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사순절의 명상/주님 가신 길, 그 길 따라 기적을 만나자! (눅 18:35-4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4. 6. 08:58

사순절의 명상/주님 가신 길, 그 길 따라 기적을 만나자! (눅 18:35-43)

 

  미국 시카고의 한 빈민가에서 목사와 이발사가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며 지저분하고 악취가 풍기고 아주 좋지 않은 환경이었습니다.
  이발사는 그런 모습을 보며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정말로 목사님이 증거 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이런 것을 보시고 내버려 놓습니까?' 그 목사님이 질문에 깊이 묵상하면서 그 이발사와 걸어가는데, 마침 청년 한사람이 다가왔습니다. 머리를 산발로 하고 수염을 이렇게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되묻기를 '여보세요. 왜 당신같이 훌륭한 이발사가 있는데 저 사람은 머리를 저렇게 늘어뜨리고 수염을 저렇게 길게 기르고 추잡하게 다닙니까?' 그 이발사가 허허 웃으면서 '내게 안 오니까 그렇지요. 이 친구가 내 이발소에 왔다면 내가 미남으로 만들어 놓지요'
  '그래요?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가난한지 압니까? 하나님께 안 오기 때문에 가난한 겁니다.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으면 모든 것이 더해지는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주님만 만나면 해결됩니다.  /dkaps!/


  ▶국내 전화 상담의 선두 주자인 '사랑의 전화'가 그 동안의 상담 내용을 정리해서 공개했습니다. 대체로 하루에 500여 통의 전화가 오고, 진지하게 상담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100건 정도가 된답니다.
  재미있는 것은 상담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이 전 연령층에 분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유치원생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고, 그 문제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힘겹게 한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무거운 짐을 누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세상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주님께로 나와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마11:28-29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할/
  오늘 본문도 주님이 여리고 성에 한 소경을 치료해 주심으로, 인생이 문제를 해결해 주신 기적 같은 이야기입니다. /할/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행하신 기적을 보면서 우리 모두 그 기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①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교훈들이 무엇입니까?  
  유월절을 몇 주일 앞두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십니다. 이번 유월절 기간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실 때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 깨끗하게 치료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 물어보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시면서,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며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해 기도의 정확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하여 겸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이혼에 대한 교훈과 어린아이들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선하신 선생님, 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을 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청년이 어릴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다고 대답하자,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가 완전해 지고자 한다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할 때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때 그 유명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자,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하자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그리고 오늘 본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할/

 

  ②본문의 배경을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소경이며 구걸로 삶을 유지하는 거지가 주님을 만나 두 눈을 번쩍 뜨고 고침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의 관문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을 지나는 것을 깨닫고 가까운 사람에게 무슨 일인가 물었습니다.  그 사람의 대답은 '나사렛 예수님이 지금 여리고를 지나가고 계십니다. 그는 병든 자를 고치고 소경을 눈뜨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런 분이시지요.'
  이 말을 들은 소경 거지는 큰 소리로 주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저마다 거지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잠잠해, 이 사람아. 자넨 소경이면서 무슨 목소리가 이렇게 커. 돈이나 구걸하고 그것으로 살아가면 됐지 왜 이래'
  그러나 소경은 더욱 더 큰소리로 소리 높여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그 소경의 음성을 듣고 제자들을 시켜 '저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소경 거지가 주님 앞으로 불려 나오자 사람들은 조용해지고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호기심으로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슨 일을 해주기 원하느냐?' 그러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자, 주님은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을 듣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자, 즉시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

 

  ③장애자는 설음이 참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애인이란 '상해, 질병, 유전적 결함으로 말미암은 만성적인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정신 지체 (지능지수 69 이하), 시각장애, 청각 장애, 지체장애, 정서장애(행동 장애, 부적응 행동, 미숙아), 언어 장애, 특정 학습 장애, 복합 장애, 자폐증 등 모두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식의 장애가 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사람을 기피합니다. 죄의식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죄 때문이라고 자책하기도 하고, 부정 탄다고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또 어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버립니다. 장애로 말미암아 자칫 경제적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경처럼 거지가 되어 사람들의 동정에 의하여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소외되어 살아갑니다. 도와야 할 가족에게는 큰 부담으로 느끼게 됩니다. 장기 치료를 위해 정작 물질이 필요하지만 신체적, 정신적 장애에다 경제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2중 3중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정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환영받고 사랑 받아야 할 가족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단란한 가정의 파괴자의 취급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의 거지 소경도 이런 어려움에 살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할/
  ▶찬송가를 보면 '화니제인 크로스비'라는 이름을 자주 발견됩니다. 그녀는 약 9천 편의 찬송 시를 작곡했고, 이 중에 약 35편이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매우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의 동정을 받아가면서 연명을 했습니다. 생후 1개월 반만에 크로스비는 감기에 걸리고, 눈병이 났는데, 식모가 뜨거운 겨자 수포를 크로스비의 눈에 댄 것이 화가 되어 크로스비는 이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크로스비는 일생동안 세상의 광명을 본 기억조차 없습니다. 그런데도 크로스비는 그의 실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의 하나라고 말했답니다.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실명했기에 세상 것을 보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더니 그녀의 영의 눈이 더욱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은 보지 못했지만 참된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할/

 

  ④본문의 소경의 신앙을 알아보고 우리도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소경은 어쩌면 저와 여러분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보기는 보아도 내일 일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데 보는 사람보다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두 눈을 뜨고 있지만 정말 내일을 볼 줄 모르는 인생, 미래를 볼 줄 모르고, 죽음 후에 그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하고, 죽음 후에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인생이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는 왔다 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합니까? 
  오늘 본문에 이 소경은 자기의 어두움을 끌어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절규합니다. 볼 수 없는 인생이 보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했습니다. 눈을 떠서 세상을 봅니다. 새로운 눈을 떠서 새로운 인생을 경험합니다. 이 소경은 새로운 삶을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이런 치유의 경험, 이런 기적의 경험, 교회에 나올 때마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육적인 눈도 열리며, 새로운 세상을 보는 놀라운 경험, 이런 경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이것이 물이 포도주 되는 기적입니다. /아멘!/
 
  ⑴그는 자신의 실존(모습)을 잘 깨달았습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소경은 여리고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 맨 먼저 통과해야할 성입니다.
  예루살렘 동남쪽 3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인데 '달의 성읍'이라고도 하고, '종려의 성읍'이라고도 불리 우는 아주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특히 이 도시에는 향나무, 뽕나무, 장미 나무 등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래서 여리고를 '장미의 도시'라고도 합니다.
  여리고가 이처럼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그러나 소경은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디메오의 형편을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가진 것도, 소유한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장래도 불투명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꿈도 없었고 소망도 없었고 절대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떠한 희망의 빛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이 사람은 자기의 처지(실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할/
  이 소경은 자기가 소경인 것도, 거지인 것도 다 알았습니다. 자기는 얻어먹어야 사는 존재, 자기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치유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존재를 고치려고 예수께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소경에게 축복을 받는 길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 길을 걷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그릇, 자신의 현실적인 사정과 환경과 형편,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데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는 자기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불쌍하면서도 불쌍한 줄을 모르고 삽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합니까? 자기가 불쌍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께 나오지 못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죄인인 줄을 알지만, 자신이 죄인인 줄은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이 연약하고, 무능하고, 죄가 많은 존재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자신을 깨닫는다는 것은 먼저 자신이 죄악 된 존재임을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죄인이요 보좔 것 없는 존재임을 고백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6:5)고 고백했습니다. /할/

 

  ⑵예수님을 메시야로, 구세주로 확실히 믿었습니다.
  37절에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들어야' 합니다.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예수 소식, 복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믿음이 자랍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깨닫습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생각이 넓어집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교회의 일도 합니다.
  주께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시키는지 자주 들어야 하고 자주 살펴봐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소경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듣고 그는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외쳤습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소낙비와 같아서 빨리 서둘지 않으면 지나가 버리고 만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회가 오면 붙잡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후6: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할/ 지금 이 시간이 귀합니다. 신앙은 현재 지금입니다. /아멘!/
  ㈂예수를 메시야로, 구세주로 확실히 믿었습니다.
  이 소경이 막상 예수께 도움을 청할 때는 '나사렛 예수여' 그렇게 외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 그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이 소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받기는 '나사렛 예수'라 소개를 받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이 표현은 그 당시 예수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쓰고있는 말로 이 표현은 예수님을 경멸할 때 부르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사렛은 빈민촌입니다. 술 먹고 주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고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 부르는 것도 예수님을 비하하는 그런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불렀을 때는 나사렛 예수라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메시야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오신다고 예언해 놓았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고, 나를 돕고, 나를 구원하고, 나를 치유하시는 분은 다윗을 통해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 메시야가 오면 하나님 나라가 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소경은 자신이 부르는 분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곧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타날 것이라는 메시아 칭호의 한 표현입니다. '당신이 메시아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구원할 자이고, 나를 구원할 자입니다.' 그는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할/
  마11장에도 보면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예수께로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믿었지만 감옥에 있다가 보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보내어 묻습니다. '당신이 정말 오실 메시야입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
  이것이 바로 메시야의 증거입니다. 메시야가 오면 '소경이 눈을 뜬다. 메시야가 오면 벙어리가 말한다. 메시야가 오시면 귀머거리가 듣는다'. 소경 바디매오가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를 천대받는 나사렛 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내 눈을 고쳐주시는 메시야로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른 것입니다. /할/
  '그 분이 메시야라면 내 눈도 열어주실 수가 있다. 내 인생을 새롭게 하실 수 있다. 예수가 메시야라면 그분은 당연히 나를 고치시고 내 인생을 바꾸어 주실 수가 있다. 내가 그분께 나아가자. 그분께 엎드리자. 그분께 구하자'.
  이 소경은 예수님이 내 인생을 바꾸고, 나를 치료하시고,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이 바꿔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앙은 '네가 예수를 무엇으로 믿느냐?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들의 인생이 바뀌기를 원합니까? 새로운 세계를 보기를 원합니까? 미래를, 내일을 보시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예수를 메시야로, 나의 생명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물이 포도주'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도 바뀌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여전히 옛 습관, 옛 사고, 옛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경이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세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분만이 나를 구원할 수가 있고, 그 분만이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수가 있습니다. /할/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⑤이 소경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의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이 소경을 보세오! 이 소경이 단 한번의 요청으로 응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38-39절에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소경이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한번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39절에 보면 장해 요인이 생깁니다.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장애요인이 발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경을 방해했습니다. 잠잠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경은 이 무리들의 압력 앞에서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했습니까?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그렇습니다. 더욱 심히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클레이는 '무엇으로도 예수님은 만나고자하는 이 소경의 고함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소리 지른 것은 소리였고, 두 번째 소리 지른 것은 그 원어로 보면 비명에 가까운 소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소경은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 더욱 소리를 질러,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가는 장애물을 극복한 것입니다.
  저는 소경의 이 두 번의 외침을 통해 이런 반성을 해봅니다. 우리는 신앙은 너무 안이한 것이 아닌가? 너무 쉽게 너무 간단하게 교회 몇 번 나오는 것으로 끝내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기도 몇 번하고 응답이 없으면 아 하나님은 별것이 아니구나! 교회 몇 번 나오고 별것이 없는 것 같으면 아 교회도 별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기도할 때 단 한번 기도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역시 나 같은 사람이 기도해보았자 무슨 응답이 있어, 난 역시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찾고 구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역사를 방해하는 방해의 말들이 난무했습니다. '잠잠하라, 시끄럽다.' 만약 이 소경이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듣고 '그렇다. 나는 팔자가 소경이요 거지니 내가 무슨 큰 소리를 지르겠는가?' 그냥 주저앉았다면 그는 평생 거지로, 소경으로 보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이 소경은 낙심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예수께 들리게 되었습니다.
  공은 때릴수록 더 높이 튀어 오릅니다. 용수철은 힘있게 눌릴 수록 더 힘있게 솟아오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으려는데 방해들이 있습니까? 은혜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공격들이 있습니까? 무서운 핍박이 있습니까?
  한 걸음 더 힘을 내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들으실 때까지 계속 부르짖어 보십시오.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아멘!/
  구약의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가면서 갑절의 영감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두 번씩이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가므로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결국 갑절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은혜의 생활에는 언제나 방해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 넘지 못하면 신령한 은혜의 자리는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만나기를 원했지만 약점이 있었고 방해물들이 있었습니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예수를 볼 수 없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키가 작아'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들 때문에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아' 환경 때문에 예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삭개오에겐 어떤 약점도, 환경 적인 제약도 은혜의 방해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의 발길이 멈추어 섰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할/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이 소경처럼 여러분 모두의 영혼의 눈이 열려지고 엘리사처럼 갑절의 영감을 받고,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모시는 기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⑥그의 분명한 고백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소경 거지가 소리지르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시던 예수께서 그를 불러 세우고 물으셨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그 소경의 소원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의 고백을 직접 듣기 위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원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생활고도 아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백을 직접 듣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경의 대답은 분명하고 간단하고 확실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습니다. 그가 소원은 '보는 것'입니다. 그는 보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거지였기 때문에 '보는 것' 이외에 필요한 것이 많았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입을 것과 마실 것, 심지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러한 것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경은 그 같은 것들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는 것'을 원했습니다. 광명을 구했습니다. 밝은 빛을 사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분명하고 확신에 차 있습니까. 이 분명함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여기에 군소리가 필요 없습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소경에게는 이 말 한마디면 됩니다. /아멘!/
  ▶요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된 병자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예'하면 끝납니다. 38년 된 병자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낫는 것입니다. 여러 다른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 병자가 대답합니다. '이 물이 움직일 때, 나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나이다.' 이것은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약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언제나 말이 많고 말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건설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이 많다보면 불평도 나오고 불만도 나오고 핑계도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 소경에게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예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기도에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아멘!/
  우리 신앙의 칼라도 선명해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시냐?'고 물으면 '예수는 나의 구주십니다.'라고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예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물으면 대부분 대답하기를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대답합니다.
  '우리'라는 말은 참 애매한 말입니다. '우리'가 아니고 '나'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신앙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나 없는 예수, 나 없는 부활, 나 없는 천국,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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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⑦기적의 역사는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할 때 일어났습니다(40).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의 발길을 붙들면 온갖 핸디캡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님의 발길을 머물러 서게 할 수 있습니까? 헤롯의 권력도 이 일만은 할 수가 없었고, 빌라도나 대제사장의 폭력도 이 일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주님의 발길을 멈추어 서시게 했습니까?


  ⑴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모든 것을 긍정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 곁에 우리 주님의 발길이 멈추십니다.
  꽃이 피어 향기를 발하면 나비와 벌이 찾아듭니다. 우리는 나비나 벌이 꽃을 찾아 헤매다가 그 꽃을 찾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꽃이 나비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나비를 부릅니다. 초청합니다. 아름다운 향기를 풍깁니다. 그러면 그 향기를 바람이 실어 나비에게, 벌에게 보내줍니다. 그러면 나비와 벌이 그 꽃의 초청을 받아 날아갑니다. 그래서 꽃가루를 채취하면서 꽃에게는 수수작용이 이루어지게 해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편에서 먼저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 /믿/
  그렇습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주님은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내려가십니다. 가난한 심령이 있는 곳에 주님은 계십니다. 이 소경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빵을 살 돈도 벌 수 없어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해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에 도무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재단사는 여러분의 옷차림에 관심을 갖고, 구두 방 주인은 여러분의 신발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절망과 낙심에 처할 때, '나사렛 예수여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찾을 때 이미 그곳에 와 계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고통 당하는 성도들을 보살펴 주시고 절망 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 주님은 그곳에 발길을 멈추어 주십니다. /아멘!/
  오늘 이 소경은 불행을 극복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성공 자들은 난관에 부딪혔을 때에 낙망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부딪었던 사람입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애들러'는 '이 땅의 모든 성공 자들은 자신의 인생에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파르타의 한 장군의 아들이 칼이 짧다고 불평했을 때에 아버지는 충고했습니다.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해 보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할/
  우리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뛰어넘는 용기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를 직면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한 걸음 더 전진하십시오! /믿/아멘!/


  ▶미국 UCLA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40년 간 재직하다 은퇴한 '골드' 박사가 제자들을 관찰한 결과를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한 마디로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적극적인 삶의 구체적인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서 소개했습니다.
  ㈀걸음걸이가 빠르답니다. 걸음걸이가 빠르다는 것은 성취 욕의 표현이고 부지런함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늘 앞자리에 있답니다. 수업시간에 늘 앞자리에 앉고, 어떤 일이 생기면 늘 앞장을 선답니다. 어떤 부흥사는 예배드릴 때 '앞자리가 금자리'라고 했습니다.
  ㈂시선을 집중시킨답니다. 강의시간에 강의에 집중하고,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의 눈에 시선을 집중시킨답니다.
  ㈃늘 웃는답니다. 웃음은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게 해주고, 스트레스를 극복하게 해 준답니다.
  ㈄긍정적인 표현을 한답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어떤 일에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성공의 길을 찾아 나선답니다. /할/
  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인생의 어떤 문제라도 점령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를 피하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왜 내게만 이런 문제가 있느냐고 불평하지 말고, 나는 할 수 없다고 주저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국 속담에 'Self Help'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할/

 

  ⑵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 곁에 우리 주님의 발길은 멈추십니다.
  본문 첫 절부터 예수님은 기도의 정확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강청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네 오늘 이 소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할/
  사58:9절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그리고 사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할/

 

  ⑶'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을 구할 때 예수의 발길은 멈추었습니다.
  우리는 공적을 내세워 주님께 무엇을 구하려고 할 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시고 지나가 버리십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아멘!/

 

  ⑷예수의 이름이 불려지는 곳에 주님의 발길은 멈추십니다.
  이 소경이 간구할 때 예수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기적을 가져다 줍니다. 온 천지에 예수의 이름보다 더 능력이 많은 이름은 없습니다.
  마18: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요14: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6:23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아멘!/

 

  ⑧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에 다 기록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은 '눅 18:35-43절에, 막 10:46-52절에, 마 20:29-34절'에 다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 세 본문을 비교해 보면 또 다른 심오한 진리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⑴마가복음에서는 이 소경의 이름이 '바디매오'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⑵특별히 마태는 맹인이 하나가 아니라 두 맹인이 있었다고 말해줍니다.
  마20:29-30절에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한 사람의 맹인이 있었는데 마태복음에는 두 사람의 맹인이 등장합니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바디매오는 담대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나 마태가 언급한 제2의 맹인은 대단히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여기 제2의 맹인 즉, 바디매오 뒤를 따라만 갔던 그도 눈을 뜬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바디매오처럼 부르짖지는 못했어도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제2의 맹인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할/
  여러분 가운데서도 소심하여 하나님의 교회에서 적극적인 사역자가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주의 은총을 덧입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언제나 앞질러 달려가며 부르짖고 외치며 전진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소극적이고 조용하게 뒤를 따라오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서 이 모든 사람들을 능히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메시지에 상당히 여러분이 위로를 얻고 힘을 얻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⑶본문들을 비교해 볼 때 한편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즉, 누가복음의 본문과 마태복음의 본문은 계속된 다른 두 사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3명의 맹인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먼저 바디매오가 예수께 부르짖어 고침을 받고 이 소식을 들은 다른 두 맹인이 여리고 성 출구까지 뛰어나와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한 것처럼 똑같은 방법을 쫓아 같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았다는 간증과 소식을 들을 때 나도 그곳에 몸을 담고 달려가는 것. 참 귀한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신 예수님은 두 사람도 구원할 수 있고,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께서 세 사람, 삼천 명, 삼만 명도 능히 살리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똑같이 눈을 떴지만 바디매오 한 사람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바디매오 한 사람만이 눈을 뜬 후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열 두 제자를 따라 복음을 전하며 따라 나선 것 같습니다. 그가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입니다. /할/

 

  ⑨본문의 소경이 받은 축복은 무엇인가?
  ⑴그의 소원이 이뤄졌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43절에 '저가 곧 보게'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할/ 그는 예수의 능력을 체험했을 뿐 아니라 삼라만상을 그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⑵그는 믿음으로 영혼까지 구원받았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⑶그러나 더 큰 기적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를 좇으니라' /할/ (2014년 4월 6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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