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20930 고향을 찾아서(눅4:16-22)[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순종]/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6. 1. 18:57

120930 고향을 찾아서 ( 4:16~22)

성경본문

예수께서 자라나신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자에게 자유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맡은 자들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그를 증언하고 입으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제가 시골에 있다가 서울로 대학을 가서 하고 싶었던 가운데 하나는 고향을 찾아가보는 것입니다. 고향은 서울 영등포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해까지 살다가 내려가서 12 만에 다시 올라왔죠. 어릴 기억, 장소를 가보고 싶었습니다. 대충 설명을 듣고는 찾아가봤어요. 제가 동생하고 놀다가 동생이 그만 물에 빠졌는데 같았던 곳을 가보니까 조그맣고 시커먼 개천이더라고요. 여기에 빠졌었구나. 우리 막내 이모가 저를 데리고 극장에 갔다가 영화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몰라도 글쎄 끝나고 보니까 이모가 혼자 가버렸어요. 저를 데리고 것을 잊어버리고 집에 혼자 가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당황해서 쩔쩔매고 영화관 문에 한참 서있으니까 그제서야 땀을 흘리고 뛰어 오더라고요. 그런 남도극장도 가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도 찾아가봤습니다. 고향을 그렇게 한번 둘러보니까 마치 잃어버렸던 과거를 되찾는 같은 그런 기쁨과 뿌듯함이 있었습니다. 오늘 추석이고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아가죠. 특별히 명절이어서 함께 고향을 찾으므로 고향에 가보니 친척도 있고 오랫동안 보았던 친구도 있고 더불어 나누었던 삶의 추억도 있고, 그런 것을 통해서 현대화되고 도시화되고 세속화된 속에 지쳐 살던 우리들이 위로를 얻고 소망을 얻게 되는 . 명절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주시는 위로요 축복이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오고 가는 교통편이 복잡해서 피곤하고 지친 것도 있지만, 그렇게 고향을 다녀오는 것이 주는 기쁨도 있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명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남으로 해서 얻는 기쁨보다 중요한 하나의 사건, 하나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좋은 은총의 시간이 바로 명절이라고 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12지파로 가나안 땅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명절이 되면 반대로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명절이 있지 않습니까? 구정도 있고 이번에 추석이죠? 유대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명절이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도 가나안에 들어와서 농사를 짓고 살았고 우리 조상들도 농사를 짓고 살았고 이런 농경민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한국의 거리 차이만 빼놓고는 나머지는 같은 거예요. 정확하게 우리가 추석을 기억하는 시간 사람들은 초막절이에요. 그래서 자기 앞에 나뭇가지로 초막을 짓고 주간 동안 불편하지만 초막에 들어가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광야의 어려운 시절 하나님이 불기둥, 구름기둥과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에서 생수를 주시고 하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이적으로 살았던 은혜를 불편함 속에서 기억하는 것이죠. 우리가 6.25전쟁을 우리 후대들에게 기억시키려고 일부러 주먹밥을 만들어서 그것을 먹으라고 하듯이 그들은 초막을 짓고 초막 속에 들어가 사는 거예요.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보면 간혹 아파트들이 계단식 아파트가 돼있어요. 왜냐하면 아파트마다 자기 앞에 자그마하지만 베란다를 만들게 하고 초막을 지을 있도록 하는 거죠. 얼마만큼 자기들의 율법과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에 몰려들게 돼있어요. 그래서 적어도 성년남자, 예루살렘에서 100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의무에요. 좁은 예루살렘이 명절만 되면 사람으로 터져나가는 것이죠. 이렇게 합니까? 물론 그들은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예수님 당시에 보면 농촌사회잖아요. 그러니까 정신의 고향, 마음의 고향, 영혼의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와서 주간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명절을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것이죠. 그러니 명절이 2가지로 중요한 것이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

, 그럼 예수님은 명절을 어떻게 지키셨겠는가? 여러분, 어떤 분이 그래요. 예수님 믿기가 어렵다고.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당신만 그런 아니고 2 전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해요. 그때 예수님을 믿어야 했던 초대교회의 많은 사람들도 똑같은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로 기록돼있습니다. 4권씩이나 기록할 있냐, 그냥 1권이면 되겠지.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보는 시각이 다른 거예요.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졌어요. 그래서 가장 짧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사실을 설명합니다. 마태복음은 뭐냐? 이제까지 메시아가 오리라고 구약을 읽으면서 기대했던 유대인들의 눈으로 예수라고 있어요.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구약의 말씀이 그에게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는 거예요. 반면에 누가복음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조건 속으로 들어와서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런 환경과 제약 속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얘기해요.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있었는가 하는 설명해요. 그래서 사실 누가복음을 읽으면 오히려 가장 우리와 따뜻하게 호흡할 있어요. 반면에 요한복음은 그러한 것을 넘어서서 비약이라고 만큼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시작부터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이시다 라고 얘기해요.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은 극소화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극대화해요.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시각을 우리가 배워야 돼요. 균형을 가지고 같이 봐야 돼요.

그런데 오늘은 누가복음에서 본문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와 같은 조건 속에 들어와 사시는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자라나고 어떤 경험을 했는가 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죠. 열두 예수의 이야기를 여러분 아시죠?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유월절을 맞이해서 부모는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사실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멀어요. 리도 넘으니까 올라가도 돼요. 의무가 아니에요. 그러나 부모들은 신실한 사람들이었기에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열두 살이 아들을 데리고 올라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죠?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 주간 머물고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 동네 나사렛으로 가는 중에 열두 예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부모는 어떻게 생각했느냐면 그저 동네사람들하고 같이 가고 있으니까 어딘가 오겠지 하고 사흘 길을 가다가 찾아보니 애가 없더라는 거예요. 놀래가지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있더라는 거예요. 거기서 학자들과 더불어 깊이 말씀을 나누시더라. 여기에 의미가 있어요.

원래 유대인들은 열두 살을 성인으로 봐요. 열두 살이면 스스로 신앙고백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열두 살이 되면 아주 중요한 성인식을 합니다. 성인식을 바미츠바라고 해요. ‘미츠바라고 하는 것은 언약이라는 말이고 라는 것은 아들이라는 말이에요. ‘바요나 시몬’, ‘요나의 아들 시몬이란 말이잖아요. ‘바디매오’, ‘디매오의 아들그런 말이에요. ‘언약의 아들이라는 성인식을 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제까지는 부모 울타리 안에서 자랐지만 부모 밑에서 신앙을 배웠지만 이제는 내가 스스로 신앙고백을 있다. 열두 살에. 그래서 우리가 중학생들 세례를 있는 근거는 성경에서 따온 겁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교육이 부실하죠. 부실해요. 제대로 가르쳐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태어나서 8 만에 할례를 받는데,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인데 이렇게 중요한 시간에 사단이 아이에게 역사할 있으므로 날부터 부모들은 기도하고 태어난 8 밖에 아이의 귀에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줍니다. 그렇게 해서 12년을 다져온 신앙이에요. 그래서 열두 아이는 이제까지 자기가 읽고 외운 성경을 사람들 앞에서 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배운 신앙을 고백하게 해요. 결혼식만큼 중요해요. 그래서 오는 사람들이 축의금을 들고 와야 돼요. 축하한다고. 축의금도 내주고 축하해줘요. 그렇게 모은 돈을 부모가 아이를 위해 저축을 해두거나 머리가 돌아가는 부모는 아이와 함께 아이의 이름으로 주식에 투자해가지고 아이에게 가르쳐줍니다. 돈을 10 지나서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아이에게 내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사회생활을 출발할 밑천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죠. 우리보다 훨씬 앞서 나가는 거죠.

이게 열두 살의 경험이에요. 예수님도 열두 살에 사건을 경험한 거예요. 부모가 찾았을 그러잖아요. ‘ 여기 있느냐 우리가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하냐.’ 그랬더니 예수님 엉뚱한 얘기를 하잖아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줄을 모르셨나이까.’ 아마 우리 같았으면 엉뚱한 소리 하고 있네하면서 때렸겠죠. 여기엔 의미가 있는 거죠. 이제까지 성경으로 듣고 보고 배웠던 마을 회당에서 배웠던 예수가 하나님이 아버지로구나 하고 뜨는 사건이에요. 이게 열두 예수의 유월절 경험이에요. 유월절이라는 것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잖아요. 여러분, 언제 유월절을 경험했습니까?

열두 예수가 경험을 하고 나서는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나이 서른이 때까지 부모를 섬기며 살았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요셉은 일찍 죽었다고 해요. 그래서 예수는 젊은 가장이 됐어요. 일찍 목수로서 어머니와 다른 많은 동생들이 있잖아요. 성경을 읽어보면 마태복음 13장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예수의 형제들 이름이 나옵니다. 야고보, 유다, 시몬, 요셉, 그리고 누이들. 적어도 6 이상이었던 거예요. 먹여 살리고 살아가게 되죠. 그러나 열두 살에 만났던 하나님의 경험, 아버지의 경험은 중요했어요. 누가복음 2 52절에 보면 열두 유월절 경험을 예수는 이후에 어떻게 되냐?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던 예수가 나이 서른에 보면 누가복음 4장에 세례요한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유대광야에서 외치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몰려들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멀리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까지 찾아와요. 그건 얘기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아버지를 만났는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나사렛 젊은 목수로 살면서도 그의 속에서도 생각을 놓치지 않은 거예요. 하나님은 누구신가? 아버지는 누구신가? 그런 목마름과 갈증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남쪽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만사를 제쳐놓고 그에게 나아간 거예요. 누가복음을 읽어보세요. 많은 사람이 나와서 세례를 받고 예수도 와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았을 , 물에서 나올 어떤 경험이 있습니까?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에게 임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겠죠. 어떤 어려움을 당했든지 절망과 눈물 속에 교회에서 기도하든지 집에서 기도하든지 기도원에 올라갔든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이제까지 그토록 태산같이 무거웠던 짐은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 나의 하나님!’ 이게 바로 예수님의 고백이나 마찬가지에요. 성령께서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셔요.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딸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음성을 듣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비즈니스 하는 분을 만났는데요,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분이 여자를 만났대요. 저는 여자라고 해서, 어려서는 엄마를 만나고 커서는 아내를 만나고 나이 들어서는 딸을 보고, 그런 얘기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래요. 아주 똑똑한 분이에요. 자기가 기업을 운영하는데 1 매출을 올리는 그런 기업을 운영하는 분이에요. 그건 대단히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이죠. 자기가 만난 번째 여자는 성공이래요. 성공이라는 여자와 연애에 빠져서 인생을 그렇게 살았대요. 그러다가 어느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그분이 소위 크리스천이었으니까. ‘내가 지금 이게 뭐하고 있는 거냐?’ 그리고 인생의 방향을 바꿔가지고 다음에는 보람되고 가치 있는 , 구제하고 남을 돕는 이런 일들에 몸을 불사르며 살았다는 거예요. 여인의 이름은 성취였대요. 그저 나는 돈만 버는 아니라 정말 의미 있고 있게 이렇게 사노라. 인생의 의미가 여기 있노라. 이렇게 성취와 더불어 살았대요. 그러다가 7 전에 암에 걸렸어요. 희귀암에 걸렸어요. 죽게 됐어요. 죽어가는데 이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 거죠. 그러면서 지금 마지막으로 만난 여자의 이름은 성숙’. 성숙이와 살고 있대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야기를 들으니 나이 삼십에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해서 너는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음성을 들은 예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서 세례요한과 같이 자기도 광야로 들어가요. 광야에 들어가서 사십 일을 기도하는 모습이 나오잖아요? 거기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면서 인생의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답을 얻는 것이잖아요. 번째 물음이 뭐예요? ‘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오늘날 세상이 그거잖아요. 모든 것을 떡으로 만들고 돈을 창출하라 이거죠. 거기에 대해서 어떤 답을 얻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떡과 말씀이에요.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는 것이죠. 다음에 사단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 높은 곳에서 떨어져 봐라. 그러면 하나님이 천사들을 동원해서 놀라운 이적으로 너를 붙들 것이 아니냐?’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이제 이만큼 살았으면 하나님을 그만 시험하세요. 이제는 온전히 듣고 순종하기에도 며칠 남은 거예요. 마음에는 하나 소원이 있어요. ‘하나님 저는 능력 있고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없으니까 그저 가르쳐 주시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순종이에요. 성경은 말해요. 요란한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 지내는 , ‘내가 지금 , 양이 모자라서 것을 달라고 하겠느냐. 그것은 너나 먹어라.’ 순종하라고 했어요. 순종이에요. 이게 성숙한 신앙이에요. 어떻게 거냐? 사단이 말하죠. ‘내게 엎드려 절하라. 그러면 세상 모든 영광과 부귀를 너에게 주리라.’ 나의 영광을 위해 거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냐를 묻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 이게 진정한 성취죠. 인생의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가지셨어요.

그리고 얼마나 마음이 뜨거웠든지 예수님이 자기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왔다고 했어요.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안식일에 그러하듯이 회당에 가셨어요. 오랜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된 예수님이 회당에 오셨어요. 아마 평소에도 회당에서 인정할 만큼 똑똑했던 같아요. 그러니까 두루마리 성경을 예수님 손에 들려준 거예요. 두루마리를 펴더니 어느 구절을 읽었느냐 하면 이사야서 61 1절에서 3 말씀을 읽은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사 나를 보내사 포로 자에게 자유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그러면서 오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노라. 여기에 이루어졌느니라.’ 이건 엄청난 얘기를 하신 거예요. 구약의 말씀이 오늘 시간 자리에서 이루어졌느니라. 동네 사람들의 반응을 보세요. 깜짝 놀라면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아니, 친구 일찍 죽은 요셉의 아들 아니냐? 마리아의 아들 아니냐? 동생들이 지금 우리 동네에 같이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무슨 저런 엉뚱한 얘기를 하느냐?’ 듣지 않았어요.

여러분, 한국의 시골에서 4, 5 내리 사는 사람은 발전이 없어요. 사람은 착하죠. 그러나 없기 때문에 아무런 발전이 없어요.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는 중요하지만 생각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고향을 떠나서 넒은 세상을 돌아보고 와서 생각이 바뀌어요. 제가 예전에 김구선생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열여덟에 황해도 지역에서 자기가 동학을 따라가면서 자기 밑에 700 동학사람들을 무장시키고 부대를 이끌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이 스물하나에 민비 시해 원수를 갚겠다고 일본군장교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때려서 죽인 사람이에요. 그리고 사람이 인천감옥에 2 갇혔다가 탈옥하고는 년을 숨어 다니면서 만주를 돌아다니고 와서는 뭐라고 고백하느냐? “내가 이제까지 황해도 서당에 가서 유학자에게 세상을 공부하면서 지켜야 원칙을 위정척사(衛正斥邪)’, 유교의 바른 이론을 지키고 서양의 사악한 모든 것을 배격한다. 이것이 내가 해야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세상을 돌아보고 오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빨리 우리나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나라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붙는 열심도 중요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 말이에요.

예수님이 그것을 발견하셨어요. 그런데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를 거부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히 여기셨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이상히 여기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로마 백부장 믿음을 보시고 뭐라고 해요. ‘우리 집에 오시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을 맞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모자랍니다. 그냥 거기서 말씀만 하십시오. 저도 군인이기 때문에 여기서 명령해도 부하들이 듣습니다. 그러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여기서 순종하겠습니다.’ 얘기를 듣고는 예수님이 깜짝 놀라면서 내가 유대의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런 믿음을 적이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믿음을 적이 없다 놀라시더니 이번에는 정작 고향에 가셔가지고 자기를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사법고시 합격 같은 프랑카드를 알았더니 거부하고 배척하더라. 누가복음을 계속 읽어보세요. 아주 독한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화가 나서 나사렛 낭떠러지로 예수님을 붙들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제는 고향을 떠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가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시입니까? ‘게오르규라는 작가의 <25> 있잖아요. ‘25라는 뭡니까? 2차세계대전 전쟁 와중의 시간은 이미 종말의 시간이에요. 25시에요. 24시를 지나버렸어요. 이제는 내게 있는 시간이 아니에요. 시간은 은총의 시간이에요. 마지막 시간이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 드리는 시간은, 교회는 하늘나라 대사관이에요. 여기는 하늘나라의 권력이 있는 곳이에요. 여기는 치외법권 지역이에요. 우리가 몸은 지금 땅에 붙이고 있지만 지금 시간만큼은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오늘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거예요. 귀를 열고 들으세요. 이사야서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셔요. ‘누가 소경이냐? 누가 귀머거리냐? 나를 믿는다고 하는 백성이 소경이요, 백성이 귀머거리 아니냐?’ 여세요. 추석 명절에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약속을 기억하세요. 더구나 초막절이라고 하는 것은, 추석은 농사를 거두어들인 거예요. 초막절, 추석의 의미는 종말이에요. 마지막이란 말이에요. 우리 인생을 주셨으니 한평생 살고 하나님 앞에 삶의 열매를 가지고 이제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세상에 보내셔서 이렇게 살았기에 오늘 이것을 드립니다.’ 손이 비었어요. 부끄러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아시기에 우리의 순종을 찾으셔요. 오늘도 순종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좋은 명절을 맞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