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209 다른 복음은 없다 (갈 1:1~10)
성경본문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조선시대 초기에 ‘맹사성’이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열 아홉에 장원 급제를 하고 나이 스물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되었습니다. 군수로 임명되어서 임지로 갔습니다. 그 마음에 자만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아주 고명한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 갔습니다. ‘제가 이제 군민을 다스리려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 좌우명이 되는 말씀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노스님은 ‘악한 일을 하지 마시고 선한 일을 많이 베푸십시오.’ 그랬더니 맹사성이 하는 말 ‘아니, 제가 먼 길을 마다 않고 이렇게 왔는데 삼척동자도 다 아는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화가 났어요. 자기를 대단히 여겨줄 줄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를 무시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죠.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납니다. 그러자 노스님이 소매를 잡아 끌면서 ‘아, 그래도 이렇게 귀한 걸음 하셨는데 녹차 한 잔하고 가시죠.’ 억지로 다시 자리에 앉혔어요. 차를 끓입니다. 찻물을 찻잔에 붓습니다. 물이 넘쳐 가지고 방바닥에 흘러 내립니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 붓습니다. ‘아니, 스님. 지금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고 있습니다. 그만 하시지요.’ 계속 붓습니다. ‘아니, 스님. 왜 이러십니까?’ 나를 무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때 스님이 한마디 합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격을 망하게 하는 것은 왜 알지 못하십니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습니다. 부끄러워 견딜 수 없어요. 몸을 일으켜서 나가려고 하다가 그만 낮은 문에 이마를 꽝하고 부딪혔습니다. 그때 스님이 한 마디 더 합니다. ‘고개를 숙이면 머리를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불교 포교지 <붓다>라고 매월 한 장씩 신문에 끼어 옵니다. 제가 늘 즐겨봐요. 거기에 나오는 얘기예요. 겸손 하라는 거예요. 이미 우리도 성경을 통해서 많이 듣는 얘기죠. 사울이 겸손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셨으나 왕이 되어 교만했을 때 그를 내치셨다. 베드로전서 5장 5~6절에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인간세상을 살아가는 도덕과 윤리는 어느 종교나 다 한 목소리를 냅니다. 같은 목소리를 냅니다. 얼핏 다 같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되요.
제가 심뿌룩 인다 아파트에 사는데요, 어느 분이 그러더라고요. ‘심뿌룩 인도 아파트’라고요. 인도 사람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인도 사람들하고 살다 보니까 불편한 점이 뭐냐 하면 뒤뜰에 걷기 위한 코스가 있는데 이 사람들하고 우리하고 방향이 틀려요. 우리는 좌측통행이고 저 사람들은 우측통행이에요. 제가 늘 걷다 보면 고민이 생겨요. 마주 오는 사람을 어느 방향으로 피해야 할는지. 어려서부터 배운 원칙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분, 종교의 뿌리가 무엇이냐, 근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돼요. 그 <붓다>를 계속 읽어보니 어느 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생, 일반 사람들의 마음 바탕은 원래 맑고 깨끗했다. 그러나 욕망의 포로가 되어서 번뇌하고 고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모든 것이 다 자기 마음이 지어낸 생각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생각에 스스로 속지 마라. 부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부처님의 마음은 맑은 물과 같다.’ 맑은 물 흔들어 봐야 여전히 깨끗하죠. 그러나 중생들의 마음은 흙탕물과 같아서 가만 있을 때는 깨끗한 것 같은데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물이 뒤집어 지면서 온갖 더러운 것이 다 떠오르는 것과 같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만물의 모든 것은 다만 마음이 지어내는 것뿐이다. 그러니 네 마음을 지키고 다스려라 하는 것이죠. 철학이죠. 그게 이제 인간들의 뭔가를 구하는 마음과 하나로 연결이 돼서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마는 원래는 논리요, 철학이죠. 자기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죠.
혹 요가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원래 요가라는 게 싼스크리트어로 ‘자아완성의 길’ 이라고 하는 뜻이고요, 고대 인도 종교의 심신수련법이죠. 참선하고 가부좌를 하고 도를 닦으려면 똑바른 자세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건강을 위해서 운동 차원에서 하시니까 하실 수 있겠죠. 그러나 알고 하시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단 요가’라는 것도 있더라고요. ‘단월드’ 라고 하는 단체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단학선원’ 이라고 했죠. 단학선원을 창시한 ‘이승헌’이라는 사람의 <뇌 호흡>이라고 하는 책을 읽어보면 그는 21일간 먹지도 자지도 않는 극한 체험을 통해서 뭔가 우주와 통하는 체험을 했다고 하는 것이죠. 자기가 발견한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려는데 현대인들에게는 직설적으로 전해서는 들을 사람이 없기에 건강이라는 통로로 내가 발견한 진리를 전하겠다. 이게 단학선원의 시작이에요. 종교라는 거죠. 그러니까 단학선원을 다니시면 그건 교회를 다니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처음에는 운동이지만 나중에는 그들이 요구하는 신앙이 있는 거예요. 그걸 알고 다니든지 말든지 결정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란 뭐냐. 영국에서 비교종교학 회의가 열렸습니다. 신학자들이 모여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기독교의 독특성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라고 하는 ‘성육신’ 이냐, 사실 알고 보면 여러 종교에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죠. 또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 났다는 부활이냐, 사실 그런 것도 있습니다. 한창 회의를 하고 있는데 C. S. Lewis라고 하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가 방을 찾다가 그만 잘못 들어 왔어요. 유명한 사람이고 널리 알려진 사람이니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기독교의 독특성이 뭘까요?’ 느닷없이 질문을 했어요. 그랬는데 그가 ‘그거야 쉽지 않습니까? 은혜죠.’하고 한마디 툭 던지고 갔어요. 학자들이 더 논의한 결과, ‘그렇다’.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결정적 차이점은 은혜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다 준비해 놓으시고, 값을 다 치르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그런데 우리에겐 은혜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 있어요. 세상은 그렇게 돼있지 않거든요. 자기가 수고하고 땀 흘린 대로 벌어 먹고 살아야 되거든요. 게으른 자는 설 자리가 없거든요. 은혜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요. 다른 종교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신을 발견하려면 구원을 얻으려면 도를 닦고 계율을 지키고 더 나아가서 고행을 하고 그 수준을 높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들의 꽃을 보라.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기르신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도 심지어는 악인에게까지도 새날을 주시고 햇빛을 주시지 않느냐’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절대적 은혜. 첫째는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모시고 산다고 하는 것, 그것이 은혜의 시작이에요. 우리가 생명을 받아 태어났습니다만 이거 참 오묘한 일이에요. 우리 뇌는 180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세포와 세포 사이에 무려 100조개의 연결고리가 있대요. ‘시놉시스’ 라고. 서로 연결망이 있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의 단순 암기력은 침팬지보다 떨어진대요. 그거 아셔야 돼요. 원숭이 무시하면 안돼요. 우리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요. 그런데 이 뇌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발달 부위가 다 다르대요, 필요에 따라서. 후진국 사람들은 그저 단순히 기억해 가지고 노동하는 쪽으로 뇌가 발달한다는 거예요.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남이 잘한 것을 이해해 가지고 그걸 본받아 가려고 이해력이 발달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선진국 사람들은 창조적인 사고력이 발달한다는 거예요. 미국에 유학간 한국 학생들이 똑똑하긴 똑똑하죠. 그런데 외워 가지고 답을 쓰는 거예요. 논술도 다 외워 가지고 쓰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 당황해 가지고 그 문제에 제대로 대처를 못합니다. 아직 개발도상국 수준이죠.
신앙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먹여주고 손에 쥐어 주는 것만 가지고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보여 주셨듯이 눈을 열고 마음을 열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생명을 보는 거예요. 생명의 신비. 로마서 11장33~36절은 사도 바울의 신학적 결론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만물이 주에게서 나서 주로 말미암아 움직이며 주께로 돌아 가니라.’ 이게 바로 만물의 주인 되시고 생명의 주인 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 절대적 은혜에요.
두 번째는 그런 하나님이 계심에도 그를 알지 못하기에 어둠 가운데 살고 있다는 거예요. 길을 잃었어요. 인생의 길을 잃었다. 이게 바로 죄인이에요. 어떤 사람은 죄인이라고 그러면 ‘내가 왜 죄인이냐, 내가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는데.’ 무식한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도덕적인 죄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인생의 길을 잃어 버린 거예요. 그거 아세요. 길을 잃어 헤매는 사람이 더 열심히 길을 찾아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러나 길을 아는 사람은 여유 있게 가요. 산도 구경하고 건물도 구경하고 그렇게 가는 거잖아요. 길을 아니까. 모르는 사람은 더 애를 쓰지만 그 마음에 말 할 수 없는 불안이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자기 자녀 삼으셨다. 이것이 은혜예요. 한국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광고판을 많이 보잖아요. 그 광고판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요. ‘Jesus loves you, 고려은단’ 사장님이 소망교회 장로님이거든요. 참 멋있는 분이에요. 몇 년 전에 한국에서 비타민 C 열풍이 일었잖아요. 그래가지고 고려은단이 확 일어 났잖아요. 그 교수에게 돈을 줘서 그렇게 말하라고 한 것도 아니에요. 아는 사람도 아니래요. 하나님이 그렇게 복을 주시는 거죠. ‘God loves you’하면 서양 사람들은 성경의 하나님으로 이해해요. 그러나 한국의 종교 배경 속에서 ‘God loves you’하면 어떤 하나님인지 헷갈려요. 정확하게 말하면 ‘Jesus loves you’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기를 보이신 하나님, 절대적인 사랑을 드러낸 하나님.
여러분, 대선이 가까워 오니까 사극들이 쏟아져 나오잖아요. 특별히 요즘 정조에 대한 드라마가 나오잖아요. 정조는 200여 년 전의 인물이죠. 개혁을 이루려고 하다가 죽었습니다. 나이 마흔 여덟에 죽었는데, 그가 과연 어떻게 죽었느냐. 의문의 죽음이라고 나와 있어요. 역사에 보면 정조의 죽음으로 개혁은 무너지고 우리나라는 세도정치 시대를 맞고 그것이 이어 지다가 대원군 시대로 가고 결국은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맞죠. 그래서 정조의 개혁 실패를 굉장히 가슴 아파해요. 미완성 개혁이었죠. 그것을 오늘날 재조명하는 것은 사회를 새롭게 하려는 사회적 열망이 있는 것이죠. 정조의 드라마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드라마도 보세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드라마에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 실패로 끝난 것 같았어요. 그러나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요. 진정한 사랑이 있어요. 그걸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 아주 강하게 이야기 해요. ‘다른 복음을 말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지어다.’ 어떤 복음을 말합니까. 이 상황 속에서의 다른 복음은 불교라든지 다른 종교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두 길이 있어요. 그 잘못된 한 길을 지칭해서 다른 복음이라고 얘기해요. 그게 바로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한 그 놀라운 일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어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역사가 이어져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루어진 상황 속에 내가 오늘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어요. 하나님이 이미 이뤄 놓은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 내가 오늘 살고 있어요. 그렇게 놀라운 은혜 속에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오늘도 은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자기의 노력으로 살려고 해요. 물론 노력이 필요하죠.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그것을 신앙의 기초로 삼는 것, 그게 바로 잘못이에요.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에요.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 비춰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에요. 우리가 허물이 많아요. 한 주간 사는 동안에도 허물이 많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춰 보는 거예요.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돼요. 거울이 나를 깨끗하게 하지는 못해요. 어디가 잘 못 됐는지 가르쳐 줄 뿐이에요. 이제 깨끗하게 하는 것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로만 깨끗해져요. 그게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이에요. 영이신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고 우리 삶에 함께 하시고 말씀을 들을 때 함께 하셔요. 이게 성령의 인도에요. 이 비밀을 놓쳐선 안돼요.
저는 산은 좋아하지만 별로 산을 올라가 본 기억이 없어요. 부끄럽게도 저는 아직 지리산도 못 가 봤어요. 근데 오래 전 어느 날 설악산 대청봉을 야간등반 했어요. 혼자서는 할 수도 없는 일이죠. 어떤 선배 목사님이 나와 함께 가자 해서 밤 9시에 서울역 광장에서 만나가지고 승합차에 타고는 달려 가지고 오색 약수 새벽3시에 도착, 잠깐 휴식, 그 다음에 인절미 봉지를 하나씩 나눠 받고 그를 따라 올라 갑니다. 길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얼마나 정확한지 보름달이 환한 날을 택했어요. 역시 경험이 풍부한 분이에요. 정말 환상이었어요.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여러분, 성령은 칠흑 같은 인생길을 그렇게 인도하셔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한 승리를 이미 보장받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약속이에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걸 알아야 돼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셨어요. 사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있기에 문제가 많습니다. 시끄러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제가 지난 주중에 람풍을 다녀 왔어요. 람풍은 수마트라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메락 가서 배를 타고 건너가야 돼요. 2시간 배를 타야 돼요. 그거 제가 어떻게 왔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수영해서 건넜을까요. 아니요, 조오련이라면 한 번쯤 해 보겠죠. 제 아무리 조오련이라도 두 번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이미 누군가 배를 훌륭하게 잘 만들어 놨어요. 그 배를 이용하세요. 건널 때마다 수영하려고 하지 말고. 교회 안에 구원이 있는 거예요. 교회를 떠나서 홀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떤 신학과 어떤 논리로 얘기할지라도 거짓이에요. 그것은 마치 배를 두고 바다를 헤엄쳐 건너겠다는 사람과 똑 같은 거예요. 하나님은 교회 안에 은혜를 주셔요. 그걸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성도로 부르셨어요. 여기에 부르심이 있어요. 사도 바울이 말해요. ‘내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부르셨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오늘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경북 구미의 어느 목사님 부부예요, 남자분이 이제 마흔 여덟인데 13번째 아이를 낳았더라고요. <인간극장>에서 그 집 얘기를 두 번이나 봤는데요, 감동 그 자체예요. 야, 애들을 저렇게 건강하게 튼튼하게 기른다면 나라도 낳고 싶어요, 물론 동의를 받아야겠지만. 애들이 건강해요. 그런데 여자분이 그러는 거예요. 자기도 둘 낳고 그만 나으려고 했는데, 둘 나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남들이 생각하는 그 정도 생각이었는데 셋을 나으면서부터 너무너무 생명이 신비하고 소중하고 귀중하고 그 생명이 뱃속에 있던지 배 밖에 나와서 자라나든지 너무너무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 바람에 그만 애를 계속 낳았어요. 열 셋을 낳았어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대요. 사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교회에 부어주신 은혜지만 더 좁혀 생각하면 나를 위한 은혜예요. 교회가 건강하려면 우리 각 사람이 건강해야 돼요. ‘헬리 나우웬’ 이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는 개인적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전히 문제는 있어요. 그러나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온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온 천국에 있는 모든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신다. 그게 성경의 고백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문제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거 얘기하지 마세요. 내가 오늘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속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살아가는 것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내가 그렇게 살아가며 기업을 운영하고 가정을 섬길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거예요. 그럴 때 자유로운 거예요. 오늘 말씀에 ‘은혜와 평강이 있을 찌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노래하는 샬롬, 평강이에요. 평강은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로부터 온다.
<골프 다이제스트>에 의하면 아마추어 골퍼들이 내기골프를 많이 한대요. 조사해 보니, 한국은 78%, 일본은 59%, 미국은 42%. 그러니까 한국사람은 열에 여덟 사람은 내기골프를 한다는 거죠. 요것도 적당하게 하면 아주 좋대요. 긴장감이 유지되고 실력이 향상된대요. 이게 좀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는 거에요. 통계에 의하면 타당 2만원이 되면 알까기의 유혹을 느낀대요. LA골프장에서 한국 사람들이 페어웨이에서 강도 만났잖아요. 내기골프 하는 것을 알고 뛰어들어 와서 돈 뺏어가지고 도망갔어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에요.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도 내기골프를 한대요. 그런데 얼마냐, 18홀 다 돌고 1달러. 1달러 이상 넘어가는 건 욕심이죠. 시합에 막 목숨 걸고 남의 돈 따먹으려고 하지 말고 은혜와 평강을 누리면서 오늘은 내가 져주겠노라 하고 마음을 비울 때 샷도 제대로 가고 메달리스트가 되겠죠.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이 절대적인 은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하신 그 놀라운 은총, 오늘도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깨닫게 하시고 내 삶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광명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 연약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하나님 백성 삼으셔서 오늘도 지켜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를 감사합니다.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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