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쓰시겠다 하라! (막 11:1-10)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사냥꾼이 노루사냥을 떠났습니다. 산 속에서 노루사냥을 하는데 갑자기 심한 눈보라가 몰아닥쳤습니다. 그는 얼마가지 않아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눈 위에 나있는 발자국은 바람 때문에 다 지워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눈 덮인 산 속의 모습은 평소하곤 완전히 딴 판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계속 헤매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되어 결국 그는 내려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 실종된 그를 찾으러 구조대원들과 그의 가족들이 그 산 속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하얀 눈을 이불 삼아 엎드린 채로 싸늘하게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가 죽은 바로 옆에 큰 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는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주변에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불안과 초조 속에 헤매면서 인생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에서 돌파구를 찾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돌파구를 찾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잊기 위해서 세상향락에 자기 몸을 맡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들입니다.
이 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렇습니다. 오직 우리의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
10절에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여기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구세주여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소원을 담은 감탄사입니다. 호산나는 우리말로 '만세'입니다. 그렇습니다. '위에서 오신 이여, 만세!' 모든 사람이 구세주를 외치고 만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할/
▶'카운트다운'이란 말이 있습니다. 카운트는 보통 '숫자'를 말하는데, 그것을 업(up)이 아닌 다운(down), 그러니까 가꾸러 센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인공위성이나 우주선 등의 로켓 발사 준비 작업을 정확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발사 예정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거꾸로 시간을 읽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로켓발사는 초(秒)단위로 진행하게 되므로 '초읽기'라고도 합니다. 로켓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많은 작업이 수반되므로 빈틈없이 진행하기 위해 그 상황을 초단위로 단계화하고 있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이젠 널리 통용하게 되었습니다. 책이나 영화제목도 나왔고, 만화나 노래에도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새해가 시작되는 마지막 순간에 온 세계의 사람들은 카운트다운을 외치며 새해를 맞이합니다.
또한 중요한 이벤트나 행사가 진행될 때에도 카운트다운을 외치며 흥을 돋우는 것을 봅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과 죽으심과 부활을 카운트다운을 주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 동안 고난을 받으십니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축하하는 주일입니다. 한때 이 주일은 '호산나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할/ ◀제목 소개!▶
①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고 계십니다.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하여 그 나라의 중심인 서울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서울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출세하시려고 올라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죽으려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깊은 영적인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⑴고난과 죽음을 맞이하러 올라가셨습니다.
막10:33-34절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간다는 말씀입니다. /할/
⑵'인류의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대관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이 즉위할 때,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그런데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어느 누구도 잔치를 베풀거나 대관식을 열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가지시기로 결정하고 나귀를 타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할/
②나귀를 타고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예수님 당시 세계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또한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B.C. 63년 로마의 속령이 되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인 이스라엘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허락해 주었고, 종교적 활동을 보장해 주기도 했으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철저하게 지배권을 행사했으며, 무엇보다 소요사태를 차단하기 위한 치안유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월절 같은 절기에는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에 무장혁명을 꾀하는 열심당을 비롯하여 유대 독립을 위한 폭동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의 예루살렘이, 지금이나 그때나, 그 이름과는 다르게 세계에서 제일 평화가 없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이런 곳에 예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 그의 인류구원 사역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가장 큰 분쟁지역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세계를 평화로 점령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왕'으로 오시는 예수께서는 임금이나 개선장군이 타는 말을 타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당시 개선장군은 군마를 타고 칼을 높이 쳐들고 입성하여 많은 시민들로부터 박수와 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는 그 당시 보통의 유대 사람들이 사용한 교통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나귀를 타고 다니는 목자들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때가 묻어 있는 옷을 입고 나귀를 탄 그 모습에서는 전혀 존귀함이나 권위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의 왕'이 권위도 없이 이런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다니 참 창피한 행진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룬 행사였습니다.
슥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스가랴의 예언은 장차 오실 왕은 전쟁을 통해 세상을 정복하는 임금이 아니라, 화평을 전하며 평화의 왕국을 건설할 겸손한 왕이라는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슥9:10절에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할/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평화의 왕이시요, 인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불란서 혁명이 터지고 나서 눈부실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젊은 지도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입니다. 그의 등장을 지켜보며 온 유럽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흥분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26살 먹은 천재 음악가였던 베토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을 무척 존경했습니다. 자기보다 한 살 위였지만 그의 인물됨에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폴레옹에게 조금이라도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어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목도 나폴레옹의 이름을 따 '보나빠뜨라 교향곡'이라고 붙이고는 5년 후에 나폴레옹에게 증정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폴레옹이 마침내 '황제에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베토벤은 너무 실망한 나머지 '보나빠뜨라'라는 제목을 써두었던 교향곡의 표지를 찢어버리며 이렇게 소리질렀다고 합니다.
'그 사람도 속인에 지나지 않았어. 자기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황제가 되다니 정말 실망했어.' 그리고는 그 교향곡 이름을 '심포니아 에로이카'로 바꾸고, 특별히 제 2악장에는 '장송 행진곡'이라는 음울한 제목을 달았다고 합니다. /할/
지도자에 실망한 사람이 어디 베토벤뿐이겠습니까? 세계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돌아보면 세상에 등장했던 왕이나 통치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이 사람들에게 안겨 준 것은 결국 실망과 허탈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냉혹하게 교훈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지도자는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지도자에 대한 기대의 역사는 곧 실망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성경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이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저 분만이 인류가 기다리는 진정한 왕'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할/
당시의 예루살렘에는 로마 정부가 파송한 빌라도를 위시한 지도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아마 빌라도는 '예수라는 사람이 지금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데 모든 백성들이 그를 향해서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외치고 있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보고를 받은 빌라도는 아마도 술잔을 들고 마시다가 너무 우스워 배꼽을 쥐고 웃다가 술잔을 다 쏟지나 안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주제에 왕이라고?'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는 사람을 놓고 인류가 기다리는 왕이요 구원자라고 누가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엄숙하게 증거합니다. '예수만이 진정한 왕이요, 예수만이 인류의 구원자이시다.'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믿/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자마자 어린아이들까지 합세를 해서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하고 외쳐댔습니다. 그것을 보고 흥분한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곁에 와서 따지고 들었습니다. '왜 저런 소리를 지르도록 내버려두는가? 저들의 입 좀 다물게 하라.'고 하자 그 때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소리 지르지 아니하면 여기 있는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눅19:40)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인류의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그를 환호하지 아니하면 돌이라도 소리를 지르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은 만 왕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진정한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 초라하게 그 분이 입성하고 계십니다.
▶삼하에 보면 다윗이 처음 왕이 된 곳은 헤브론입니다. 이곳에서 유다 지파를 7년 6개월 다스렸습니다. 그가 통일 왕국의 왕이 된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시온 산성 즉 예루살렘 성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 성에서 33년 간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예루살렘에 성도를 세운 후 하나님께서 이 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왕들이 이 예루살렘에서 통치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통치하는 곳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물건입니다. 즉 하나님을 상징하는 성물입니다. 다윗은 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옴으로써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법궤가 예루살렘에 오게 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참된 신정정치가 실현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가 들어오는 날 다윗이 그렇게도 기뻐했던 것입니다. /할/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통치자들이 많았습니다. 분봉왕도 있었고, 로마 총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뜻만이 난무하고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진정한 통치자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내 인생에 왕으로 오셔서 나를 다스리고 싶어하십니다. 우리 가정에 왕으로 오셔서 가장이 되고 싶어하십니다. 우리 교회에 왕으로 오셔서 교회다운 교회로 이끌고 싶어하십니다. 우리나라에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고 싶어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겸손히 그분을 맞아야 합니다. 그분을 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멘!/
③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여기서 나귀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⑴나귀는 누구도 이끌 수 있고, 누구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조그만 어린이들도, 노인들도, 여자들도 모두 끌고 다닐 수 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은 왕이신 데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누구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왕이십니다.
죄인이든, 병든 자이든, 버림받은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어린아이까지라도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할/ 이것이 축복입니다. /아멘!/
⑵나귀는 무거운 짐을 싣고 끌고 가는 인내가 한이 없는 짐승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끌고 가십니다. 저의 짐을, 여러분의 짐을, 우리 죄악의 짐을, 무거운 걱정 근심의 짐을 홀로 지시고 대신하여 끌어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하여 져주시는 분이십니다.
⑶나귀는 순종을 잘하는 동물입니다. 주인에게 죽기까지 복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내어놓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좇아 죽기까지 복종하신 참으로 나귀와 같은 삶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⑷어린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심기 위해 오셨습니다.
⑸나귀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힘이 있지만 언제나 약한 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겸손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라도 사랑하고, 누구라도 이해하며, 누구라도 용서하시는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만 못나도, 조금만 못 배워도, 조금만 가난한 사람을 만나도 얼마나 있는 척하고 군림하며 남을 힘들고 피곤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다섯 손가락이 모여 각자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먼저 엄지손가락이 뽐내며 말하기를 '나는 엄지야, 최고를 가리키잖아' 그러자 둘째도 지지 않고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집을 수 없어, 또 무엇을 가리킬 때 내가 없어봐' 그러자 이번엔 가운데 손가락이 끼어 듭니다. '나는 가장 키가 크단다' 그렇다고 약지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죽기 싫은 약지가 '사랑하는 사람이 반지를 어디에 끼워주는지 아니? 바로 내 손가락이야. 그러니 나는 가장 사랑 받는 손가락이라고'했습니다. 그런데 새끼손가락만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던 새끼손가락 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야 너희들 내가 없으면 병신들이야.'
이게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믿음 좋다고 하지만 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앞자리에 올려놓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 왕의 왕이신데도 불구하고 겸손의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할/
④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3)
여러분! 주께서 보잘 것 없는 나귀새끼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며 겸손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말을 잘 못한다고 사양한 모세를 굳이 들어 쓰셨고, 이새의 아들 중에 인물 잘난 큰아들 엘리압을 쓰지 아니하시고 8번째 말 째인 다윗을 들어 쓰시면서 사무엘에게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을 들어 크게 쓰십니다. /믿/
오늘 이 자리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나오셨습니까? 주님이 은혜로 세우시면 한 세대 크게 들어 쓰실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가난한 사람이 나오셨습니까? 천국이 당신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인생을 비관하는 분이 있습니까? 성령의 불만 밭기만 하면 세상에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무능하다고 자책하지 마시고 가진 것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인생살이에 조금 뒤졌다고 열등의식이나 실패의식을 가지지 마시고 예루살렘의 나귀새끼처럼 당신의 등위에 예수님을 태우시고 호산나를 외치며 앞을 향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등에 세상의 것들인 근심이나 걱정, 가난이나 질병, 실패나 좌절을 싣고 고통을 당하며 나가지 말고 예수님을 태우고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태우면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가난 질병이 자취를 감춥니다. 이유는 그분은 기쁨이요 화평이기 때문이고 부요와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시는 신령한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을 들어 쓰기를 원하십니다. 입을 들어 쓰시고자 하는 자는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 왕이 될 것이고, 손을 들어 쓰기를 원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충성자가 될 것이고, 내게 주신 물질을 들어 쓰기를 원하는 자는 축복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훌륭한 자도 들어 쓰시지만 보잘 것 없는 나귀새끼도 들어 쓰십니다. /아멘!/
㉠'주가 쓰시겠다'고 하시니 '아멘!'하고 순종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⑴나귀를 드린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을에 내려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왜 끌고 가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의아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만으로 그냥 풀어 줄 것인가?
그런데 제자들이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나귀 주인은 아무 소리 않고 풀어 주었습니다. 6절에 보니 '이에 허락하는지라' 4절에 먼저 '그것을 푸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귀를 '풀어서 주었다.'는 것입니다. 매여 있으면 주님이 쓰실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얽매어 있습니다. 가정에 얽매어 있고, 직장에, 사업에 얽매어 있고, 환경에 얽매어 있습니다. 쓰임 받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풀어서 주님께로 끌고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풀어야 합니다. 죄의 끈을 풀고, 세상의 끈을 풀고, 이기주의의 끈을, 구습의 끈을, 고집의 끈을 풀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의 끈에 꼭 꼭 묶여서는 주님께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은 안 끊깁니다. 무엇으로 끊어야 합니까? 성령의 검으로 말씀의 검으로 끊어야 합니다. /할/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 주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름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 사복음서에서 다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도 말했고, 마가도 말했고, 누가, 요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보아도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무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명의 충성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그만 일을 하고서도 이름을 나타내려고 안간힘을 다 쏟습니다. 그래서 조금 선심을 쓰고서도 과대 선전하고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서도 끝까지 무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삭막하고 메마른 것 같아 보이지만 오늘날도 이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숨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큰일을 했으면서도 나타내지 않고 남을 돕는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숨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래도 이 정도라도 지탱이 되고 있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봉사라고 하는 것은 공개가 되면 그 향기가 반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내지 않을 뿐이지 묻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언뜻 보면 엉망진창인 것 같고, 사람이 사람을 팔아먹고, 사기와 속임과 부정과 거짓이 난무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좀더 관심을 가지고 깊이 들여 다 보면 이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름도 없는 충성 자, 여기 나귀 임자가 바로 이름도 없는 충성 자입니다. /할/
㈁빛도 없는 충성 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쨌거나 영광스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하는 이름과 명예와 빛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경력입니까?
천국의 새 예루살렘성의 기초 석에는 이 12사도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람들입니까? 예수를 위해서 순교만 해도 영광인데,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는 장로만 되어도 영광인데, 예수님의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영광입니다.
12사도 중에 바돌로매, 시몬, 다대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을 한 사람들입니까? 이름뿐인 제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천국의 예루살렘성 기초 석에 기록되어 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기 이 나귀 주인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시골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올림픽에서 한 사람이 금메달을 따면 신문에 얼굴이 나오고, TV에 비쳐지고, 박수와 환호와 찬사가 쏟아지고, 금으로 만들어진 메달이 주어지고, 상금이 수여되며, 하루아침에 영웅이 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 혼자서 메달을 땄습니까? 그 사람이 금메달을 따기까지 그 뒤에서는 빛도 없이 충성스럽게 함께 훈련하면서 함께 땀을 흘린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얼굴도, 상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들이 숨어서 큰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숨어 있는 사회,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이 같은 나라가 부강한 나라입니다. 빛 없는 충성자, 여기 이 나귀 주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보상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농촌에서 소 한 마리는 큰 재산입니다. 그래서 농촌 사람들은 소를 기르느라고 수고를 많이 합니다. 그렇게 키운 소 한 마리를 선뜻 내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나귀 주인도 분명히 나귀 한 마리가 큰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길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두말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 나귀가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그저 만족스럽게 바침으로써 기뻐했을 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정성껏 기른 나귀를 주께서 요긴하게 쓰신다니 그것으로 보람과 기쁨을 느낀 것입니다. 이것이 보람이고 뜻이고 기쁨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이 같은 뜻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리마대 요셉 같은 이가 그렇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무덤을 돌을 깍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부자인데 얼마나 좋은 자리에, 얼마나 좋게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 무덤을 주님께 바쳐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예비해 놓았던 것을 바침으로써 기뻐했고 만족했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를 자신이 대신 졌습니다. 사람들이 욕하고 조롱하고 비웃었지만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또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도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서 철저하게 희생당한 사람입니다. 이 모두 다 보상 없는 충성자들입니다. 이것이 참 헌신이고 충성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을 보십시오. 오늘은 철저하게 보상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조금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약간이라도 손해가 올 것 같으면 데모부터 합니다. 길거리에 눕습니다. 길을 가로막고 시위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의 불편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나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남의 손해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는 말 한 마디에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상 없는 충성자입니다.
㈃이 사람은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하니 아무 말 없이 나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를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이유가 많습니까? 바쁘고, 시간이 없고, 형편이 안 되고, 사람이 마음에 안 들고, 적성에 맞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하고 그럽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용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네 인생이 필요하다.'고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인생, 주님이 필요하시다 하면 내놓아야 합니다.
무조건의 충성,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의 요구라면 조건과 핑계가 없는 무조건의 충성, 이것이 신앙인의 인생관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도맡아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귀 주인은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이 사람은 참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참 기쁨과 보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쓰임 받을 때입니다. 순교자는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곳에서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헌신자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질 때 기쁨과 보람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줄 때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귀의 주인은 자신이 귀하게 기른 나귀 한 마리를 주께 드림으로써 보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마침내 슥8장에서, 사62장의 그 예언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아멘!/
㉡겉옷을 드린 사람들이 헌신도 돋보입니다.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만들어 예수님이 편히 앉으실 수 있도록 한 사람도 있고 겉옷을 길에 편 사람도 있습니다.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존경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지금도 외국의 국왕이나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는 공항에 붉은 카펫을 깔아서 영접을 합니다. 바로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복자가 말 타고 올 때에 허리 굽혀서 절하는 것은 진정한 존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 겉옷을 펴는 것은 진정한 존경입니다. 억지로 동원된 무리도 아니고 강요에 의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누가 권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겉옷을 벗어서 주님을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정중한 예의를 표한 것입니다.
만 왕의 왕이시며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이와 같은 예의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께 온갖 예의를 다하여야 합니다.
겉옷은 계급장과 같습니다. 자신의 체면의 옷입니다. 나의 옛 사람의 옷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벗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사장노릇 하려고 하는 사람, 전무노릇 하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못 태웁니다. 교회에 와서는 다 하나님의 어린양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정중한 예의를 갖춰 주님을 태우려면 계급장을 떼야합니다. 체면의 옷도 벗어야 합니다.
옛날 이승만 대통령은 정동 감리교회에 나왔을 때 목사님이 '이 앞에 와서 앉으시지요'라고 했을 때, 거절하면서 '저는 여기 대통령으로서 온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 왔습니다.' 바로 그런 자세 없이는 안됩니다.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최상의 것을 드리는 표현도 됩니다.
우리 주님께는 항상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신앙도 최상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중한 예의로서 최상의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하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요단강 계곡에 아름드리 나무 세 그루가 있었습니다. 세 나무는 서로의 꿈을 나누었습니다. 한 나무가 말합니다. '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기둥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러 오는 것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어야지'
두 번 째 나무가 말합니다. '나는 지중해의 유람선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즐기는 것을 보리라'. 또 한 나무는 말합니다. '나는 큰 나무가 되어 가지를 뻗어 사람들이 산에 오를 때 그늘 아래 쉬면서 나를 쳐다볼 때마다 하늘을 보게 해야지'
어느 날 목수가 와서 나무들을 잘랐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고자 했던 나무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가서 짐승의 밥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가 태어나 그 위에 누웠습니다.
유람선이 되려고 했던 나무는 작은 돛단배가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의 배가되었는데 예수께서 타시고 설교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그늘이 되고 하늘을 쳐다보게 한다던 나무는 십자가가 되어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비록 저들의 꿈은 다 깨어졌지만 깨어진 꿈속에서 주님의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지라도 예수님을 모신 구유처럼, 예수님이 타신 배처럼,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처럼 주님을 위해 쓰임 받는다면 영원히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큰 인물이 되리라, 큰 기업가가 되리라, 큰 명성을 날리는 학자가 되리라' 했던 꿈이 깨졌을지라도 주님을 모시기만 하면, 아기 예수를 누인 구유처럼, 타시고 설교하신 배처럼, 주께서 달리신 십자가처럼 역사의 종말이 올 때까지 하늘가는 밝은 길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크게 쓰임 받지 못했다고 탄식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주님을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할/
▶의사였다가 기독교 작가가 된 'A. J. 크로닌'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남들이 외면하는 광산촌에서 의사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산촌에 한 그리스도인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 간호사는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면서도 아무 불평 없이 무엇이 그리 기쁜지 늘 웃으며 정성껏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크로닌 박사가 보기에 하도 안쓰러워서 그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지닌 가치만큼 여기서 대우를 못 받고 있어요. 그걸 알고 있나요?' 그러자 그 간호사가 대답했습니다. '박사님, 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할까요? 저는 그냥 제가 살아 있고 그분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에요.' /할/
▶'샘플만 써 봐도 알아요'란 광고로 유명한 '참존'화장품 설립자는 김광석 장로입니다. 그의 저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서울에 올라가 성공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약대를 졸업한 후 을지로에 4평 짜리 약국을 개업했습니다. 밤마다 좁은 약국에서 피부병 약 연구에 매달리던 그는 피부병 특효약을 개발하고 피부병 전문 피보약국을 열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무허가 제약혐의로 보건범죄단속법에 걸려 검거대상이 되어 범법자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5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마지막으로 찾은 양산 통도사에서 인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 사찰 방에서 자신의 기사가 실린 빛 바랜 오래된 신문을 우연히 보면서 억울함과 답답함의 눈물을 흘리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석가를 찾아야 할 그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불렸습니다. 여기서부터 그 분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이 됩니다.
그는 산에서 내려와 자수를 한 그는 56일간 구치소 생활을 마친 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기도 중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 그는 1984년 직원 10명과 함께 기초전문화장품 회사 '참존'을 설립하였습니다.
청개구리 경영방식으로 스킨과 로션 등 기초화장품만 생산하던 참존은 드디어 국내브랜드 파워 1위 기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김 장로는 부채가 많은 가운데서도 십일조를 꼭 드렸습니다.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생각하며 중국 연변의 과기대, 미국 플러스 신학대에 장학금을 보내는 일들을 통해 끊임없이 주님이 주신 일을 감당했습니다. /할/
오늘 본문인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은 플러스 신학대에 백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한 그의 입에서 나온 성경구절입니다.
그의 물질관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입니다. 김 장로는 말합니다. '주님은 물질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데 무어라 하겠습니까? 그저 순종할 따름입니다.' 주가 사용하시겠다면 언제든지 무엇이든 아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로드쉽(Lordship) 즉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신다는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주님이 삶의 주되심을 인정하느냐 여부에 따라 인생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할/
▶삼성 휴대폰의 '애니콜 신화'를 만들어 낸 사람은 이기태(李基泰) 사장입니다.
그분은 그때는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사장으로 있었습니다. 그가 남모르게 해 오던 일들이 최근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TV를 보면서 병원비가 없어 애타하는 사람, 시골교회, 해외선교, 가난한 사람 등에게 아낌없이 물질선교를 해온 것입니다.
대기업 사장인데도 불구하고 재산은 대구에 1억 8천만원짜리 집 한 채뿐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조건 선교하는 사람입니다. 부인은 한 술 더 떠서 도움이 필요하면 카드 빚을 내서라도 선교를 했다고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주님께 쓰임 받도록 만든 순종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할/
⑤'호산나' 찬송 속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호산나'라는 말은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외치던 군중들의 '호산나'가 금요일에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요19:9) 하는 아우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될 것을 다 아셨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이 부르짖음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이 부르짖음을 기뻐하십니다.
'이제 우리를 로마의 압제와 탄압에서 해방시켜 주시오! 가난과 질병과 고통의 멍에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오!'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했습니다. 사람들만 그런 기대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곁에서 모시고 다녔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가시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본문의 앞장 막10:33-34절에서 예수님께서 자기가 당하실 일(십자가의 죽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무지 무관심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약삭빠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무엇을 구했습니까?
막10:37절에 보세요!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새 임금으로 등극하시면 높은 자리를 자기들에게 달라는 말입니다. 제사는 안중에도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바로 그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제자들은 엉뚱한 요구나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래서는 안됩니다. /할/
여러분! 이제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주님의 십자가는 결코 승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영광과도 거리가 먼 것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입니다. 주님이 걸으신 그 고난의 길은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낮고 천한 자리로 향해서 주님은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 십자가 고난의 현장에서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현장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 그 음성을 듣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만을 따르기로 다짐하는 충성스러운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4년 4월 13일 대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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