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7일 주일예배
승리의 노래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편 1-5)
오래 전에 본 영화가 기억납니다. ‘축제’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청준’씨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죠. 저 전라도 지방의 장례의 문화를 한편의 영화를 통해서 아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아주 그 교육적인 효과가 높은 그런 영화작품이고요, 그 내용은 죽음도 삶과 결코 분리 될 수 없는 우리의 삶에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과정으로 수용을 하고 또 그것뿐만 아니라 그 죽음과 장례조차도 하나의 축제로 표현해내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심지어는 그것을 웃음으로 바꾸어 공동체의 하나됨을 만들어내는 참 탁월한 지혜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시인은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는 것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인 우리의 가정과 사업장 일터 온 땅에서 하나님을 불러야 할 것이죠. 우리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꿈꾸는데 그러려면 이원론을 극복해야 되요. 하나님이 계신 이 곳을 우리가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집이라 이렇게 부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지적하고 있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므로 우리가 나가서 사는 우리의 가정과 일터 역시 거룩한 곳이죠. 교회만이 거룩하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 지는 일만이 거룩하고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행해지는 먹고 마시고 돈을 벌고 하는 이런 일들은 덜 거룩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게 강조해 오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에요. 그걸 극복해야 되요. ‘게토(ghetto)’라는 표현이 있죠. 게토라는 것은 폐쇄된 공동체를 말하는 거에요. 옛날 독일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다 잡아가지고 일정한 구역에만 머물도록 했어요. 그걸 게토라고 해요. 맘대로 들어오고 나가지 못해요. 교회가 게토가 되면 안 되요. 우리가 여기서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를 가지고 우리의 삶에 펼쳐나가야 되요. 그리고 우리의 비즈니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은혜를 가지고 성경적인 원리를 가지고 운영해야 되요. 신앙은 신앙이고, 비지니스는 비지니스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또 하나의 이원론이죠.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에서 큰 변화는 ‘만인제사장’설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로마 가톨릭에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것들은 신부라고 하는 그런 성직자계층이 다 책임을 지고 다른 일반사람들은 그곳에서 소외되어서 신부가 대리하는 대로만 위탁하고 하나님을 믿어왔다면,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근거해서 베드로전서 2장9절에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리고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얻어야 하는 제사장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죠. 종교개혁자 칼빈은 르네상스 이후 지리상의발견 그리고 상업혁명이 이루어지는 그 시대 분위기에 발 맞추어서 돈을 버는 그 상인들을 그 이전에는 아주 죄와 가까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무시하고 천시했던 그런 종래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서 돈을 버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이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렇게 선포했던 것이죠.
요즘 TV프로를 보면 아주 기존의 가수들만이 나와서 혼자의 무대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그런 일방통행적인 방식을 벗어나서 오디션 프로가 많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게 하고 또 자기의 있는 것들을 펼쳐내게 하고 간혹 그런 프로들을 보면 아주 기술적으로 탁월하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거기에 출연하고 있는 사람들에 그 삶의 스토리가 있어요.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 우리들에게 공감을 주고 또 우리로 하여금 삶에 새로운 면들을 느끼게 하는 거죠. 우리신앙이 이원론이 되어서는 안 되요.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일터가 분리되어서는 안 되요. 또 교회는 하나님 믿는 일은 그건 다 목사님이 알아서 하는 일이고, 그냥 우리는 그저 따라만 간다. 그건 건강하지 않은 생각이에요. 저는 그야말로 뻠반뚜(pembantu)죠.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안내 해주는 길잡이죠. 세계여행을 다닌다면 저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사람이죠.
자!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교회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일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자, 그러려면 우리가 누군가 하는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에요. 이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지혜와 권능으로 우리를 지으시고 그 안에 우리 삶의 뜻을 두시고 그 섭리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라고 하는 것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요. 똑같은 어린아이지만, 부모를 잃은 아이는 고아에요. 부모를 잃어버렸다는 그 상황으로 인해서 그 아이의 앞날은 너무나 거칠고 험해요. 또 먹을 것, 입을 것을 설령 넉넉히 준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부모로부터 온전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다면 그 인생에 얼마나 큰 멍에를 지워주는 것인지 모르죠.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되요.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양이다 그렇게 표현했어요. 짐승 가운데 제일 미련한 게 양이에요. 그 염소하고 양은 말이에요, 목자가 칼을 들어서 들이대면 염소는 막 죽는다고 난리를 치는데, 양은 어찌 된 일인지 칼이 들어와도 아무 소리 안하고 그냥 가만히 죽는다는 것이죠. 지난번에 어느 뉴스에 보니까 대도시에서 말이에요 그 양떼가 어느 집에 막 들어와 버렸어요. 목동이 잠깐 한눈 팔고 어디 간 사이에 그 양떼의 제일 우두머리가 길을 잘 못 들어가지고 어느 마켓에 들어갔는데 나머지 양들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그냥 따라 들어와 가지고 그 마켓을 한번 휘젖고 다 무너뜨리고 나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양이 가장 어리석어요. 가장 미련해요. 그러기에 여기에 우리의 갈등이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지은바 된 존재요, 하나님의 복 받은 존재라고 분명히 성경에 말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다 받아 누리기에는 우리 너무나 어리석어요. 여기에 우리의 한계와 갈등이 있어요.
간혹 제가 영국의 프리미어리그 프로축구를 보는데 어쩔 수 없이 박지성 선수가 가 있는 팀을 보게 됩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그 팀이 지금 프리미어리그 20개 팀 중에 꼴등 이거든요, 꼴등. 꼴등 하는 팀이지만 박지성이 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종종 틀어보게 되요. 요즘 박지성이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어요. 그 지금 QPR ‘퀸즈파크 레인저스’ 라고 하는 팀으로 옮겨 갔잖아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에 7년간 있다가 이제 이 팀으로 옮겨 갔는데 주장으로 갔어요. 그래가지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주장을 맡았다 이렇게 떠들어댔는데 좀 들여다 보신 분들은 알겠습니다만, 지금 프리미어리그가 7라운드까지 갔는데 단 한번도 이기질 못했어요. 심지어는 그 팀 130년 역사 속에 지금 최악이다 이러니 주장이 얼마나 마음이 무겁겠어요. 가만히 생각 해봐요. 맨유팀 같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면 최강팀이잖아요. 아주 잘하는 선수들이 있지요, 거기에 박지성이 가면 박지성이 없어도 이겨요, 그 팀은. 그저 시합에 뛰게 되면 그걸로 감사해요. 그리고 제 역할만 해도 아이구 잘 했다 그래요. 있으나 없으나 이기는 팀에 가 가지고 숟가락 하나 들고 있으면 그건 뱃속 편하죠. 뭐 좀 야단 맞아도, 좀 심하게 얘기하면 어차피 골 넣는 핵심 멤버가 아니니까, 자살골 넣지 않는 한 별 얘기 들을 것도 없어요. 강 팀에 있으니까. 또 반대로 한국대표팀에 예전에 주장도 했잖아요. 그러면 박지성이가 주장으로 있으면 모든 팀에 조직이라든지 이런 전술운영이 감독과 더불어서 그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으니까 그가 가는 곳에 공이 몰리게 되고 기회가 주어지게 되고 이렇게 힘을 모아주고 함으로 인해서 우리 한국팀이 일본과의 싸움에서도 멋있게 이기고 멋있게 골을 넣고 보란 듯이 고개를 턱 쳐들고 세러머니를 하고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차라리 못하는 팀에서는 다른 선수들이 다 같이 철저하게 조직과 전술로 하나가 되어가지고 간다면 해 볼만 한데, 지금 간 팀은 말이에요, 여기 저기 선수들을 막 불러 모았단 말이에요, 나름대로는 다 그래도 프로선수라고 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박지성이가 주장으로 서 있기는 한데, 다른 선수들이 도대체가 주장의 말을 안 듣는 거 같아요. 이게 뭐 우왕좌왕이에요. 참 고민이 크겠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제 박지성이가 인생을 알아가는 구나. 축구라는 것도 그저 공만 잘 차면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 안에 인생이 녹아 들어 있는 거잖아요. 이제까지 지난 10년 동안에 외국에서 화려했던 그러한 선수생활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그것을 넘어서서 어떻게 더불어 그 상황 속에서 그것을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정말 그저 기술만이 아니라 이제는 그 문제 속에서 고민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저런 경험을 겪어야 저 사람이 나중에 감독이 되어서도 그 선수들의 다양한 인간적인 고민과 상황까지도 내다보면서 그것을 다 끌어내어서 조화로운 한 팀을 만들고 다음 세대 한국팀을 또 이끌어 가지 않겠는가. 이제 뭐 새로 옮겨서 첫 시즌이니까 어떻게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다급한 모양이에요. 참 많이 공감을 느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양이라고 했어요. 가장 어리석어요.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목자가 꼭 필요해요. 그런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가 계세요. 그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죠.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을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 기도에 이런 표현이 있어요. 저들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세상 속에 살아가지마는 그러나 또 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이 세상 속에서 세상의 논리를 쫓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경이 말합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왕궁에 들어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저 한번 소개 한 적이 있습니다만, 몇 일 전에 우연히 인간극장을 한번 보니까 거리에 ‘마리의 남자들’이란 제목에 5부작이 있어요. 근데 마리라는 사람이 인도네시아 사람이에요. 인도네시아 여자분인데 한국으로 시집 간 거에요. 올해 나이가 서른두 살이래요, 8년 전에 시집 갔대요, 스물네 살에 한국남자를 만나서 시집 간 거에요. 아니 인도네시아 여자가 왜 여기서 그리로 시집 갔겠어요? 여러분, 자와 사람인데 너무 가난하니까, 집안을 일으켜 보려고 사람을 찾는 한국 남자를 만나 가지고 간 거에요. 벌써 산지 8년이 된 거에요. 저 전라도 함평 시골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가 만난 남자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듣지 못해요. 거의 듣지 못해요. 듣지 못함으로 말하지 못해요. 말이 아주 어눌해요. 그 곳에 들어가서 벌써 8년이 지난 거에요. 그 가난하기 때문에 그 얼굴도 모르는 남의 나라 남자를 따라나서야 했던 그 자기의 신세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이란 나라에 들어가 저 시골에 처 박혀가지고 그 답답한 상황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거에요. 가서 우선 아들을 셋을 낳았어요, 셋. 그 시어머니가 엉덩이가 크다 그러더라구요. 우리 며늘애 엉덩이 크다고. 아들을 셋을 낳았어요. 그 집을 완전히 환하게 바꿔놨어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들과 그 부모가 살아가는 그 집안의 분위기가 어떻겠어요? 엄마는 그걸 평생 가슴에 못을 박고 살아가요. 그러니까 그 아들에게 다 크도록 농사일도 안 시켜 애처롭다고. 또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아들하고 의사 소통이 안되니까 버럭버럭 화를 내요. 그런데 말도 안 통하는 이 여인이 들어가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다리가 되어주고 또 그저 무작정 아들을 아끼고 챙기려고 하는 시어머니와 남편 사이에 아주 지혜롭게, 그래서 어머니 안돼요, 지금은 어머니가 이렇게 농사일을 다 하시고 이렇게 도와주고 해서 우리가 살 수 있지만, 이제 곧 돌아가시면 남편하고 내가 아이들을 끌어안고 살아야 되는데 남편이 농사일도 못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겠어요. 농사일을 시켜요. 같이 농사일을 배우게 해요. 그래서 새로운 삶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요. 얼마 전 르바란 이었잖아요. 가난한 집에서 자기가 마음대로 인도네시아에 올 수 있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그저 친정식구들과 전화를 하면서 그 가난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의 아픔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산더미 같은 그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과 이런 과거와 이런 것을 과감히 뒤 돌아서서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요. 그래서 얼마나 전라도 사투리를 잘하고 심지어는 남편과 통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화를 배워가지고 남편과 수화로 얘기하고 어린아이들에게도 말이 안 되는 아버지를 무시하려 하는 애들을 호되게 야단을 치면서 애들을 수화를 가르쳐서 아빠하고 하나가 되게 해요. 제가 그거를 우연찮게 보고는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다 봤어요. 앞에 것도 보고 뒤에 것도 보고 다 봤어요.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뭐냐. 아! 내가 죄인이다. 아무것도 없는 저런 환경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온 몸을 던져서 하나하나 이것을 풀어나가면서 얼마나 잘 웃는지 몰라요. 웃을 일이 하나도 없는데, 웃어가면서 그 집안을 살려내는 것을 보면서, 야! 내가 죄인이구나. 조건과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누구에게 원망하고 누구에게 불평하겠어요. 그거는 당신이 어리석고 당신이 악한 거에요. 이런 일들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 신앙은 자세에요. 감사하며 찬송하며 이거는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기 대표적인 이 시편에 저자라 할 수 있는 다윗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아요. 시편 57편 7절에 보면 다윗이 이런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 내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확정했습니다. 내 마음을 결정했사오니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하고 찬송하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시편은 사울 왕에게 쫓겨 들어가 지금 굴 속에 숨어가지고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 속에 있을 때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간구했던 기도에요. 그 기도에다가 곡조를 붙인 거죠.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님께 피합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난이 지나가기 까지 내가 숨겠나이다 나를 지켜주십시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지금 동굴 속에 숨어 있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들이 내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했습니다. 내 영혼이 너무나 억울합니다. 억울하기도 해요.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아요. 돌아서서 한발 더 나아가서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해요. 내 영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결정해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그 마음을 정한 사람이에요. 환경에 관계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노래하고 훗날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수십 년 만에 다시 되찾아 가지고 맞아들일 때 춤추고 노래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날 저녁에 돌아왔을 때 그 아내가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그 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이 다 흘러내리도록 그것도 모르고 춤추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라고 얘기했을 때 내가 다시 그런 일이 있을지라도 개의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춤추고 노래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다윗을 향해서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내가 그를 통하여 내일을 다 이루리라.
여러분, 환경이 좋아지는 거 중요하지요. 그러나 먼저 내 자세에요. 어떤 분은 그러잖아요,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의 뇌를 속이세요. 먼저 웃으면 뇌가 속아요. 아, 웃을 일이 있는가 보다 그러고 온 몸이 다 깨어나고 반응을 하는 거에요. 뇌가 먼저 시들해지면 뇌가 뇌 결정에 따라서 뇌 반응이 다 나타나는 거에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세요. 예수님조차도 히브리서 5장 8-9절 말씀을 보니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아 순종을 배우고 온전하게 되셨은즉 이제 그를 뒤 따라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십자가에 이제 못 박히려 나가시면서도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다 베푸신 후에 어떻게 합니까? 찬송하며 감람 산으로 나아갔다. 우리 믿음으로 찬송하는 거에요. 믿음으로. 그럴 때 이것이 진정한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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