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우리의 피난처[성공은99%실패끝에얻는1%의결과,고난이축복의통로]/장영수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10:54

080309 우리의 피난처 ( 46:1-11)

성경본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즈음에 방영되었던 반짝반짝 작은 별이라고 하는 휴먼 다큐멘타리입니다. 30대 젊은 엄마가 폐암으로 죽었습니다. 여기에 좌절한 남편이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러다가 설상가상 교통사고를 당해서 왼팔, 왼다리를 잃었습니다. 불구가 됐어요. 몇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병원에 있어야 합니다. , 그러자 어린 남매가 있습니다. 이제 5년이 지나 5학년짜리 열두 살 아들과 그 아래 2학년짜리 딸아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육십대 할머니가 버거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요즘 육십대가 할머니입니까. 그러나 이 분은 너무 고생을 해서 칠십도 훨씬 넘어 보여요. 벌어 먹을 수단이 없어서 폐지를 하루 온 종일 돌아 다니면서 수집합니다. 리어카 하나 채워야 만 3천원이에요. 기가 막힌 거죠. 이를 생각하면 탄식뿐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자그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 어린 남매가 꿋꿋하게 살아 가는 거죠. 학교도 얼마나 먼지 아침 일찍 버스를 타야 돼요. 그거 놓치면 70분을 기다려야 돼요. 그 먼 학교를 갔다가 돌아오면 저녁에 어김없이 할머니와 같이 추운 겨울 바람을 아랑곳 않고 옷 챙겨 입고 폐지 주우러 나갑니다. 매일 밤 할머니가 몸이 불편해서 혼자 할 수 없기에 손주가 앞에서 끌고 손녀 딸이 밀면서 신호등도 없는 횡단보도를 3개나 건너서 대형 마켓에 가서 빈 상자들을 모아 옵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몸이 아파서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어요. 진단을 받아보니 백내장이에요. 그냥 집에 누웠습니다. 그러자 남매 둘이서 추운 날씨에도 나갑니다. 왜 나가냐고 물어보니까 하루라도 가서 벌어야 나중에 급할 때 돈을 쓸 수가 있어요. 엄마의 빈 자리가 얼마나 큰지 몰라요. 엄마 아빠가 비니까 세대가 끊어지고 무너지는 거예요. 고통이 가중되는 거예요. 그 남자아이의 소원을 물어보니 이렇게 말합니다. 소원이 있어요. 제우스 신에게 기도했어요. 첫째는 부자가 돼서 넓은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두 번째는 아빠가 술 끊고 건강해 졌으면 좋겠어요. 세 번째 이게 제일 중요한데요. 내가 무엇을 빌던지 다 들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우스 신에게 기도한다 그랬어요. 왜 그랬을까요. 책을 읽다가 제우스 신화를 읽은 거죠. 누군가 하나님을 일러주고 가르쳐 주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거죠.

사도 바울이 아데네에 선교하러 갔을 때에 아데네를 둘러보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치는 제단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는 말씀이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캠브리지 대학에 데이빗 포드 교수가 자기가 아는 가까운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20년 동안 많은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들었는데 그들에게 가장 많은 문제가 무엇인가. 신부가 답합니다. 하나님 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이해, 사랑과 용서와 온유함과 따뜻함으로 나를 맞아주시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하는 것이죠. 은행 지점장 같은 하나님으로 알고 있더라는 겁니다. 돈을 빌려야 하는 사업하는 분들에게 있어서 은행 지점장은 자기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돈을 빌려야 되잖아요. 너무 신용이 없는 것 같이 보이면 돈을 안 빌려 줄 것이고. 그렇죠. 얼마나 긴장 속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마음을 열고 부담 없이 나아갈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없죠. 그러나 놀랍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은행 지점장 같은 하나님 이해를 가지고 있다 하는 거죠.

여러분,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배 중에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 홀로 조용히 기도할 때 내 마음속에 어떤 하나님이 그려지느냐 하는 것이에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혁명적으로 달랐다는 거예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마가복음 14 3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여기 아바라는 단어는 예수님 당시에 쓰이던 아람어에요. 그게 원래 아빠거든요. 아버지가 높이는 말이라면 아빠는 어린 아이들이 쓰는, 벽이 없이 다가가는 완전한 신뢰 가운데 나오는 말이잖아요. 아빠 그건 우리 말하고 똑같아요. 당시에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학자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에요. 어떻게 저 높은 하늘 보좌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께 인간이 감히 아빠라는 말을 쓰느냐.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신 거예요. 

시집간 딸이 친정에 돌아와 가지고 아버지를 만났을 때 어떤 집은 거침없이 아빠라고 부르잖아요. 그게 버릇없는 것이 아니고 그 집의 분위기가 그러한 거죠. 얼마나 부녀지간에 사랑이 넘쳐 흐릅니까. 바로 그러한 이해,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자녀의 특권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라고 거듭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사진 중에 아주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아주 어린 아들이 걸터앉아서 아빠를 쳐다보는 모습이에요. 아니, 어느 장관이 거기 걸터앉아서 대통령을 대하겠어요. 그건 아들만 가능한 거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분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런 아빠, 아버지를 고백할 수 있느냐. 오늘 본문에 시인은 예루살렘 성을 찬양합니다. 여기 보면 고라 자손이라고 했으니까 다윗 시대, 솔로몬 시대에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한 사람들이에요. 이게 아주 웅장한 찬양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다 라고 하는 찬양이에요. 여기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원래 히브리어로 이르 샬라임 이에요.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에요. 그러나 예루살렘은 결코 평화의 도시가 되지 못했어요. 지정학적으로 세계 대륙의 교차로 한복판에 있었어요. 전쟁이 끝이 없었어요. 다윗이 그 성을 차지한 다음에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 옵니다. 장막을 준비해서 거기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요. 그러면서 새롭게 해석합니다. 이제 이 예루살렘 성은 그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성에서 살겠노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결코 이 성은 요동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 신앙으로 고백해요. 장막의 성소 그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의 축복을 아세요. 저는 어린 시절에 교회 마당에서 뛰어 놀다가 종소리 들으면 뛰어 올라가서 예배 드리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고 했던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어요. 세월이 흘러서 요즘 세대에는 아이들을 적게 낳기도 했지만 부모들이 똑똑해져서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아요. 어린 시절에 그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가장 큰 실책이에요. 여러분이 그 아이들의 생명을 다 책임지지 못해요. 그들의 인생을 다 책임지지 못해요. 교회 앞 뜰에서 뛰어 놀다가 그들이 가지게 되는 마음의 고향 같은 교회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모르게 듣고 배우고 먹고 마시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줘야 돼요. 뒤늦게 교회로 돌아 오시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어린 시절에는 교회를 다녔었는데 머리가 굵어지고 똑똑해 지면서 교회를 떠난 분들이 많이 있어요. 왜 그렇게 떠났을까. 교회의 비밀을 알지 못했기에 떠난 거예요.

여기 다윗의 장막이 있습니다. 그 아들 솔로몬 대에 가면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을 짓습니다. 그 가운데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어요.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외관은 너무 달라요. 두 가지 교회 모형이 있는 거에요. 흔히 화려한 교회가 있어요. 자랑이 되고 만족을 주는 교회가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교회의 비밀은 외관에 있지 않아요. 많은 사람의 수에 있지도 않아요. 조직과 행정에 있지도 않아요. 교회 한 복판에 있는 그 법궤에 있어요. 솔로몬의 성전은 화려하고 요란한 제사 의식 속에서 법궤의 생명을 놓쳤어요. 다윗은 그의 삶을 통해서 생명 되신 하나님을 만났고 고백하고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법궤를 장막에 모셔들이려 했던 거예요. 다윗은 왕이었지만 많은 실패를 겪었던 사람이에요.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내 인생을 그 누구도 지킬 수 없다.

흔히 성공이란 99%의 실패 끝에 얻는 1%의 결과이다 그렇게 말해요. 사실 알고 보면 부단한 시행착오 끝에 조금씩 조금씩 얻는 결과의 축적물이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왜 실패합니까.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을 때 실패해요. 제대로 공부 안 했으니까 실패하는 거예요. 두 번째는 욕심이 지나쳐서 실패해요. 세 번째는 성공했을 때 자만하다가 큰 실패를 만나게 돼요. 그리고 네 번째는 회사는 이루고 많은 것은 이루었습니다만 소중한 인간관계를 다 잃어버려요. 많은 사람들이 돈을 얻고 사람을 잃어요. 기업을 얻고 가정을 잃어요. 실패해요.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없어요. 알고 보면 우리는 성공하기 보다는 부단히 실패하는 거예요.

그러나 다윗은 이거보다 한발 더 들어 갑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모습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가정은 이루었어요. 집은 꾸몄어요. 그러나 그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의 능력이 없어요. 사랑의 지혜도 없어요. 그러기에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온전한 사랑이 없는 것이죠.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장막에 모셔 놓고 그 인생 말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다윗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나는 누구입니까. 내 인생을 돌아 보면 수많은 전쟁과 환난 속에 순간 순간 목숨을 잃을 뻔한 때가 많았건만 많은 사람은 죽었어도 하나님이 오늘까지 나는 지켜 주셨는데, 나는 누구입니까. 왜 나의 집에 이런 복을 주십니까. 그건 알 길 없어요. 내가 행한 대로 주신 게 아니에요. 참으로 하늘 문을 열고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셨어요. 그래서 이제 이렇게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물질적인 복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내 마음과 삶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끝까지 나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토마스 머튼 이라고 하는 영성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심각한 영적 질병은 능률이다. 능률 또는 성공이겠죠. 세속적 욕망을 무한 추구하는 것이 시대 정신이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정말 그것을 내가 원하는 것이냐. 학자들의 지적에 의하면 그게 아니에요. 남의 욕망을 내가 얻으려고 부질없이 내 삶을 거기다가 투자하고 있는 거예요.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을 몰라요.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깨워주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거예요. 고난이 축복의 통로에요.

여러분 그 유행가 기억하세요.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대답은 여러분이 해 보시죠.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사람을 사랑해도 그래요. 물질을 사랑해도 그렇구요. 그 어떤 세속적인 모든 것 사랑해보면 결국 그건 다 눈물로 돌아와요. 그러나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깨어질 때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하여 작업하기 시작하죠.

오늘 말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가만히 있어 라틴어로 바카테 그래요. 원래 이 단어는 Vacation 휴가라는 단어잖아요. 쉬라는 말이에요. 내려 놓으란 말이에요. 네가 하나님 노릇하는 그 모든 것을 내려 놓으라. 그때 내가 네 하나님이 되어 네 삶을 인도하겠다.

여러분 이런 유머가 있어요. 지렁이를 밟으면 왜 꿈틀할까요. 그건 아주 콱 밟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래요. 그러니까 어지간히 밟히면 앓는 소리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할 땐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세요. , 아직 우리가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에. 뭐 그렇게 할 말이 많다고. 언제 하나님이 응답하시느냐. 그냥 콱 밟혀서 숨도 못 쉬고 캑 하고 죽을 때, 완전히 손을 들 때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사실은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시건만 내 안에 할말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해요.

제가 예전에 목회할 때 한 번 콱 밟힌 경험이 있거든요. 아이고, 이젠 죽었구나. 이거 뭐 몸부림치는 것도 한 두시간이지. 그렇죠. 우리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해야 돼요? 밟히면 얼른 죽는게 제일 나아요. 그래야 하나님 음성을 빨리 들어요. 내 원망이 막 나옵니다. 불평이 나옵니다. 그러나 의문도 사치에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흔들리지 말고 초점을 맞추라는 말이죠. 제가 예전에 고교 교사로 있을 때 학생들을 데리고 경주에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도중에 안경이 깨졌어요. 안경을 벗으니까 잘 안 보이는 거예요. 얼마나 불편한지 모르겠어요.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세상에 온전히 보이는 것이 없어요. 내 삶을 분명히 하나님과 눈을 맞출 수 있을 만큼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남난희라는 분이 있어요. 지금은 50대 초반이 되었습니다만 이분은 27살에 우리나라 백두대간을 겨울에 혼자서 두달 반 종주했대요. 우리나라 여자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에도 올랐대요.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 산만 보면 불같이 오르고 싶은 뜨거움을 스스로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고백해요. 그러다가 뒤늦은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 남자는 홀연히 떠나가요. 아이와 함께 소박하게 지리산 산자락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50이 넘었어요. 이제는 아들이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고 희망이 되고 그리움이 되고 그렇게 살아가요.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 되자 대안학교를 보냈어요. 둘이 살다가 아이를 보내니까 얼마나 서글픈지 그 남자 같은 분이 아들을 보내고 펑펑 울었다는 거예요. 방학을 맞아 돌아온 사춘기 아들하고 한달 동안 아주 아기자기하게 오붓하게 삽니다. 지난 시절 얘기를 나눕니다. 얘기를 하다가 장난을 해요. 우심뽀까 그러는데 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우심뽀까 그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그런 말이더라구요. 다시 아들을 떠나 보내고 지리산에 올라갑니다. 저녁 노을을 보면서 너무 행복해 해요. 그러면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산 속으로 들어서면 산을 볼 수 없다. 그 동안 산에 오르기는 했으나 산을 볼 줄 몰랐다. 산 아래서 생활하다 보니 이제야 산이 보인다. 그 동안 산이 목마름의 열망 덩어리였다면 이제야 비로소 편안한 산을 만난 것이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니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 그랬어요. 저는 참 행운아예요. 이렇게 해외 나와서 자유롭게 목회하는게 참 감사해요. 한국 목사님들 사실 과로에요. 어느 분이 그러더라구요. 새벽 기도만 없으면 해볼만 한데,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죽겠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충분히 이해가 돼요. 저는 새벽에 나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그 새벽시간을 여유 있게 지킬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면서 목회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다 협력해 주셔서 감사해요.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마음을 활짝 열고 나의 허물을 솔직하게 내려놓고 하나님 나는 누구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연약하고 거짓된 나를 오늘까지 사랑으로 이끌어 주십니까. 이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너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리라. 이게 믿는 자의 축복이에요.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미친듯이 성공을 위하여 몸부림치며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요, 시대 정신이 되어버린 이 삶의 한 복판 속에서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또 성공했다 하지만 알맹이는 텅 비어있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습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부르시고 네 마음 한 복판에 성소를 만들라고 말씀하시고  기도할 때 우리의 아픔을 헤아리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그 놀라운 은총을 십자가를 통하여 보이시고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너의 피난처가 되리라 약속해 주셨사오니 이 은혜, 이 감동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