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16 힘써 싸우라(유 1:1-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번 받은 ‘구원은 과연 영원히 유효한가?’ ‘구원은 영원한가?’ 이거는 하나의 신학적 물음이기도 하죠. 이것이 논쟁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읽어보면 두 가지 입장을 주장하는 지지하는 그런 말씀들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죠. 로마서 8장 38-39절 말씀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 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기품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증언하는 말씀이죠. 그러나 동시에 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마태복음 7장 22-23절 말씀 보면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경을 읽어보면 늘 어떤 문제든지 양면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항상 그걸 놓쳐서는 안되요. 그렇다면 이렇게 양면을 이야기 하는 것은 그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이지요. 하나님은 완전하신데 인간은 불완전해요.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시작은 불완전한 인간의 자세에 있어요. 하나님이 구원 하시려고 하지만 그 구원에 응답하는 인간의 자세, 인간의 선택에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그저 먹고 배부른 사람들의 신학적 논쟁만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교회 생활 신앙생활 속에서 터져 나온 실제적인 문제예요. 오늘 우리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이 말하는 초대교회 시대부터 이 문제는 있었어요. 여기에 유다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다 이랬습니다. 사실은 유다는 예수님의 형제예요. 그 요셉과 마리아가 낳은 자녀들이 여럿 있어요. 성경을 읽어보면 야고보도 있고, 유다도 있고, 요셉도 있고, 또 딸들도 여럿 있어요. 이름은 안 나오지만. 그러니까 어린 시절 예수님과 함께 자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생이란 말이에요. 야고보 또 그 아래 동생이지요. 그렇다면 이 유다는 초대교회가 시작되던 사도행전 1장과 2장에 나오는 마가 다락방의 오순절 성령 역사하셨을 바로 그때 120명의 사람들이 그 은혜를 체험할 바로 그때 있었어요. 그리고 교회가 시작되는 것을 경험했어요. 교회가 놀랍게 부흥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사도행전을 잘 읽어보면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습니다만 동시에 신앙에서 실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간간히 나와요. 사도행전 5장만 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교회 안에서 으뜸을 자초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는 그것을 보고는 “우리도 뒤질 수 없다.” 해서 아까운 마음에 팔기는 팔았습니다만 절반을 감추어 놓고 절반을 내어놓잖아요. 재산 절반을 교회에다 내어 놓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것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는 사건으로 크게 책망을 들었고 그 부부는 목숨을 잃게 되죠?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놀라운 성령의 은사가 있을 때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돈을 갖다 바치면서 ‘나에게도 이런 은사를 주십시오.’ 그럴 때 베드로 사도가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을 보니 당신 안에는 욕심이 가득 차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사를 돈으로 사가지고 자기마음대로 부리고 행세하며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악한 마음이 가득하구나 네가 네 돈과 함께 망할 지어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부터 불완전한 인간의 이런 많은 사건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더 더욱이 이 유다가 이 편지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어요.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밖으로는 핍박을 당하게 되지만 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의 복음을 왜곡하는 그런 이단들이 일어나게 되요. 그 대표적인 이단이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지’라는 말은 영적인 지식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그리스 철학을 기초로 한 성경 해석이었어요. 그리스 철학은 <이원론>이에요. 모든 만물을 둘로 나누어 보는 거예요. 눈에 이렇게 보이는 것들은 이거는 일시적인 것이다. 이거는 다 낡아지는 것이고 나중엔 썩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육적인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죠. 이건 천한 것이죠. 이것이 신앙에 어떻게 적용이 되느냐 하면 ‘우리의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다. 육신은 오히려 영을 가두는 감옥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정욕에 들끓고 있는 육신을 약화시켜서 우리의 영이 정화되어서 깨끗한 영이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도록 해야 된다.’ 이런 주장이 나와요.
그러면 우리 육신을 어떻게 할까요? 두 가지 방향으로 나와요. 하나는 금식과 고행 같은 것을 통해서 육신을 약하게 해서 영이 자유를 얻도록 하자. 원래 뿌리는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구원이 육신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영적인 구원이므로 육신은 고행을 하고 금식을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어요? 그렇지 못해요. 육신적으로 성적인 범죄를 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되냐 하면 해석이 뒤집어져요. 설령 육신으로 그런 일을 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차피 육신은 썩어질 것이므로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번에는 아주 방탕한 쾌락주의를 용인하게 되요.
여러분, 극단과 극단은 서로 뒤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어요.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는 뒤에서 만나게 돼 있어요. 둘 다 건강한 게 아니예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성경은 우리의 영과 우리의 육은 모두 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예요. 아주 귀한 거지요. 모든 것이 다. 이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지요.
지난 주간에 통일교의 문선명씨가 세상을 떠난 이야기가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습니다만 사실 그들의 주장의 뿌리도 초대교회에 나온 것과 다르지 않아요.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영적인 구원은 이루었지만 육신적인 구원 육체적인 구원은 실패했다. 그러므로 내가 육체의 구원을 완성하러 왔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리고 태초에 하와의 타락은 뱀과 하와의 성적인 그런 교제를 통해서 타락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 깨어진 육체적 구원을 완성한다.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이 있잖아요. 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새로운 메시야로 온 자기의 피를 통해서 모든 인류의 피를 새롭게 한다는 거예요. 마치 하와가 뱀과 성적 교제를 가지므로 타락의 피가 흘러 들어간 것 같이 자기가 새로운 여자들과 혼인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피가 모든 결혼관계를 통해서 온 세상에 퍼져나간다고 하는 것이에요. 굉장히 무서운 교리죠.
오늘 여기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해야 되느냐? 우리의 신앙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 힘써 싸워야 된다. 왜냐하면 잘못된 교리와 불신앙들은 전염병 같이 무지한 사람들을 통해서 순식간에 퍼져나가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 하던 사람들을 구원하셨어요. 유월절 놀라운 하나님의 사건으로 구원하시고 그들을 홍해 이적을 보이시고 광야로 이끌어 들이셨지만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런 구원을 체험하고서도 광야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끝내 불신앙 하다가 불순종하다가 광야에 다 없드러져 죽었어요. 우리가 사람이 착한 것만 가지곤 문제가 해결이 안 되요.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지 않고서는 내가 착하다 하는 것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요. 실상 자기가 착하다고 하는 것까지도 착한 게 아니죠. 무지한거지요. 참 순진한 거지요. 심지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타락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미 태초에 하나님을 섬기던 천사들 안에 있었던 반역과 타락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 타락한 천사들 그 우두머리가 마귀가 되고 사탄이 되어서 함께 타락한 천사들이 귀신이 되어서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하나님이 지으신 가장 존귀한 존재인 인간을 어떻게 하던지 파멸시키려고..
요즘 연일 뉴스에 그 성폭행에 관한 보도가 그치지 않고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뉴스를 보면서도 대문을 열어 놓고 잘 수 있습니까? 방문을 열어 놓고 잘 수 있습니까? 그 미친 사람이죠. 그러나 너무나 놀랍게도 사단은 그거보다 더 철저하게 우리의 생각, 우리의 인생,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결코 봐주지 아니하고 우는 사자같이 멸망 시킬 자를 찾고 심지어는 믿는 자들 까지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언인데 우린 너무 몰라요. 대문도 열어놓고 방문도 다 열어놓은 것과 똑같아요.
오늘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힘써 싸워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하나님을 쫓아가야 하죠. 그래서 여기 11절에 보니까 잘못된 세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의 모델을 얘기하고 있어요. 가인의 길에 행하였고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다. 여러분 가인이 누굽니까?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가인이 추수를 하고 나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아벨은 그 양을 잡아서 그 피로 예배를 들였다. 그랬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요? 어떤 분은 그래요. 가인이 추수한 것 중에 좋은 것을 드리지 아니하고 흠 있는 것, 질이 떨어지는 것을 드렸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그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셨다.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피의 제사를 드렸다 이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나뭇잎으로 그들의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던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가죽 옷을 입혀서 그들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셨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약에서 모든 제사에는 크고 작은 모든 죄에는 소든 양이든 염소든 심지어는 비둘기라도 다 죽여서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 받지 못한다. 요 비밀을 아벨은 기억하고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양을 잡아서 피를 뿌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데 우리가 지난 한주간의 삶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릴게 없어요. 불신앙 불순종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 보혈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 보혈을 힘 입어서 나온 것이지요. 이거를 잊어서는 안 돼요. 예배의 형식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예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거예요. 자칫 잘못하면 자기의 의를 가지고 나올 수 있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행전 5장에서 고꾸라졌는데 이들이 놓쳤던 것은 예수 보혈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예배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놓친 거예요.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헌금하고 더 열심히 하고 나를 따라올 자가 없다라고 하는 사람만큼 하나님께 먼 사람이 없어요. 기억해야 되요. 이게 예배의 비밀이에요.
두 번째 발람이예요. 이 발람이란 사람은 민수기 22장-24장에 나오는 사람이죠?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라고 나와있어요. 그러나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땅에 가까이 왔을 때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해서 발람을 찾아 가서 뭐라고 부탁하느냐 하면 ‘당신은 내가 듣자 하니 가장 뛰어난 선지자라고 합니다. 당신이 축복하면 축복을 받고 당신이 저주하면 영낙없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내가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하여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주십시오.’ 이렇게 된 거예요. 아니 하나님을 안다는 선지자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가지 말라.’ 그랬는데 발람을 보면 이 모압왕이 어마어마한 은 금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자꾸 그 돈에 눈이 어두워가지고 왕이 보낸 사신을 맞이하면 ’내가 갈 수 없노라’ 선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물우물 합니다. ‘오늘밤 우리 집에서 주무시오.’ 내가 한번 하나님께 물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분명 가지 말라고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얘기하지 못하고 그 돈에 눈이 멀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이제 예수 믿고 신앙 생활 할 때 우리의 동기가 참 중요해요.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 합니까? 어떤 아가씨가 인제 연애를 하고 있어요. 남자가 결혼하고 싶어해요. 이 아가씨가 이렇게 얘기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당신하고 1년에 364일은 같이 살 수 있지만 일년에 딱 하루만은 내가 옛 애인하고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수 있겠는가?’ 여러분 어떻하시겠어요. 그런 사람하고 결혼 할 수 있어요? 아니요. 결혼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신부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참 두렵고 떨리는 질문이 아닐 수 없어요.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법이 있으면 우리는 법 앞에서 우리의 죄가 다 드러나게 되요. 법이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가 점점 늘어나요. 법이 없으면 몰랐을 텐데 법 조항을 들이 댈수록 우리는 지킬 수 없기 때문이예요. 다 들어나는 거에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은혜로 사느냐? 율법으로 사느냐?예요. 우리가 보세요 여러분 제가 아무런 얘기 안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합니까? 그런데 ‘우리 나와서 기도합시다’ 하면 벌써 여러분은 벌써 기도합시다. 하면 죄 짓는 거예요. 기도 못하니까. 우리가 ‘새벽에 나와 기도합시다.’ 새벽에 못나오는 사람은 한 순간에 다 죄인이 돼버리는 거예요. 제가 얘기할 것도 없어요. 자기가 다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합시다’ 못하는 사람은 다 죄인이 되 버리는 거예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수많은 율법에 수많은 조항이 있었는데 몽땅 다 그들을 얽어 매는 그들의 죄를 다 드러내는 조항이 되어 버리고 말은 거예요. 얼마나 아이러니해요. 하나님의 백성이 살도록 만든 것이 율법이지만 우리에게는 율법을 이길 능력이 없는 거에요. 우리가 연애하고 서로 사랑할 때는 절대로 율법으로 살지 않아요. 24시간 그를 생각하는데 새삼 그에게 ‘하루에 두 번씩 애인을 생각하시오.’ 그런 법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24시간 온통 꿈속에서 만나고 있는데 이게 바로 은혜로 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살아가고 있느냐? 그런 물음 앞에서 저와 여러분은 다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못해요. 그러므로 어떻해야 되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또 구하면서 마음을 낮춰야 되요.
교회 안에서 잘난 척 하는 사람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예요. 신앙의 본질을 놓치는 사람이예요. 그거 기억하셔야 된다고요. 또 여기 고라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사람이예요. 성경을 잘 찾아보면 이 고라는 레위지파에요. 그러면서 모세의 친척이에요. 정확히 촌수를 따져보니 육촌이 되는 사람이예요. 그런데 민수기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탐꾼을 보내고 들어가려 하다가 저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들어가질 못하는 사건이 일어나요. 하나님께서 너희가 40일 동안 정탐군을 보냈는데 너희가 믿음으로 응답하지 못 했음으로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너희는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사실 절망적인 이야기에요.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이 통곡을 하잖아요. 그리고는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라도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군대를 몰고 들어갔다가 가나안 족속에게 대패 당하잖아요? 이런 큰 좌절을 맞본 직후에 고라가 모세에게 대적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 250명을 이끌고 와가지고 모세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잘한 것이 뭐가 있느냐’ 이렇게 된 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 어찌 하나님이 당신만 만난다는 말이냐.’ 그래가지고 대적하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모세가 말하지요. ‘고라여! 하나님이 당신을 레위지파로 삼아서 레위지파는 하나님 성막을 섬기는 사람들 이지요. 하나님의 성막에서 수종 들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섬기게 했는데 그것으로 부족해서 제사장이 되려 하느냐? 그렇다면 너희 모두 다 고라와 250명 모두다 각자 향로를 가지고 나와라 불을 피워서 나와라 향로를 가지고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향로를 가지고 불을 피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누구를 받으시는 지 한번 보라. 그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님께서 판단하시잖아요.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어기는 자들에게 땅이 갈라지고 고라와 그의 모든 가족들이 땅속에 파묻히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 참 안타까운 대목이 있어요. 참 교회는 신비한 곳이예요. 정치권력이야 부자지간에도 못 나눈다 하잖아요. 역사를 보세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이야기가 많아요. 권력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지요. 그러나 교회는 안 믿는 사람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데가 교회잖아요. 자기 돈 들여가지고 섬기고 봉사하고 그게 교회예요. 하나님께서 주신바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드리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직분과 은사대로 뜻을 모아 섬겨야 될 것입니다.
여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나아가야 할 가나안이 있어요.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이 있어요. 그리고 구름기둥 물기둥으로 하나님이 저들을 지키시고 이끌어 가세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요.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세요. 그리고 날마다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셔서 우리를 먹이고 입히셔요. 비록 황량한 광야이지만 여러분 광야이지만 눈을 들어보면 만나와 메추라기의 일용할 양식을 주신 은혜가 있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끄시고 그 다음에 우리가 인생을 다하여 나아가야 할 가나안이 있다는 거예요. 너무나 분명한 우리 인생의 지표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각을 모아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찾아 나갈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는 것이지요. 자 이게 바로 교회의 비밀이에요. 교회는 바로 이거예요. 이 은혜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모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힘써 싸워라.’ 힘써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냐? 가인의 예에서 보는 예배의 비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총을 붙들고 나아가라. 발람 너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려 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서 살아가도록 그리고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늘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라.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어린아이 시절부터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은총이 있어요. 오늘 우리 찬양대가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이 찬양을 불렀는데 주일학교를 다녀 보신 분들은 아실꺼예요. 제가 주일 학교를 다닐 때 제일 즐겁게 부르고 제일 귀에 익숙한 찬양이었어요. 결국 한평생 그 찬양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유다는 권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 말씀에 아주 간단히 말합니다.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 것이다.’ 그럴 때에 로마서8장 37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세상을 이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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