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고정 15:12-2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4. 19. 05:10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고정 15:12-20)

 

  오늘은 전국교회가 부활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이 빠지면 전체적으로 교리가 무너집니다. /할/
  ▶모 방송 프로그램 가운데 '있다, 없다.'라는 그런 프로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UCC 문화를 선도하려는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입니다.
  매주 시청자들이 보내준 신기한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합성이냐? 진짜냐?'를 MC들이 직접 현장을 추적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그런 내용입니다. 
  방송제작진은 출연자의 발로 뛰는 리얼한 추적을 통해 UCC 속에 담겨진 따뜻하고 사연 있는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서 대한민국의 특종을 발견할 의도로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 보면 정말 신기한 것이 많습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히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제주도에는 마을 크기만 한 거대한 구멍이 있다, 없다? 강원도에는 저절로 생긴 한반도 모양의 지도가 있다, 없다? 엄마 아빠 큰아들 작은아들이 같은 학과에 같은 학번인 가족이 있다, 없다? 운전면허 시험을 770번 떨어진 사람이 있다, 없다? 90세에 임신한 할머니가 있다, 없다? 한우 한 마리를 공짜로 주는 마을이 있다, 없다? 전기료가 없는 아파트가 있다, 없다? 이사하면 삼천 만원을 주는 마을이 있다, 없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진짜와 가짜가 아주 많습니다.
  만약 1세기에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당연 화제의 초점이 되는 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활이라는 주제인, '주님의 부활이 있다, 없다?'가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할/ ◀제목 소개!▶

 

  ▶프랑스에 야심 찬 영웅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수십 억 명이 되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종교를 하나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 성직자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도 예수님처럼 종교를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를 만들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 때 목사님이 정중하게 대답하기를 '예.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당신이 직접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시오. 그리고 3일만에 살아나십시오. 그러면 기독교와 같은 위대한 종교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사람은 새로운 종교 만들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답니다. /할/ 그렇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주일'입니다. /아멘!/
  고전15장은 부활 장입니다. '메투헨리'는 고전15장은 '복음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다루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기독교는 '죽은 자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를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과학적으로 볼 때,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가능할지 몰라도,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이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그의 생애는 끝이 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이 부활신앙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는 인구 75만의 상업 도시로 외국과 무역 거래가 아주 활발해서 선박이 많이 들어오고 이로 인해 사회의 풍토가 매우 어지럽고 문란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가면 망가진다.'라는 말이 유행이 될 만큼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는 큰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곳에서 제사행위가 끝나면 의례 신전을 섬기는 성녀들과 성행위가 이루어지는 아주 음란이 판치는 그런 곳이고,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혼'만 귀한 것이고 인간이 죽을 때 육체는 소멸되어버리고, 영혼만 육체를 빠져 나와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영적 부활'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는 이 세상을 살 때만 필요한 것이지, 죽으면 전혀 필요 없는, 아니 더 나아가 몸은 인간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저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부활은 '영혼 불멸'이 아니라 '영혼과 하나된 몸의 부활'입니다.
  그런 철학이 우선하는 고린도에서 바울이 전하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신앙에 대하여 그들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허구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진리는 미련한 것이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어디서 그런 허무맹랑한 논리를 가지고 와서 우리보고 믿으라고 하느냐?' 이런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15장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느냐?'고 반문하는 헬라 철학의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적 설교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말씀의 요지는 '인간 부활은 예수의 부활 사건에 기초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하는 것 다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는 거짓 증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19절에서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할/ ▶이제 바울이 설명하는 부활의 확신을 우리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할/
 
  ①예수님의 부활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3-4). 
  바울은 본문 3-4절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보면 '성경대로'란 말이 두 번이나 강조됩니다. 즉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대로'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사건은 우연이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아멘!/
  사53장을 보면 구구절절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22편 역시 버림받고 멸시받는 메시아의 모습을 예언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메시아의 부활도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호6: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주님의 부활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16:10절도 의역에 보면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셨으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했고, 우리 주님께서도 죽은 야이로의 딸을 보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마9:2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할/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영혼은 썩지 않으며 사후에 다른 생명이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나 에스겔 선지자 또한 부활의 사실과 부활의 신비를 예언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해골들이 서로 연결하여 생명을 다시 얻어 군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서만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아멘!/


  ⑴여기 '성경대로'라는 이 한마디는 부활의 확실성과 역사성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리고 성경의 모든 예언과 진리가 소멸되지 않는 한 성경대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영원한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가장 든든한 신앙은 성경대로 믿는 것입니다. 사이비나 이단 교주들은 성경의 권위보다 자신의 교훈이나 권위를 더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기독교는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신앙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아멘!/


  ⑵우리가 어떤 몸으로 부활되는가?
  요6: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영생 부활을 빼놓으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몸으로 부활되는가?
  ㈀죽어서 장사되었던 몸이 그대로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몸으로, 영광의 몸으로 부활'합니다. 콩이나 옥수수 알갱이를 심으면 그것은 썩어 없어지고 그와 꼭 닮은 다른 알갱이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죽으면 지금 요런 모습, 지금 요 나이 그대로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빌3:21절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몸이 그대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장례식으로 매장을 해도 좋고 화장을 해도 좋습니다. /아멘!/
  ㈁썩지 않는 불후불멸(不朽不滅)의 몸으로 부활합니다. 본문 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부활의 몸은 늙지도 썩지도 않으며 영원히 죽지 않는 몸입니다. /할/
  ㈂태양과 같이 빛을 발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마13:43절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단12: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활의 몸은 그 영광이 각각 다릅니다.
  고전15:41-42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즉 해와 달과 별들의 영광이 각각 다 다른 것같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지만 순교한 바울이나 베드로가 누리는 영광과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간신히 구원받은 강도의 영광이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냥 대충 대충 신앙생활 하는 자들과 열심을 품고 헌신하는 자들의 상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급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믿/아멘!/ 
 
  ②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을 바울은 본문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5-8). 
  부활하신 주님이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11번 제자들에게 오셨고 후에 스데반 집사와 핍박자 사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순서를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⑴무덤 가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오셨습니다(막16:9/요20:14-18). 예수님은 부활 후 무덤 가에서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⑵무덤에 갔던 여인들에게 오셨습니다(마28:8-10). 주일 새벽에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 사건은 주일 새벽 일찍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⑶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눅24:13-35/막16:12-13). 제자 중 두 명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로 가면서 일어난 체험인데 '이 일을 이야기하고 문의할 때' 예수님이 동행하며 자신에 대한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할/
  ⑷베드로에게 오셨습니다(눅24:34/고전15:5). 주님은 당신을 부인한 제자에게도 나타나셔서 그 좌절과 절망과 낙심과 후회 속에 있는 그를 다시 격려하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⑸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막16:14/눅14:36-37). 주일저녁 방에 숨어있던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제자들 앞에 예수의 영(靈)이 나타난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살과 뼈가 있다'고 하시고 제자들이 먹다 남은 생선을 받아서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으로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신과 함께 온전히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
  ⑹도마를 포함한 열 한 제자에게 오셨습니다(요20:26-29). 한 주일 후에 도마와 함께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주일 전에 도마는 예수님이 나타날 때 없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나타났다니까 비웃었습니다.
  '참 정신 없는 소리하지 말라. 나는 예수님의 손에 내 손가락 넣어보고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고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한 주일이 지나서 도마가 열 제자와 함께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도마야 이리 오너라 네 손을 내어서 내 못 자국에 넣어 보아라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너무나 놀라고 감탄하고 탄복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그렇게 고백할 때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⑺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에게도 오셨습니다(요21:1-14). 갈릴리 호수에 이른 아침 나타나셨습니다. 요21:4-6절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먹이시고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세 번 예수님이 회복을 시켰습니다.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또 잠시 후에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마지막으로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부인한 만큼 세 번 그의 입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서 상처 입은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켜 수석제자로 복귀시켰습니다. /할/
  ⑻갈릴리 산에서 열 한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마28:16-20/막16:15-18). 갈릴리 한 산 위에서 지상명령을 내리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⑼500명의 성도들 알에 오셨습니다(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한 두 사람이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500명이 동시에 보았으니 500명이 동시에 다 최면술에 걸렸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⑽야고보(알패오의 아들)에게도 오셨습니다(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⑾부활 후 40일 째 되는 날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모습을 보이셨습니다(막16:19-20/눅24:44-53/행1:1-11). 40일 후 감람산 베다니 근처에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축복하시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승천해 올라가셨습니다.
  눅24:50-51절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친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그들 옆에 서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왜 하늘을 처다 보느냐? 하늘로 들리운 이 예수님 네가 본대로 오시리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⑿스데반이 순교할 때 하나님 우편에 주님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끌려나가서 돌로 얻어맞고 죽을 때 예수님을 보셨습니다.
  행7:55-56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⒀교회를 열렬히 대적하던 사울에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시며 그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행9). /할/
  우리는 부활신앙을 소유한 백성입니다. 넓은 마음, 관용의 마음, 섬김의 마음이 우리 안에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③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도 부활합니다(20).
  고린도교회가 '부활'에 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연결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의 부활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첫 열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앞으로 다가올 '성도들의 부활'의 표시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앞으로 있을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표시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부활의 연관성에 대해 '첫 열매'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뒤 이제 첫 사람 아담과 예수의 사건을 설명하는 '모형론'으로 같은 요지를 반복 설명합니다.
  21-22절에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창3장에 보면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을 아담의 죄에 대한 결과이고 형벌입니다.
  롬5:12절에서도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또 롬5:18절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의 사슬로 하나로 묶여 있었는데, 예수 안에서는 '의로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담 안에서 하나로 묶여있던 사슬을 끊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함께 죄에 묶여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 안에서 영원한 승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부활이 나에게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할/
  그리고 바울은 23절부터 '군대 개념'으로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3-26절에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3절에 '차례'라고 번역된 말은 '순서' 혹은 '계급'이라는 의미의 당시 군대 용어입니다. 마치 전투에서 선두에 선 선봉장이 적장을 물리치면, 뒤를 따르는 병사들이 승리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먼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것이며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원수인 사망이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어서 부활하셨고, 마지막 날에 전 이류가 빠짐없이 부활할 것인데, 우리 성도들의 부활과 불신자들의 부활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도들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기 위한 부활이지만, 불신자들의 부활은 심판을 받기 위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믿/아멘!/

 

  ④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현상이 될까요?(13)
  ⑴만일 부활이 없다면 예수 부활이 없습니다(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미국 스탠포드 대학은 우리나라 서울대 연, 고대처럼 명문 대학입니다. 그런데 그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스탠포드'입니다. 스탠포드가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한 동기가 있습니다.
  '스탠포드'는 부자였습니다.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잘 생기고 수재였던 외아들이었습니다. 극도의 슬픔에 잠긴 아버지는 장례식에서 말을 잃었습니다. 슬픔 속에 잠을 자지 못 하고 있는데 그 날 밤 꿈에 아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저 대신 청년들을 도와주셔요.'
  스탠포드는 이 환상을 보고 인생관이 확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도 살아 계시고 내 아들도 살아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고 했습니다. 그래서 청년 교육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당시 거액인 2천만 달러 약 200억 원을 바쳐서 오늘의 명문인 스탠포드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의 재산은 10원짜리 동전 하나 남기지 말고 청년 교육에 사용하라.' /할/
  ▶어느 날 무디는 장례식 설교를 부탁 받았습니다. 문득 그는 예수님은 성경에서 장례식 설교를 어떻게 하였는가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장례식 설교를 단 한 편도 이 땅에 남기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무디는 놀라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날 사람에게 죽음의 설교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⑵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14).
  바울은 본문에서 부활의 확실성을 믿음과 연관에서 강조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이 말씀은 16절 이하에서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지 못했고, 주님이 살지 못했다면 믿음이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헛것'이라는 헬라어원적인 의미는 '내용은 없고 외형만 가진 빈 것'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속이 비어 있는 껍데기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부활이 없으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할/


  ⑶우리가 거짓증인이 됩니다(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만약 부활이 없다면 바울은 사기꾼이요, 제자들은 거짓말한 자들이 됩니다. 부활이 없다면 주님의 말씀은 진리가 아닌 것이고, 성경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법정용어를 사용하여 역설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거짓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증인은 언젠가는 탄로가 나고, 진실은 밝혀집니다. 거짓증인은 처벌을 받습니다. 설령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불안합니다. 양심이 그를 찌르고, 이성이 그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거짓증거는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잠깐 동안 속일 수는 있어도, 여러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신 지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


  ⑷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불쌍한 자입니다(19).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부활을 확신했는데 만약 부활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눈물과 땀과 피로 부활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웠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헛되게 믿은 것이고, 헛되게 산 것이고, 지금까지 헛수고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불쌍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기에 결코 불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고, 축복을 받고, 은혜를 누리며 삽니다. /아멘!/
  우리는 종종 장례식에 참여합니다. 거기에서 유족들과 부활의 소망을 위로로 함께 나눕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이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하기에 장례식을 '영결식'(永訣式)이라고 부르며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래서 땅을 치고 통곡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천국과 부활을 믿습니다. 먼저 죽은 자는 천국에 가고 우리 또한 언젠가 부활의 몸으로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장례식 때에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거기서'입니다. 천국에서 만나고, 죽은 자가 살고, 우리도 영원히 살기에 불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안에서 사는 것이 복이 있고, 주안에서 죽은 자가 복이 있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복된 자입니다. /아멘!/

 

  ⑤부활의 첫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을 소개합니다(막 16:9-11).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일 먼저 그 소식을 알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대상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상식적으로 부활의 기쁜 소식을 맨 처음 어머니 마리아에게 알려야 했지 않았을까요? 아들의 죽음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어머니에게 먼저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장차 주님의 뒤를 이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끌어 가게 될 베드로에게 먼저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3년 동안 함께 하던 제자들에게라도 먼저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 부활의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린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면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을까요? 물론 이것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 무려 13번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을 유추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할/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자리하고 있는 '막달라'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일곱 귀신에 눌려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단 귀신이 들린 사람은 사회로부터 격리가 됩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마을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돌며 방황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여인으로서 가족을 떠나 미쳐 방황하며 참혹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그 삶이 고달팠을까요? 아마도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을 여러 차례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선 아무도 가까이 해주지 않았던 자신, 공격적이고 더럽고 추악한 자신을 불쌍히 바라봐 주셨습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놀라운 능력으로 그 무섭다는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낫게 해 주셨습니다. /할/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기에 남은 생애를 다 바쳐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멘!/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과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⑴그는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 사역하실 때 자기의 소유를 팔아 주님을 따르며 섬겼습니다.
  눅8:1-3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의 식사와 주님의 일상생활을 뒷바라지했을 것입니다.
  ⑵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고난의 현장을 지키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27:55-56절에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달려 운명하시는 그 자리에 막달라 마리아가 지키고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⑶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실 때 또 거기에 있었습니다.
  마27:58-61절에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돌을 굴려 무덤 문 위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그 무덤에 막달라 마리아가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망친 그 자리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마저 떠난 그 자리를 막달라 마리아가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⑷또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에 새벽같이 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요20:1절에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막16:9절에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가서 알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를 따라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무덤 안을 살펴보니 막달라 마리아의 말대로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빈 무덤은 확인했지만 두 제자는 또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요20:11절을 보면 이 때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서 그 빈 무덤을 지키고 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한 가지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토록 주님을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처음 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그 때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마도 온 몸에 전율이 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이 터지도록 기뻤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끌려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믿/아멘!/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의 신앙의 행위는 무엇인가?
  ⑴주님의 깊은 은혜를 깊이 새기며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장악하고 있던 귀신을 내 쫓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몸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모습을 귀히 여기셔서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신 것입니다. /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합니다. 그것은 사소한 상처라고 해도 두고두고 마음에 간직합니다. 이에 비해 은혜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큰 은혜라고 해도 얼른 망각해 버립니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의 은혜, 이웃의 은혜, 특별히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할/
  ▶중국 진나라 때 '위무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너의 새어머니는 아직 젊으니 내가 죽거든 개가시키도록 하여라' 한참 세월 흐른 후에 위무자가 죽게 되자 아들을 불러놓고 이번에는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너의 새어머니는 나를 따라 순장(殉葬)하도록 하여라'
  아들 '위과'는 아버지의 두 유언 가운데 어떤 것을 따라야 할 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병중에 혼미하여 남긴 유언보다는 맑은 정신일 때 남긴 유언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젊은 새어머니를 개가시켜 드렸습니다.
  뒷날에 위과가 두회와 전쟁을 벌일 때의 일입니다. 두회가 워낙 용맹한 장수인지라 위과의 군대는 싸움에서 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회가 탄 말이 누군가 묶어놓은 풀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위과는 두회를 사로잡고 전쟁을 이겼습니다.
  그 날 밤, 위과의 꿈에 한 노인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개가시킨 새어머니의 아비가 되는 사람이오. 그대가 지혜로운 판단으로 나의 딸을 개가시킨 것이 고마워 내가 풀을 묶어 적장의 말이 걸려 넘어지게 한 것이오. 작게나마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오'
  이 고사에서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죽어서 무덤의 풀을 묶어서라도 은혜를 갚는다'는 뜻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도 저마다 주님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가 더 수지 맞습니다.
  잠8:17-18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할/ 
  ⑵주님의 필요를 채우며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열두 제자들과 함께 주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 때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식사 문제를 담당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안살림을 맡아 수발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역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했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필요를 채우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습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할/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며 사는 성도들이 주의 일꾼입니다. 이런 성도들을 바울은 귀히 쓰는 그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딤후2:21절에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할/ 우리 모두 귀히 쓰임 받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⑶항상 주님 곁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떠나 두루 다니시며 사역하실 때 그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셔서 끌려가실 때도 뒤를 따르며 그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도 그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실 때도 그 곁을 지켰습니다.
  때로는 아끼시던 제자들이 다 도망치고 없는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가족들마저 다 떠나버린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 모습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믿/아멘!/
  ▶세계 제1차 대전 중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떤 같은 마을에서 자라났던 두 친구가 같이 전쟁터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전쟁도중 한 친구가 아군진영에서 떨어져 격리되었습니다. 그때 포탄이 날아와 한 친구는 온 몸에 파편을 입어 피 흘리고 쓰러집니다.
  그 광경을 멀리 참호 속에서 바라보고 있던 다른 친구가 견딜 수가 없어서 부상당한 친구에게 달려가려 할 때 분대장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분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친구에게 달려갔고 천신만고 끝에 친구를 들쳐업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 친구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분대장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 봐라 너까지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내가 말렸던 거야' 이 때 그 병사가 말하기를 '분대장님! 제가 그 친구에게 갔을 때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숨을 헐떡이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야 네가 올 줄 알았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 곁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주님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큰 희생을 치른다고 해도 주님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할/ 참 행복한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런 헌신 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4년 4월 20일 부활절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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