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오직 주를 위하여 [카토릭과 기독교의 차이,문화의수수께끼]/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11:59

080113 오직 주를 위하여 ( 14: 1~9)

성경본문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만약에 여러분이 배를 타고 가다가 조난을 당해서 무인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이건 물론 우스개죠. 혈액형에 따라 반응이 다릅니다. A형은 슬픔에 빠져 구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넋 놓고 그냥 앉아있을 수 없기에 식량이 어디 있나 한번 찾아보고 없으면 작살을 만들어서 물고기를 잡습니다. O형은 나 홀로 여기 떨어졌다고 친구들이 없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칩니다. 구조선이 오지 않는다고 절망합니다.  그러다가 혼자 외롭게 굶어 죽습니다. B형은 구조를 기다리지만 구조대가 오든 말든 벌써 적응했습니다. 과일을 따 먹고 고구마를 캐먹고 버팁니다. AB형은 우선 그늘에 앉아 풍경을 감상합니다. 그러다가 A형이 물고기 잡으면 거들어 주고 B형이 과일을 따면 함께 따주고 그리고 얻어먹고 삽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달라요.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하지만 순간순간 상황에 반응이 다른 거죠. 여기다가 한국사람, 미국사람 하는 문화가 겹치면 또 달라지는 거죠.

신앙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거죠. 이게 신앙의 내용이에요. 그러나 그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다 다른 것입니다. 거룩하게 예배 드리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분이 갓을 쓰고 도포를 휘날리며 예배를 드리러 왔다고 한다면 거룩하게 예배 드리려고 하는 그의 마음이 드러나있는 것은 분명합니다마는 적어도 시대에는 안 맞는 거예요. 어색한 거예요. 우리가 같이 예배를 드리는데 불편한 거예요. 이게 문화의 차이죠.

종교개혁, 낡고 부패한 종교를 새롭게 하기 위한 개혁이죠. 그러나 문화적인 관점으로 보면 라틴 문화권에서 게르만 문화권으로 문화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경제력이 이동하면서 역사의 주도권이 옮겨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신앙을 새롭게 해석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카톨릭은 미사를 드리잖아요. 거기에는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기억하는 성찬이 항상 있죠. 떡과 잔을 받죠. 그것이 그들 미사의 중심입니다.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떡과 잔을 우리의 입 속에 받아 넣는 그 순간 떡은 예수님의 몸으로 변하고 잔은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 실제로 그렇게 변한다고 고백해요. 소위 화체설(化體說)이죠. 그러니까 성찬 받는데 빠지면 큰일나는 거죠. 그러니 빠지지 말고 나와라 그런 얘기겠죠.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제 새롭게 해석합니다. 자칫 그렇게 신앙 고백할 수도 있지만 반복되는 습관 속에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되거든요. 자칫 잘못하면 미신화 되거든요.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죠. 루터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기억하며 떡과 잔을 받는 그 순간 성령께서 그 자리에 함께 하신다. 그래서 신학적으로는 공재설(共在說) 이라고 그랬어요. 함께 계신다.

그러나 루터와 달리 보다 더 개혁적이고 과격하다고 할 수 있는 쯔빙글리 칼빈 의 해석은 또 달랐습니다. 성경을 봐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건 그저 기념하는 것이다. 떡과 잔을 받으므로 주님의 피 흘리신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에게 성경이라고 하는 기록된 말씀을 주시고 그 성경이 번역되어 출판되어 우리 손 앞에 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카톨릭은 미사를 중심으로 신앙을 유지해왔고 성경은 사실 번역하지 않았죠. 거기에 비해서 기독교, 우리 개신교는 종교개혁 때부터 부지런히 자기 나라 말로 번역해서 성경을 읽고 성경 속에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성찬 중심이 아니라 말씀 중심의 교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이게 뭐예요. 새로 변화된 문화에 맞는 새로운 해석이라는 거죠. 시대가 변했다는 것이죠.

흥미 있는 것은 음악에 대해서도 다르더라고요. 루터와 칼빈의 음악이해가 다르더라고요. 루터는 원래 카톨릭 신부 출신입니다. 자신이 성악을 공부했고 작사하고 작곡도 했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부른 384장도 루터의 작사, 작곡 아닙니까. 그는 음악은 하나님 말씀 다음으로 소중한 가치가 있다. 음악은 인간의 감정의 주인이며 지배자이다. 그러므로 슬픈 자에게 평안을 교만한 자에게 겸손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음악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느냐. 그래서 전통적인 카톨릭 음악을 거부하지 않았어요. 음악을 폭넓게 해석했어요. 전통도 받아 들이면서 독일 사람들이 부르는 민요의 가사를 바꿔서 찬송으로 불렀어요.

그러나 칼빈은 또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법률가였어요. 그는 스위스의 제네바시에 들어가서 제네바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합니다. 방종한 시대, 방종한 사회에 대해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예배를 드리되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다 치웠어요. 그래서 제네바의 칼빈이 시무했던 교회를 가보니까 다른 성당들하고 너무 대조적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다 치워 버렸어요. 사람의 생각을 미신으로 우상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다 치워버렸어요. 심지어는 자기가 죽을 때에도 나의 무덤도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사람은 어리석어서 내 무덤을 만들어 놓으면 우상화하고 꾸밀 터이니까 그리스도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다 치워라. 그래서 칼빈의 무덤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또 가만히 있나요. 어딘가는 묻혔을 것 아니냐 해서 공동묘지를 찾아가지고 칼빈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곳에다 조그만 표지석을 세우고 거기다가 영어로 J.C.(John Calvin) 하고 새겨놨어요. 또 관광객들은 거기까지 가서 들여다 봅니다. 여기가 칼빈의 무덤이다. 역시 칼빈이 정확했죠. 인간의 호기심과 그것을 넘어선 우상숭배의 경향. 칼빈의 교회에 가보면 강대밖에 없어요. 옛날 설교강단이라는게 큰 기둥에 나선형으로 계단이 빙둘러 올라가서 위에 강대가 올려져 있죠. 그리고 딱 하나 칼빈이 앉았던 의자가 남아 있어요. 음악에 대해서도 춤과 노래, 이건 인간을 쾌락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니냐. 음악은 인간의 영혼과 도덕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찬송은 해야겠는데 함부로 작사, 작곡하지 못하도록 하고 구약성경의 시편만 가사로 해서 곡을 붙여서 찬송을 부르게 하고 화음을 넣지 못하도록 하고 악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어요.

누가 맞고 누가 틀립니까? 아니요. 오늘 성경이 말한 대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우리가 죽으나 사나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 하는 정신에 충실 하려고 자기 시대와 문화에 맞춰서 표현한 것이죠. 우리가 잘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금기라든지 존중의 대상을 우상화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아시다시피 인도나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은 원래 한 나라였잖아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갈라졌죠. 그래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그들끼리 이슬람교인들은 저 파키스탄으로 가라, 힌두교인들은 인도로 들어와라. 며칠까지 이동하게 했어요. 그래가지고 대이동이 벌어 졌죠. 그 정도로 그치지 않고 암소를 숭배하고 돼지를 금기시하는 그들의 식습관이 종종 종교갈등, 인종갈등의 빌미가 되는 거죠.

<문화의 수수께기> 마빈 해리스 라고 하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의 책을 읽어보면 힌두교인들의 암소 숭배와 유대인과 이슬람교인들이 돼지를 금기시하는 것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합니다. 레위기 11 7절에 보면 돼지 먹지 말라고 했어요. 여러분, 다 돼지고기 드시고 계시죠. 어쩌자는 거예요.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종교적인 금기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빈 해리스 의 분석에 의하면 중동의 기후조건 속에 돼지사육은 지극히 적절하지 않다. 소와 양이나 염소는 풀과 나뭇잎을 먹지만 돼지는 상황이 달라요. 돼지는 열매를 먹고 식물뿌리를 먹고 곡식을 먹기 때문에 곡식을 인간하고 싸워야 해요. 나눠 먹어야 돼요. 또 돼지는 젖도 안 나오고  원거리 이동에 불편하고 덥고 건조한 기후에는 사육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돼지고기는 기막히게 맛있지만 그들의 척박한 삶의 조건 속에서 돼지사육은 너무나 사치하고 비경제적인 일이에요. 그러기에 종교적 금기가 된 거에요. 그렇게 해석합니다.

또 힌두교의 암소숭배도 마찬가지죠. 1970년 현재 미국사람은 년간 1인당 12톤의 에너지를 소비했는데 인도사람은 5분의 1톤 밖에 소모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인도사회는 저 에너지 소규모 가축중심의 영농사회예요. 템포가 느려요. 그래서 소를 냅다 잡아서 고기로만 먹는 거는 낭비라는 거예요. 그 시스템 속에서 그것을 타고 다니기도 하고 밭을 갈기도 하고 젖을 얻기도 하면서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얻어낸 거죠. 에너지 효율이 높아진다는 거죠. 미국사람만 똑똑하고 인도사람은 미련하겠어요. 아니죠. 그 삶의 조건 속에서는 그렇게 해야 최대한 유익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 이런 배경이 있는 거죠. 이것을 위하여 종교적인 계율로 둔 것이죠. 그러니 이런 배경을 모르고 단지 그 계율만 가지고 싸운다고 하면 오늘날 여러 종교가 공존해야 하는 다원화 사회에는 생각이 모자라는 것이죠.

오늘 성경 본문에 바로 이러한 갈등이 있습니다. 본문이 로마서니까 로마교회의 상황입니다. 로마는 로마제국의 중심이니까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서로 섞여 살게 되었어요. 그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 왔어요. 예수 믿기 이전에 자기들 나름대로의 다양한 경험이 있어요. 유대인들이 있어요. 이방인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방인들은 고기를 먹는데 원래는 그게 다 신전에 제물로 바쳤던 고기가 뒤로 나와서 시장으로 나오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이 고기를 먹어야 될 것이냐, 말아야 될 것이냐. 어떤 이들은 먹으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방인들은 늘 먹어왔던 사람들이죠. 이걸 어떡하면 좋으냐,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새로운 원칙을 얘기합니다. 디모데전서 4 3-5절에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먹지 마라. 음식을 가려라. 이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식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받아먹으면 된다. 우리가 그걸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받아먹을 때 그건 다 거룩해 지는 것이다. 새로 원칙을 얘기해요. 그러므로 구체적인 지침으로, 고기를 먹게 될 때 묻지 말고 먹으라고 가르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간혹 우리 집에 떡이 오잖아요. 그러면 물어 봅니다. 보통 이사 왔다고 인사하며 돌리는 떡은 맛있게 먹는데 고사떡이라고 하면 고민이에요. 그때 우리 아버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묻지 말고 먹어라. 떡을 주면 일체 묻지 말고 그냥 받아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함으로 먹자. 이게 사도 바울이 세운 원리예요.

또 절기 얘기를 해요. 유대인들은 지켜야 될 절기가 많았어요. 안식일부터 시작해가지고 유월절도 있고 초막절도 있고 많은 절기가 있었어요. 그걸 어떡할거냐. 이제 이방인 교회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칠 때에 어떡할거냐.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절기얘기 하지 말아라. 어떤 사람은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 귀한 날로 여기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다 똑같이 귀한 날로 여기는데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에 각각 확정할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는 그 이유를 분명히 하고 그것이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그대로 하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런 모든 절기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본체는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절기를 지키는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올바로 알기 위하여 그렇다면 그 모든 절기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사건이다. 유대인에게 대표적인 절기가 세가지 아니에요? 유월절이 있고요, 오순절이 있고요, 초막절이 있지요. 유월절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사건의 그림자예요. 오순절은 첫 농사를 지어서 보리 추수한 거예요. 이건 뭐냐. 성령께서 오셔서 내 안에 계시면서 내가 믿는 신앙이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 걸 확정해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아직 천국에 가보지 못했어요. 그러나 성령께서 내 안에서 말씀을 읽을 때마다 들을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 할 때마다 응답을 주시므로 내가 믿는 신앙이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의 증거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거예요. 초막절은 뭐냐. 우리가 마지막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에요. 절기는 모두 다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가르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 안에서 일어난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아라 이런 금기에 가득 찬 율법적인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를 주목하라.

필립 얀시<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을 읽어 보면 미국 남부 보수적인 교회 안에서 자라난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져 버리고 사람들은 그저 모여 앉아가지고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바쁘다. 주일날은 신문 읽지 말아라. 수영하지 말아라. 운동하지 말아라. 여자들은 화장하지 말아라. 온통 금기를 가지고 서로 판단하기 바쁘다. 잘못 믿으면 그렇게 가는 거예요. 그게 아니죠. 오직 그리스도를 붙들어라.

그래서 한국을 방문하는 인도네시아 목사님들이 가끔 시험에 든대요. 왜 그러냐 하면 한국 교회에서 남자분들하고는 쉽게 악수 하는데 여자분들은 손 내밀면 악수 잘 안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 인도네시아 분들은 남녀구별 없이 아주 서로들 악수하고 인사하거든요. 문화가 다르거든요. 그걸 누가 설명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 여자들이 우리를 인도네시아 사람이라고 꺼리는 것인가 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문화의 차이죠. 문화에 대한 몰이해죠.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곳은 주일 오전 11시 예배 드리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하면서 백인은 백인대로 흑인은 흑인대로 철저하게 분리돼가지고 서로 거부하고 배타시합니다. 이거 얼마나 아이러니 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 바울은 말합니다. 새로운 원칙을 얘기했어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주목하라. 예수님은 어떡하셨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와 사실 때에 열두 제자의 구성원이 다양했어요. 세리에서부터 세리 같은 놈은 죽어야 한다고 칼 들고 쫓아 다니는 열심당까지 하나로 제자로 묶으셨어요. 그리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계층을 넘어서 교제하셨어요. 심지어는 이런 얘기까지 들었어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다. 일상적인 생활을 거부하지 않으셨어요.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주 기쁘고 즐겁게 받았어요. 감사했어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먹는 것은 결코 우리를 온전케 못한다. 많이 먹어도 만족함이 없고 적게 먹는다고 부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먹는 것으로 인하여 네 형제를 시험에 빠뜨리지 말라.

제가 대학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그 학교가 미션 학교였어요. 그런데 그 학교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어요. 학교에도 교목이 있잖아요. 학교 예배를 담당하는 목사님이 계시잖아요. 몇몇 선생님들하고 목사님하고 가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맥주를 시켜서 마시더라고요. 그런데 목사님도 마시더라고요. 저는 그때 충격 받았어요. 그게 머리로 아는 거하고 실제 보는 거하고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물론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필요하면 하나의 음식으로 선용할 수 있죠.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 장소와 사람을 가려서 하고 심지어는 양보해야죠. 사도 바울은 새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다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복음을 위하여 저 사람의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내 것을 고집하지 않아요. 저 사람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거기에 맞춰주어요. 율법을 아는 유대인에게는 나도 율법을 아는 사람이 되어 저를 상대하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을 만나면 그의 문화 속으로 낮춰 들어가서 그와 교제하면서 그에게 무엇을 얘기 하느냐.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다원화된 사회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먹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업신여기지도 말고 비판하지도 말라. , 하나님이 저를 다 받으셨다. 중심이 중요하죠. 먹어도 주를 위하여 먹고 먹지 않아도 주를 위하여 먹지 말며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라.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얘기했으니 난 자유다. 자유 하세요. 그러나 기도하세요. 이거는 기도하면서 은혜의 통로로 쓰라는 얘기에요. 어떤 신앙이 건강한 신앙입니까. 여기 사도 바울이 보여주듯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놀라운 은혜이다.  그 은혜 중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은혜를 가지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양한 문화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만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하여 저들의 유익을 도모합니다. 저들을 세워 줍니다. 저들의 믿음을 일으켜 주기 위하여 오늘 나는 살아가는 것이죠.                   

옛날 크리스마스 때는 교회에 등이 있었어요. 등을 많이 달았어요. 그리고 새벽송 돌 때 등을 들고 다녔어요. 그런데 한국교회 초기 역사 속에 원래 크리스마스 때 등을 다는 것은 불교의 연등행사를 창조적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그런데 등을 다는 갯수가, 고종 황제 즉위 년에 맞춰서 즉위 36년이다 그래서 서른 여섯 개, 37년이다 서른 일곱 개를 달았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게 달았지만 좀 시간이 지나가니 사람들은 원래의 뜻을 다 잃어 버려요. 많이 달면 좋은가 보다 하고 많이 달았던 거예요. 또 세월이 흘러 지금은 아무도 안 달아요.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 문화, 관습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늘 물어 봐야 돼요.

오도방정이 맞습니까, 오두방정이 맞습니까? 누가 그렇게 묻더라고요. 제가 당장 사전을 확인해 보니 오도방정이 맞더라고요. 생각날 때 마다 늘 확인하세요. 생각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는 미신이 되기 쉬워요. 시퍼렇게 내 생각을 깨워서 내 마음을 깨워서 오늘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듣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물으면서 응답을 들을 때에 변화된 신앙이 일어나는 거예요. 창조적인 신앙이 되는 것이죠. 이런 은혜로 새해를 살아야 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이요, 감사함으로 받을 때 버릴 것이 없으며 기도하며 받을 때 거룩해 진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마는 우리는 어리석어서 본질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깨어있는 신앙이 되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나와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창조적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