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21216 나를 사랑하면(요14:15-20)[예수님의 흑백사진]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6. 3. 10:57

20121216

나를 사랑하면

성경본문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15-20)

아주 오래전 얘기입니다. 제가 아내와 연애할 때 얘기죠. 추석이 되었는데 명절이지만 연애를 하니까 마음이 저쪽에 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모처럼 쉬는 날인데 어디 갈수 없을까.’ 제가 그 때 서울 저 태능쪽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려고 저 시내버스 창동까지 나가서 강원도 철원 가는 버스를 타려고 했더니 추석 때 얼마나 붐빕니까? ‘아! 내가 계산을 잘못 했구나.’ 도저히 그 버스를 탈수가 없어요. 너무 많아 가지구요. 그래서 집에 돌아왔는데 한번 가려고 마음을 먹어서 그런지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다. 어떻게 하면 갈수 있을까?’ 그래서 자전거를 꺼내 타고 철원을 갔습니다. 한 다섯 시간 반은 걸렸던 거 같아요. 하나도 힘들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찾아가서 나타나면 깜짝 놀라겠지?’ 그거 하나로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뭐 이미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자전거를 타고 여기 오는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또 얘기할 수 있지만 이미 그걸 벌써 넘어버렸죠. 그게 아니죠. 하나의 증거로서가 아니라 출발할 때부터 마음은 기뻤고, 또 만날 것을 생각하고 설레고 했습니다.

혹, 여러분 <모정>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참 오래된 영화지만 그 영화를 보면 스토리는 사실 별거 없어요. 차라리 제 연애얘기가 훨씬 재미있어요. 그러나 그거 보다……. 그러나 그 <모정>이라는 영화의 주제가가 참 인상적이잖아요. “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 여기까지밖에 몰라요. 그러나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우리 신앙이 그래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그분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되길 원하게 되고 그것이 내 기쁨이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분이 내게 주시는 말씀은 더 이상 나를 얽어매는 율법이 아니죠. 그것은 내 소원의 기름을 붙는 불붙는 열정이 되는 것이죠.

오늘 요한복음 14장 15절 말씀을 보니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영어성경에 보면 아주 오래된 ‘킹 제임스 버전’ 1600년대 쓰여진 그 영어성경을 보면 ‘If you love me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Keep my commandments 나의 계명을 지켜라’ 이렇게 돼 있어요. 명령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나 최근의 성경을 보면 다시 학자들이 연구를 해보니까 그 원래의 의미는 그러한 뜻보다는 ‘If you love me, you will keep my commandments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굉장히 큰 차이가 있어요. ‘나의 계명을 지켜라’ 이건 명령이에요. 이렇게 되면 벌써 율법이에요. 그러나 ‘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너와 나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기에 ‘내 마음이 네 안에 있고, 네 마음이 내 안에 있고, 내 소원이 바로 네 소원이 되고,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는가.’ 사랑의 관계를 얘기했잖아요. 연애하는 두 사람에게 ‘하루에 꼭 한번 만나야 된다.’ 그 무슨 부질없는 짓이에요. 24시간 같이 있고 싶은 사람한테 ‘하루에 한번 만나야 된다.’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의미가 없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성경의 많은 인물 가운데 다윗이라는 인물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는 정말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사람’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아주 젊은 시절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귀로만 듣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죠. 기름을 부을 때 성령의 은혜를 경험해요. 그리고 그 다음 부터는 온전히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13장 22절에 하나님이 다윗을 이렇게 증거 하셨죠. ‘그 사람은 내 마음에 딱 맞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통하여 내 뜻을 다 이루겠노라.’ 이게 바로 믿음의 본질이에요. 알다시피 다윗은 목동으로 출발해서 한나라의 권력을 흔드는 왕으로 참 입지전적인 인물이죠.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겠죠. 그러나 본질은 그게 아니에요. 왕이 되었다고 해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장악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인생의 고난과 그 어려움은 왕이 된 이후에도 더 요란하게 겪었어요. 인간의 허물과 연약함이 그대로 송두리째 다 드러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즐거워한 사람이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시편 119편 47절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나이다.’ 시편40편 8절에 보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이게 비밀이라고요.

참 골프하시는 분들은 고민도 많겠어요. 어떤 분이 예배에 안 나왔단 말이에요. 목사님이 “웬일이냐?”고 물어봤잖아요. 그런데 뜻밖에 예배시간에 골프장에 가서 골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자고 해서 불렀죠. “왜 그러셨느냐?”고 그랬더니 그분이 뭐라고 그럽니까. “목사님, 제게 고민이 있습니다. 교회에 앉아 있으면,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골프장에 가있다”는 거예요. 또 “골프장에 가있으면 골프를 치면서도 영 마음이 교회에 가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차라리 몸이 교회에 앉아 있는 거 보다 하나님은 마음을 찾으신다고 하기에 저는 골프장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 안타까움을 이해할 수 있어요. 얼마나 좋으면 그렇게 하겠어요.

여러분, 다윗이 범죄 한 걸 아시잖아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 그를 책망할 때, 그는 회개하는데 그 회개가 달랐어요. 정말 진실한 회개였어요.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구나!’ 그것을 아프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위의 신하들이 왕을 위로하려고 하는 그 위로까지도 거절했어요. 반면, 사울왕은 그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이 사무엘선지자를 보내 그를 책망하실 때에 사울의 반응을 보면 ‘내가 이렇게 잘못하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책망들은 것을 내 부하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알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 끝까지 자기의 왕위를 염려했어요. 진실한 회개가 아니죠. 그러므로 오히려 왕위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상하게 한 그것으로 인하여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할 때, 오히려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를 지켜주셨어요.

자 그렇다면, 우리도 어떻게 다윗과 같이 뜨겁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여러분 그 ‘예수님의 흑백사진’ 그 이야기를 아시죠? 20세기 초에 저 중국 오지에 한 사진사가 이제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나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했을 때, ‘사진을 찍어라’ 그런 어떤 감동을 느끼고 주위의 산과 들의 눈이 녹는 그 모습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현상해 보니 거기에 주님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하는 거잖아요. 그런 얘기는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주님의 얼굴을 보셨어요? 그래서 저도 주님의 얼굴을 찾아보려 했는데 이상하게 안 보이는 거예요. 이게 속상하게도. 그게 믿음과는 관계없겠지만, 이왕이면 좀 딱 보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가족이 벌써 오래전 얘기니까 4가족 중에 말이에요 단숨에 한 순간에 주님의 눈을 본 사람이 둘이 있는가 하면, 또 나머지 둘은 아무리 콧잔등이 여기라고 가르쳐주고 이게 눈이 아니냐고 찍어줘도 잘 안 보이는 거예요. 보일 듯 말 듯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친구네 집에 들어가 앉으면서 둘러보다가 말이에요. 벽에 걸려있는 그 사진과 눈이 마주쳤는데, 주님의 얼굴하고 딱 눈이 마주쳤어요. 그 다음부터 어떤 일이 일어났냐하면, 희한하죠? 그 사진 어느 각도에서든지 늘 주님이 나를 보고 계시더라고요.

여러분, 어떻게 하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까? 먼저 나를 뜨겁게 사랑하는 그 주님의 눈동자를 봐야 되요. 주님의 그 깊은 사랑을 주목해야 되요. 오늘도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세요. ‘내가 이제 십자가에 죽을 터인데, 너희는 너무 염려하고 슬퍼하고 두려워 걱정하지 말라. 내가 가면 너희를 위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노라.‘ ’보혜사‘라는 말은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말이에요. 우리를 은혜로 보호해주시는 분을 보혜사라고 해요. 그러니까 아주 과외선생님 같은 분이에요. 아주 친절한 분이에요.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보혜사가 있고, 또 다른 보혜사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보혜사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켜주셨던 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가시면서 예수님과 똑같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 그런데 이분은 더 좋은 분이에요. 왜? 예수님은 사람의 몸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같이 시간과 공간에 이 제약 속에 함께 스스로 갇히신 분이지만, 이제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오시는 성령 하나님의 영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시간과 공간에 메이지 않는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우리와 항상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실 수 있는 분이죠. 그분을 보내주시겠다. 그런 말이에요. 그분은 영원히 우리 안에 함께할 것이고,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가르쳐 주실 것이다. 말씀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신앙고백이 있어요. 구약성경에 어떤 분이 그러죠. 구약을 읽다보면 “하나님 무섭다” 그래요. 이스라엘백성만 사랑하시고 다른 사람은 다 진멸하라고 하신 그 하나님. 제가 요점만 간단히 말씀 드릴게요. 당시 유대사람들의 하나님 이해는 그만큼 좁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것을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들이 생각하는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놀랍게도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비를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이 무한한 사랑으로 그의 창조의 능력만큼이나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부르시는 가장 따뜻한 아버지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시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빌립이 이렇게 물었을 때 ‘빌립아, 네가 어찌 그렇게 말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그 지혜와 모든 것이 다 드러나 있는 것이죠.

자,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성경에 보면 당시에 성경이 기록되고, 증거 될 때, 가장먼저 말씀을 들었던 히브리사람들 유대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의 세상을 보는 관점은 역사에요. 또 헬라사람들 그리스사람들이 있어요. 철학이 발달했던 그리스사람들은 모든 사물과 모든 상황을 철학적으로 보는 것이죠. 반면에 전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고, 이것을 통치해야하는 로마사람들이 있어요. 로마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팍스로마나 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모든 민족이 다 같이 수긍할 수 있는 법적인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의 법적관점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 속에 일으키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부활과 이런 놀라운 역사 이 사건을 히브리인도 이해하고, 헬라 그리스사람들도 이해하고, 로마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은 마태복음으로, 마가복음으로, 누가복음으로, 요한복음으로, 다양하게 예수님을 고백하고 증거하고 있어요.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 모든 것을 다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되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듣고, 생각하면서도 항상 알아두세요. 결국에는 가장 성숙한 사람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아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에요.

간난 아기가 엄마에게 딱 붙어가지고 떨어질 줄 몰라요.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어요. 자라나야 되고, 언젠가는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되고, 사춘기 때 부모에게 저항해요. 독립하려고 해요. 사실은 사춘기 애들이 돈만 있으면 당장 나가서 결혼하고 딴살림을 차릴 거예요. 지금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여건이 허락지 않으니까 지금 눈치를 보고 있는 것뿐이죠. 언젠가 때가 되면 성숙한 사람이 되어서 자기 집을 이루게 되고, 자기 가정을 이루게 되겠죠. 그러면서 점점 부모를 깊이깊이 이해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하나님이해가 올해가 다르고, 내년이 다르고, 지난주가 다르고, 이번 주가 다르고, 점점 더 깊이 있게 달라져야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제 사도바울과 같이 고백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1장 17-19절에 이런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는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주셨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의 크고 작은 이 삶속에 어떻게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지,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이 만물이에요. 성경을 보면 ‘날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했어요.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속사람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육신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낡아질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우리가 여러분, 지금 우리교회가 이제 10년이 되어가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이런 예배와 이런 속에 이제 푹 젖어들었어요. 그래가지고 어느 날 눈을 떠서 가만히 보니까 편안해졌는데, 대신에 그만큼 나이가 먹어버렸구나. 교회도 나이가 먹어버리고 우리도 그렇게 됐구나. 창조성이라고 하는 것은 낯섦이에요. 좀 낯설다 이게 새로운 거예요. 새롭게 볼 때 새로운 것이 열리는 것이에요. 우리가 새해부터는 우리의 예배를 많이 바꿔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갇히기도 하고, 한마음대잔치도 하면서 보다 더 한발 더 서로 가까워지고 하면서 이제는 과감히 우리가 광야로 나가야 되겠다.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그런 형식을 이런 전통에 매여서만 하지 않고 과감히 순간순간마다 좀 새롭고 낯설지만 우리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그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알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도 이제는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응답하며 살게 하소서. 그럴 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죠.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즐겁게 지킬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나의 생명이요, 나의 기쁨이요, 나의 소원이 되는 것이죠. 우리 이런 뜨거운 마음으로 올 연말을 은혜롭게 보내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