843년에 서양 선교사 두 사람이 그 섬에 선교하러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랬다가 그렇게 죽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말이에요. 그 항구로 접근할 때 그 <빠라밧>이라고 하는 곳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가야 그 섬으로 들어가는데 물론 배가 속도가 느리기도 하지만 멀리서 그 마을이 보이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교회입니다. 바딱교회에요. 그 광경과 그 이야기가 연결되면서 많은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분이 그래요 자기가 40년을 가이드를 하면서 이렇게 깜깜한 밤에 여기 들어오기는 처음이다. 제가 2박 3일 그쪽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그래 서양선교사가 여기 들어올 때에 이런 상황을 알고 들어왔을까? 모르고 들어왔을까? 그러나 더 중요한건 그거 뭐 알던지 모르던지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누군가 그렇게 와서 피를 뿌리는 그 헌신과 희생이 있은 이후에 그 바딱족이 다 기독교로 개종을 한 거죠. 그래서 그 섬으로 접근하는 그 첫대목에 교회가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이 야만인이다 그렇게 얘기할 것 없어요. 그런 우화 있잖아요. 아프리카에 식인부족을 선교해가지고 그들에게 그런 모든 습관을 다 고치게 하고 했던 선교사에게 말이에요. 추장이 물었다는 거 아니에요. 예전에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날 때 말이에요. 그런 소식을 어디선가 듣고는 “선교사님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뭘요?” “아, 우리는 필요할 때 한 두 사람 잡아먹지만 선교사님이 왔다는 그 동네는 한꺼번에 몇 백만씩이나 죽인다는데 도대체 뭐 하러 그렇게 많이 죽입니까?” 야만은 똑같은 거예요. 누가 그들을 보냈을까? 성경은 말해요. ‘하나님이 보내셨어요.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사랑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다.’ 화목제물이라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분이 있죠. 이것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화목하게 하기위해서 제물로 보내셨다. 그래서 그를 십자가에 매달고 채찍으로 때리고 가장 처참한 형벌가운데 죽도록 하셨다. 돌 판에 죽는 거나 십자가에 죽는 거나 똑같죠. 하나님이 보내셨어요. 이게 또한 하나님의 선교에요.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선교사에요. 이 땅에 자기의 생명과 복음을 전하시려고 야만 중에 야만인 우리들에게 보내셨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Medan>에서 <Danau Toba>까지 가는데 차로 4시간~5시간 이렇게 걸리는데요. 죽 지나가다보면 끝없는 커피농장도 보이고, 끝없는 고무농장도 보이고, 그리고 또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길옆에 수많은 마을들이 있는데 꼭 교회가 있어요. 바딱 교회들이 있어요. 그런데 교회를 볼 때마다 제가 목사라 그런지 모르지만 ‘과연 저 교회는 살아있을까?’ 언젠가는 낯도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와서 자기의 피를 뿌리고 목숨을 내어놓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다 복음을 알게 되고 그들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과연 오늘 살아있는 교회일까?
제가 며칠 전에 <니아스섬>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우리와 같은 교단의 백진식선교사님의 선교편지를 보았습니다. 거기 첫대목에 “드디어 7년 만에 샬롬신학교가 1회 졸업생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 예전에 <아체>에 쓰나미가 일어났잖아요. 그때 <니아스>도 같이 맞았거든요. 제가 1년 후에 다시가보니까 니아스도 뭐 도시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나마 있는 2층 건물들도 다 무너지게 된 거죠. 절망가운데 있는 그들을 위하여 선교사님들 몇 사람이 그들에게 복음과 새로운 소망을 주려고 시작한 그 무너진 교회 한 구석에서 시작한 그 신학교가 말이에요 7년 만에 첫 졸업생을 내게 된 거죠. 너무 감격스러워서 편지를 보냈어요. 조금은 느낄 수 있겠더라고요. 그런데 그 편지를 죽 읽으면서 이런 대목을 봤어요. “감격 속에 졸업을 하고 이들이 이제 교회현장으로 나아가고 심지어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아갈 소위 말하면 믿음의 특공대를 구성해서 우리가 저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들 신학생들의 현실을 이야기해요. 이들이 방학을 맞아서 집에 가보면 부모가 이혼 했어요. 그래가지고 아빠는 다른 여자와 저 집에 가 살고, 엄마는 다른 남자와 저 집에 살고 어디가 살아야 되며 어디가 자야 되며 어떻게 해야 되는지 깊은 절망 속에 있다가 개학을 하면 시커먼 얼굴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이게 니아스나 바딱의 크리스챤들이 처한 현실의 또 다른 단면이에요.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했지만 그를 둘러싼 가정과 그 부모와 그 환경은 그를 좌절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고, 고통을 받게 만드는 것이죠.
사람이 경제적 수준은 좀 달라도 서양 사람들도 그렇고 여기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그렇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들의 상황도 똑같아요. 과연 정말 우리는 살아있는 교회인가 우린 정말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우리 이 요한일서 4장의 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 그리고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 초대교회가 일어나가지고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고 흩어져가는 이 모든 100년의 역사를 마지막까지 지켜본 사람이 사도 요한이에요. 이제 다른 제자들은 다 죽었어요. 다 나가서 순교했어요. 사도요한도 이제 마지막에 반모 섬에 갇혀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고 말씀을 주시는 거죠. 이제 자기가 자기 자신과 교회의 모든 흥망성쇠와 변화를 보면서 마지막으로 피를 토하면서 증거 하는 그 한마디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하는 것이죠.
초대교회는 내부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하면서 이단의 문제가 등장해요. 이단 ‘어느 게 참 진리냐?’ 하나님 말씀 해석이 다 다르거든요. 그러다가 어디까지 가버렸느냐 하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오늘 본문을 앞뒤로 죽 읽어보면 얘기하죠.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것은 적그리스도요 거짓이다.’ 그건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거든요. 내부로는 이단의 문제요. 그리고 외부로는 로마정부를 비롯한 핍박이에요. 이런 속에서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율법주의자들이 나타나요.
예수의 그 복음과 생명을 놓치면 율법주의가 되요 여러분 교회에서 반듯하게 모범적으로 섬기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죠.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이 있어요. ‘생명’이에요. 지금 내안에서 성령으로 오셔서 호흡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없는 사람은 알든 모르든 다 율법주의자에요. 그것이 빠지면 교회도 기업하고 비슷하게 되요. 서로 잘하고 못하고 시비를 가리게 되고 다른 사람 잘하는 거 배 아파하게 되고 못하는 사람 비판하게 되고 영락없이 그리로 가게 되요. 또 신비주의에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셨건만 말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니까 자꾸 자기 경험에 의지해서 뭔가 추구하려고 해요. 2000년 전 예수님 당시에도 똑같았어요. 종교마다 다 신비체험이 있는데 그런 것을 자기 신앙의 핵심으로 붙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요.
여러분, 그건 마치 직장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고 월급 받는 거 하고 비슷한 구조에요. 회사는 그렇잖아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많이 주잖아요. 그러나 그 회사 사장의 아들은 얘기가 달라요. 잘하면 좋지요 마는 그것과 관계없어요. 아버지 것이 곧 내 것이에요. 그런 분명한 법적인 그리고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그런 관계가 이미 이루어져 있어요. 못하면 야단맞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부자의 관계가 깨어지지는 않아요. 이런 자유 함이 아들에게는 있는 것이에요.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노력의 대가를 받는 그런 회사원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결국 살아있는 교회 살아있는 신앙 이 비밀은 오늘 성경이 말 한대로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처참하게 십자가에 죽는 그 고통까지 쏟게 하시고 대신 우리의 목숨을 구하시고 우리를 자기 자녀 삼으신 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고백이에요.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 이야기가 나올 때 첫 번째 에베소교회를 가리키며 뭐라고 얘기합니까. ‘너의 수고를 알고, 너희 열심을 알고, 악한 자들과 맞서서 싸우는 그런 모든 것을 내가 다 기억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다보니 너희가 첫 사랑을 잃어버렸구나.’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다 잃어버린 거예요.
하나님은 선교사를 파송하세요. 그 첫 번째 선교사가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20장 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교사로 파송하신 거예요.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일터에, 또 교회에 선교사로 파송하신 거예요.
우리 가정에 대한 이런 우스개가 있어요. 여러분 한번 잘 들어보십시오. 남편들이 자기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을 말이에요. 요 간단한 물음하나로 리트머스시험지 가지고 탁 체크 할 수 있대요. 이게 미술치료에서 나온 것인데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 무지개가 있지 않습니까? 자 무지개를 생각해요. 아내를 딱 생각할 때 일곱 빛깔 무지개 그 어떤 색깔이 먼저 딱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내가 내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대요. 이건 남자 분들만 대답하시면 되요. 아내가 일곱 빛깔 무지개 가운데 어떤 색깔일까? 빨강이 딱 먼저 연결되시는 분은 아내를 그냥 마누라로 생각하는 분이래요. 주황이 다가오시는 분 이거는 애인 같은 마누라, 또 노란 색이 다가오는 분 이건 동생 같은 마누라, 초록색깔이 딱 들어오는분 이건 친구 같은 마누라, 그리고 파랑색과 연결되면 편안한 마누라, 그리고 남색 요건 지적인 마누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라색 요거는 섹시한 마누라래요. 한번 여러분 여자 분들은 집에 가셔 가지고 남편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남성분들은 이제 지혜롭게 잘 대답해야 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미술치료 미술심리치료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저한테 묻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뭐 마누라를 일곱 빛깔 무지개가운데 어떤 색깔로 연상이 떠오르는지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요. 그러나 공통점이 있어요. 어릴 때는 그토록 어른이 되기를 목말라하더니 정작 어른이 되어 가지고는 지난 어린 시절을 그리워해요. 돈 벌기 위해서 건강까지 해쳐가면서 그토록 애를 쓰더니 나중에는 건강을 잃고 나서는 그것 치료하기 위해서 그 돈 다 쏟아 부어요. 어리석은 인생이에요. 특별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아주 가장 너 나 할 것 없이 다 공멸의 길로 덤벼들고 있어요. 이건 뭐냐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첫 말씀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와 복을 주노라. 이세상의 모든 열매와 모든 것을 다 너희의 먹을거리로 주노라.’ 이렇게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나와 함께 살자.’ 했는데 첫 사람 아담부터 시작해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요.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죠.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들지요. 여기에서 죄가 시작되고 인간의 타락이에요. 경쟁구도 속에서 남을 밟고 일어나야만 살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얘기하면 그것은 사단의 목소리에요. 거기에 다 빠져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정작 하나님이 지으신 인생이건만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나무 그늘에 숨고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고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7절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니라.’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 요게 사단의 전략이에요. 우리는 다 내면은 다 덮어두고 가면을 하나씩 다 쓰고 있는 거예요. 제가 우리 예배를 이렇게 드립니다마는 이게 우리의 상황과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이렇게 드리는 거지만 사실은 말이에요 건강한 건 아니에요.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다 가면을 하나씩 쓰고 있는 거예요. 모차르트 <아마데우스>영화 보세요. 그 유럽에서 <가면무도회>가 성행했어요. 남녀 할 것 없이 다 가면들 쓰고 나타나서 술 마시며 놀았어요. 가면이라는 거는 이제 일탈을 하기위해서 자기얼굴을 가리기 위한 거예요. 타락하기 위한 거예요. 가면을 벗어버리고 민낯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공동체가 가장 건강한 공동체에요.
그럼 해결책은 뭐냐 요한일서 4장 18절에 하나님 말씀하세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아까 그 섬사람들이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 혹은 잡아온 사람들을 예외 없이 다 때려죽였다고 했죠. 얼마나 무서워요. 그러나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야말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에요.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공동체를 파괴할까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 두려움을 사단이 이용해서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거죠. 생각해보세요. 중국 명나라, 청나라 때에 한참 발전할 땐 저 서양의 천주교 선교사들이 온 <마테오리치>라든가 <아담 샬>이 왔을 때 다 잡아 죽입니까? 아니요“너희는 어디서 온 오랑캐냐?” 두려움이 없어요. 그리고 죽 얘길 들어보고 “어 공부했느냐? 그럼 한번 네가 공부한 걸 한번 펼쳐보아라.” 벼슬도 주고, 집도 주고, 땅도 주면서 그들과 공존합니다. 왜? 자신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청나라도 나중에 <아편전쟁>이후에 무너지고 막 그러니 어떻게 돼요. 서양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두려워가지고 1900년에 <의화단사건> “서양 사람은 보이는 족족 애 어른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다 죽여라!” 그들이 무서운 것 같지만 아니요. 그들이 두려워하는 거예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안에서 자유 함을 누리는 사람은 두려울 게 없어요. 우리의 지난날의 허물과 아픔까지도 두려울 게 없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깨끗하게 해결하셨기 때문에.
사실 저도 이제 간혹 손님을 만나거나 누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하다 보면 얘기를 다 끝내고는 쓴웃음을 지을 때가 있어요. 왜? 제가 말이에요. 저의 지난이야기에 대해서 부끄러운 얘기는 하나도 안하고 다 감춰놓고 제일 잘했던 거를 날마다 하는 것 같이 얘기했구나.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 볼링으로 얘기하면 어쩌다가 200을 치는데 평생 제일 제가 한 267인가도 쳐봤는데 그 얘기를 했구나. 그거는 이제까지 딱 한번 있었던 그 얘기를 하고 날마다 치던 180얘기는 한 번도 안했구나. 그게 인간의 속성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십자가보혈로 다 해결 받고 자유 한 거예요. 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에 파송하신 선교 공동체에요. 우리 교회 로고가 있잖습니까. 기억하시는지 몰라요. 비둘기가 날고 있어요. ‘성령’을 의미하죠. 물고기 두 마리를 형상화했어요. ‘공동체’라는 의미에요. 한마음교회 ‘성령을 따라가는 한마음교회 공동체’ 라고 하는 의미를 거기에 담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안디옥교회를 모델로 삼는대요. 사도행전 13장에 안디옥교회이야기를 여러분 조금만 읽어봐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만 그들 중심에는 성령께서 말씀하셔요. 전심으로 기도하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순종해요. 묻습니다. 듣습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성령이 세우라고 하면 사람들을 세웁니다. 보내라고 하면 그들을 보냅니다. 이게 건강한 교회에요.
선교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비밀 십자가에 죽으시건만 그는 이렇게 말해요.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다.’ 이거를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이라고 해요. 신앙이 뭐냐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시는 것을 늘 알고, 늘 고백하고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지만 우리는 보는 대로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말씀을 좇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세요. ‘모든 일꾼들은 나가서 일하기 전에 또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까지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기까지 기다리라.’ 그들이 집중하여 기도하며 기다릴 때 성령께서 오셨고 드디어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인생, 따라가는 교회, 따라가는 공동체가 되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다 병자에요. 아주 골병이 들었어요. 아마 저보다 더 병든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연극을 못해요.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이 연극이에요. 어떻게 한 얼굴 가지고 저렇게 시치미 뚝 떼고 노인대학 같은데 가서 보면 얼마나 웃기길 잘합니까. 그 사람이 제일 건강한 사람이에요. 자기를 싹 벗어버리고 주어진 역할에 맞춰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건강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렇게 뭐 웃기고 그러는 거는 도대체 평생에 못해요. 그런데 그건 뭐냐 하면 심리적으로 아주 병든 사람이에요 사실은. 제가 밤낮 착한 얘기만 듣고 매 한번 안 맞고 자라다보니까 그만 그렇게 병들었어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성경에 보면 눈물을 많이 흘리시기도 했어요. 자기의 감정을 숨김없이 그대로 다 드러내셨어요. 또 말씀을 읽어보면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그러셨어요. 그러고 말씀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은 아주 우스운 이야기도 아주 잘 하셨어요. 건강하신 인격이었어요. 그건 다 어디에서 온 거냐.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시므로’ 이런 비밀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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