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보시기에 좋았더라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완벽한사람은 없음] / 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12:07

080106 보시기에 좋았더라 ( 1:27~31)

성경본문(개역개정)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지금 삼성에서 두바이에 짓고 있는 버즈 두바이 라고 하는 건물은 세계 최고층 빌딩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700m 이상, 공사비만 9천억 원이고 사흘에 한 층씩 올라간답니다. 그래서 이미 건축가들이 뽑은 세계 10대 건축물로 선정이 되었고 21세기 피라미드가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완공된 다음에 한번 꼭대기 스카이 라운지에 가보고 싶습니다. 아찔할 것 같아요. 며칠 전에 TV에서 번지점프하는 오락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마카오에 아주 높은 번지점프대가 있는 모양입니다. 250m쯤 된다는데 남녀 연예인 몇 사람이 뛰는 장면이었는데 한 시간 내내 가슴을 졸이면서 웃다가 울다가 그랬습니다. 꼭 제가 꼭대기에 서있는 것 같더라고요. 젊은 사람들은 확실히 대단해요. 어떤 젊은이들은 남녀불문 막 뛰어내리더라고요.

세계 최고층 빌딩을 세우는 우리나라가 됐어요. 우리나라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죠. 그러나 1960년대 초에 장충체육관을 지을 때 우리는 그걸 지을 기술이 없어가지고 필리핀에서 와서 설계하고 시공 했습니다. 그런데 반세기만에 그걸 다 뒤집은 것이죠. 참 대단한 거죠. 그러나 결코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어요.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도 무너지고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남기면서 다시 한번 자기를 가다듬고  도전해서 드디어는 세계 최고층 빌딩을 세우는 나라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는 하나님의 건축 솜씨를 보여 주는 것이죠. 온 우주 만물과 그리고 그 한 복판에 또 하나의 소우주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솜씨가 여기 기록돼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민족마다 가지고 있는 신들의 이야기, 신화가 아니에요. 그래서 이것을 흔히 사화(史話)라고 이야기합니다. 역사의 이야기, 이 사화라는 말은 역사적 사건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죠. 흔히 역사 그럴 때 History가 있고요, 독일어로 게쉬흐테(Geschichte) 가 있어요. 히스토리 라고 하는 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적인 역사에요.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는 빠져있어요. 초월적 사건은 다 빼버렸어요. 그러나 게쉬흐테 라고 하는 역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이루어 놓으시는 역사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는 이적이 있어요. 창조사건이 있고 부활 사건이 있고 오늘도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기록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 창세기는 성경의 맨 앞에 나오는 기록이지마는 그러나 구약의 역사를 통해 보면 창세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의 재발견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른 민족과 같이 우리도 부강한 나라를 이루어 보자 하고 몸부림치고 애를 써가지고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이루었어요. 제법 그럴듯한 나라를 이루었어요. 그것을 자랑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것이 신앙의 정점이 아니기에 그들은 곧 바벨론에 의해서 다 망합니다. 성이 다 무너지고 심지어는 성전도 무너지고 그들은 다 흐트러지게 됩니다.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세계 최강대국인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살게 되요. 한 세대가 죽고 다음 세대가 일어나요. 그 고통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는 거예요. 바벨론이 망하는 사건을 보고 페르시아가 일어나고 또 무너지는 세계 역사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흔히 바벨론의 신들의 이야기와 같이 신들이 인간과 같이 싸우고 이기고 투쟁하는 그러한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빛을 지으시고, 태양과 달과 별은 그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 반사하는 하나의 피조물의 하나인, 완전히 새로운 하나님을 재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오묘한 건축물인 이 우주 한복판에 내가 서있구나 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여기 하나님의 설계도가 있어요. 높은 빌딩을 지으려면 설계도가 필요하잖아요. 움막집은 설계도가 필요 없어요. 그저 2층 짓는 거는 설계도가 필요 없어요. 그러나 제대로 건물을 올리려면 설계도가 필요해요.

창세기는 하나님의 설계도에요. 그리고 그 설계에 가장 핵심이 뭐냐, 그게 인간창조에요.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되 다른 짐승과 달리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 놓으셨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한국사람이 해외 나와 살기에 자카르타만한 데가 없다. 정말 그래요. 그러나 아직 충분하지 않아요. 식당은 많고 먹는 거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마는 그거면 충분합니까. 아니요. 정치, 경제, 사회가 기반이라면 그것을 바탕으로 꽃피워야 할 문화가 없어요. 놀고 먹는 문화는 있는지 몰라도 문화가 없어요. 우리가 여기 나와 살면서 일상에 매여서 급급하게 살아간다면 의미가 없죠. 새로운 문화를 여기서 피워내야 하는 것이죠.

제가 창세기 말씀을 준비하면서 지난 한주간에 조셉 하이든오라토리오 천지장조를 계속 들었어요. 그는 도대체 이 창세기의 내용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이미 여러분은 천지창조 노래를 부르셨어요. 조금 전에 부른 찬송 75장이 천지창조에 나오는 1부의 맨 마지막 노래에요. 하나님이 지으신 해, , 별과 우주를 부르는 노래에요. 그러나 천지창조의 하이라이트는 3부에요. 거기 아담과 하와가 둘이서 서로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해요. 아담과 하와가 듀엣으로 나올 때 온 우주가 웅장하게 합창을 해요. 이 천지창조를 우리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와 그리고 이것을 엮어서 문화로 꽃피워서 하나님을 찬양해야죠. 거기 이렇게 노래하더라고요. , 내 사랑. 그대 함께 있으니 꿈과 같도다/ 이 시간이여, 순간마다 황홀해 걱정 근심 없어라/ 내 마음에 기쁨 넘치네/ 내 모든 것이 당신 것이요. 당신 사랑만 바랍니다/ 아침의 이슬, 저녁의 바람, 싱그러운 과일 맛, 꽃 향기도 그대 있어야 기쁨 되네/ 그대는 삶의 축복. , 나의 사랑 오늘 우리 현실과는 너무 다르죠.

어느 엄마가 개구쟁이 아들을 데리고 버스에 탔어요. 장난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올라 탔는데 아니나 다를까 애가 또 달리는 버스 안에서 까불고 장난해요. 엄마가 하도 답답해서 말합니다. 아들, 엄마가 어떤 사람을 제일 싫어하지? 그랬더니 아들이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아빠

그게 우리 현실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이상을 포기 할 수는 없죠. 그러고 보면 드라마도 그렇고, 오페라도 그렇고, 뮤지컬도 그렇고 연극도 그렇고 뭐든지 스토리야 어떻든 늘 그 내용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에요. 아름다운 사랑이에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들으면서 새삼 신학자보다 음악가가 몇 세기를 먼저 내다보고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구나 했어요.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얘기하고 이것이 바로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결정적 차이점이라고 얘기했는데, 그럼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 라고 얘기할 때 기독교 전통 속에서는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 어거스틴의 해석을 많이 좇았어요. 인간은 몸과 영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인간의 고귀성은 영혼이 있다라고 얘기하면서 그렇다면 하나님을 찾는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육신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우리의 영이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했어요. 그래서 영적으로 온전한 사람일수록 육신적인 것에 눈 돌리지 아니하고 수행과 연단과 때로는 고난과 금식과 이러한 것을 통해서 영이 더 맑아져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난 20세기에 신학은 대 반전을 겪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재해석을 하게 됩니다. 아니다. 성경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성경은 한번도 우리의 몸을 영보다 저급한 것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 철학 이원론 철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기는 어거스틴이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기 전에 오랫동안 헬라철학에 빠져 있었고 마니교라는 이원론적 종교에 빠져있었어요. 그걸 다 벗는다고 했습니다마는 그게 그렇게 쉽게 벗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 얘기 아세요. 목사님과 장로님이 심방을 가는데 양조장 옆을 지나갔대요. 지나가다가 그 냄새가 사라지는 경계가 있잖아요. 그 경계를 통과할 때 장로님이 숨을 한번 크게 쉬었대요. 아휴, 좋다 그거 옛날 버릇 못 버리는 거에요. 몸에 배어있는 거거든요. 벗어버린다고 했습니다만 다 못 벗었던 거에요. 그런데 20세기 새로운 신학은 뭐냐, 인간의 영과 몸은 모두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성경을 다시 읽어 보니 하나님이 지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되어 사랑을 나누고 둘이 함께 살아가는 관계,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에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그 모습 속에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 그래서 남자 없는 여자, 그것도 결핍이에요. 여자 없는 남자, 그것도 부족함이에요. 둘이 하나가 되어 사랑을 나누며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그 모습 속에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있다.

프랑스 속담에 혼자 밥 먹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혼자 식사하지 마세요. 누구라도 불러서 대화하면서 해야죠. 그렇죠, 음식은 보잘것없어도 서로 삶을 나누는 대화를 하며 식사해야 되는 거죠. 우리 교회 식구들이 점점 예뻐지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노인대학 봉사하러 나와서 밥 먹지, 수요일 예배 나와서 또 식사하지, 주일예배 마치면 또 식사하지, 가만히 보면 한 주일에 거의 매일 식사가 있어요. 사실 식사는 그저 한끼 때우는 게 아니에요. 삶의 중요한 시간이에요. 먹기 위한 시간만도 아니에요. 함께 삶을 나누는 시간이에요. 웃음이 사라지고 말하기 싫어지고 혼자 있고 싶어진다. 그건 우울증 걸린 사람이에요. 함께하는 여기에 삶이 있어요. 사람이 허약해지면 교만해져요. 정말 힘 있는 사람은 여유가 있는 거에요. 받아 줄 수 있는 거에요. 열등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병중의 병이에요. 자칫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못 배우면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요. 그러면 누구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아요. 교만이 다른 게 교만이 아니에요. 자기를 걸어 잠그는 것 그건 교만한 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것과는 정반대로 가는 거에요. 나 홀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경쟁하고 시기하다가 자기에게 기회가 오면 그 권력을 철저하게 사유화하는 것, 자기 멋대로 행사하는 것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죠. 흔히 블루오션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거는 경쟁하지 말고 모방하지 말고 당신이 제일 잘하는 것,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키워 가라는 거에요.

여러분, 이제 어지간히 사실 만큼 사셨잖아요. 그럼 이제는 부질없는 욕심은 내려놔야 되요.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내가 쉽게 하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그게 나의 장점이에요. 그게 내게 주신 은사에요. 이제 그걸 가지고 일하면 되는 거에요. 사람으로부터 받는 인기, 그리고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카리스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됩니다. 오히려 살수록 정말 사람에게 필요한 건 순수함이고 성실함이에요. 그리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섬기고 기쁘게 하는 그 일에 우리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이죠. 이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의도에요. 설계하신 의도에요. 이렇게 살 때에만 우리에게 기쁨이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는 연약합니다. 흙으로 지어진 인간이에요. 땀 흘리고 살아야 돼요. 성경이 말한 대로 가시덤불과 엉겅퀴 속에 파묻혀 있어요. 부부간에도 서로 책임을 미루면서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에요. 그러다가 어느 날 홀연히 흙과 같이 무너져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대안을 내셨어요. 그게 뭐냐, 십자가의 그리스도 사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신 그 사랑, 곧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의도요, 창조의 목적이에요. 사랑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우주를 왜 만드셨겠어요. 우주 한 복판에 우리를 지으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거에요. 사랑이 목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에요. 혼동하면 안돼요. 간혹 이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어떤 사람이 너무 예수님을 깨끗하게 믿으니까 주위사람들이 작은 예수, 예수님 동생 이러잖아요. 물론 좋은 뜻으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만 사람들을 그르치게 할 위험이 있어요. 작은 예수가 어디 있어요. 그러지 마세요. 그냥 있는 대로 사세요.

일본은 우리나라 보다 먼저 기독교가 먼저 들어 왔습니다만 일본 교회가 인구 1%도 안돼요. 왜 일본 교회는 부흥하지 못할까. 학자들이 연구했을 때 뭐라고 결론을 냈느냐 일본교회는 그만 먼저 믿는 사람들이 작은 예수의 모델을 보이려 한 까닭에 죄있는 사람들이 다 죄로 넘어지게 만들었어요. 아휴, 저렇게 예수 믿으라면 난 못한다. 아니에요, 죄 가운데 있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고 사람이 변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늘 그 마음에 함께 하신다, 그게 변화의 의미에요. 내가 갑자기 도를 닦아 가지고 도통했다. 절대 아니에요. 그거는 종교가 말하는 거예요. 자기 구원을 말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에요. 마치 목사를 작은 예수로 쳐다보면 그걸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목사라고 부부싸움 안 하겠어요. 넘어지고 넘어지지만 그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랑으로 나를 응원하시는 거예요. 괜찮아, 다윗도 그랬어. 너의 연약함과 너의 실수를 알기에 내가 오늘도 십자가에 피 흘린단다. 그 분을 바라보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지도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에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에요. 성경에 보면 그 많은 인물들 다 허물이 있었어요. 죽는 그 날까지 허물이 있었건만 하나님이 들어서 쓰시는 거예요. 그때 그때 은혜를 주시면서 쓰시는 거예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에요. 완벽한 사람은 없을 뿐더러 완벽한 사람은 찾지도 마세요.

어떤 청년이 그랬잖아요. 얼마나 여자를 고르는 기준이 까다로운지 어려운 거예요. 완벽한 여자를 찾는 거예요. 그러니 나이 사십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가는 거예요. 친구가 하도 답답해서 몇 번을 설득했지만 안 통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흥분해서 말합니다. 내가 아주 완벽한 여자를 만났어 그런데 왜 결혼을 못했나? 아니, 그 여자도 완벽한 남자를 찾더라구. 그러면 절대 결혼 못하죠.

여러분, 내가 누군가를 확인하세요.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그 한복판에 너와 나를 만드시고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셔요. 사랑의 원천을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두셨어요. 우리는 이제 플러그만 꽂으면 되는 거예요. 모든 힘은 그곳으로부터 공급되는 거예요. 내가 만들어 내는 힘이 아니에요.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 힘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고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시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걸음에 복이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미용실을 했는데 이름을 YOU & ME 라고 했대요. 너와 나잖아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분이 그러는 거예요. , 멋있다. 그대 그리고 나 그러더래요.  여러분, YOU & ME를 다음부터는 너와 나라고 무미건조하게 말하지 마세요. 창의력을 발휘해 가지고 그대 그리고 나

 인생의 변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 속에 사랑 받는 나로 보세요. 그럴 때 내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도 절대긍정이에요. 죽어도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와 동행하신다는 그 약속으로 살기에 그게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행복의 비밀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우주를 만드시고 만물을 지으시고 그 한복판에 한 남자, 한 여자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연약하고 허물뿐이지만 주님이 주신 사랑에 감동하고 감격하여 어떤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