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지붕을 뚫어라[풀리쳐상,요나로 또는 사도바울로 살고있는가]/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11:08

080224 지붕을 뚫어라 ( 2:1-12)

성경본문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파리의 세느 강을 가서 보신 분들 계실 것 입니다. 또 몽마르뜨 언덕에 올라가 보신 분도 계실 것 입니다. 저는 거기 가서 뭘 느꼈냐하면 원 세상에. 그렇게 크지도 않아요. 좀 심하게 얘기하면 도랑 같아요. 좀 큰 도랑. 몽마르뜨 언덕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얕으막한 언덕일 뿐이에요. 평범함을 새롭게 하는 것은 해석이다. 우리는 그 세느강과 몽마르뜨 언덕에 얽힌 수많은 연인들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하여 책을 통하여 다 들었거든요. 그렇게 보기를 원했거든요. 생각이 중요해요. 그 생각을 꽃 피워내는 예술과 문화가 중요해요. 다행이 우리나라도 이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예요. 겨울연가 벌써 일본에서 구름떼 같이 몰려 오잖아요. 남이섬을 그렇게 막 훌고 다니면서 사진 찍고 하잖아요. 남이섬은 괜찮아요. 더 재미있는 것은 춘천의 어느 고등학교 담벼락에 올라가서 사진 찍는 다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담벼락에 그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거기는 관광 명소가 된거죠.

200년 말 뉴스위크 에서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관한 기사를 실으면서 제목을 Welcome to Normal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다. 과도한 진보적 이상주의에서 꿈을 깨고 중도적인 실용주의로 돌아왔다. 이제 한국 사람들이 평범함으로 돌아왔다. 이제 정상으로 왔대요.

칼럼리스트 정진홍국민성공시대 리더쉽이라고 하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대통령과 새로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 밥을 배불리 먹여라. 두 번째 돈이 돌게 하라. 부자들의 돈을 강제로 빼앗으려고 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즐겁게 지갑을 열어서 소비하게 하라. 그래서 그 돈이 온 국민들에게 돌고 돌게 하라. 세 번째는 국민들에게 일을 하게 만들어라. 일자리를 창출하라. 여기까지는 기본이에요. 네 번째는 그들로 꿈을 꾸게 하라. 말단 샐러리맨이 대통령이 되는 그런 새로운 꿈을 당신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가지게 하고 젊은이들이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라고 하는 꿈을 가지도록 하라. 마지막 다섯 번째는 혼을 불어 넣어라. , 꿈을 가지고 내 집을 마련하고 성취하는 것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라. 그래서 밥의 리더쉽에서 혼의 리더쉽 그리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신앙도 그렇습니다. 제가 성지순례를 가서 갈릴리에 갔을 때 세느강에 선 느낌이 들더라구요. 작아요. 크지 않아요. 원래 이스라엘이 큰 나라가 아니니까. 그리고 오늘 가버나움이라고 했습니다만 가버나움 회담터에 가서 느낀게 뭐냐 하면 작아도 너무 작다. 예수님이 한 평생 돌아다녔던 삶의 반경은 너무나 작았어요. 가버나움에서 가나로 나사렛으로 해 봐야 그거 다 멀리 있는 동네들이 아니에요. 졸망졸망 그렇게 가까이 멀리 붙어 있는 곳들이에요. 이렇게 작은 곳에서 말씀을 전하셨고 그 말씀을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이적을 체험했고 삶의 길을 발견했구나.

오늘 그 가운데 한가지 이야기입니다. 가버나움에 어느 집에 들어가셨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몰려 들어서 여기 보니 용신할 수 없었다 이 말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까 입추, 송곳 하나 세울 틈이 없었다. 용신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밀려 들었는지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런 말이에요.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침상에 데리고 왔습니다. 안에 들어 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 보니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었다. 물론 이스라엘의 당시 가옥 구조는 우리와는 다르죠. 지붕은 평평한 옥상으로 돼있고 그 지붕을 올라 갈 수 있는 바깥 계단이 있었으니까 얼마든지 올라 갈 수 있고요. 또 지붕에는 나무 석가래를 받쳐놓고 그 사이사이에는 잡목으로 덮어 놓고 흙으로 발라 논 것이니까 뭐, 맘만 먹으면 파헤칠 수 있는 거죠. 뜯어 낼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자세가 다르지 않아요. 사람들이 많으니까 못 들어가겠구나 하고 물러서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비판하기 위해서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안에 들어가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또 많은 무리들은 병을 고쳤다고 하는 그 소문을 듣고 호기심을 가지고 꽉 들어찼어요. 그러나 중풍병자와 저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반드시 오늘 고침을 받겠노라고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왔어요. 자세가 다른 거예요. 그런 생각이 다른 거예요. 오히려 서기관과 많은 무리들은 정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의 길목을 막고 있었어요. 그리고 오늘 지붕을 뜯어내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다같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적 가운데 실린 예수님의 놀라운 계시의 말씀을 듣게 돼요. 죄 사함의 선포를 듣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나는 응답 받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훤히 열려 있는가. 하나님과 나의 수직적 관계는 어떠한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가 서 있는데 엉뚱하게도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오려고 하는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활짝 열어주고 안내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에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을 통해서 만나는 거예요. 예수를 어떻게 믿어요? 유령이신 예수를 믿어요. 아니요, 예수를 잘 믿고 응답 받는 사람을 통하여 나도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제가 몇 주일 전에 우리 부부가 저 리포에 짜장면 집이 하나 있어요. 그래서 거기 가서 짜장면 먹읍시다 몇 번 먹어 봤는데 요리를 시키고 그러니까 정작 짜장면 맛을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오늘은 가서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짜장면만 먹읍시다. 작전 성공했어요. 너무 맛있더라구요. 그러면서 제가 돌아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 식당이 크고 인테리어를 잘 하고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건 역시 기본이 중요하구나. 중국집은 짜장면을 제일 잘 해야 돼요. 기본이 제일 중요해요.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소박한 믿음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 믿음이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깨끗하게 듣는 관계인가. 흔히 창조적인 생각, 창조적인 삶 그러면서 너무나 새것만 얘기해요. 그렇지 않아요. 이미 주어진 그 기분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데서부터 시작해요. 그래서 오늘 주님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그랬어요. 믿음을 보시고.

 얼마 전에 유 튜브라고 하는 동영상 사이트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휴스턴 라디오 FM 방송에서 올린 자그마한 짧은 전화 통화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목을 뭐라고 붙였느냐 하면 Logun 이건 사람 이름이에요. 로건이라는 어린이 Logun, The sky angel cowboy 하늘천사 카우보이 로건. 왜그러냐.  이 아이는 아마 미국의 소를 기르는 목장에서 자라는 12살난 소년이에요. 이 소년이 어느 날 아침에 방송국에 전화한 거예요. 이게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이 방송국에서 웹사이트에 올린 거죠. 마이크 아저씨, 나 뭐 좀 얘기해도 돼요. 그랬더니 방송 진행자 마이크가 그래, 얘기 해봐. 지금 하나님이 저한테 얘기하셨는데요, 그걸 얘기하려고요. 그래, 한 번 얘기해봐. 어제 밤에 우리 집에 송아지가 태어났어요. 그런데 너무 늙은 어미 소가 낳은 송아지에요. 그래서 태어나긴 했지만 우유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만 보니 등이 부러졌어요. 그래서 낳자마자 얼마 있지 않아서 죽었어요. 그래서 지금 아침에 나가서 그걸 땅에 묻었어요. 그걸 묻으면서 하나님께 물어 봤어요. 울면서 물어 봤어요. 하나님, 나 하나님께 물어 볼 게 있어요. 도대체 왜 이렇게 하셨어요. 왜 이 송아지가 죽었어요. She was special. 그 송아지는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송아지였는데. 그때 하나님이 나한테 말씀하셨어요. My son was special. 그래, 내 아들도 그렇게 소중했단다. He died for a purpose. 그런데 그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죽었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가 말합니다. 그래요, 똑 같은 거예요. 송아지가 나에게 너무나 소중했듯이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께 소중했어요. 그러면서 울면서 얘기를 해요. 그래서 진행자가 말합니다. 이제 좀 괜찮니? 그랬더니 . 조금 나아졌어요.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이건 너무 중요해요. 만약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든지 사랑하는 동물을 잃는다면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그의 아들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요. 그러기에 그는 우리의 아픔을 언제든지 이해하신다는 것이죠.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세요. 그래, 알았다. 너 정말 멋있구나.그랬더니 아니에요. 나는 바보 같은 짓을 너무 많이 해요. 이러고 전화 통화가 끊어 졌어요.

여러분 뭘 느끼세요. 비록 12살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힘이 없잖아요. 음성으로 말씀하셨든지 그 마음으로 말씀 하셨든지 그가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 시간 하나님의 응답을 듣잖아요. 이게 바로 자유한 영혼이에요. 자유한 영혼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어요. 죄 사함을 받은 영혼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그러잖아요. 아니, 참람하도다. 감히 어떻게 저런 말을.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할까. 예수님이 말합니다. 내가 이 병자에게 그냥 일어나라. 네 침상을 걷어 가지고 가라. 이렇게 말하면 더 쉽지 않겠느냐. 그러나 내가 굳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먼저 말하는 것은 내 이 이적이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내가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너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모든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병든 자는 그 죄값으로 병들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죄 사함 받지 않고는 건강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오늘날 우리하고의 이해는 다르죠. 모든 병이 다 죄의 결과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맑고 깨끗할 때 우리는 마음도 건강하고 더불어 몸도 건강해요. 우리가 몸이 병들어 있다면 그 원인 중에 상당한 부분은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고 그 스트레스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에서 기인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선포하셨어요.

이제 우리 나라가 대통령을 비롯해서 많은 권력들이 많이 분산됐어요. 심지어는 이제 대통령을 향해서도 막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나중에는 대통령도 자기도 막 헌법 소원을 제기하잖아요. 그래서 최종적인 판단의 결론은 헌법 재판소에서 냅니다. 헌법 재판소에서 마지막으로 그것을 심의해 가지고 결론을 내리면 거기에 다 수긍해요. 우리 죄 사함의 문제는 너와 내가 적당히 타협해서 해결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하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시면 그 사람은 자유한 거예요. 여기에 놀라운 은총과 비밀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선포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지붕을 뚫는다 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과연 나는 닫힌 사람인가, 열린 사람인가. 또 우리 교회는 우리끼리 꽉 들어 가지고 다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막고 있는가. 아니면 저들을 향해서도 문을 활짝 열고 있는가. 닫힌 교회인가, 열린 교회인가. 이 세상은 풍랑 만난 배와 같죠.

플리쳐 상이 있습니다. 플리쳐 상은 1917년 언론인 플리쳐의 유산을 기금으로 해서 언론 보도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을 시상하는 것이죠. 특별히 우리는 기자들의 보도 사진 수상으로 플리쳐 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올해의 사진해서 매년 한 장씩 그 사진을 선정합니다. 1950년에는 6.25전쟁으로 대동강 철교가 파괴됐어요. 그 대동강 철교를 개미떼 같이 이삿짐을 둘러매고 살겠다고 탈출하는 북한 주민들의 그 모습이 1950년 올해의 사진이였어요. 1994년도에는 아프리카 수단에 굶주린 소녀라는 제목의 사진이였는데 아프리카의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서 자그마한 새카만 흑인 소녀가 기운이 다 빠졌어요. 걷지도 못해요. 웅크리고 있어요. 곧 죽을 것 같아요. 주위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바로 그 등 뒤에 독수리 한 마리가 그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 곧 죽을 거예요. 죽으면 잡아 먹을 거예요. 그걸 찍었어요. 그것이 94년에 수상작이 되었습니다마는 그 작가는 거센 비난을 받게 됩니다. 왜 소녀를 빨리 구하지 않았느냐. 물론 그 사진을 찍고 나서 곧바로 그 소녀를 바로 구했습니다마는 작품을 위해서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라는 비난을 받았기에 그는 상을 수상한지 석 달 만에 스스로 자살합니다. 그런데 그 플리쳐 상 매년 올해의 사진들을 보니까 두 가지로 나뉘어요. 하나는 전쟁 사진이고 하나는 온갖 기근을 비롯한 재난의 사진이에요. 이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에요. 지구가 생산하는 모든 식품을 공평하게 나눈다면 굶어 죽을 사람이 없데요. 그러나 부가 편중되어서 오늘도 수 십만이 죽어가고 있는 거죠. 풍랑 만난 배와 같아요.

저와 여러분은 오늘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성경은 풍랑 만난 배를 탄 두 사람을 얘기합니다. 당신은 요나입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 입니까.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났어요. 알고 보면 요나 때문에 풍랑을 만났어요. 그러나 정작 풍랑을 만났을 때 요나는 배 밑 창에 들어가서 자고 있었어요. 다급한 선장이 사람들을 동요하다가 배 밑 바닥에 내려가서 자고 있는 요나를 흔들면서 말합니다. 어찌하여 자고 있느냐. 과연 우리 교회는 깨어 있습니까. 그리고 요나를 배 밖으로 내던진 다음에 풍랑이 그쳤어요. 자칫 잘못하면 사회에서 내던짐을 당하는 그런 교회가 될 수도 있어요. 닫힌 교회일 때.

그러나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배를 타고 갈 때 풍랑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를 향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사도 바울을 죄수가 되어서 그 배에 실어서 로마로 보냅니다. 그 배가 풍랑을 만나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응답을 듣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이 배가 풍랑을 만나서 많은 손실을 입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로마로 이끌어 가리라. 그러기 때문에 너와 함께한 모든 사람의 생명도 내가 지켜주리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세상에 소망과 위로를 전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지붕을 깨는 사람이에요. 생각을 여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받아드리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으로 오늘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풍랑 만난 배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요나로 살고 있는지 사도 바울로 살고 있는지 우리를 돌아보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하게 하시고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날마다 들을 수 있는 그런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가족과 남편과 자녀와 이웃들에게 하늘로 향한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보이는 우리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성령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