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09 열매로 알리라 (마 7:15~23)
성경본문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러분, 전혜성 박사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는 올해 여든두 살입니다. 해방 후 혼란기에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에 유학을 했습니다. 고학을 하며 공부하고 결혼하고 명문대학에서 사회학과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입지전적인 인물이죠.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해서 가정을 이루며 6남매를 기르게 됐는데 그 6남매가 모두 다 하버드나 예일 출신이라는 것이죠. 그 가족들이 받은 학위가 모두 11개나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미국 정부의 고위관리로 또는 예일대 법대 학장을 하듯이 학계의 리더로 다 활약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모델과 같은 그런 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가지고 있는 교육철학이 있어요. 진정한 리더는 어떤 것이냐? 홀로 잘 되고 똑똑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다른 사람과 세상을 섬기는 인물이어야 된다. 재주보다 덕이 더 앞서야 된다고 하는 것이 이분의 교육철학이에요. 그래서 미국 교육부에서 동양계 미국인 가정교육의 연구대상으로 이 가정을 선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최근에 한국을 방문하게 됐는데 오실 때마다 특강도 하시는데 자녀교육의 원리를 몇 가지 얘기했는데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첫 번째는 자녀를 위해 희생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서 희생했다. 자기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의 삶을 열심히 살고 이루어가면 그것이 오히려 더 자녀들에게 자긍심을 준다고 하는 거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희생했다. 이것은 자녀를 짓누르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아버지는 아버지의 삶을 열심히 배우며 익히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분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가족들마다 다 자기 책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놀러 오는 친구들까지 같이 공부하고 어울릴 수 있도록 책상을 더 넉넉하게 만들어주었다고 하는 거죠. 또 하나는 철저하게 이민생활에서 그 가정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가족공동체의식을 심어주었다는 거예요. 반드시 아침식사는 꼭 같이 한다는 거예요. 심지어는 남편 분이 어렵게 일자리를 얻었는지 새벽3시40분이면 차를 타고 떠나야 하기 때문에 새벽 3시에 아침식사를 할 때 온 가족이 다 일어나서 3시에 아침식사를 하면서 같이 일터에 나가는 아버지를 배웅하고 격려했다고 하는 거죠. 아버지가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이 새벽에 이렇게 나가는데 우리가 어떻게 잠만 자고 있겠느냐. 다같이 일어나서 새벽 3시에 밥을 먹었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깜짝 놀라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고 물을 때 이 분이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합니다. 어려서부터 해야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아예 애들이 태어나고 자랄 때부터 온통 집안이 우리는 하나라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쳐서 경험하게 해야 된다고 하는 거죠. 세 번째로는 그가 그렇게 뛰어난 자녀들을 기르고 했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미국사람들이 갖는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아직도 그렇게 썩 우호적이지 못하다는 거예요. 자선이라든지 기부하는 것에 너무나 인색하다. 개인과 국가는 연결되어 있기에 개인만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도 더 건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 자녀도 중요하지만 남의 자녀를 잘 키워야 한다. 남의 자녀를 잘 키울 때 그것이 우리 모두가 잘 되는 일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가정이죠.
그러나 저는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참 대단하구나.’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 ‘나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해보지도 못하고 자녀들이 벌써 다 자라버렸구나.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저런 철학이나 미흡한 부분이 많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저 좋은 것을 우리가 함께 우리 후대들에게, 사실은 후대들 이전에 이제라도 내가 그것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내 남은 100세 인생을 새롭게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게 ‘교회’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방송통신대학 아시죠? 우리나라 대학 중에 제일 큰 대학이 방송통신대학이에요. 대부분 다 늦게 공부하시는 분들이잖아요. 마침 얼마 전에 그것을 촬영한 이야기를 보면서 공감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늦깎이로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서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거기 한 육십 중반 되신 남자분이 나오더라고요. 일본어학과를 열심히 공부하시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공부하게 됐습니까?” 라고 하는 인터뷰에서 자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쏟아요. 일찍 부모님을 잃고 형님 집에 의거해 살다 보니 가난한 형편에 어떻게 공부합니까? 어렵게 어렵게 중학교는 겨우겨우 마쳤습니다만 그 다음에는 내 밥벌이는 내가 해야 되니까 형님 집에 의거해 살면서 시골에 살면서 날마다 나가서 나뭇짐을 해가지고 와야 되는 거죠. 그러다가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지게를 메고 고생을 하며 내려왔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너무너무 눈물을 쏟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해요. “내가 열다섯, 열넷이었을 그 소년시절의 나에게 스스로 너무 너무 미안하다. 그때 내가 좀 더 의지를 가졌더라면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더 주어진 기회에서 열심히 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이렇게 공부하게 되었노라. “지금은 어떻습니까?” “너무 너무 좋습니다.”
교회가 그렇다고 생각해요. 교회가 그렇습니다. 우리의 환경이나 지난 날이나 조건이나 어떻게 완벽하고 다 좋을 수 있겠어요? 그렇지 못하죠. 그러나 놀랍게 성경은 늘 막차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반전을 얘기해요. 요즘 드라마는 하도 반전의 연속이어서 조금 싱거워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이야말로 보세요, 열일곱 요셉이 하루 아침에 가정에서 쫓겨나서 구덩이 속에 들어가고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가 겪었던 그런 고난과 아픔, 그리고 그 마지막 모든 일이 어떻게 하나님 손에서 이루어진 일인가 하는 것을 창세기 마지막에 와서야 발견하게 되요. 형들도 요셉을 발견하지만 요셉도 그때에서야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을 발견해요.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이 큰 재난에서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시고 나를 이렇게 준비시키셨구나. 반전이에요.
신약성경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나오잖아요.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목격한 증인이에요. 그런데 누가복음 8장 3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려 고통 당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간 여인으로, 반전으로 말하면 이런 반전이 어디 있겠어요? 또 요한복음 20장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고백을 터뜨리는 그 의심 많다는 도마를 생각해보세요. 주님 손에 붙들린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고 축복이 있는 거죠. 그러므로 세상의 환경과 조건으로는 너무너무 미미할 뿐만 아니라 내 자신도 내 안에도 허물이 있고 연약함이 있고 오늘 그것으로 인하여 수많은 실패와 아픔을 겪었을지라도 이제 하나님 손에 붙들린 나를 다시 한 번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하나님의 나를 향한 새로운 계획이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까지 얘기했느냐 하면 그 많은 공부를 한 사도바울이 빌립보 3장에 뭐라고 얘기합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니 이제까지 내가 세상을 향해서 자랑했던 나의 문벌과 학벌과 열심과 이런 모든 것들은 쓰레기 같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지 몰라요.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골로새서 2장 3절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 인생의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 우리 요즘은요, 인생 백 세 시대가 된 거예요. 이제까지도 열심히 살아오셨지만 알고 보면 이제부터가 더 중요해요. 정말 중요해요. 어떻게 사실 거예요? 저는 그 방송통신대학 프로그램을 보다가 저것도 참 좋은 방법이다. 거기에 팔십삼 세 된 남자 분이 나오는데 그분이 칠십에 하루아침에 정년으로 일을 놓고 나서 어떻게 해야 될까 하다가 방송통신대학을 만나서 14년째 열심히 공부합니다. 일본어학과 4년 졸업하고 법학과 졸업하고 경영학과 졸업하고 14년째 아침 7시 출근, 저녁 5시 퇴근. 그 공부를 너무 재미있어 해요. 공부에 중독됐대요. 너무 재미있대요. 그것도 참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이제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의 인생 속에 어린이든 어른이든 남자든 여자든 잘났든 못났든 과거가 어떠했든 누구든지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내가 진정한 안식과 평강을 주리라.’
신앙은 뭡니까? 신앙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뽐내는 두 그룹이 있었어요. 하나는 사두개인이요, 하나는 바리새인이에요.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과 논쟁을 하고 싸우는 이야기가 마태복음 22장에 있지 않습니까? 뭐라고 합니까? 어떤 일곱 형제에게 한 여자가 큰형에게 시집을 왔는데 자식 없이 죽었다. 유대사람들의 관습에 의하면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와 같이 살아서 낳은 아이를 형의 집에 입양시켜서 형의 집안이 유지되게 하는 것이죠. 그러다가 보니까 칠 형제가 다 차례 차례 죽어서 한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다면, 정말 부활이 있어서 나중에 천국에 가서 어떻게 되는 거냐? 그렇게 물었어요. 즉 사두개인들은 놀랍게도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일을 전담하는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을 부인하고 천사를 부인하고 영생을 부인하고 내세를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구나.’ 그리고 성경 출애굽기 3장을 펴시고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모세를 만날 때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모세가 하나님에게 당신이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기를 드러내시면서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있음을 증언하시지 않았느냐.’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이렇게 참패 당했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었어요. 바리새인들이 아주 고소해하면서 자기들 가운데 가장 똑똑한 신학자를 예수님께 보내서 묻습니다. 시험해서 뭐라고 묻느냐면 ‘이 방대한 구약의 수많은 말씀 가운데 첫째 되는 계명이 뭡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에 있는 쉐마의 말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니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를 섬기라’ 그리고 하나 더 붙이셨어요. 레위기에 있는 말씀을 붙이셨어요.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가르쳐주셨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수많은 것을 지킨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집어내셨어요. 그리고는 예수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죠. 이번에는 예수님이 물음을 던지셨어요. 시편 110편 1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영감 속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아 되신 내 주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가 너의 모든 적들을 다 네 발 밑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옆에 앉아있으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왜 그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까? 다윗은 메시아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는데 왜 또 그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물었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그리스도를 올바로 아는 것이 참 진리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사실 이 시편 110편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 역사 때에 베드로의 첫 설교 가운데 나오는 것이죠. 베드로도 그때 깨달았어요. 아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놀라운 영광스러운 사건,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이루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다윗이 먼저 성령의 감동 속에서 보고 예언한 말씀이로구나 하는 것이죠. 그것을 인간의 지식으로만 연구하는 바리새인들이 어찌 알았겠어요? 알지 못하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거냐 하면 우리의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 그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그 고백이에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가운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메시아요 그리스도요 구세주이시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신앙은 교회 와서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 것도 잘 하는 것이지만 그 어떤 것 보다도 그리스도가 누구냐, 그분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살아있어야 돼요.
그래서 신앙은 이렇게 예수님을 고백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떠나간 사람들이 많아요. 오병이어 이적이 있었어요. 어린 아이의 도시락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셨어요. 여러분, 어떤 일이 일어났겠어요? 그 다음부터 이 사람들이 예수님만 따라다니는 거예요. 이분이 우리의 왕이다. 이분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다. 이분만 만나면 우리는 더 이상 굶을 염려가 없고 어떤 위험과 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겠다고 구름 떼 같이 몰려들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이제 그저 떡 먹고 배 부른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이 사건 속에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것을 발견하라’ 그러면서 ‘진정한 떡은 하나님만이 하늘에서 주시는데 그 떡을 먹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다’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물이라고 하는 것을 죽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이 다 듣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하면, ‘이것은 참 이해하기 어렵구나.’ 그리고 많은 사람이 떠나갔다고 했어요. 왜 그렇죠? 우리가 하나님을 내 필요를 따라서만 구한다면 이는 언젠가는 떠나가게 돼있어요. 내 생각하는 먹고 마시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언젠가는 떠나가요. 천국까지도. 죽어서 지옥 가는 것보다는 천국 가는 것이 백 번 낫죠.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고 천국을 가야지. 이런 생각으로만 주를 믿는다면 놀랍게도 진정 예수를 믿는 것이라 볼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간다고 말해요.
오늘 말씀을 보면 너무나도 기가 막힌 얘기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이거 교회가 드러내야 할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셔요? ‘내가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노니 나를 떠나가라 불법을 행한 자들아’ 이게 무슨 말일까요? 심지어는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놀라운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국 마지막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거예요. 우리의 자세를 보시는 것이죠.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일들이 있었어요. 귀신이 떠나가고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가 부어졌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말합니까? 돈을 싸들고 와서 말하기를 ‘나에게도 이런 놀라운 권능이 부어지도록 해주십시오’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너를 보니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도다 너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구나 그 돈과 함께 네가 망할지어다’ 그래서 교회 역사 속에 이걸 ‘시모니즘’이라 그래요. 이 사람의 이름을 따가지고 돈을 주고 교회의 직위를 사는 것을 시모니즘이라고 해요. 성직매매를 시모니즘이라고 해요. 자기의 이득을 좇아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사실은 다른 사람을 얘기하는 게 아니죠. 냉정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정말 주님의 뜻을 좇지 아니하고 그저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위해서, 그저 자녀가 잘 되는 것을 위해서 늘 주님을 부르짖고 찾았다면 우리가 바로 시몬 같은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눈을 씻고 마음을 씻고 손을 씻고 정말 주님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간 사람들이 있는데 주님을 끝까지 따라간 사람들이 바로 제자들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제자들도 주님과 싸웠어요. 예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이 당신을 엘리야라 하고 예레미야라 하고 혹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하고 혹은 죽었던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기뻐하시면서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구나.’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진정으로 메시아가 되고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죠? ‘예수님을 따랐던 내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당신은 당신의 뜻대로 십자가에 죽을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죽는다고 하고 당신을 쫓아서 직업이며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당신을 따라왔던 나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죠.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합니까?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우리 번역으로는 예수님이 제자를 꾸짖었다 말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건 안됩니다 라고 말했지만 놀랍게도 헬라어로는 두 단어가 다 똑같아요. 둘 다 야단치고 꾸짖었단 말이에요. 사실은 베드로도 예수님에게 목숨 걸고 대들은 거예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저항을 한 거예요. 거부한 거예요. 항변했다고 했어요. 싸운 거예요.
그래서 마가복음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이 앞부분에는 바리새인이나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그런 맥락으로 전개되지만 그리스도를 고백한 다음부터는 진짜 싸운 사람은 누구냐 하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싸워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막 내적 갈등을 하며 불평을 하며 원망을 하며 싸우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죠.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여기에 답이 있어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주신 뜻입니다.
오늘도 말합니다.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올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오리라.’ 어느 교회에 열심을 내고 충성 봉사하던 여집사님이 목사님에게 면담을 신청을 했어요. 그래서 목사님 방에 잠깐 앉았는데 목사님이 벌써 상황을 알죠. 일하다가 일하는 사람들끼리 마음이 부딪혔어요. 마음이 단단히 상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 목사님한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러 온 거예요. 목사님이 차를 한 잔 내면서 얼마나 수고가 많으시냐고 이렇게 저렇게 돌려 얘기를 하다가 한 마디 이런 얘기를 했어요. “집사님, 교회에서 섬길 때는 자존심은 집에다 두고 오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일할 때, 자존심은 집에다 두고 오세요. 그게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는 될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음주부터 다들 자존심을 집에다 두고 오세요. 그럴 때에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주님의 그 놀라운 사건, 그 은총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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