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루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6-12)
가인의 후예,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가인과 아벨 또 아벨과 가인.
인류를 둘로 나누는 것이지요. 그래서 흔히 아벨은 하나님을 믿는 자, 가인은 믿지 않는 자 .그렇게들 많이 얘기하지요.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꼼꼼히 보면 가인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런 모습으로 봐서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을 다시 아벨의 후예냐 가인의 후예냐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 하나님을 아예 부정하는 자들은 신학적 무신론자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실천적 무신론자들이죠.
오늘 나는 정말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불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나의 소속이 교회에 있고 내 몸이 예배하는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은 참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중심, 어디에 있습니까?
또 가인과 아벨은 어느 부류로 딱 나눈다기보다는 순간순간 때로는 순종하고 불순종하는 우리 한 인격 안에 두 모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안에 가인이 있고 우리 안에 아벨이 있는 것이지요. 여기 가인이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그렇게 우리가 원하고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는데 오늘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오셔서 말씀을 주실 때에 가인의 태도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지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즉 예배를 드린다고 했는데 그 예배는 가인이 드리는 예배는 잘못된 예배였기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으셨어요. 오늘 여러분 예배를 드리잖아요? 오늘 여러분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계십니까? 지금 내가 드리는 이 예배를 정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라고 생각하세요? 그것은 제가 물어볼 것도 없어요. 자기가 알아요. 사실은 내 문제는 다 내가 알고 있어요.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오셔서 가르쳐주세요. 네가 왜 성을 내고 있느냐? 예배 잘못 드리면 하나님한테 화를 내요. 방귀뀐 놈이 성을 낸다고 똑같아요. 네 얼굴이 왜 그러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네 문에 엎드려서 틈을 엿보고 있느니라. 우리가 예배 잘못 드리면 우리 안에 사단이 틈타는 것이지요. 의혹과 불신과 분노와 이런 것들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문제가 결국은 나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가까이 멀리 있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해요. 오늘 불순종하는 가인은 하나님이 이렇게 가르쳐주셨는데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더 성을 내고 끝내는 그 분노를 품고 있다가 동생을 죽이게 되요.
여러분 우리가 연약해서 죄를 지을 수 있어요. 그러나 더 문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잘못 되었다고 가르쳐주실 때에 빨리 회개해야 되요. 그 실수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고집을 부리고 버티다 보면 합리화 하다 보면 그 다음에는 걷잡을 수 없는 문제가 생겨요. 정작 우리의 문제는 죄를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실 때 빨리 회개하고 엎드리지 아니하고 고집을 부리는데 있어요.
얼마 전에 고속도로에서 여러분도 보셨을 거예요. 뉴스에 나오잖아요. 글쎄 갑자기 버스가 말이에요. 앞에 줄줄이 서있는 차들을 와서 그냥 받았어요. 요즘은 블랙박스 장치가 다 차에 장착되어 있어서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훤히 볼 수 있잖아요. 차들이 찢어지고 날라가고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그 원인이 무엇인가 했더니 졸았다는 거예요. 기사가 깜박 졸았다는 거예요. 참 답답한 거예요. 졸리면 빨리 대책을 세우고 갓길에라도 차를 붙이고 잠을 자야 하지않겠어요? 그것을 깜빡하는 순간에 대형사고가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목숨을 잃은 것이지요.
에베소서 4장 26절 27절에 보면 싸워서 분이 생겼더라도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말라. 그 분을 계속 품고 있으면 사단이 틈타게 되느니라 말하죠.
한경직목사님이 6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와 둘이 사니 얼마나 삶이 곤고하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한경직 목사님 12살 때 “얘야 아무래도 네가 장가를 가야겠다” 이러셨다고 해요. 처음에는 잘못 알아들어서 아버지가 새장가를 가시겠다는 말씀이신 줄 알고 ‘그렇지 아버지가 어떻게 우리 남자끼리 이렇게 살까? 새장가를 가셔야지’ 그랬는데 그게 아니고 “네가 장가를 가야 되겠다“ 그래서 건너편 동네 세살 연상의 김씨하고 열두 살에 결혼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도 참 그분이 지혜로운 분이예요. 결혼하면서 두 분이 약속을 했데요. “우리가 앞으로 결혼생활을 하면서 절대 우리는 부부싸움을 하지맙시다.“ 라고 했대요. 어떻게 그것을 눈치채고 알았을까요? 그러면서 “만약에 당신이 잘못해서 내가 화가 나게 되면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말고 부엌으로 가시요.“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그럼 만약에 당신이 잘못해서 내가 화가 나게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하고 아내가 물으니“ 그럼 내가 밖으로 나가서 동네를 조용히 산책하지.” 그렇게 약속을 했대요. 한경직 목사님 전기에 보면 평양에 사실 때는 대동강을 많이 거니셨답니다. 신의주에서 목회를 하실 때는 압록강을 많이 거니셨대요. 영락교회에서 목회하실 때는 차마 한강에 못나가고 할 수 없이 영락교회 구내를 도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부부싸움할 때 사실 말도 안되는 작은 자존심 싸움이잖아요. 빨리 멈추고 산책 나가세요. 분노를 키우면 안되요. 여기 보세요. 가인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동생을 살해하게 되죠? 하나님이 또 찾아오셔서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은 뭐예요? 하나님이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요? 빨리 네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엎드리라는 얘기잖아요?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당장 벼락을 맞아 죽어도 싼데 하나님은 한 번 더 참으시고 말하죠?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부터 나에게 소리지르고 있구나. ’마지막 기회조차도 그는 외면했어요. 결국 어떻게 됩니까? 저주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에덴의 동편으로 나아가서 유랑자가 되잖아요. 오래 전에 에덴의 동쪽이라는 제임스 딘이 나오는 영화가 있었잖아요? 에덴의 동쪽이라는 것은 뭐예요? 거기에 청소년의 반항이 잘 들어나 있죠? 결국 그것은 청소년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그 누구든지 간에 에덴을 놔두고 쫓겨나서 에덴의 동쪽에 가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성경이 말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서 너를 엿보고 있느니라. 죄는 너를 삼키려고 너를 틈타고 있지만,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죄를 다스리는 권세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왜 우리는 불순종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왜 불순종할까요?
삶의 기준이 달라서 그렇지요. 이번에도 잠깐 한국에 나갔다 왔습니다만, 한국이 얼마나 무섭게 변하는지, 특별히 길이 말이에요. 너무너무 새로운 길이 많이 생겨서 어설프게 예전에 아는 지식을 가지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했다가는 망신을 당합니다. 큰일납니다. 저는 좀 길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저 늘 골목길이고 어디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데 늘 지도를 가지고 확인하고 이러는 사람인데 이제 그거 가지고는 안 되요. 어디 가려면 겸손하게 아가씨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내버게이터(Navigator) 아가씨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주소만 딱 찍으면 이제부터 안내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뭐 세상에 가다가 있는 차량 방지턱 이런 것까지도 다 안내하잖아요. 얼마나 정밀한지 몰라요. 정말 운전초보자라도 길치라도 내버게이터 안내만 들으면 정확하게 안내해주고요, 더 놀라운 것은 몇 시까지 갈 수 있도록 딱 시간까지 안내를 해줍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어느 것을 택하시겠어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경험을 믿고 서울같이 새로운 길이 계속 만들어지는데도, 그걸 믿고 가시겠어요, 아니면 내버게이터를 켜고 그 안내를 받으면서 여유 있게 가시겠어요.
왜 우리가 불순종하느냐?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삶에 대한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 나의 기준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내 기준을 고집하기 때문이에요. 여기 아벨과 가인이 나오는데요.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그 이름에 참 그 놀라운 비밀들을 다 담고있어요. 이름이 중요해요. 이름, 사실 이름이 전부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 집사님 한 분을 소개하려면 “아무개 집사님” 그러면 두 사람이 “아~ 그분 ”하고 얘기 하기 쉬울텐데 가끔 이름이 생각이 안나니까 “여보, 여보 그 집사님있잖아. 왜 그 키큰 분. ”아니 키 큰 사람이 한 두 사람 이예요? “아, 그리고 빼빼 마른 사람. ”이건 무슨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구요. 이름이 중요한 거예요.
아벨이라는 말은 ‘생기’라는 뜻이예요. ‘생명’이라는 뜻이예요. 가인이라는 말은 ‘얻는다’라는 말이에요. ‘소유’라는 말이에요. 아벨은 양을 잡아서 그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드렸다,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에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피를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되요. 왜 그러냐 하면 히브리서 9장 22절 말씀을 보면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오늘도 다시 한번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쏟으시고 그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거예요. 옷을 깨끗이 입고 나오는 것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기억하고 예배에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아벨의 예배예요. 그런데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얻은 자기의 소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열심히 노력했지요. 수고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과 달라요. 하나님은 내가 얻은 것 가지고 “하나님 내가 이만큼 얻었습니다. ”자기 의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나오기를 원하세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 받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붙들고 나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아벨과 가인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아벨은 양의 피로 제사를 드림으로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노라. 비록 아벨이 불의의 죽음을 당했지만 그는 죽어서도 계속 말한다고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그 아벨의 그 피의 제사를 지금도 증거하신다 라고 말했어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오세요?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건강하게 일하고 수고하고 땀 흘리고 애써서 이렇게 나왔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만한 것을 주셨지요.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지요. 그러나 그 어떤 감사보다도 중요한 감사가 오늘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 그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느냐. 우리가 땀 흘리고 수고해서 얻은 것은 재물이고 학식이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는 우리 속사람의 거짓과 더러움을 정결케 하지 못해요. 얼마나 거짓됩니까?
고린도전서 8장1절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 참 아는 게 병인 것 같아요. 제가 한국교회사를 이렇게 읽어 보면 우리 앞선 세대, 또 전전세대는 얼마나 알았겠어요? 그저 자기 이름 석자 쓰는 정도밖에 못 배운 사람들이 태반 아니겠어요? 그저 그 정도 가지고도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이것은 내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붙들고 온전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거기에 비해서 우리는 너무 많이 배웠어요. 너무 많이 배웠다구요. 더 이상 무엇을 배우려고도 하지 마세요. 차라리. 좀 짓궂게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50이 넘은 사람은 무엇을 더 공부할 것도 없어요. 이미 배운 것 지키기도 바빠요. 성경을 지식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님 살아 생전에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박사들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저들이 말하는 것은 지켜도, 저들이 행하는 것은 절대로 따라가지 말아라. 저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지식으로만 그저 입으로만 얘기할 뿐이지 그들의 중심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여러분 사랑이에요. 사랑이라구요. 로마서 13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두 젊은이가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요? 두 젊은이가 사랑하게 되어 지금 막 불이 붙었어요. 그럼 뭐 그 사람에게 새삼 ‘너는 상대방을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기억해야 된다.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24시간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 못 만나서 안달이 나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가 하는 것을 돌아봐야 되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런데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까?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원초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먼저 눈이 열려야 되요. 우리 찬송하지 않습니까?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주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주님이 날 먼저 사랑하셨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아느냐.’ 예수님이 물으세요.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했더니,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바요나 시몬아. 요나의 아들 시몬아. 이것을 네가 알게 한 이는 네 아버지도 아니고, 어떤 선생도 아니고 오늘 이 시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너에게 보여주셨구나. 계시하셨구나. 이제부터 너는 네 이름을 베드로라 하라. 반석이라 하라. 이제까지는 고기잡이 시몬 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인생을 낚는 반석 베드로라 하라. 내가 너의 이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노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음부의 권세. 하나님이 지으신 우리 인생을 사단이 하나님께 대적하기 위해서 부잣집 아이를 유괴해가지고 부자를 고통에 빠뜨리는 것같이, 인생들을 파멸시키려고 해요. 그래서 틈을 노리고 있어요. 여기 음부의 권세를 그 영어성경이나 헬라어 원본을 보면 뭐라는 표현이 나와 있냐 하면 ‘음부의 문이 열린다’라는 표현이 있어요. 문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아까 창세기 4장7절에서도 ‘네가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네 문에서 틈을 엿보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문을 단단히 닫으면 안전하게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데 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어떻게 되요? 사단이 틈타고 들어오는 것이지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지옥의 문이 열리지 못 할 것이다. 라고 하는 말이에요. 여러분,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깨달았을 때 이렇게 말하잖아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전적으로 의심해요. 그리고 전적으로 순종해요. 그리고 이제 눈이 열려서 이제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어요.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계세요? 그것은 자기가 다 측정할 수 있어요. 다른 것 가지고 얘기하지 마세요. 뭐 다른 사람 잘 믿네 못 믿네. 그것은 다 부질없는 얘기예요. 기준은 딱 하나예요. 내가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고 과연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을 것인가. 그것만이 기준이에요. 남들이야 뭐라고 하든 내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이 있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오늘도 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창세기 1장으로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누누히 얘기하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오늘도 들으면서 살고 있는가? 이사야서에 보면 주님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우셨는지 이런 말을 해요. 누가 귀머거리냐. 정작 내일을 하겠다는 내 종이 아니냐. 누가 소경이냐. 내 종이 아니냐. 안 믿는 사람이 소경, 귀머거리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나를 구원해달라고 물속에서 소리쳐 외치는 사람들하고 똑같아요. 오직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요. 우리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려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자랐습니까? 아니면 나이 들면 키가 쪼그라들잖아요. 제가 이번에 병원에 가서 키를 쟀는데요, 일 센치 줄었어요.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쫄아든다고 하더니 정말 쫄아들었구나. 몸은 쫄아들지라도 우리의 신앙은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해요?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해서 환란과 고난이 올지라도 ,아 죽을 날도 몇일 안 남았는데 좀 하늘나라가 훤히 보여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내 자식과 내 손주들에게 확실하게 얘기해주면서 아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야 멋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 아니겠어요?
가인의 후예로 살 것입니까? 아니면 예배의 비밀을 알고 하나님께서 저가 참 올바른 사람이라고 증언하는 아벨의 후예가 될 것입니까? 여러분 선택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두 번 다시 가인의 후예로 저주 받은 인생이 되어 에덴의 동편에서 한평생 방황하며 세상의 환란과 고난 속에 눈물뿌리며 피를 흘리며 고통당하며 사는 그런 인생 되게 하지 마시고,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만져주셔서, 눈을 열어주시고, 귀를 열어주시고, 생각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고, 주님을 그 놀라운 사랑의 주님을 깨닫지 못해서 몸을 움추리고 외면하고 돌아서고 숨으려 했던 그 모든 거짓과 허물로부터 우리를 용서하시고 밝은 빛 가운데로 이끌어주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생각도 밝게 하시고 마음도 건강하게 하시고 육신도 하나님의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강건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도록 우리의 사업현장과 우리의 직장과 우리 자녀들의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복을 더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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