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LOVE와 LIKE의 차이,How to be happy]/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11:25

080210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 8:1-9)

성경본문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얼마 전에 이메일을 하나 받았는데, 전달이 5개가 붙어 있더라고요. 아마도 그 내용이 너무 좋아 나누고 싶어서 또 전하고 그 사람이 읽고 또 전달한 거죠. LOVE LIKE의 차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즐거워집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겨울도 봄 같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겨울은 겨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눈빛을 보면 얼굴이 붉어지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웃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 기억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가끔 기억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다 주고 싶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것만 해주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 해주면 샘이 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 해주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은 빤히 볼 수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울고 있으면 같이 울게 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울고 있으면 위로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슬플 때 생각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고독할 때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은 길어도 짧게 느껴지지만 좋아하는 사람과의 시간은 길면 넉넉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의 시작은 눈에서 시작되고 좋아하는 마음은 귀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좋아하다 싫어지면 귀를 막으면 그만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눈꺼풀을 덮어도 포도송이 같은 구슬로 맺히는 눈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랑합니까, 좋아합니까. 아니면 싫어합니까, 미워합니까.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행복이란 기뻐하는 마음, 희열에 넘치고 사랑하고자 하는 감정, 그게 행복이에요. 그래서 똑똑한 것도 중요하지만 감성지수가 높아야 행복해요. 여러분 그 말 있잖아요. 열심히 일하는 것은 지혜롭게 일하는 것만 못하고 지혜롭게 일하는 것은 즐겁게 일하는 것만 못하다. 열심히, 의지입니다. 지혜롭게 일하는 것, 이성입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즐겁게 일하는 것, 감성이에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은 두 갈래 길로 가요. 하나는 고집스러워집니다.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제대로 간다면 갈수록 얼굴이 밝아지고 포용력이 있고 넉넉해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는 사람이어야 하는 거죠.

이번 설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 동안에 쌓인 피로도 있고 해서 집에서 혼자 쉬겠다, 그렇게 하실 수 있죠. 그러나 설은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더불어 함께 나누라고 정한 거예요. 그러니 혼자 지낸 분들은 교만한 사람들이에요. 그때는 좋은 음식을 나누며 오며 가며 지내라는 거예요. 만약 애인과 함께 설을 보낸다면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보낼 수 있겠어요.

좀 오래된 조사입니다만 2004년 한국 사회를 조사한 내용 중에 이런 항목도 있었어요. 친구와 이웃을 조사했어요. 여기서 친구라고 하는 것은 동창, 동호인, 교회 식구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웃은 자기 집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분류했어요. 한국 남자들은 몇 명의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 평균적으로 12.95, 13명의 친구가 있다는 거죠. 여자들은 평균 10.44명의 친구를 가지고 있어요. 10명 정도의 친구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월 소득 4백만 원 이상인 사람의 친구는 평균 13.65명이에요. 월 백만원 이하의 소득을 가진 사람의 친구는 6.41명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친구 만나면 돈 써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넉넉할수록 친구가 많다는 얘기죠. 그 사람의 활동 범위와 능력에 좌우되는 거죠. 친구는 자기 중심적 선택이에요. 수준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는 거죠. 이건 잘나갈 때 얘기에요. 그럼, 이웃은 뭐냐. 자기 집에 가까이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 한국 분들은 아파트에 많이 사시잖아요. 아파트는 물리적 공간은 가까워도 심리적 공간은 태평양만큼이나 멉니다. 문만 닫아 걸면 남이에요. 언제 그 문을 여느냐, 20대는 이웃이 2.96, 30대는 5.79, 60대는 6.5명이다. 나이 들고 돈 떨어지고 힘 떨어지면 슬슬 문을 열기 시작해요. 그래서 이웃이 돼요. 그러나 여러분 이왕이면 잘 나갈 때 이웃을 만드세요.

제가 노인대학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아요. 노인대학에 남자 분들 한 분도 없어요. 어쩌다가 한 분 두분 오는 데 배겨내질 못해요. 하루 이틀 나오다가 쭈삣쭈삣하다가 물러 가시더라고요. 그래서 남자분들 참 걱정스럽습니다. 노후를 위해서 돈도 준비해야 되지만 친구와 이웃도 만들어 놔야 합니다. 설이란 뭡니까. 우리 삶의 고단함을 털어 버리고 삶의 기쁨을 더하려고 그 먼 길 마다 않고 가족을 찾고 친척을 찾고 친구와 이웃이 함께 하는 거잖아요. 남자분들은 계급장이 붙어있어서 그런가 보죠. 유행하는 말대로 계급장 좀 떼고 살 준비를 하세요. 누구와도 마음을 열고 마음을 낮추고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 그건 어떤 거냐. 똑똑해 가지고는 안돼요. 똑똑한 사람일수록 소외돼요. 노년이 외로워요.  감성이 풍부해야 돼요. 같이 공감할 수 있어야 돼요. 노래할 때 같이 노래하고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는 것, 이건 아주 중요한 삶의 자산이죠.

 유대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설이 있어요. 그게 바로 유월절이에요.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그들을 해방했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어요.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셨어요.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어요. 그들은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게 됐어요. 민족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신앙 공동체가 이루어졌어요. 그 공동체는 하나님 안에서 삶의 자유를 누리는 공동체였어요.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기억하여 지키라고 말씀 하셨어요. 유월절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32백 년 전에 일어난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다 모여서 어린 양을 잡아 양고기를 먹습니다. 그 날밤의 급박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하여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요. 빵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어요. 반죽을 싸서 그냥 둘러매고 탈출을 해야 했어요. 그리고 쓴 나물을 먹어요. 종살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쓴 나물을 먹어요.

우리는 6.25가 지난 지 몇 십 년도 안됐습니다만 다 잊어 버리고, 현충일도 다 잊어 버리고 그저 쉬는 날이 되고 노는 날이 되었어요. 그걸 기억해 보자고 주먹밥을 만들어서 먹이잖아요. 저들은 3천년 역사를 내려오면서 그 절기를 지키는 거예요. 소중한 거죠.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으로 다 모여 듭니다. 우리는 명절에 고향으로 내려가는 데 저들은 절기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 다 모여서 한 주일 동안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게 있어요.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데 유월절에 읽는 성경이 있어요. 그게 뭐냐, 아가서예요. 구약에 나오는 아가서, 아가(雅歌)라는 말은 아름다운 노래, 쉬르 핫쉬림 노래 중에 노래. 

아주 오래 전 양주동 박사가 생전에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친구가 연애을 하기 시작했는데, 친구가 글 솜씨가 약하니까 연애편지 한 장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이 분이 말이죠. 아가서를 뒤져서 거기서 그대의 유방은.. 뭐 이렇게, 아가서는 아주 에로틱 하거든요. 여기 놀라운 비밀이 있어요. 하나님이 종살이 하던 우리를 건져주셨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기억하고 표현하느냐 그걸 기억하기 위해서 아가서를 읽었어요. 물론 그게 8장까지 밖에 없으니까 단숨에 읽을 수 있겠죠. 짧으니까 그렇게 읽겠죠. 그러나 내용에 의미가 있어요. 솔로몬 왕과 낮고 천한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에요. 남자와 여자의 이중창과 그를 둘러싼 시녀와 친구들의 합창이 나와요. 그건 노래예요. 그 표현이 연애 편지에 옮겨 쓸 만큼 아주 에로틱해요. 그래서 구약 39권 성경을 하나로 묶을 때에  아가서를 넣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가 중요한 신학적 논쟁이 될 만큼, 그러나 끝내는 하나님이 넣으셨어요. 무슨 의미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구체화 시키느냐 하면 남자와 여자의 사랑으로 남편과 아내의 사랑으로 표현했어요.

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냐, 자기 아내가 에로틱하게 보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게 제일 중요해요. 아내를 대할 때 가슴이 떨리는 사람, 물론 무서워서 떨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떨리는 사람. 부부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만은 아니에요. 정신적인 사랑만이 아니에요. 몸과 함께 어우러지는 사랑이에요. 성경은 그걸 아주 소중하게 여겨요. 그것을 다 묶어서 노래하는, 아주 풍부한 감성이 넘쳐나는 거예요. 얼마나 멋있어요. 아가서 첫 대목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면 이래요. 나에게 입맞춰 주세요. 숨막힐 듯한 임의 입술로. 임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합니다. 한 번 읽을 만 하겠죠.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오늘 본문은 다윗의 노래예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다윗이 시인이었어요. 보세요.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비쩍 마른 사람이 아니에요. 마음이 메말라 붙은 사람이 아니에요. 눈에 걸리는 것마다 귀에 들리는 것마다 다 화답하고 응답하고 생각이 열리는 그런 사람이에요. 창조세계를 노래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해요. 하나님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찬송을 기쁘게 받으셨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호산나 예루살렘 입성하시고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예수님을 본 어린아이들이 막 몰려와서 호산나, 호산나 어른들이 부르던 노래를 막 흉내 내어 부릅니다. 그랬더니 성전에 있는 제사장, 서기관들이 시끄럽다. , 여기서 떠드는거야. 그러면서 예수님께 말하죠. 저게 보이지 않습니까, 왜 성전을 소란스럽게 합니까. 라고 얘기했을 때 예수님이 그들의 거짓을 보시면서 너희는 성경도 읽어 보지 못했느냐,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찬송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씀도 들어 보지 못했느냐. 여러분, 신앙에 이성이 중요해요. 그러나 감성과 함께 어우러져야 해요.

또 창조를 얘기하면서 그 한 복판에선 사람을 노래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기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라고 했지만 원래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엘로힘 이거든요, 하나님이란 뜻이에요. 어찌 사람이 하나님과 견주겠어요. 그럴 순 없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물가운데 택하셔서 하나님의 권세를 안겨 주셨어요.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어요.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존재, 또 이웃과 관계를 갖는 존재 그리고 만물과 관계를 갖는 존재,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우리를 해방시키셨어요. 죄로부터의 해방, 죄를 짓는 자마다 모두 죄의 종이라고 했는데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해결하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게 하셨어요.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고 종래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는데 마지막 아담이셨던 그리스도는 그 관계를 회복하셨어요. 그래, 이런 말씀을 하셨죠.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하나님이 나를 즐거워 하신다. 그래서 누가복음 10 21절에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이렇게 표현해요.

여러분, 우리가 잘 알듯이 1620 ,필 그림 파더스 청교도들이 미국땅으로 건너가잖아요. 그들이 영국에서는 자기들의 신앙을 자유롭게 누릴 수 없었어요. 카톨릭이나 영국 국교도에 의해서 많은 핍박을 받았어요. 그래서 미지의 땅 신대륙, 아직은 죽음의 땅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건너가겠다. 그곳에 건너가요. 청교도들이 개척했어요. 그런데 미국의 초기 역사를 읽어보면 아이러니가 있어요. 이들이 그토록 간절히 청교도적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땅에 건너가서 도시를 건설하면서 규정을 만들었어요. 하나님을 예쁘게 믿지 않는 사람은 우리 시민이 될 수 없다. 시민권을 주지 않았어요.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을 박해했어요. 쫓아 냈어요. 율법에 빠졌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청교도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말했어요. 청교도란 무엇이냐,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행복하게 지낼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경건을 너무 강조하다가 메마른 사람들이 되어버렸어요.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신앙, 다윗이 노래하고 있는 신앙은 어떤 신앙이에요.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됐어요. 성령으로 기뻐하는 거예요.

 또 자연과의 관계도 회복됐어요.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합니까. 땅이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게 할 것이다. 네가 땀을 뻘뻘 흘려야 겨우 먹고 살 것이며 흙으로 지어진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연과의 관계가 깨어진 존재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을 때 예수님이 보여주셔요.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들의 꽃을 보라.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된 거죠. 그 유명한 성 프란시스코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Brother Sun, Sister Moon 온 자연만물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형제요, 자매니라. 이게 건강한 신앙이에요.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죠.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그토록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하와를 향해서 책임을 전가하죠. 그리고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해서 무화과 마른 잎으로 가렸다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깨어진 인간과의 관계를 다 회복한 거죠.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이나 많은 사람들은 금기가 많았어요.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금하는 내용이 너무나 많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오히려 다가가서 저들을 만지셨어요. 저들과 함께 하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부정한 것에 손대면 나도 부정해진다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내가 가서 손을 내어밀 때 저들이 거룩해지고 온전해지고 회복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삽니까. 상대를 피해야 할 모든 대상으로 상대를 바라봅니까, 아니면 내가 저와 함께 교제하면서 연약한 저를 붙들어 주고 세워주고 강건케 합니까. 신앙의 생각과 태도가 다른 거죠.

<How to be happy>라는 책이 있어요. 어떡하면 행복할까. 거기 보면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가 세가지 있는데 첫째는 유전적인 요인이 있구요. 두 번째는 환경, 그리고 세 번째는 의도적인 활동이에요. 유전적인 요인이 50%에요. 저는 행복하게도 먹어도 살이 안 찌더라고요. 그러니 저는 살찔 것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어떤 분은 물만 마셔도 살찌고 공기만 마셔도 살찐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어쩔 수 없어요. 그건 타고난 거니까. 유전적 요인이 50%에요. 환경, 돈이 많으면 없는 것보다 좋죠. 집이 넓으면 좁은 것보다 좋죠. 그러나 그거는 10%에요. 금방 우리는 익숙해져요. 지루해져요. 더 이상 변화를 느끼지 못해요. 우리의 의도적인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40%에요. , 이 부분은 우리가 노력함으로써 고칠 수 있어요. 새롭게 할 수 있어요. 행복도 연습이 가능하다. 또 연습해야 된다. 행복을 지속하는 비결을 여기서 말합니다.

긍정적인 감정을 소중히 다뤄라. 여러분, 운동하세요. 운동하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활기가 넘치죠. 그러면 창의력이 일어나요. 걸으면서 생각을 하면 건강한 생각, 밝은 생각,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올라요. 사실은 저도 설교를 준비해 놓고는 종종 뒷뜰에 나가 걷습니다. 걷다 보면 좋은 생각들이 많이 떠올라요. 그러면 얼른 끝내고 가서 메모를 하고 정리를 해요. 답답하면 얼른 옷을 갈아 입고는 걷는 거예요. 긍정적인 감정을 소중하게 불씨같이 다루고 키우라는 거죠. 그러면 만족함이 있습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넉넉하게 용서할 수 있어요.

또 타이밍과 변화가 중요합니다. 정통 유대교인들은 여자들이 생리가 있는 전후 칠일간은 부부라도 서로 손도 대지 않는대요. 뭐예요.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부싸움을 왜 합니까. 긴장감이 무너져서 싸우는 거죠. 다른 여자보고 왜 가슴이 뜁니까. 긴장감이 있어서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그런 긴장감을 만들어서 지루한 일상을 탈피하는 지혜를 가지라는 거죠.

동기 부여가 중요해요. 제가 며칠 전 설날에 어느 선교사님 집에 가서 교제를 나눴는데 그날 아주 도전 받은게 있어요. 거실에 보니 그림이 있는데 그 가족들이 거기 다 들어가 있어요. 그 그림의 제목이 뭐냐 하면 20년 후 우리 가족이에요. 아이들이 중학생, 초등학생인 그 아이들의 꿈을 그 안에 다 담았어요. 의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겠다는 그 꿈을 담아 가지고 20년 후의 모습을 그려놨어요. 저는 굉장히 도전 받았어요. 저렇게 비전을 그림으로 그려가지고 늘 내 앞에다가 걸어놓을 때 삶이 달라지죠. 말이 달라지죠. 생각이 달라지죠.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변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습관이 중요해요. 행복도 습관이에요.  

오늘 다윗이 너무나 아름다운 만물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찬양했어요. 보통 은혜 받으면 찬양하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찬양해요. 그러면 은혜가 주어져요. 은혜가 올 때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삶으로 바꾸어서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는 거예요. 우리가 불을 끄면 깜깜합니다. 그러나 플러그를 전원에 꽂기만 하면 불이 들어 오듯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앞에 가까이 와 있어요. 우리가 마음을 열고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그것이 우리의 습관이 될 때 오늘 다윗과 같은 이런 행복한 고백이 우리 입술에 실리게 되는 것이죠.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설 명절을 주셔서 삶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모처럼 쉼을 갖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충족될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찬송할 때, 말씀을 들을 때, 조용히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 감성, 의지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날마다 맛보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