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그리스도인의 고품격(高品格)의 삶! (갈 6:1-1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3. 16. 13:10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고품격(高品格)의 삶! (갈 6:1-10)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대헌장'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복음을 통해 주어진 참 자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에서 자유, 사망권세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완전 자유 함을 얻게 되는 것이 인생 최고의 축복임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유는 어디서 오느냐?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5장에서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말씀하시고,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런 사람은 5:21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향하여 당부하기를 성령의 열매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5:16절에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면서 성령의 열매 9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5:22-23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갈5:25절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리고 오늘 본문은 5:25-26절로 이어지는 말씀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의 삶의 자세를 우리에게 당부하고 계십니다. /할/ ◀제목 소개!▶

 

  ①자신을 살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
  신앙생활은 자기를 돌아보며 사는 삶입니다. 자기를 잘 살피는 삶입니다. 고전3:18절에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하셨고, 고전11:28절에서는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성찬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을 소유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묻어 나와야합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그리스도인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범죄한 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 때도 교회 공동체 안에 범죄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옛날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범죄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잘못해서 실족해 버렸습니다. 죄악의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의 약점이나, 잘못, 실수가 드러나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수치를 느끼게 됩니다. 아담도 범죄한 후 부끄러워 숨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 당당하고 뻔뻔한 사람도 있지만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은 대부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을 도망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사람은 대부분 그 공동체를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나온 '드러나거든'이라는 말의 원문의 뜻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다.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죄를 짖고 실수를 하면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사람 만나기도 싫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고 깊은 영적 우울증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잘 권면해서 건져내야 하고 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아멘!/ 

  여기서 '신령한 너희는'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성도'를 가리키며, '바로잡는다.'라는 말은 '윤리적인 의미에서 이전의 좋은 상태로 회복시킨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본 절은 '만약 여러분 중에 범죄한 사람이 있다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여러분은 부드럽고 온화한 태도로 그를 이전의 좋은 상태로 회복시키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할/
  ▶바울은 1절 하반부에서 그들을 대하는 태도 세 가지를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⑴'온유한 심령으로' 대하라! 
  온유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 온유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이 온유는 여유 있는 마음입니다. 이 온유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이 온유는 성령 받은 자의 열매입니다. 우리 참 행복한 성도들이 이 온유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아멘!/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태양과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를 누가 벗길 수 있을 것인지를 시합을 했습니다. 그 때 강한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겼습니까? 아닙니다. 바람은 아무리 세차게 불었지만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미소를 띄면서 따뜻하게 비추일 때 나그네는 외투를 벗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한 심령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녹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멘!/
  신령한 사람은 형제가 범죄 했을 때 정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를 함부로 단죄하거나 미움과 증오로써 비방하지 않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또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형제의 잘못을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주고 잘못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온유의 열매가 드러나야 합니다. /아멘!/
  ⑵'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입니다.
  여기 '바로잡는다.'는 말은 '돌이키다. 그물을 깁다, 인격을 완성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책망하고 나무라고 정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어성경에는 '회복시킨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어적으는 본래 접골 즉 뼈가 어긋났을 때 뼈를 바르게 맞추는 일을 지칭합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깁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몸을 정상적으로 회복하게 하는 것이고 그물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원상 회복을 한다는 말입니다. 일어 설 수 없는 사람을 일어서게 해주는 것입니다.
  상처 난 부분을 드러내 놓고 후벼파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상처 난 신앙, 상처 난 마음, 상처 난 감정, 상처 난 자존심, 상처 난 인격'을 다시 치유해주고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멘!/
  사람이 어떠한 잘못으로 가정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잘못으로 직장에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실수로 교회에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들을 결코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을, 그렇지 않아도 낙심한 사람을 더 밟고 짓누르고 정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고 하시면서 정죄하며 죽이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할/
  ⑶'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어떤 사람의 잘못이 드러나면 교회도 매정하게 그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를 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 사람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술 한잔 먹고 풀어 버린다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점에 더 인색합니다. 은근히 따돌리고, 가볍게 보고, '속마음을 알았다, 당신의 본모습을 알았다. 이제까지 꼬리만 보았는데 몸통을 보았다.'라고 말하면서 그 사람과 상종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서로 비난하며 수군거립니다. 교회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다른 교회로 가든지 아니면 세상으로 빠져버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네 자신을 돌아 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은 것을 왜 모르고 엉뚱하게 시치미를 띠고 있느냐는 물음일수도 있습니다. /아멘!/
  여기 '너 자신을 살펴보아'에서 '살펴보다.'는 말은 '주의 깊게 쳐다보다, 응시하다, 조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조심해서 살피고 죄에 빠지도록 미혹을 받지 않으려고 유혹을 경계해야 할 책임이 각 개인에게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할/
  사실 자가의 모든 허물은 자기가 더 잘 압니다. 우리 모두도 실수 투성이 인생입니다. 약3: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만 실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똑같이 실수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더 큰 실수를 더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7:3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속에 들보는 모르고 남의 티만 보고 난리를 칩니다. /할/
  ▶여기 '네 자신을 돌아 보라'는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강조됩니다.
  하나는 '자신을 깨우라'는 것입니다. '잠자는 신앙을 깨워라, 어리석은 신앙을 바로 세워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잠자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 자신을 깨워야 하고 근신해야 합니다.
  이런 변형시조를 보았습니다. '까마귀 검다하여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많은 사람들은 남의 속을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겉 희고 속 검은 백로의 위선을 비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자신을 가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네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약점을 보완하며 살아가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②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2,5)
  일찍이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수고한다.'는 것은 능동적으로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또는 이루기 위해서 땀 흘려 애쓰고 혼신을 기울여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른 새벽부터 뜁니다. 끈이(식사)를 건널 때가 있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동분서주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큰 수고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습니다.
  다음으로 '무거운 짐을 진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무엇인가 짓 눌려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책감에 짓눌려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녀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짓눌려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중압감에 시달려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떻게 하다가 빚을 진 분이 있습니다. 갚기로 한 기한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갚을 길이 없습니다. 채권자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습니다. 늘 무엇인가가 가슴 한 곳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것이 무거운 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무거운 짐에 짓 눌려있습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허덕이면서 그 심신이 정말 곤고한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무슨 말씀인가? 우리의 모든 수고를 덜어주시겠다는 말씀이요,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할/
  ▶어떤 분이 리어카에 짐을 잔뜩 싣고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 쩔쩔매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친구들이 보고서 함께 힘을 씁니다. 뒤에서 밀고 앞에서 당깁니다. 아예 한 친구가 너는 잠시 쉬라며 대신 끌고 갑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십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려고 하십니다. 우리 짐을 대신 져주십니다. 우리에게 참된 쉼과 안식을 주십니다.
  그런데 마11:29절에 보면 '내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은 벗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번에는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우리가 스스로 짊어지고 가던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게 하신 후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짐을 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
  그러면 주님께서 왜 짐을 지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슨 짐을 지라고 하십니까? 본문은 우리가 져야 할 짐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⑴먼저 5절에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 맡겨 주신 짐, 그 짐을 성실하게 지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짐'이라는 말은 헬라어원으로 생각해 보면 '포르티온'이란 말로 '군인들이 행군할 때 지는 짐'을 말합니다. 안전무장 엄청 무겁습니다.
  군에 다녀오신 분들은 다 아시겠습니다만 군인들의 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평시의 짐으로 소위 '터불 백'이란 것에 담겨집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시의 짐으로 완전 군장이라 해서 짊어집니다. 그런데 이 짐들은 모두 자기의 짐입니다. 남들이 꾸려줄 수도 짊어져 줄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짐 챙기고 지고 가기에도 벅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각각 저마다 주님께서 주신 짐이 있습니다. 그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짐이 무엇일까요? 고전12:28절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주님께서 성도들 저마다에게 걸맞은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짐은 바로 '사명의 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맡기셔서 그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사명의 짐을 잘 지고 가야 합니다. /아멘!/
  ▶'9일 동안 천국 만들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부인이 가정생활이 힘들어 비관하며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너무 힘이 듭니다. 차라리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그러마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네가 죽은 후에 마지막 정리 잘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 정리를 잘해라' 부인이 그동안 엉망이던 집안을 3일 동안 정성을 다해서 깨끗하게 정리를 했답니다.
  3일 후 하나님께서 이 부인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예야 죽자니 아이들이 걸리지 네가 죽은 후에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마지막 3일간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사랑해 보겠니?' 이 부인이 안 하던 맛있는 요리도 하고 다시 못 볼 것이라 생각하고 마지막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3일 후 하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예야 이제 갈 때가 됐구나 마지막으로 네 남편 한번 봐라 남편 때문에 속 많이 썩었지 네가 죽은 후에 남편이 그래도 '참 좋은 아내였는데' 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니'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3일 동안 정성을 다해서 남편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할/
  그렇습니다. 우리가 맡겨주신 일을 최선을 다해서 섬기면 우리는 천국을 만들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맛 볼 수 있고,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멘!/ 그래서 주님께서 이 짐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성실하게 우리에게 맡기신 짐을 잘 지시기를 바랍니다. /할/
  ⑵2절을 보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짐이라는 말은 앞에서 살펴본 5절의 짐과는 다른 말입니다. 여기의 짐은 원문으로 '바로스'인데, 이것은 어떤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뜻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짐을 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있고, 직장에서도 있고, 교회에서도 이런 짐이 있습니다.
  제가 군 생활 할 때 부대에서 김장을 할 때인데 큰 트럭에 고춧가루가 들어왔습니다. 80키로 부대에 담겨있었습니다. 트럭 밑에서 등을 대고 실어주는 대로 짊어졌습니다. 50미터 정도는 가야하는데 10미터 가다가 그만 그 고춧가루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말하는 바로스라는 짐이 그런 짐입니다. 특별히 지고 갈 때 너무도 고통스러운 고통의 짐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무거운 고통의 짐을 지고 갈 때 그 짐을 도와 함께 져주라는 것입니다. /아멘!/
  특히 오늘 본문은 교회 안의 성도들이 서로 짐을 함께 지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서로서로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겨워하는 믿음의 형제를 돌아보고 그 무거운 짐을 함께 지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서 한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12절 이하를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몸은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예를 들어 발가락 하나에 가시가 박혀서 고통이 중하다면 온 몸은 그 고통을 함께 나눕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합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기능하기가 힘이 듭니다. 온 신경이 거기에 쏠려있습니다. 모든 지체가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무거운 짐을 지고 시달리고 있을 때 곁의 다른 지체들이 함께 그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짐을 나누어 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지체가 무거운 짐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올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럴 때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아멘!/
  ▶그러면 구체적으로 서로의 짐을 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로의 짐을 돌아봐야 합니다. ㈁짐 진자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어쩌면 일부러 이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 평상시 요단강가로 우회해서 가시던 길을 일부러 사마리아 지경 수가 성을 통과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만나 대화하지 않고 더더욱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과 공공장소에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우리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야 합니다. 곁에서 대화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면서 무엇보다 외롭고 고독해서 힘이 듭니다. 그 때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 큰 힘이 됩니다. 그리고 따뜻한 손을 내밀어 그 지친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온기로 전해 오는 사랑은 더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됩니다. /아멘!/
  ㈂어떻게 짐을 져주어야 합니까? 우선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큼 확실하게 무거운 짐을 나눠지는 길이 없습니다. 위해서 중보 기도할 때 그 짐은 훨씬 반감이 됩니다. 그리고 함께 그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해 도울 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씀처럼 함께 짐을 나누면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짐을 지는 삶입니다. 우선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위한 사랑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믿/아멘!/
  ▶눅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바른 이웃의 섬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보면 잘못된 모델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제사장이고 다른 하나는 레위인입니다. 이들은 모두 성전에서 일하는 소위 성직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도 돕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헌신한다는 사람들이 정작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외면해 버리는 모순을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네 이웃의 무거운 짐을 져준 그런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그를 통하여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일 4:7-8절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리고 요일 4:20-21절의 말씀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할/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새롭게 제시해 주시는 모델 선한 사마리아인의 특징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델을 따라 우리가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눅10:29절을 보면 율법사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면 자신이 도와야 할 이웃은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도와야 할 사람들을 따져보고 돕겠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도울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자세히 살펴보고 돕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우선 이방인들은 도울 수 없었습니다. 율법에 도우라고 명시되지 않은 사람들은 도울 수 없었습니다. 저들은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그 사람을 도와도 되는지 여부를 따지고 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델로 제시한 사마리아인은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냐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다급한 필요만 보았을 뿐입니다. 죽어 가는 그 생명만 보았을 뿐입니다.
  당시 역사적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돕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오랜 세월 무시를 당해왔고 심지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라면 치를 떨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그런 편견과 오랜 민족 감정을 뛰어 넘어서 돕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점을 새로운 모델의 주요 특징으로 손꼽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사랑은 사람을 가려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는 안돼!'하면서 사람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눅10:29절을 보면 율법사의 태도에 대해서 누가는 이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 율법사가 이웃사랑에 나서려 한 것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6:1-4절에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할/
  ▶미국의 역대 퍼스트 레이디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은 인물은 4대 '매디슨' 대통령의 영부인 '돌리 매디슨'이라고 합니다. 한 번은 기자가 이분에게 물었습니다.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분이 깜짝 놀라면서 대답하기를 '제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성경 말씀대로 차별 없이 사랑하려 했을 뿐입니다.' 아무 것도 보상을 바라거나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할/
  ㈂말없이 실천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묵묵히 강도 만난 이웃을 도왔습니다. 사랑을 그저 몸으로 실천했을 뿐입니다. 실천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런데 짐을 외면하면 어떻게 됩니까? 고전12:26절에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우리 모두 한 지체임을 꼭 기억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③각각 자기 일을 살피라(4)
  여기 '각각'이라는 말과 '자기의 일'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자기의 일이라는 여기에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사명'과 '책임'입니다. 자기 사명을 인식하라는 것이고 사명에 따는 책임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사명과 책임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남편의 책임, 아내의 책임, 이것은 남편의 사명과 아내의 사명에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각 자기의 일을 감당하는 인생으로서 성실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기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생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명은 성스럽고 책임은 우리에게 보람을 줍니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사명은 책임이 따를 때 열매를 맺고 우리에게 유익과 보람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
  ▶미국 대통령들이 가장 즐겨본 영화가 '하이 눈'이라고 합니다. 서부의 사나이 '케리 쿠퍼'와 '그레이스 켈리'가 나오는 이 영화는 명화 중의 하나입니다. 역대 대통령이 이 영화를 많이 즐겨본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그 스토리가 아주 단순하지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공 케리 쿠퍼의 고뇌의 결단과 내가 이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여행을 포기하고 자기의 목숨을 걸고 그 결전에 임하는 사명을 다하는 책임 있는 희생이 이 영화의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아마 대통령들이 이 대목을 그렇게 좋아한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고뇌에 찬 결단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최종결단을 해야 하는 사람이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안일과 개인의 기쁨을 버리고 마을로 돌아오는 보안관과 같은 사명감, 그리고 그 마을을 지켜내는 책임성이 대통령의 덕망이 아니냐는 메시지입니다.
  그는 결국 전투하여 이깁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악당들을 다 물리치고, 자기 가슴에 붙어있는 보안관 마크를 떼 내어 바닥에 던지고는 그 마을을 떠납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퇴임 후에 모든 영광을 국민에게 돌리고 떠나가는 의연한 모습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담긴 지도자의 고뇌, 결단, 사명, 희생, 책임과 같은 메시지가 미국 대통령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평론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은 사명의 사람으로 살아야 사람이지 사명을 저버리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져야 하나님의 자녀이지 자기의 십자가를 팽개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의로운 결심, 그것에 따르는 희생을 감수할 줄 아는 사명과 책임의 사람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보시고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아멘!/

 

  ④주의 종들을 잘 섬기라(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바른 섬김을 말하고 있습니다. 섬김은 배려하는 것이요, 관심을 가지고 살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으려면 목사와 성도들이 모든 좋은 일에 함께 해야 합니다. 성도와 목회자간에 아픔도, 눈물도 함께 하며, 기쁨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목회자들을 섬기고 대접할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의 종을 대접하다가 복 받은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넴여인의 이야기는 감동을 줍니다(왕하4:8-37).  
  히13: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할/

 

  ⑤스스로 속이지 말라(3,7-8)
  ⑴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아니 하십니다. '하나님은 만흘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십니다.
  여기 '만홀'이라는 말은 '코방귀를 낀다'는 말로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우롱한다'는 말인데 그 분은 인간들에게 절대로 우롱을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아무도 못 속입니다. 악을 심는 자는 악을 거두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3절에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전체의 결론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할/  
  사람은 누구나 다 제 잘난 맛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어느 두 집사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집사님만 삼일 밤 예배에 참석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여자 집사님은 일이 있어서 그 날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집사님이 삼일 밤 예배에 다녀오더니 달라졌습니다. 평소에 안 하던 친절을 베풀어주고 뜨겁게 사랑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 집사님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하! 남편이 삼일 밤 예배에 참석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구나!'
  그래서 그 다음 날 과일이 잔뜩 들은 바구니를 사들고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어젯밤 설교가 참 좋았다고 하지요? 주보를 보니까 제목이 사랑이었는데 무슨 내용으로 설교하셨나요?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나요?'
  그랬더니 이 고지식한 목사님은 센스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했는데요.' 상상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할/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이 그러했습니다. 자기들이야말로 가장 바르게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잘 믿는 사람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방하는 것은 곧 '나는 의롭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가증스럽게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고 정죄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⑵'스스로 속이지 말라'

  스스로 속이면 먼저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남에게 속기 전에 자신이 속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전에 자신이 마귀에게 먼저 팔린 것입니다.
  사람이 남을 속이면 자신을 속이게 되고 하나님을 속이게 됩니다. 이것은 다 연관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대로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 보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불의하면 불의한대로 주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면 안 됩니다. 진실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할/

 

  ⑥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8)
  이 말씀은 종말론적인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은 베풀고 나누는 친절한 행위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추수하게 될 곡식이 결정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할/ 그렇습니다. 사람은 매일 매일 씨를 뿌리며 살고 또 그 뿌린 씨의 열매를 거두며 사는 존재입니다. 농부만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씨를 뿌리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 전체가 파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을 무시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강도나 사기꾼, 도둑놈들입니다. 이런 무리들은 심지 않고 거두겠다는 심보입니다. 또 투기꾼들도 있습니다. 자기가 쓸 만큼 물건도 사고 땅도 사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뻥튀기 할 목적으로 사는 땅은 심지 않고 거두겠다는 욕심입니다.
  어떤 칼럼이스트는 '벼락부자, 벼락감투를 쓰려는 생각은 벼락 맞을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이 내용 속에 대자연의 원칙이 들어 있으며 인간 삶의 지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지표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술을 심으면 알코올 중독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담배를 즐기던 사람들은 폐암이라는 열매를 얻게 되고, 원수를 많이 맺는 사람은 인생을 마감할 때, 외톨이라는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심으면 영생을 거둡니다. /할/

 

  ⑦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9-10)
  ⑴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피곤하지 아니하면'은 '지쳐서 쓰러지지 아니하면, 포기하지 아니하면'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지쳐서 쓰러지지 말고, 환경이 변해도, 내 감정이 아무리 변해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축복이 늦어지는 것 같아도, 계속해서 낙심하지 말고 축복의 씨를 심어두면 거둘 때'가 반드시 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그런데 언제 피곤이 옵니까? ㈀일이 잘 안 되면 피곤합니다. ㈁꿈을 잃어버리면 피곤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항상 생기가 넘치게 됩니다. 열정이 생깁니다. 힘이 솟구칩니다. 꿈을 버린 사람은 밤낮 지쳐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모험을 모릅니다. 도전할 줄을 모릅니다. 삶이 단조롭습니다. 안일하게 하루하루 살아 갈 뿐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만듭니다.
  ㈂즐겁게 살지 않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즐겁게 살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면 피곤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요셉이 종살이, 감옥살이하면서 한 번도 짜증을 부린 적이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헛된 일을 하다가 절망을 합니다. 그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헛된 일 하다가 낙심하는 것은 당연히 절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자는 하나님이 붙잡아 주십니다. /할/
  ⑵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복이 되어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믿음의 형제들에게 더욱더 사랑과 친절을 베풀어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구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남극과 북극의 에스키모 인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프리카 밀림 속에 있는 토인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와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든 이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푼다면, 주안에서 하나 된 형제들에게 더욱더 그러해야 될 줄 압니다. /아멘!/

 
  ☞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까? 그리스도인답게 살라고 주신 교훈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어느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총각시절에는 시골에서 교편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학교로 출근하기 위해서 시냇물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앞에 놓여있는 징검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디디면서 건너다가 그만 잘못 놓인 돌을 밟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신발도 다 젖고, 바지도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젖은 몸으로는 학교에 갈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때마침 서울에서 잠시 내려오신 어머니께서 집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젖은 몸을 보고서 딱하다는 듯이 물어보셨습니다. '얘야, 어쩌다가 그렇게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느냐?' 아들은 대답하기를 '예, 어머니. 제가 징검다리를 디디고 시냇물을 건너다가 그만 잘못 놓인 돌을 밟아서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얼른 되물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밟았던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왔느냐?' 아들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얼른 옷 갈아입을 생각만 했지, 미처 돌을 바로 놓아야 된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나무랐습니다. '이놈아, 너 그런 식으로 해서 무슨 선생이 되겠다고 그러느냐? 얼른 가서 돌을 바로 놓고 오너라. 그리고 나서 옷을 갈아입도록 해라!'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참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해서 얼른 가서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그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돌을 바로 놓는 마음으로 매사에 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의 마음도 바르게 되고, 모든 사람들도 그 사람을 바르게 보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
  오늘 본문의 교훈도 삶의 현장에서 바른 돌을 놓는 자세로 살아가라는 교훈입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고, 또 다른 사람도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할/ (2014년 3월 16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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