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30217 너희는 거룩하라(레19:1-4)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6. 4. 12:16

130217                                              너희는 거룩하라

 

성경본문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19:1-4)

 

 

요즘 성경들을 열심히 읽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별수 없어요. 잔과 같아요. 물을 부으면 물 잔이 되는 것이고 술을 부으면 술잔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면 하나님의 그 영광 빛을 받고 그러한 형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죠.

자, 레위기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계실 터인데 왜 한국 사람인 내가 유대인의 율법을 이렇게 읽고 배워야 하는가? 또 읽어보면 우리의 전통적인 제사와는 물론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데 무슨 차이가 있는가? 첫째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제사 표현은 제사지만 또 실제로 겉모양은 우리의 전통적인 제사와 별 다를 것은 없지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죠. 전통적인 우리의 제사가 우리의 죽은 조상들을 섬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3절에 보니 ‘네 부모를 경외하라’ 부모님은 경외 하죠. 그러나 죽은 그가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성경에도 물론 ‘부모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천대에 이르기까지 내가 네 후대에게 복을 주리라‘했어요. 부모를 통해서 복이 오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 두 번째는 레위기를 읽어보니 제사법이 너무너무 복잡해요. 그럴 수밖에 하나님은 우리와는 격이 다르신 분이므로 최대한의 그 예의와 격식을 갖추는 것이죠.

우리 대통령들이 다른 나라에 국빈 방문을 하게 되면 그 격식이 있지 않습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우리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미국대통령하고 같이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 빵을 집어먹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이게 헷갈려가지고 좌우가 헷갈려서 그래 미국대통령이 눈치를 딱 채고 “오늘은 우리 한번 바꿔먹읍시다” 그러고 먹었다고 해요. 호텔에 모처럼 가서 양식을 좀 하는데 사람이 좀 많이 오면 자리를 촘촘하게 배열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어떤 게 내 빵인지 네 빵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좌빵우물’이에요. 빵은 좌측에 놓고 물은 우측에 놓는 거예요. ‘좌빵우물’을 기억하세요. 그러나 핵심이 있어요. 이런 제사법의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오늘 19장 1절부터 마지막 37절 까지 무려 16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세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니라.’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므로 당연히 우리는 그를 닮아야 하는 것이죠.

예전에 자본주의 특집 프로그램을 보면서 요즘 중국이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그 빈부격차 극심하지 않습니까. 중국의 젊은 벼락부자들이 갑자기 얻은 부를 주체하지 못해가지고 자기 부에 걸 맞는 신부들을 구하는 얘기가 나와요. 인신매매 시장도 그런 게 없어요. 신부들을 테스트를 해요. 짝을 찾는 거죠. 제가 그거 보고 나는 중국에 살지 않는 게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그것도 다 엇비슷하게 맞추는 거지 돈하나 가지고 그 아가씨들을 거기에 얽매여가지고 벼라별 교육을 다 시킵니다. 바느질도 시험하고, 예쁜 거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여자들이 어떡하던지 한번 삶을 바꿔보려고 거기에 응모하면서 겪는 좌절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게 다 닮아가는 거죠.

하나님 말씀하셔요. 그렇게 세속적이고 돈에 죽고 사는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게 핵심이 뭐겠어요? 거룩 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돼요 여러분. 그 거룩에 더 깊이 들어가면 ‘온 만물을 불같은 사랑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하나님에 걸맞게 우리도 뜨거운 사랑으로 한번뿐인 우리의 삶을 남김없이 불태우며 살아가자’ 하는 거예요. 이게 핵심이에요.

자, 거룩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제사를 드릴 때 거룩한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레위기를 읽어보면 ‘다섯 가지 제사’가 나오죠. ‘번제’ 이 건 완전히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향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거예요. 헌신을 말합니다. ‘소제’ 곡식제물을 드리는 거죠. 감사헌금이라고 할 수 있겠죠. ‘화목제’ 하나님을 더 가까이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에요. ‘속죄제’ 내 자신이 죄인이에요. 나를 위해서 이 같은 내가 제사장이 될 수 없어요. 이 같은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없어요. ‘이 연약한 나를 정결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뜻으로 드리는 게 속죄제에요. ‘속건제’ 그런 내가 하는 일마다 실수와 잘못이 많아요. 그런 어그러진 잘못들에 대해서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드리는 제사가 속건제에요. 그렇다면 이런 모든 제사들에 핵심이 있어요.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짐승의 피를 뿌려서 네 죄를 사함 받는 것이다.’ 피를 드리는 것이죠. 생명을 드리는 것이죠.

자, 이들이 모든 제사 속에 생명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종살이를 하다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사건이죠. 구원받는 그날 하나님께서 바로 애굽 왕 첫 아들부터 여종의 아들까지 모든 짐승의 첫 수컷을 다 죽이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양의 피 바른 집에 들어가서 구원 얻었어요. 모든 생명을 하나님이 주장하셨는데 하나님 앞에 다 심판을 받는 그날 밤에 의롭지도 않고 더 배운 것도 없고 부족하고 허물뿐인데도 불구하고 양이 먼저 죽어 피를 바른 그 집에 있음으로 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죠. 그러므로 모든 제사 모든 예배는 유월절 구원에 대한 응답이에요. 구약에는 레위기가 있고 이 레위기의 복잡한 제사와 이 모든 것을 아주 명확하게 해석해 준 말씀이 신약의 히브리서에요. 레위기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러는 분은 신약에 가서 히브리서를 보세요. 아주 명쾌하게 그 모든 제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유월절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린 사건을 예표 하는 거예요. 저건 그림자에요. 예고편 이였어요. 이게 실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 흘림이 없이는 용서 받지 못 한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드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레위기의 복잡한 제사는 그냥 읽어보세요. 잘 모르면 그냥 지나가세요. 그러나 이것만은 아세요. 그 모든 제사는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거룩한 예배에 드리는 제물은 구약시대에는 소와 양과 짐승의 피를 드렸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그의 아들을 피의 제물로 받으셨어요. 우리는 예수십자가의 보혈을 가지고 하나님께 오늘 나와서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더 이상 이제 제사는 안 드리죠. 왜? 성경에 뭐라고 그랬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단 한 번에 영원한 죄 사함을 이루셨다’ 더 이상의 제사는 필요 없어요. 예수께서 완성하셨어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이름으로 나아와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제단’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뭐 그렇게 표현이 있으니까 쓸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제는 제단이 아니라 완성된 그 구원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강단’이 되겠죠.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고 드리는 예배가 거룩한 예배에요. 레위기가 말하는 것은 그 것입니다.

또한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들 얼마나 엄격하게 구분하는지 몰라요. 거룩한 제사장이어야 되는 거예요. 백성들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은 누구보다도 정결해야 돼요. 제사장의 규례가 레위기 21장에 있습니다. 자기 가족 외에 타인의 시체를 만져서는 안돼요. 육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안돼요. 음식과 먹는 장소도 다 가려요. 심지어는 과부나 이혼녀하고는 결혼해도 안돼요. 제사장은 반드시 처녀하고 결혼해야 돼요.

여러분 아시죠. 영국의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의 심슨부인하고 사랑에 빠지잖아요. 그런데 영국왕실 규례에 의하면 왕은 이혼녀하고 결혼할 수 없어요. 심슨부인은 이혼한 사람이거든요. 그래 고민에 빠졌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왕위를 내려놓고 왕위를 포기하고 그 여자를 택했어요. 그 바람에 동생에게 왕위가 가는 바람에 엘리자베스2세가 그 줄기니까 왕이 된 거예요. 이만큼 엄격하게 구별하려고 했던 거죠. 그 제사장을 위임하는 요즘 얘기로 하면 목사 안수식에 보면 물로 씻고 기름으로 바르고 짐승의 피를 드리고 이번엔 또 피를 바르고 정결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다시 기름을 바르고 또 피를 바르고 하나님의 성막에서 7일간 머무르면서 깨끗하게 유지 한 다음에야 백성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게 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에 보면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정결하게 깨끗하게 제사장을 구별해 했지만 그는 손으로 지은 장막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일을 했지마는 그거는 단 일회용 이였다’ 저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돌아가서 또 잘못하면 또 다른 거 또 끌고 와서 또 목을 쳐서 또 피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분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장막 즉, 천국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고 단 한 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으로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 제사장이 되셨다. 그런데 말이에요. 왜 그래야 되느냐?

오래 전 얘기에요. 저 제대하고 나서 예비군 훈련을 가보니까 참 사람들은 이상해요. 회사에서는 뭐 자기 사업도 운영하고 회사에서는 넥타이 메고 이러던 사람들이 예비군 훈련장에 예비군복 입고 오면 망나니가 되는 것 같아요. 아무데나 드러누워 자고 질서도 안 지키고 그게 사람이에요. 그래서 환경이 중요하다고요. 얼마나 우리가 죄에 둔해져 있는지 몰라요. 다른 사람에 대해선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다고 하는 것은 생각지 못해요. 의식하지 못하는 죄가 너무나 많아요. 그래서 죄로부터 정결케 된다고 하는 것 이건 그저 몇 번 손 씻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아주 뿌리부터 죄인이에요.

예레미야 13장 23절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셔요. ‘흑인이 그 피부를 바꿀 수 있느냐 표범이 그 반점을 바꿀 수 있느냐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가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무슨 말이에요. 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우리 힘으로는 우린 온전케 될 수 없어요.

부부가 서로 화나면 그러잖아요. 화나면 옛날 결혼할 때 얘기하잖아요. “그때 결혼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대.” 그러면서 “처음부터 잘못 되었어.” 그거 진짜 진리에요. 저도 그 얘기를 듣고 너무 화가 나가지고 화를 냈지만 사실인 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처음부터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끝날 까지 가는 거예요. 잘못된 만남이에요 여러분. 그러니까 이제 그 얘긴 할 필요 없어요. 우리의 기준으로는 그건 틀림없이 잘못된 만남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신비로운 사건이 있어요. 아내가 십자가 되고 남편이 십자가 되어서 십자가 지고 가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부자, 가난한사람, 많이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못생긴 사람, 잘난 사람 다 똑같은 거예요.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에요. 그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그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뿌리심으로만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는 사건이에요. 이게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제목이 되는 거예요. 옷을 잘 입었다고 의로워져요? 아니에요. 오직 우리는 이 시간에 예수그리스도 그 놀라운 피 뿌림의 역사를 듣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나오는 거예요.

레위기에 보면 절기가 많이 나와요. 1년 열두 달 여러 절기가 있어요. 거룩하게 살라는 거예요. 거기 보면 대표적인 게 유월절이 있어요. 유월절 사건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해요. ‘칠칠절’ 유월절이 지난다음에 7x7=49일 지난 혹은 ‘오순절’ 거기다 하루를 더 붙이면 오순절이죠. 유월절이 지난다음 51일이 되는 오순절에는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에서 탈출해가지고 ‘엑소더스’ 애굽탈출해서 광야로 들어와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때에요. 새로운 백성이 되고 언약을 받는 때에요. 우리도 예수를 믿고 들었던 그것이 우리에게 실체가 되는 사건이에요.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가운데 오시고 교회가 시작되는 놀라운 사건이에요. 그게 오순절의 의미에요. 마지막 ‘초막절’ 우리 추석이 저 사람들의 초막절이라고 했죠. 초막절은 일 년 농사를 거두는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고,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고, 우리의 죽음을 의미하고, 드디어 약속하신 천국을 보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거예요. 그러므로 일 년 동안에 이루어지는 절기는 뭘 말하느냐 하면 ‘너의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며 살아라.’ 그러는 말이에요. 출애굽기23장 14절에서 16절에 보면 ‘너희 모든 남자들은......’ 옛날에는 남자들만 강조했으니까 ‘매년 세 번 절기를 지켜라. 예루살렘 백리 안에 있는 사람은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에 모여서 한 주간씩 그 절기를 지켜라’ 하는 것이죠. 그게 뭐에요? 우리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집중하라.

여러분 관심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다음 주 부터 시작될 ‘어! 성경이 읽어지네.’ 그 구약통독 세미나에요. 그게 원래 20시간이기 때문에 5일간 하루 4시간씩 공부를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남자 분들에게 얘기했어요.“여러분, 여러분 사업을 위해서 출장도 가고, 심지어는 그 바쁜 와중에도 휴가도 가는데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일에 휴가를 못 냅니까?” 평생 살면서 단 한 번도 휴가를 못 냈는데 그다음에 무슨 얘기를 하겠어요. 하나님 앞에. 시간을 내세요. 시간을 내시라고요. 예수님께 집중하라는 거예요. 이 절기를 이렇게 만드신 것은 뭘 말 하면, 나의 관심 이전에 하나님의 관심이에요. 하나님의 관심은 그저 우리에게 밖에 없어요. 부모들은 어쩔 수 없어요. 저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식이 있어요. 자식이 못돼 먹었건 건강하건 연약하건 뭐 잘하면 잘하는 대로 그저 자랑하죠. 제가 대학 들어간 그 해에 제 모교회의 목사님 아들이 서울대학을 들어갔어요. 근데 목사님이 나이 늦어가지고 얻은 아들이었는데 그렇게 되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이 기쁨을 주체를 못해가지고 길거리에 나가 가지고 광주리 놓고 물건을 파는 할머니한테 말이에요 “할머니 할머니, 우리 아들이 서울대학 들어갔어요.” 그랬다는 거예요.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를 붙들고요. 얼마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자기 자식이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나에게 있어요. 자기 자식인 우리에게 일 년 열두 달 하루 24시간 불꽃같은 관심을 가지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셰익스피어의 희극가운데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있어요. 누구말도 듣지 않는 말괄량이가 말이에요 사랑에 빠졌어요. 그러더니 어떻게 되요? 아 글쎄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가 됐다는 거 아니겠어요. 사랑에 빠지면 예뻐져요. 그 유행가는 진리에요.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예뻐지면 온전하게 사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지금 이 시간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돈 많이 번 사람이 아니에요. 다 나름대로 기여하는 바 있죠.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뭐겠어요? 이 짧은 인생을 환하게 웃으면서 사랑하면서 살려고 사는 건데, 누구말대로 젊을 때는 건강을 헤쳐가면서 돈 벌더니 이제 나이 들어 가지고는 그 잃어버린 건강을 복구하려고 번 돈 다 써버리는 이 허망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사랑을 하면서 운동도 중요하지만요 그것도 스트레스가 되면 안돼요. 한바탕 웃는 게 두 시간 운동하는 것 보다 몸에 더 좋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 예수사랑에 빠져들고, 예수 복음을 찬양하고, 예수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에요. 차가운 윤리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말을 가지고 안에 율법을 가진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그 사랑을 기뻐하고 그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는 사람.

여러분도 그렇겠지만요. 저도 지금 우리 서로 성경읽기로 약속해가지고 저도 날마다 성경을 읽습니다. 얻는 유익이 너무나 커요. 처음에는 문자만 읽는 것 같죠. 졸기도 하죠.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 나를 앉혀놓는 시간이에요. 그것 자체가 은혜가 되는 거예요.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이 내 마음을 만지시는 것을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 거예요.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다가올 앞일에 대해서 대비하고 준비하고 다 필요하죠. 그러나 결단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게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오늘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것을 빼버리면 다 소용이 없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 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