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20610 완전케 하리라(마5:17-20)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5. 29. 17:14

120610 완전케 하리라 ( 5:17~20)

성경본문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라도 버리고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랑은 나그네 인생의 영원한 주제가죠. 저도 오래 전에 에릭 시걸 소설을 영화화한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를 감동 있게 보았습니다. 하버드대학의 부잣집 아들과 가난한 여대생의 사랑 이야기. 미국이라고 빈부의 차이와 차별이 없겠습니까?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젊은 영혼들의 이야기. 눈밭에서 서로 눈을 던지며 장난하는 모습과 주제곡이 흐르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도야 우리도 겪고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뭐냐? 사랑은 헤어지면 영원하고 화려한 추억이 되고 이루어지면 남루한 일상이 된다는데 고민이 있어요.

이혼을 주제로 하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얼마 전에 편을 봤습니다. 남편이 답답하더군요. 그런데 분노를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로 나로구나.’ 하는 자책이 들었습니다. 제가 B형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겠죠. 원래 B 남자는 자유로운 영혼이어서 무책임한 사람들이 많은 편이죠. 우리가 깨지지 않고 사는 것은 그저 하나님의 은총이구나. 이것은 목사로도 막을 수가 없어요. 목사라는 지위로 막을 있는 세상이 아니에요. 세대까지는 가능했는데 요즘 여자들은 드세져 가지고 국물도 없어요. 장로, 안수집사 모두 속수무책이에요. 그런 걸로는 막아요. 제가 지난 주에 그랬잖아요. 20세기 경영의 신으로까지 불렸던 웰치 이혼을 당했어요. 아내가 뭐라고 해요? 집에 와서도 사장 노릇하는 꼴을 내가 어떻게 보냐? 서양여자들은 우리보다 먼저 나가버렸지요.

결국 근본으로 돌아가면 사랑의 문제에요. ‘뮌하우젠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과 관심을 끌기 위해 자기의 병세 같은 것을 과장해서 거짓말을 하는데 너무 진지하게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뮌하우젠이라는 이름은 초등학교 시절에 들었던 기억이 나요.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라는 책에 나오는 뮌하우젠 남작이에요. 아마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거예요. 사람이 말을 타고 가다가 내리는 어두운 밤에 도저히 수가 없어서 말을 쇠말뚝에다 묶어 놓고 한참 자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말이 없어졌어요. 이게 어떻게 거지 하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나길래 쳐다보니 옆에 있는 높은 성당 꼭대기 철십자가 위에 말이 매달려 있는 거예요. 어떻게 일이에요? 밤새 쏟아진 폭설이 아침해가 뜨면서 녹아버렸다는 거죠. 묶어 놓은 말은 십자가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나는 지금 여기서 자고 있더라! 얼마나 놀라운 허풍이에요? 

심지어 지난 번에 이런 신문보도도 있었습니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루게릭병으로 꼼짝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있잖아요. 둘째 부인이 간호사인데 이상하게 스티븐 호킹이 자주 휠체어가 뒤집어 지고 넘어지는 거예요. 나중에 조사해봤더니 부인이 의도적으로 넘어뜨렸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 유명한 사람에게 카메라가 들이닥치면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자기의 모습 또한 신문에 보도되도록, 자기의 보호본능이 사람들의 눈길을 있도록 했다는 거예요. 남에게 의존하고 또는 남의 인정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려 하고 심지어는 남을 해치면서까지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는 사회적 현상. 그래서 요즘 고소, 고발을 하잖아요. 옳고 그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악명을 떨쳐서라도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고 하는 거죠. 완전히 병든 거죠. 심리학자들의 처방은 뭐냐?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신을 사랑하라.

처방은 맞았어요. 그러나 여기에 고민이 있어요. 사랑할 능력이 없어요. 성경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에요. 여러분은 아내나 남편을 사랑할 능력이 있습니까? 내가 죄인인가? 알고 있지만 사랑할 능력이 없어요. 그러나 이제 여기에 놀라운 복음이 있어요. 요한일서 4 8~10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가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아들을 십자가의 화목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같은 사랑을 받았으니 형제들아 이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유명한 사랑의 명제를 말씀드릴까요? ‘사랑은 아름답다.’ 이건 예술가들의 노래에요.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이건 윤리도덕가들의 얘기에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복음은 뭐냐?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이게 신앙의 핵심이에요. 이걸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요한복음 8 29~32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 거하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인자(人子)’라고 했어요.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기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시는 까닭은 육신을 입고 우리와 같은 삶의 상황 속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의 고통을 몸소 겪으시고 있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신 말씀이에요. 예수님의 시대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정치적 억압 속에 있었어요. 말할 없는 경제적 가난 속에 있었어요. 수많은 사회적 차별 속에 있었어요.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 차별 받고 무시 당하는 지방사람이에요.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어요.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는 소년가장으로 가난의 밑바닥에서 살아야 했어요. 그가 태어날 때도 말구유에 태어난 것은 누구라도 인간의 고통을 예수님 앞에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는 뜻이에요.

이렇게 혼란한 시대상황 속에 또한 다양한 신앙의 모습들이 생겨나요.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바리새파, 경건주의자들이에요. 우리나라에 빗대어 보면 사람들은 양반이에요. 자기 먹을 있는 사람들이에요. 신학이라는 것도 먹고 나서 이루어지는 거죠. 경건을 지킬 있을 만큼 자기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스스로를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들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어요. 먹고 살기 바쁜 일상에 매여 제대로 하나님의 규율을 지킬 없는 사람들을 더러운 놈들이라고 취급했어요.

사두개파가 있어요. 사두개파는 제사장그룹이에요. 종교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바리새인과 팽팽히 맞서고 있어요. 이들은 세속주의자들이에요. 구약 중에서도 모세 5, 제사에 관한 말씀만 인정하는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은 영도 영생도 부활도 내세도 인정하지 않아요. 그저 오직 현세 동안에 어떻게 복을 누릴 것인가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에요.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려고 하는 열심당이 있었어요. 로마에 협력하는 자들을 미워하며 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이에요. 아마도 바라바라는 인물이 바로 그런 유형이죠. 로마정부와 협력하는 급진개혁파들이죠.

아예 세상을 죄악 가운데 빠져버린 구제불능의 세상으로 규정하고 광야에서 동굴을 파고 은둔하며 살아가는 수도원식 공동체인 엣세네파가 있었어요.

이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몸부림이었어요. 제가 재작년에 그리스 터키를 여행할 인상적인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의 메테오라 라는 지역인데요, 거기 가니 높은 바위산들이 있어요. 민둥바위산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어요. 박해를 받게 되니까 거기로 도망가서 사는 거죠. 이제는 겨우 길이 났으니까 그리로 다니고 다리도 놓았지만 옛날에는 그런 수도원은 적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문도 만들지 않았어요. 거기에 들어가려면 꼭대기 망루에서 내려주는 그물가마니 같은 붙들고 올라가요. 그런데 거기는 들어가면 나와요. 서원하는 사람만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서 죽는 거예요. 무덤도 안에 있어요. 그것을 둘러보면서 나도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지만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믿을 있을까?’ 했어요. 들어가면 다시 나오고 거기서 죽고 묻혀지는 수도원의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았을까? 저는 예수님이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을 마치지 않으신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하지 않으셨어요. 너무나 평범하게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셨어요.

보세요, 예수님의 신앙교육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의 전통교육을 받았어요. 태어난 8일만에 할례를 행했어요. 의학적으로도 태어난 8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리고 12살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새로운 경험을 했어요.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12살이면 성년이에요. 어려서부터 말씀을 가르쳐서 12살이면 말씀의 아들(바미츠바)이라는 성인식을 치뤄요. 그때부터 성년으로 취급하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새로운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요. 기도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그에게 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요. 이게 소명이에요. 

목사만 소명을 받는 아니에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하는 아들, 이는 기뻐하는 하는 것을 확신해야 해요. 가슴에 불이 떨어지듯이 뜨거운 체험도 중요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아요. 하나님의 방법을 제한하지 마세요. 활짝 여세요. 말씀을 듣다가 깨닫는 순간이 여러분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에요. 귀한 거예요. 심지어는 의문이 있을지라도, 어찌 의문이 없이 해답이 있겠어요? 무조건 믿으라? 반대에요. 그렇게 믿을 없는 거예요. 생각해보고 따져보고 인간의 이성으로 묻고 묻고 묻지만 한계가 와요. 한계가 겸손하게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여는 거예요.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며 생명과 우주 만물을 오늘도 권능과 지혜로 움직이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고 무릎을 꿇고 이제는 내가 할만큼 했사오니 하나님이 말씀해주십시오.” 그럴 하나님이 들려주셔요. ‘너는 사랑하는 자녀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게 하나님의 부르심이에요. 이걸 확인해야 되요.

세례 받은 다음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갔어요. 광야의 핵심은 뭡니까? 금식했다고 했지만 금식에 초점이 있지 않아요. 인생의 근본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한 거예요. 비즈니스 현장에서 날마다 씨름하고 부대끼고 특별히 격심한 경쟁사회 속에서 너나 없이 실패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 모두 인생의 근본문제를 묻는 아니겠습니까? 떡이냐 말씀이냐? 성경은 말해요. 떡과 더불어 말씀이에요.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어요. ‘높은 곳에서 떨어져 봐라. 하나님의 아들 아니냐? 하나님이 천사들을 동원해서 너를 붙들어 것이 아니냐?’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여러분, 세상에서 성공도 중요하지만 나의 의를 드러내는 것만큼 바보가 없어요. 똑똑하다면 하나님이 주신 아니에요?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아닙니까? 멀쩡하던 사람이 순간에 퍽퍽 쓰러지고 죽어가는 , 여러분 봤습니까? 자랑할 없어요. 은혜에요. 잘하든 못하든 은혜에요. 하나님의 안에서는 송명희 시인같은 부자유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있는 거예요.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의 근본문제에요.

광야에서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은 광야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아요. 예수님도 그것을 발견한 이후에는 마을로 들어가는 거예요. 마을마다 찾아가는 거예요. 삶의 현장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씀하세요. “내가 복음을 전하러 왔노라.” 우리의 일상 속에, 비즈니스 현장 속에, 가정 속에. 이게 사명이에요.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에요.

이제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율법을 주셨어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율법이에요. 율법의 핵심은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뜻과 마음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까지도 내어놓으시며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사자성어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그러잖아요. 목숨을 다해 사랑에 응답하며 살아가리. 오직 이것 뿐이에요.

요한복음 2 24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성전을 정결케 하려고 장사꾼과 강도의 소굴이 안타까움에 채찍을 휘두르면서 성전을 허물어 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사건을 예언하신 말씀이에요. 우리 마음 안에 십자가와 부활이 체험되지 않으면 교회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헛된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힘을 잃은 것은 작아서가 아니에요. 돈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에요. 십자가의 놀라운 은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에베소 교회같이 흘리고 수고하고 너무 일이 많이 있지만 첫사랑을 잃어버렸어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첫사랑을 잃어버린다면 목사도 헛일 거예요. 귀하지만 절대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비밀과 은총과 하나님의 첫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돼요.

요한복음 2 24절에 예수님은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셨으므로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셨다고 했어요. 남편과 아내가 나이가 들수록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죠. 그러나 오늘 여기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뜻을 알아야 되요. 우리 자신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인정해야 되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다음에야 사랑할 있어요. 오직 성령충만으로만 가능해요.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지혜를 구합니다. 날마다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겠노라 하는 자세, 결국 신앙은 자세에요.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안다? 아니요, 아직 거예요. 마디 말씀이라도 말씀에 무릎 꿇는 자세, 그것이 인생을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의 이치를 알고 나서 세상을 떠나겠습니까? 아니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만큼 우리가 알고 깨닫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열고 살아가는 자세. 그러기에 오늘 발을 디딘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인다면 오늘밤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는 이미 성공한 인생을 거예요.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을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는 부질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첫사랑의 회복을 다음에야 나누고 베푸는 , 흘리고 수고하는 , 모든 것이 이제야 비로소 제자리에 놓이게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셔요. 내가 율법을 점이라도 무너뜨리려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리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가 조금 전에 찬양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박혀 흘리신 주님의 옷자락을 만져보았다.’ 정말 옷자락을 만져보았다면 오직 그것만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