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고난과 구원의 감사절 (시 118:27-29/엡 5:19-21)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2. 23. 09:11

고난과 구원의 감사절

 

118:27-29 5:19-21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

호와께 감사 하리이다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

심이 영원함이로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고 동시에 전도주일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신 분들의 용기를 축하하고 환영합니다. 한해동안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참 감사한 것뿐입니다. 금년에는 농사가 너무 잘되어서 걱정이라고 합니다. 너무 풍년이라서 농산물 값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기차를 타고 지방에 가보니까 감나무에 가지마다 수백개씩 탐스러운 감이 열려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귤밭의 열매들이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열려 있었습니다. 고향 예산을 지나가다 보니까 사과나무에 사과가 너무 많이 열려서 가지를 다 받쳐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나무 밑에 낙과가 수북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순간 북한이 생각났습니다. 저 북한 땅에도 이런 결실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굶주린 그들에게 큰 감사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 국민들은 감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판로가 없고 값이 떨어진다고 불평불만을 합니다. 주어져서 하는 감사는 그래서 깊이가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주어져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감사는 배고픔에서 고난에서 어려움에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 자식들은 부모에게 제대로 감사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감사할 줄을 압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런 감사가 나옵니다. 본문은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시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각고 끝에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첫 번째 장막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절기가 오늘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그때 시인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감사는 차원이 다른 감사입니다. 이 속에는 구원의 감사가 들어 있습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8) 진정한 감사는 평안하고 넉넉하고 풍성할 때 나오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나옵니다. 에베소서 519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 시대의 범사는 핍박의 어려움을 일컫습니다. 그 어려운 핍박 아래에서도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는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풍성함에서 주어지는 감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적음에서 고난에서 어려움 속에서 말미암는 감사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청교도들이 그런 감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청교도들이 드린 감사를 감사의 원형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드린 추수감사의 감사는 눈물겨운 감사였습니다.

청교도들의 모험신앙

 

청교도라는 말은 원래 순례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이라는 뜻입니다. 퓨리탄(Puritan) 이라고도 하고 신교도라고도 합니다. 우리말로 청교도라는 말은 깨끗하다”, “순수하다라는 뜻입니다. 16세기 영국이 카톨릭으로부터 분리 해 나옵니다. 그리고 영국 국교를 세웁니다. 그것이 앵글리칸 쳐치라는 오늘의 성공회라는 교파입니다. 그런데 영국은 모든 국민에게 성공회를 믿으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때 일단의 신앙인들은 카톨릭의 형식주의에 신물이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국교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구태의연한 모습이었고 카톨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카톨릭 형식주의를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복종을 선언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청교도입니다. 그때부터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도망 다니며 숨어서 살아갔습니다. 나중에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무작정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162096180톤급의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102명이 영국 남부의 한 항구를 떠난 것입니다. 목적지는 발견한지 100년도 안되는 미개척지인 오늘의 북미대륙이었습니다. 탑승했던 102명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자 어른이 44, 여자 어른이 19, 아이들이 39명이었습니다. 어른 중에서도 50세가 넘은 사람이 단 2명이고 40대는 9명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젊은이, 청소년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풍랑과 싸워가며 항해를 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려고 출발을 한 것이니 이것은 생사를 건 대모험입니다. 가다가 풍랑에 배가 전복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모험의 항해를 두달 동안 했습니다. 드디어 119, 62일만에 북미대륙 지금의 플리머드라는 뉴잉글랜드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해 보니까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진 희생이 요구되는 땅이었습니다. 수천년 묵은 황무지와 맹수들과 사나운 인디언들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도착하자 얼어붙는 추위가 있었고 식량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잘라서 통나무 집을 지었습니다. 먼저 창고같은 커다란 공동의 집(Common House)를 지었습니다. 19일에 입주했는데 닷새만인 114일 새벽에 불이 나서 삽시간에 다 타버렸습니다. 하마터면 몰살당할 뻔했습니다. 또 그해 겨울에는 폐병이 전염병처럼 만연했습니다. 그래서 12월에 6명이 사망했고, 18일에는 8명 사망하고, 2월에는 17명이, 3월에는 13명 사망했습니다. 인원이 줄어든 것을 알면 인디언들이 습격해 올까봐 무덤도 봉분을 쌓지 못하고 평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해 추위 때문에 102명 중 46명이 죽고 56명만 생존했습니다. 청교도들의 정착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생활이 조금 안정되자 그들은 먼저 예배당부터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아이들을 가르칠 교실을 지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들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로 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청교도들의 3대 비젼이고 미션인 삶의 좌표입니다.

 

청교도들의 3대 삶의 좌표

 

청교도들은 3가지의 삶의 좌표를 세웠습니다. 그 첫째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절대주권이란 내가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이 주권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결의했습니다. 고로 세상의 어떤 주권도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리처드 박스터는 이 청교도들을 가리켜 하나님 앞에서는 진흙같이 겸비하나 세상에서는 능히 임금의 목을 타고 앉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자. 하나님만이 주권자시고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하나님만이 나의 생사의 주권자임을 고백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만 우리의 일생을 바치자. 헌신하자. 모든 영광을 그에게만 돌리자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청교도들의 다짐입니다. 그것이 청교도들의 삶의 좌표였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그때부터 모든 삶을 교회중심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절대주권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엊그제 독일에서 목회하는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암이 온 몸에 퍼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대뜸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역할을 주시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목회를 거의 끝나갈 즈음에 나에게 이런 미션을 주시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주 담담하고 초연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 담담함의 힘과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믿기 때문에 그런 힘이 해석이 나온 것입니다. 미국 텍사스 앤더슨 암병원에는 32년간 의사로 일하고 있는 김의신 박사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 의사들이 뽑은 최고 의사에 11차례나 선정된 분입니다. 그는 32년간 암 치료를 하면서 세상에서 암이 제일 치료 안되는 사람이 네 부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네 부류가 의사, 변호사, 교수, 검사라고 합니다. 그 분들은 암에 걸리면 암치료 서적을 구입해서 부정적인 부분에만 밑줄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충고하면 가장 불행한 얼굴을 하고 의사에게 반론을 제기한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 가장 치료가 잘 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인들이라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절대 주권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내 삶의 생사를 운명을 다스리는 분을 믿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나를 고쳐 주실 것이라는 절대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치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듀크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팀이 베토벤의 곡을 연습하는 사람들을 연구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아닌 사람에 비해서 암 면역단백질이 150% 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가곡을 연주하는 성가대원들을 조사해 보니 240%가 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일회 주일예배 드리는 신자들을 조사했더니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 보다 7년을 더 장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주 수요일까지 꼬박꼬박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거기다 매일 새벽기도까지 참석하며 예배드리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앤더슨 암병원에서는 병자들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권장한다고 합니다. 장기려 박사라는 의사는 의료인들에게 강의 하면서 질병치료는 80%가 하나님 뜻이고 10%는 의사 몫이고 10%는 약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의사들에게 내가 병을 고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청교도들은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생의 좌표를 설정했습니다. 그 좌표 중 제 1조가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사가 감격과 감사뿐인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3가지 삶의 좌표 중 두 번째는 세상의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천직이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직업을 Vocation이라고 합니다. 이는 생업이라는 뜻이고 동시에 사명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세속을 등지고 산속에 들어가 은둔하고 명상이나 하며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은 지금 현재 내가 일하는 일터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소이고,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일하는 일, 사업, 직장이 단순히 밥 먹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거기가 선교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이 하나님이 주신 천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자기 일을 성직 수행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이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은 그런 뜻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하루를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냈습니다. 청교도들의 수칙을 보면 하루 6시간만 자면 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게으름이나 많이 잠자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살았던 사회와 그 나라가 잘 살고 선진화 되고 질서가 잡히게 된 것입니다. 노동관이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다. 적성이 안맞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문제는 소명의식입니다.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뜻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평불만을 하게 됩니다.

청교도들의 3가지 삶의 좌표 중 세 번째는 성실, 근검, 절약의 삶입니다. 근검절약은 참 중요한 정신입니다. 그렇게 살면 돈을 모으고 살게 됩니다. 또 그렇게 모은 돈을 저축하면 부하게 살게 됩니다. 그 형태는 기본의 삶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이 기본을 잃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노리며 삽니다. 개중에는 이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삶의 형태가 아닙니다. 보편적인 삶은 근면 절약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기본적 삶을 이루게 합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빈곤을 구제대상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멸시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빈곤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청교도들은 그렇게 모으고 적금해서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학교를 세우고 자선에 사용했습니다. 영국 캠브리지, 네덜란드 라이덴, 스위스 제니바, 미국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한국의 미션 스쿨들은 모두 청교도들이 모은 돈으로 세워진 학교들입니다. 청교도들은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한 삶을 살며 적금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선하고 기부했습니다. 죽을 때는 자기 재산을 그대로 남겨놓아서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이것이 청교도 문화입니다.

청교도들은 그 어려운 환경에서 이 3대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원칙대로 살아갔습니다. 오늘 생각해 보면 이 원칙은 청교도들만의 원칙은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의 삶의 원칙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삶의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추수감사

 

이 청교도들이 그런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추수한 것으로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청교도들이 드린 추수감사는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추수감사절과 격이 다릅니다. 그들은 온갖 각고 끝에 정착하고 삶의 좌표 세우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첫곡식 거두었고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지나온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눈물겨운 개척자의 길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하나님의 인도요, 섭리요, 이끄심인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 감사예배는 새 세계를 세우겠다고 함께 떠났는데 보지도 못하고 죽은 동료들이 묻힌 공동묘지에서 드렸습니다. 그러니 그날 얼마나 감격을 하며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날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불러놓고 칠면조를 함께 나누며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추수감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다짐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 온 것은 더 잘살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 참 예배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곳에 왔고 자라나는 우리의 자손들이 이 땅에 신앙의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이 고백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것이 감사의 정신입니다. 추수감사는 단순히 농사를 잘 지어서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총체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렇게 추수감사절을 지키기까지 그해 겨울을 보내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가운데 추위, 굶주림, 질병, 사고 때문에 51명이 죽었습니다. 새 세계도 좋고 미래도 좋지만 오늘 주어진 현실이 얼마나 쓰라리고 무거웠는지를 말해줍니다. 사람은 미래도 소중히 여기지만 지금 내가 처해진 환경, 현실 때문에 실망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해 315일 그들이 타고 왔던 배가 고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51명중 한사람도 여기가 힘드니 고국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와 신앙과 미래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래가 없는 사람이 불행한 인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감사의 질을 되새겨야 합니다. 의미를 되새기고 차원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좌표를 다시 설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오늘 이런 감사를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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