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21223 떨리는 마음으로(빌2:12-18)[성육신의 신비를 찬양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탄맞아야]/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6. 3. 12:33

121223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 2:12-18)

 

여러분, 영화 십계를 아마 다 보셨을 겁니다. 그 얼마나 스팩타클한 영화 입니까? 볼만한 영화 아닙니까? 웅장하고요. 그거 1956년 작품이에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드디어 세계 최대 강대국으로 우뚝 서는 미국의 자부심이 가득히 담겨 있는 그런 영화죠. 그저 스팩타클 그 정도 규모만 스케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드라마의 내용을 보십시오. 히브리민족이 오랫동안의 노예생활로부터 탈출하는 엑소더스(Exodus) 출애굽의 이야기요, 홍해의 이적 같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참 감동적인 영화에요. 그런데 그 영화 그 스토리 한복판에 모세라는 인물이 있어요. 그 모세 인생의 스토리를 보면 그 규모나 그 어떤 것보다도 그의 인생 그 자체가 더 드라마틱해요. 그 어린아이들 애니메이션으로 이집트 왕자가 나왔어요. 뭔가 그랬더니 모세에요. 아! 그 참 표현이 기가 막혀요. 모세의 그 정체성, 그는 히브리인의 자식이었지만, 어려서 애굽 왕궁에 들어가서 이집트 왕자로 자라납니다. 어려서 자기 엄마가 유모가 되어서 그 젖을 먹으며 그 귓가에 히브리의 언어와 말씀을 듣고 자랐지만, 곧 이제 엄마와 떨어지게 되고 애굽 왕궁의 최고 교육을 받으면서 그 문화를 익히면서 자라나게 되요. 그는 도대체 유대 사람 입니까? 이집트사람 입니까?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누구보다 더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사는 것이죠. 그리고 드디어 그가 현실에 눈 뜨고 자기 동족을 구원해보겠다고 일어났지만 그는 오히려 살인하게 되고 광야로 도망가게 되요. 광야로 도망가 양치기로 살아갑니다. 무려 애굽 왕궁에 40년 또 광야의 40년 80.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마른 막대기만도 못하게 말라비틀어진 자기의 인생 속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만나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펼쳐 주시고 모세를 보내셔요.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와서 하나님 만났던 시내산으로 와요. 모세가 애굽 왕궁에서 자랐고 애굽을 속속들이 알았기에 그리고 또 이번에는 광야와 신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삶이 있었기에 그는 그 민족을 이끌고 나올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시내산에서 그 백성과 함께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을 연출하신 하나님의 그 뜻,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계시를 듣게 되는 것이죠.

성경을 읽어보면 시내산은 드디어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에요. 여러분 성지순례 가셔서 시내산에 올라가 보셨어요? 야! 참 감동이에요. 밤새 돌산을 올라가요. 계단을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가잖아요. 동 트기 직전에 도착하게 되죠. 캄캄한 밤에 뭐 여기가 도대체 어딘가? 좀 기다려 보세요. 동이 터 오기 시작해요. 그 때 주위를 둘러보면 눈을 들어보면 하늘밖에 없고 주위에는 온통 나무 한그루 없는 그냥 바위돌산이에요. 그렇지, 눈에 아무것도 걸림이 없는 그 적막 고요한 그런 장소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주신 거에요. 뭐하나 붙들고 의지할 것 없는 그런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이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게 되요. 그런데 하나님 이런 말씀하셔요. ‘너는 나한테 나아오라’ 그 출애굽을 경험하고 홍해의 이적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이렇게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였는지 아십니까? 백성들이 말합니다. 모세 당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만나면 죽으니까. 자기의 죄를 알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 앞에 가겠단 말을 하지 않아요.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당신이 가서 다 만나시고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씀만 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70인 장로들을 데리고 시내산에 올라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70인 장로들은 가까이 오지 말고 거기서 기다려라. 시내산에 이렇게 내려오다 보면 그 나무가 몇 그루 있어요. 거기서 장로들이 모세가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 만나 내려오기를 기다린 장소다 그렇게 이야기하죠. 모세에게 하나님 말씀하셔요. 너는 가까이 나아오라. 하나님 만나는 장면이 나오죠. 출애굽기를 보면. 그러나 하나님은 구름 속에서 나타나셔요. 구름 속에서 말씀하셔요. 그래서 흔히 세키나(Sekinah)라고 해가지고, 그 구름은 말이에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백성들이 성막을 지을 때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어요. 하나님 계시다는 뜻이에요. 그러다가 이 구름이 뜨면 움직이라는 준비에요. 구름이 움직이면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해서 움직였어요. 자! 구름의 의미는 뭐겠습니까? 모세일지라도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어요. 다 죽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구름으로 자기를 가리신거에요. 모세가 그러죠. ‘주여!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 말씀 하셔요. 그러냐? 그러나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구름으로 자기를 가리신 거에요. 그렇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오면 그 얼굴에 얼마나 광채가 나는지 백성들이 감당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만나고 하나님 주신 말씀을 백성들에게 얼른 선포하고는 얼굴을 너울로, 성경에 보면 수건으로 너울이죠, 너울로 얼굴을 가렸다고 했어요. 행여나 백성들이 자기를 이 영광의 광채가 나는 이 신비함에 마음이 끌려 가지고 하나님보다 모세를 높일까봐 모세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 그러다가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너울을 벗고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이야기해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어요. 우리는 한 없이 부족한 존재에요. 이렇게 해서 모세가 구약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잖아요. 구약에서 한사람을 뽑으라면 모세에요. 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나가고 이런 구원을 경험하면서도 모세 마음에 한없는 탄식이 있었어요. 홍해의 이적을 경험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지만, 여전히 불순종 했어요. 참 얼마나 아이러니인지 몰라요. 그런 놀라운 이적 속에 광야에 나와서 40년 살아가는 동안 어른이 되어서 애굽을 탈출했던 사람들은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다 죽었어요. 그리고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어린세대들이 40년 동안 자라가지고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주역이 됐어요. 왜 그랬는지 아세요? 애굽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그 의식구조, 그 모든 것이 완전 불신앙의 구조였기 때문에 도저히 그거 가지고는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이해 할 수도, 순종 할 수도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대를 길러내셨어요. 그러기에 모세는 너무 탄식했던 거에요.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도 돌아서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이 행하는 모세의 탄식. 자,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던 구약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모세. 그리고 이제 시대가 흘러서 신약에 들어오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죠. 그분은 하나님과의 우리의 신앙이 무엇인가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설명해 주신 분이에요. 예수님이 살았던 그 때, 유대땅, 그 시대에는 로마가 천년 로마를 뽐내면서 전 세계를 통일했던 때잖아요. 그 뭐 히브리민족이 애굽을 무너뜨리고 출애굽을 한 것도 사실은 대단한 사건이지만,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의 사건과 비교하면 이건 일도 아니죠. 그야말로 글로벌화 된 시대에요. 로마가 정치적으로 싹 통일했어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이루었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 글로벌 시대나 지금 글로벌 시대 속성은 똑같아요.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보세요. 그 어마어마한 제국을 이루었습니다만, 그 제국에서 주님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퀴리오스(Kyrios),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 주님이라고 하지마는 그 당시 로마지배 사회에서는 로마 황제가 주님이었어요. 그런데 그 주님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거의 신격화된 존재 였습니다만 그 많은 황제들의 스토리를 읽어보시면 예를 들어 네로와 같이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사건이에요? 그 어마어마한 로마제국의 황제가 사생아요, 가장 비틀어진 인격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로마를 불 질러버리는 가장 정신병자 같은 사람이 그 황제로 앉아 있는 이 세상의 아이러니.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Co)의 잭 웰치(Jack Welch), 20세기의 최고의 경영자라고 평가를 받는 웰치. 그 책을 보고 참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그의 인격은 어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큰 기업을 이루고 학문을 이루고 다 이루었습니다만 그의 사람됨은 어떠합니까? 전혀 같이 가지 못해요. 그래서 유대땅 갈릴리 청년으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는 어마어마한 나라를 이루고 민족을 이끌고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이룸으로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의 긍극적인 문제인 내 속 사람의 문제를 들여다보기 시작해요. 좀 짓궂은 표현으로 아무리 교회가 큰들 그게 여러분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여러분이 바로 서고,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여러분 안에 은혜가 없다면 아무리 건물을 크게 짓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아무리 아름다운 찬양이 있다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스스로 속이면 안되요. 속으면 안되요.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주목한 것은 그거에요.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정치적인 책략 속에서 이방인인 헤롯이 유대사람을 지배하면서 유대사람들의 정치적 그 신임과 표를 얻기 위해서 46년째 성전을 계속 확장하고 화려하게 꾸밈니다. 정치적 타협을 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제 뭐라고 그랬어요? ‘허물어 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성전을 새로 짓겠노라’ 아무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결국 그 말 때문에 성전모독이라는 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은 눈에 보이는 제도와 건물과 제물과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 이렇게 선포하셔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구약의 으뜸가는 인물이었던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님 말씀하셔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히브리서 3장 5-6절에는 모세와 예수를 비교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종이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집의 아들이셨다. 그럼 종과 아들은 무슨 차이이겠느냐? 요한복음에 보면 15장 15절 종은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한다. 모세가 제아무리 위대한 인물이었을지라도 그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의 그 출애굽을 이루었을지라도 탄식하고 한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그 큰 계획을 다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거 신성모독이에요. 로마사람들이 볼 때는 이거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의 지배자들이 서로 결탁해가지고 십자가에 죽인 거에요. 종교적인 이유와 정치적인 이유로 죽였어요. 예수님이 죽은 것은 내가 아버지와 하나라고하는 이 고백 때문에 죽었어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새롭게 성전을 짓겠노라 라고 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는 이 말씀 때문에 죽은 거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 직전 요한복음17장 24절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게 주신 영광을 저들이 보게 하소서. 이거를 보는 것이 신앙이에요. 오늘 말씀 보면 바로 사도 바울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신비를 본 사람이에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 말씀을 보면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시가 거기에 실려 있는 거에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의 모습을 가진 분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게 그리스도 찬가에요. 초대 교인들이 이 노래에 곡을 붙여 가지고 예배 때마다 그리스도를 찬양했단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지금 막 감격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거에요. 그러면서 12절에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루신 이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그로 말미암은 우리의 새 생명을 우리가 알았다면 이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항상 복종하여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여러분 우리 임권택 감독 아시잖아요? 벌써 오래됐어요. “서편제”라는 영화 있었잖아요. 그건 참 획기적인 영화에요. 아, 글쎄 저 남도의 “창”이 우리나라 우리노래인데도 불구하고 우린 정작 몰라요. 그런데 그 영화 한편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했어요. 대단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임권택 감독이 100번째 제작한 영화, 그래서 주목을 끌었어요. 뭐냐 그랬더니 이 서편제를 내가 다시 한번 새로 찍겠다, 그래 가지고 만든 영화가 “천년학”이라는 거에요. 천년학. 그래서 전문가들은 야! 그 장면 하나하나가 정말 기가 막히다 영상 미학을 자랑한다. 저도 한국에서 그걸 보니까, 야! 장면은 정말 기가 막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거에요. 왜? 거기 주로 창이 나오는데 이게 대체 귀에 걸리지 않는 거에요. 무슨 소린지? 그래서 전문가들은 그렇게 평을 했는데 저는 잘 동의가 안 되는 거에요. 아, 이거 참 아쉽다. 그리고는 인도네시아에 돌아와서 우연히 여기서도 그 영화가 나온 거에요. 그래서 DVD를 하나 샀더니 다행히 거기에는 영어자막이 있어요. 영어자막이. 그걸 다시 보는데 영어자막이 특별히 창을 영어로 이렇게 번역해놨잖아요. 아하! 그게 그 뜻이로구나. 우리말로 노래하는데 그게 들리지 않아서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영어자막을 보니까, 아, 지금 그 노래를 이해하니까 영상미학과 어울러져서 그 영화가 야! 정말 잘 된 작품이구나. 이거 얼마나 어이가 없어요. 우리영화인데 그냥 들을 때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좀 도움을 받아서 비록 영어였지만, 해설을 통해서 그것을 이해할 때 아, 그렇구나 했어요. 여러분, 눈을 열어야 되요.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거에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이 놀라운 신비에 눈을 열어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증거 하려고 내가 이제까지 달음질해왔고 수고했지만 내가 그것을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왜 나를 몰라주느냐고 내가 탄식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제 곧 내가 만날 주님, 주님을 만나는 그 날, 그리스도의 날에 나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이 이 비밀을 알도록, 여러분이 눈이 열려서 이 비밀을 알도록 내가 나의 남은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겠으며 여러분이 이제 헌신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의 그 헌신의 제물위에 내피를 전제로, 술을 붓는 걸 전제라고 그러잖아요, 내피를 술과 같이 부을 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그 사도 바울 하나님이 벌써 불러 가셨어요. 이제는 우리 차례에요. 눈 감기 전에 이걸 알아야 해요. 눈 감기 전에 이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해요. 요한복음 14장 12절에 예수님 이런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내가 한일뿐만 아니라 이거 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살아계실 때 유대 땅을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아, 우리는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이러고 살잖아요. 글로벌 시대가 되어가지고 미국이고 아프리카고 전화 한 통화로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이런 어마어마한 시대가 되었잖아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본인이 하셨던 그 일을 오늘 이루기 위하여 교회를 두신 거에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을 오늘 우리가 하는 거에요. 우리가 같이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끼리만 모이면 괜히 잘난 척하고 싸우고 그럴테니까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그들을 지켜주셨던 보혜사였어요. 은혜로 저들을 보호하고 지켜주시는 선생님이었어요. 그런데 그분과 똑같은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시고 오늘 말씀하잖아요.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오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셔요.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육신을 입은 게 아니라 육신을 벗고 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 안에 들어와 일하셔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그 뜻을 깨닫는 순간 우리 안에 소원이 일어나요. 그 뜻을 붙들고 그걸 가지고 살길 원하는 거에요. 미션이에요. 미션. 과제란 말이에요. 해결해야 될 과제. 예수님은 이 땅에 오는 그 첫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죽는 그 시간까지 그 미션을 향해서 초점을 놓치지 않고 나아가셨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잔잔한 호수같이 사는 인생은 그것은 시간낭비 하는 거에요. 다 미션을 가지고 사는 거에요. 사실은 애를 낳고 기다리고 학교 입학을 위해서 준비하고 이거 다 미션이잖아요. 그러나 그런 미션 가운데 가장 중심 되는 미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 생명의 역사를 우리가 모든 사건과 연계해서 해석하고 기뻐하고 나아가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셨어요. 교회는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지만, 교회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우리 삶 속에 새롭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구제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제하는 것입니다. 봉사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그 비밀을 우리가 감격스럽게 고백하기 위해서 말씀을 대하는 것이죠. 지금 성탄이에요. 1년 주기를 우리가 1년 365일 돌아가는 것을 교회에서는 교회력이 있어요. 교회에 달력이 있어요. 그 첫 출발은 성탄이에요. 이게 늘 성탄이 연말이 되어 있지만, 교회력으로 얘기하면 이제 시작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1년 동안 예수님의 그 생애를 1년 동안 고백하고 반복하는 거에요. 그래서 부활주일이면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같이 금식하고 기도하다가 또 부활의 기쁨을 맞고, 성령이 오시면 또 성령의 은혜를 새롭게 사모하고 이렇게 하면서 1년 1년을 돌아가는 거에요. 아마도 하나님이 우리를 60년 살게 하신 것은 그렇게 해서 60번은 반복해야 온전한 믿음으로 마지막날에 주님이 나를 부르실 때 할렐루야 하고 주님 앞에 우리에게 부어주신 이 은혜에 감사하며 설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성탄은 그저 크리스마스가 아니죠. 이 땅에 오신 그 성육신의 신비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제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그 새 생명을 부으시고 새롭게 살자라고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초대장이 바로 성탄이에요. 성육신의 신비를 찬양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