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1-5)
옛날에 어떤 왕이 자기 나라에서 제일 가는 학자 한 사람을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될 수 있겠소? 당신에게 귀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소.' 학자는 서슴없이 한 마디 했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지요. 왕께서는 나쁜 짓은 하지 마시고 착한 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왕께서는 틀림없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왕은 학자에게서 무엇인가 특별한 가르침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나쁜 짓은 하지말고 착한 일만 하라는 평범한 말을 하니까 왕은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왕은 언성을 높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까짓 가르침을 받으려고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소? 나쁜 짓은 하지말고 착한 일만 하라는 것은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 소리가 아니요?'
그러자 학자는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나쁜 짓을 하지말고 착한 일을 하라는 것은 네 살짜리 어린 아이로부터 여든에 이르는 노인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실행을 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할/
야고보서의 주제가 바로 행함입니다. 약2: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장에서는 믿음과 행함의 불가분 성을 원론적으로 강조한 야고보 사도는 이제 이와 같은 일반적인 원리가 2장부터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하나 하나씩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조차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무시당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보면, 있는 자 앞에서는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없는 자 앞에서는 거만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한 영혼의 귀중함을 가질 때, 우리는 그 누구를 대하든지 따뜻한 사랑으로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귀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아멘!/
▶미국의 명문 스탠포드 대학이 어떻게 건립되었는지 아십니까?
돈 많은 재벌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허버트 대학교 일년을 다니던 중 사고로 죽게 되어 긴 여생을 조금은 쓸쓸하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노부부는 그 많은 재산을 유익한 일에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노부부가 둘이 의논하기를 '우리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헌납'하기로 하고, 다음 날 부부는 미국의 명문 허버트 대학을 방문하였습니다. 아들이 이 대학에 다닐 때 무척이나 행복했기에 이 대학을 찾은 것입니다.
정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허름한 옷차림의 두 노인을 본 수위가 그들을 불러 세우고는 불친절하게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노인양반들 지금 어디를 들어가려고 하는 거요?' '총장님을 좀 뵈러 왔는데요' 수위는 아주 경멸하는 태도로 괄시하며 대답하기를 '총장님께서는 댁들을 만날 시간이 없소' 노부부는 수위의 태도에 불쾌했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물었습니다.
'대학교를 설립하려면 돈이 얼마나 듭니까?' 그러자 퉁명스럽게 말하기를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댁들 같은 사람들이 그건 왜 묻습니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노부부는 그 대학에 기부하는 것을 없던 일로 하고 직접 학교를 짓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전 재산을 투자하여 설립한 대학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제일가는 대학중의 하나인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타서 지은 것입니다.
한편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하버드 대학에서는 그 날의 잘못을 반성하며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허버트 대학 정문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게 되었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수위 한 사람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허버트 대학은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할/
▶인도의 정신적인 지주인 간디(1869-1948)가 젊었을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온갖 차별과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경책을 발견하고 이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간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그에게 큰 감명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성경을 읽은 간디는 하나님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하고는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나라이었고 인종차별이 심한 때이었기 때문에 그의 결심은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번번이 교회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여러 번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원을 해 보았으나 그때마다 교회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기 일수였습니다. 간디가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한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경멸한다.'
그는 결국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10억 인구의 인도를 움직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 교회가 간디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인도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간디가 기독교의 영향을 인도에 끼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입니까?
▶건국대학교의 명예교수이신 류태영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36년 전라북도 임실이라는 산골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농촌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세상 적으로나, 외모적으로는 그리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구두닦이를 하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집 근처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주일뿐만 아니고 새벽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교회는 보잘 것 없는 소년이지만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은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소년이 잘 되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소년의 마음 속에 꿈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농촌출신이니까 어찌하든지 농촌을 한 번 잘 살게 하는 방법을 공부해야 되겠다. 유학을 가야되겠다.' 이런 꿈이 그의 마음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진 농업국인 덴마크로 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자기의 꿈을 영어로 적어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그 편지를 덴마크로 보내기는 해야 되겠는데 누구에게 보내야 될지 몰랐습니다. 그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이왕이면 내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제일 높은 사람에게 보내자'고 생각하고 편지봉투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프레드리히 9세 국왕 귀하, 코펜하겐, 덴마크'
편지를 보낸 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돈도 없고 배경도 없습니다. 저의 유일한 배경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저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니 주께서 저로 하여금 유학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세요'
교인들도 보잘 것 없는 소년의 꿈을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더불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낸 지 40일 만에 답장이 왔습니다. 덴마크 국왕의 보좌관이 쓴 편지였습니다. 자기 나라에 와서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편지에는 비행기표까지 함께 넣어왔습니다.
시골뜨기 소년이 하나님의 은혜로 유학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덴마크로 갔습니다. 거기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는 더 배울 것이 없게 되자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또 편지를 썼습니다.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그는 키부츠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그 뒤 그는 귀국해서 건국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농촌전문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명예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머슴의 아들이었습니다. 시골뜨기였습니다. 구두를 닦으면서 고학을 하던 소년이었습니다. 외모적으로는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소년이 어떻게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겼겠습니까? 교회가 그를 따뜻하게 사랑으로 품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온 교우들이 진정 어린 마음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놀라운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외모를 보고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족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택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그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바라보며 그를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사실 어떤 시대에든지 사람의 완전 평등을 말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못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빈부나 신분을 중시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는 물질의 풍요는 신의 축복이요, 가난은 신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은 물질의 부유함을 누릴 뿐 아니라 사회에서 존경과 대우를 받아왔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그 가난하고 육신에 병든 것도 서러운데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정죄 받고, 사회에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유대인들에게서는 더욱 심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로 생각하여 가까이 하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경멸했습니다. 반면에 부유한 사람들은 그 부요를 누릴 뿐 아니라 사회에서 존경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들 사는 사회는 의식들이 많이 깨었지만, 여전히 유전은 무죄가 되고, 무전은 유죄가 되는 일이 성행합니다. 이것은 공정해야할 법정에서조차도 여전합니다. 곧 권력 있고 부유한 사람은 큰 죄를 지었음에도 얼마 후에 너그러운 판결을 받아 사면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누가 그를 변호해 줄 사람들도 없기에 그가 무죄함에도 큰 곤혹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과 함께 멸시 천대를 받기 때문에 더 억울한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랑을 말하는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차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일들이 초대교회 안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말씀의 검을 빼들었습니다. /할/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①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 모두 예수의 피로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들아' 사도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외모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할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우리 모두는 영광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영광의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늘의 영광을 다 내버리고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무런 외모도 갖추지를 못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자들에 의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흠모할 만한 외모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대 전제가 무엇입니까? 우리 영광의 주,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일 때 잘사는 사람에게 잘 보이거나 무슨 덕을 보려고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영광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인간들의 차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있고 없고, 배우고 못 배우고, 잘났고 못났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믿음 안에서 평등합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판단하거나 선별해서는 안니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가 작은 교회라고 기죽지 마십시오! 이곳에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있습니다. /할/
㉣오늘 주제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할/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이 하루는 집무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누구를 만나야 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급히 나오다가 꼭 챙겨야 될 서류 하나를 빼놓고 왔습니다. 백악관 앞에 있는 안내 실을 지나갈 때 그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내 실에서 근무하는 수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급히 나오다 보니까 서류 하나를 빼놓고 왔는데, 자네는 젊으니까 얼른 가서 가져올 수 있을 걸세. 내 책상 위에 보면 노란 봉투 하나가 있으니 그것을 좀 가져다 주게나'
그래서 수위가 명령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수위가 돌아와 보니까 놀랍게도 대통령이 수위인 자기 자리에 앉아서 자기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아니 각하께서 이런 하찮은 자리에 앉아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자네가 나를 위해서 대신 일해주는데 내가 자네 자리에 앉아서 대신 자리를 좀 지키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얼마나 큰 인물입니까?
그런데 우리 소인배들이 문제입니다. ▶어느 시집 간 딸 자랑을 늘어놓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내 딸은 시집을 참 잘 갔어. 사위가 얼마나 착한지 아침에 출근할 때도 딸이 피곤할까봐 깨우지도 않고 자기가 라면 하나 끓여먹고 출근하지요, 내 딸은 10시쯤 일어나서 미장원가서 오전 내내 있다가 점심시간에 사위 회사식당에 가서 사위와 함께 점심 먹고 집에 와서 한숨 자고 저녁에 사위가 퇴근하면 저녁 먹으러 나가고... 사위가 얼마나 마음이 좋은지 딸이 하자는 대로 다 하니까 정말 시집을 잘 가서 고생 안하고 살아요'
'그런데 우리 아들 녀석이 장가를 잘못 가서 고생문이 훤하게 열렸지 뭐예요. 글쎄 며느리가 매일 아침 늦잠 자느라고 10시에나 일어나니 아들 녀석이 아침도 못 얻어먹고 출근하고 나면 며느리는 미장원가서 머리하고 점심해먹기 싫다고 남편 회사로 쪼르르 달려가서 점심 먹고 쇼핑하고 집에 와서 또 낮잠을 잔다오. 그리고 저녁에 아들이 들어오면 밥도 안 해놓고 나가서 사먹자고 한다니 집에서 따뜻한 밥 한번 못 얻어먹는 아들이 불쌍해서 죽겠어, 장가잘못 가는 바람에...' 그럽니다.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들의 편견의 일면입니다. /할/
⑴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롬2:11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행10:34-35절에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또한 벧전1:17절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리고 요7:24절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할/
▶'아름다움의 권력'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움은 권력이 되어 능력과 성격, 대인관계, 결혼, 승진, 여가 등의 개인 생활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참여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예쁜 여자, 잘 생긴 남자가 인기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루키즘(look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look이라는 단어에 ism이 합쳐져서 '외모차별주의'라는 말입니다. 외모가 개인간의 우열과 인생의 승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외모에 집착하는 외모지상주의를 뜻하기도 합니다.
옥스퍼드 1999년 판 20세기 단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루키즘(Lookism)이란 외모를 근거로 한 편견이나 차별을 의미한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차별하는 '루키즘(Lookism)'은 대중매체의 발달로 홍수처럼 확산되어 성형 시장을 한여름 강물처럼 불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냄새가 고약한 아름다운 꽃을 집안에 장식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외모가 항상 최고의 덕목은 아닙니다. 마음의 아름다움이 더 큰 힘입니다. /아멘!/
⑵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16:7).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들이 외모로만 판단하여 실수하고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사회는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채용하면서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말입니다. 조선 사대부 집안에서 사위를 고를 때에도 이 기준을 가지고 골랐습니다.
신언서판의 신(身)은 얼굴과 외모와 신체의 건장함을 보는 것입니다. 언(言)은 언변, 곧 말솜씨를 뜻하고, 서(書)란 글씨와 글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판(判)이란 사물의 시비를 바르게 가릴 수 있는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전자보다는 후자로 갈수록 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외모의 그럴듯함보다는 말씨가 더 중요합니다. 언변보다는 글로 표현되는 교양이 더 중요합니다. 사물과 사람을 보는 판단력과 지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세태를 보면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지혜보다는 외적으로 보이는 외모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고의 천박성이 드러나고 삶의 비천함이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서울과 경기지역에 사는 18세 이상의 여성 810명에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얼굴이 25.8%, 몸매가 18.6%로 둘만 합쳐도 40%가 넘습니다. 그리고 마음씨가 13.5%, 매너가 10% 되는 것을 보면 여성이 여성을 볼 때도 얼굴과 몸매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남성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얼굴과 몸매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70%-80%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잡지를 보면 남자를 보는 눈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에 남자배우들에게 '꽃 미남'이라는 외모에 치중하는 말이 유행했다면 최근에는 그 말과 더불어 또 다른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는 '훈남'이라는 단어입니다. '완소훈남'이라는 단어는 '완전 소중한 훈훈한 남자'라는 말로 여성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겉만 꾸미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얼굴까지도 수술을 해서라도 고쳐야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얼짱 몸짱 짱짱이 유행입니다. 외모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먼저 심장을 고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믿/
⑶하나님은 사람들을 골라 쓰실 때 세상의 기준과도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일등도 좋아하시지만 꼴찌도 예민하게 살피십니다.
이것부터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일등을 선택하고 엘리트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등 하려고 일류가 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의 방법을 구사하십니다. 오히려 꼴찌와 실패자와 낙오자들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할/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을 삼는데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 아들 중에서 기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의 집으로 가기 전에 미리 '아들들을 모아 놓으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가면서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려는 사람이니 얼마나 잘 생겼을까?' 그런 기대를 하고 상상을 하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키와 용모를 보지 말라, 사람들은 외모와 키를 보지만 나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 말은 선택받는 사람의 외모나 생김새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할/
그래서 이새의 집에 가 보니까 아들들이 다 모였는데 모두 참 잘났습니다. 모두 키가 훤칠하고 생김새가 아주 준수했습니다. 큰아들을 보고 그가 뽕 갔습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과연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실 자가 주님 앞에 있도다.'하고 기름을 부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는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음 아들도 보니까 또 준수했습니다.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 하니까 또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일곱 아들 모두를 거절하십니다. 이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또 없느냐' 하니까 이새가 말하기를 '말 째가 하나 더 있기는 한대 그 아이는 지금 들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 째 아들 다윗은 이 자리에 초청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새에게 여덟 번째 아들이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딸만 일곱 명 낳다가 마지막 8번째 아들을 낳았다면 애지중지하는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들만 일곱 명을 낳다가 여덟 번째도 또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별 볼 일 없는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말 째가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아버지도 그 막내아들은 좀 부족해서 기대도 안하고 그 날 그 자리에 아예 부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그 막내아들을 불러다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우선 잘 생긴 것을 따집니다. 그리고 1등을 좋아합니다. 우리나라는 2등은 모두 별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소수 외에는 모두 실망 당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회사에서 사원을 뽑을 때도 우선 학교를 보고 성적을 보고 생김새를 보고, 키를 보고 실력을 먼저 봅니다. 모두 외적인 조건을 우선합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자꾸만 사고가 터지고 배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됨의 진정한 가치는 내면에 있는 것인데 세상에서는 그것들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배반이 일어나고 속임이 일어나고 불행한 사건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택하시는 방법은 사람들과 다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일등한 사람보다, 엘리트보다 꼴찌를 생각하십니다.
일등 하는 사람도 엘리트도 유능하지만 꼴찌하는 사람에게도 상당한 장점이 있습니다.
꼴찌 하는 자는 공부는 좀 못해도 순박함이 있고 순수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정이 있고 마음에 여유가 있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오늘 세상에서는 꼴찌를 무조건 무시하는데 공부 못한 사람이 후에 성공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꼴찌하는자, 가난한자, 배경 없는 사람, 자본 없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배경이 없다고 현재 공부에 쳐진다고 가진 것이 적다고 유산이 없다고 그런 것 때문에 비관하고 침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그 아버지도 그 아들이 왕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막내아들은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 형들이 훨씬 유능해서 자신 있게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막내아들을 불러다 그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외모를 보고 생김새를 보고 조건을 먼저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키를 보지 않으시고 그 마음과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희망을 가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작은 겨자씨를 중하게 여기십니다.
겨자씨는 작음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는 오늘은 이렇게 작지만 나중에 땅에 심겨지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려고 주님이 '겨자씨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겨자씨의 중요성은 '작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작은 겨자씨 안에 들어있는 생명력입니다. 그 생명력이 그 겨자씨가 지니고 있는 가치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작지만 이것을 땅에 심으면 크게 자라서 새들이 깃들 만한 은신처가 되고 쉼터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양을 따지고 부피를 따지고 크기를 따집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크냐,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길고 높으냐 하고 물량을 따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게들 지향합니다. 이사를 갔다 하면 몇 평이냐를 따집니다. 서로 크고 높은 것을 자랑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더 커지고 많아지고 높아지고 유명해지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크고 높고 잘 생긴 것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평생 풍부하게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살다보면 때로 한때 배가 고팠던 때가 있었던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요 추억이 됩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경거망동은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 잘생기고 예뻐지고 멋있고 날씬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기왕이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날씬하고 아름다움이 특출해서 그 인생이 참 불행하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잘생기면 누가 이 세상을 웃깁니까? 여러분 TV에 아주 잘생긴 사람이 나와서 웃긴다면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고 이주일씨는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웃겼습니다 오늘 좀 못생겼다고 비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참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많고, 크고, 높고 긴 것만을 따지지 않습니다. 결코 잘생기고, 키 크고, 부하고, 많은 것만 선호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게 들어있는 믿음 속의 생명력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정신이고 순전한 마음이고 맑고 깨끗한 영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그것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신장이나 아름다움이나 준수한 외모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았다면 다윗의 다른 형제들 중에서 뽑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보신 것은 외모가 아니고 그의 중심이었고 마음이었고 생각이었고 그의 맑은 영과 삶의 책임감을 보신 것입니다.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칠 때 생명을 내놓고 양을 지키는 그 용기 있는 모습을 하나님은 내려다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에게 당신의 백성을 맡기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다윗의 마음속에 간직되어진 그 생명력을 보신 것입니다. /할/
사람이 아무리 외모가 출중하고 조건이 좋고 배경이 좋아도 그에게 이 믿음이 없고 용기도 없고 거기에 생명력도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씨가 아무리 크고 실하다 해도 그 속에 생명력이 없다면 그 씨를 어디다 사용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겨자씨를 들고 비유로 교육하신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버려진 작은 돌멩이를 선택'하여 기초 석에 세우십니다.
눅20:17절을 보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석수장이들이 버린 돌이 때로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세상에서 쓸모 없다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때로 하나님이 부르셔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이 버리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불러내서 훈련시켜 큰 인물을 만드십니다. 예를 들면 무디 같은 경우입니다. 무디는 초등학교 밖에 공부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무디가 얼마나 무뎠는가 하면 요한복음을 찾으라면 창세기부터 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디는 어려서부터 왕따를 당합니다. 친구들이 너를 가까이 하는 것이 창피하다고 무시하고 따돌렸다고 합니다.
그 무디는 말하자면 버려진 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름도 좋아야 합니다. 그 이름이 무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한 시대에 불같이 쓰셨습니다. /할/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그 시대의 낙오자들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그 시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낙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도자 빌리 그래함도 전도사 때 교도소를 방문해서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말주변이 없는지 재소자들로부터 '너는 전도사 하지말고 다른 일이나 하라'고 야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를 별과 같이 모래와 같이 자손을 번창하게 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불러내셨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시려면 젊은 사람들을 택하고 체형이 다산체형을 골라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이 75세 된 아브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때로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 일 때가 많습니다. /할/
㈃그렇다고 여기서 여러분은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꼴찌만 불러 사용하시는 것이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 없이 사람을 선택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골라내신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함이고 충성됨이고 부지런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장점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요소들입니다. 하나님은 유능함보다는 진실을 보십니다. 재주보다는 진실함을 보시고 겸손함을 보십니다.
엘리트들, 일류 자들, 1등한 사람들은 성적은 좋으나 대부분 교만합니다. 자만합니다. 자기 과신에 빠져 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리고 서로 융합을 잘 못합니다. 긍정적인 정신도 부족합니다. 수용력도 적습니다. 사람이 가져야 할 인간성은 1등한 사람이나 엘리트보다는 꼴찌가 훨씬 더 좋습니다.
꼴찌에게는 책임감이 있고 열심히 있고 화합할 줄 알고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과 따뜻한 인간애가 있습니다. 그리고 꼴찌들에게는 교만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겸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런 마음을 높이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자만한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존 맥스웰'이라는 리더십 전문가가 쓴 책 중에 '인재 경영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존 맥스웰'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을 키우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사람을 키우는 일은 기업에서도 국가에서도 교회에서도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을 키우는데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 마음에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경제전문가들은 경영이라는 말의 개념을 사업이라는 말과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사업은 돈을 벌고 돈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영은 사람을 벌고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업이 잘 됐다.'는 말은 '돈을 벌었다.'는 말이고, '경영이 잘됐다.'는 말은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면 사업가 기질의 사람이 있고, 경영가 기질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질이 더 훌륭합니까? 사업의 능력 보다 경영의 능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영을 잘 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각자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그런 환경, 그런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면 성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할/
그러므로 사업을 잘하는 사업가 보다 경영을 잘하는 경영인의 마인드가 되어야 합니다. 사업가는 망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만, 경영인은 망해도 사람을 얻게 됩니다.
유명한 경영인 '앤드류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답니다. '나는 나의 비문에 '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을 쓸 줄 아는 지혜를 지녔던 인물 카네기, 여기 고이 잠들다.'라고 적고 싶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할/
②그 당시 상황을 예로 들어 외모로 판단하는 것을 질책했습니다(2-3).
초대교회에도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사람들이 좋은 자리에 앉도록 하고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이 오면 못 본 체 했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할/
③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4).
⑴'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구별해서 사람을 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목사만 사랑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장로님도 사랑하시고 권사님도 사랑하시고 처음 나온 새 신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남자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배운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끼리 서로 사람을 구별해서는 안됩니다. /아멘!/
⑵'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할 때 그 배후에 깔려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 사람과 친해지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래서 그 사람이 내게 이득이 될 것으로 판단되면 그와 친해집니다.
그러나 그가 내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는 눈 아래로 보아버립니다. 그러니 그 생각이 얼마나 악합니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9절에서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흑인이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앞에서 안내를 하던 백인 집사들이 못 들어가게 그를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백인교회입니다. 흑인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흑인교회로 찾아가세요' 흑인은 어쩔 수 없이 그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되돌아서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방금 교회로 들어가시는 것 같던데 왜 도로 나왔습니까?'
흑인은 슬픈 듯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랬군요. 실은 나도 백인이 아니라고 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흑인은 눈을 들어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안보입니다. 그제야 흑인은 그 분이 환상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보고 무시해 버리면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약2:13절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④하나님은 사람들이 차별하는 가난한 자를 축복하셨습니다(5).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네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⑴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⑵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⑶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⑷그들에게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이 가난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괄시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가운데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외모를 조금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등소평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중국의 거인이었습니다. 그의 키가 컸기 때문에, 그를 거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키는 불과 150cm 남짓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나라도 중국을 깔볼 수 없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등소평입니다.
그가 한 번은 닉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등소평은 미국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키가 크고 등소평은 키가 작으니까 우리가 생각하면 그가 자기 손을 올려서 악수를 해야 되는데, 등소평은 절대로 손을 올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부러 키 큰 미국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손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키 큰 미국 사람들은 악수는 해야 되겠고 어쩔 수 없이 등소평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공손한 모습으로 악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중국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악수를 하시는데 일부러 손을 내리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때 등소평은 '모르는 소리! 내가 13억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자네는 잊었는가?'
자기 밑에 13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콧대 높은 미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앞에서는 당연히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외모를 갖추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 때도 있습니다. 병들 때도 있습니다. 남들이 갖춘 외모를 우리가 갖추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택해 주셨습니다.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토록 유업으로 받는 백성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이런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다!' /할/아멘!/ (2014년 3월 2일 대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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