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여호와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 (창 15:1-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7. 28. 08:50

여호와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 (창 15:1-7)


  오늘 본문은 '이후에'로 시작이 됩니다. '이후에'는 '14장에 사건 후에' 이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갈데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아 가나안땅에 들어온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거부가 되어 그의 목자들끼리 싸움이 잦아지고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도 감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너와 나는 한 골육 한 집안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물질의 문제로 이렇게 다투지 말자'(창13:8)고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재산의 분쟁으로 불안을 일으켜 거부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양보하면서 화평을 도모함으로 재산 적으로는 손해가 될지 모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길을 택했습니다. /할/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기득권마저 내려놓고 조카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하고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멋있는 사람입니다. 요사이 이런 사람 보기 드뭅니다. 하나님은 이런 멋쟁이를 더 크게 축복해 주십니다.
  조카 롯은 눈을 들어 소돔과 고모라 땅을 바라보고 그곳을 택했습니다. 창13:10절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롯이 바라보는 요단들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물이 넉넉했다.'는 사실입니다. 물이 많다는 것은 농사가 잘 되고 모든 것이 풍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하게 할 만큼 완벽한 조건과 환경을 갖춘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애굽 땅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롯은 그곳에서 나일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도시문화가 꽃피었던 애굽문명의 편리함과 화려함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렇게 '물댄 동산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그곳은 행복이 보장된 곳'처럼 보여 그곳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화려한 것에 속지 마세요! 그럴듯한 곳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 땅이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았던 땅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도시요 매력 있는 도시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없는 도시입니다.
  사실 롯의 비극은 아브라함을 떠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왜 아브라함을 떠나는 것이 비극입니까? 아브라함은 축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러분! 축복의 사람을 따라 다니시기를 바랍니다. 또 축복의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면 평생 후회가 없습니다. /할/
  롯이 풍요로움과 아름다운 환경을 찾아갔지만 그 풍요로운 물질도 아름다운 환경도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인간의 욕망이 넘쳐 싸움의 장소가 되어져 버렸습니다.
  변방에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를 치고 창14:11-12절에 보면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군대 318명을 이끌고 그돌라오멜과 그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조카 롯을 비롯하여 포로로 잡혀간 소돔성의 주민들과 그들의 약탈해간 많은 양떼들과 금을 보화를 찾아 개선장군으로 돌아올 때, 맨 먼저 누가 그들을 영접했습니까?
  소돔 왕이 환영대로 만들어 놓고 그를 환송합니다. 또 한 분이 아브라함을 맞이했는데 살렘왕 멜기세댁이 대 제사장의 신분으로 아브라함을 맞이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왕의 환영 식을 뿌리치고 맨 먼저 하나님의 종의 신분인 대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축복안수 기도를 받은 다음 십일조 헌금을 드리고 겸손히 믿음으로 살겠다는 그의 다짐에서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의 신앙의 인격을 경험합니다.
  소돔 왕이 자기는 포로들만 인수인계 할 테니 모든 노획물을 아브라함에게 가지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것들도 거절했습니다. '내가 그 물건을 가지고 가면 그 물건이 나를 부자 만들어 주었다고 사람들이 소곤거릴 것이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큰 재물을 주셨는데 그 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 질까봐' 그 많은 보화를 거절합니다.
  여기서 가장 큰 이유는 '내 부요와 영광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산 증거로 드러내겠다. 소돔왕 때문에 형통케 되고 치부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살아 계신 하나님 그 분이 나의 영광이고 전부다'는 각오입니다. /할/
  그리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도 두려움이 임한 것입니다. 무슨 두려움이 임하겠습니까? 그돌라오멜의 군대를 격파하고 돌아갔지만 그 나라가 얼마나 막강한 나라입니까? 바벨론 일부나라입니다.
  여러분! 인류 문화의 발상지가 바벨로니아와 이집트에서 꽃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누구보다도 그쪽나라 사정을 너무나 잘 압니다. 왜? 그가 바로 그쪽 갈데아우르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온 사람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그 강한 나라를 쳐서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크게 개선장군이 되어 금의환향을 받았습니다. 또 멜기세덱에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너에게 승리를 주었느니라!' 네가 전술을 잘 사용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고, 네 부하들이 용감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겼느니라!' 이렇게 승리하고 나서도 멜기세덱에게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 후'라는 이야기입니다. /할/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굉장한 체험을 했다할지라도 그 사람이 또 다시 약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큰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체험이 늘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큰 권능을 받고 또 말씀을 배웠다 할지라도 또 악해질 수 있습니다.
  깨어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또 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크게 승리하고 나서는 아마도 영적 관리를 게을리 했거나 기도를 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마음이 두려움이 왔지요! 그돌라오멜의 군대가 언제 다시 자기를 침공할지 불안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 1절에서 우리들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할/
 

  ①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오셨습니다(1)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영혼의 창을 열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인생의 크고 작은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어 내는 것입니다.
  시인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주는 편지'에서 '슬플 때는 홀로 귀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다린다는 것은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케 가이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통이 있을 때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을 보지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라. 마음 쏟는 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줄 것이다.' /할/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이상중의 말씀으로 성도들의 영안을 열어주시려고 하십니다. 사람은 육의 눈과 지식의 눈과 영의 눈, 곧 믿음의 눈이 있습니다. 이 믿음의 눈이 활짝 열려야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아멘!/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 지금 내 마음이 컬컬합니다. 제 마음이 약해지려고 합니다. 큰 승리를 했는데도 지금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속마음을 너무나 훤히 아셨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아셨던 그 하나님이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의 심령을 아시고 우리의 환경을 아십니다. /믿/ 아브라함은 큰 은혜를 체험했지만 그가 약해졌다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 쪽에서 먼저 '가라사대' 하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서 '가라사대'는 주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때로는 풀이 죽어 있다가도 성경을 읽는 중에 '아! 그래! 맞아! 하나님이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구나!' 크게 깨닫고 용기를 얻을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주십니다. 어느 때는 기도하다가도 받을 수가 있고, 주의 종이 심방할 때 심방 설교에서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할/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세 가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⑴'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두려움 속에 빠져있는 아브라함에게 두려워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두려움은 불신에서 옵니다. 하나님을 조금 믿는데서 옵니다.
  두려움 속에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행하여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꼭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너를 불들이라'는 말씀도 함께 주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23: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으로 나에게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말라고 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노라'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⑵'나는 너의 방패가 된다'고 했습니다. 방패가 무엇인가? 적으로부터 오는 공격을 막는 무기입니다. 세상의 방패는 그렇게 안전하지를 못합니다. 골리앗은 창과 단 창을 손에 잡고 방패든 자를 앞세웠습니다.
  삼상17:41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든 자가 앞섰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든 방패는 다윗의 물멧돌을 막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그 무엇을 방패삼아 의지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돈을 방패삼아 살아가는 어리석은 부자도 있습니다(눅12:13-21). 권력을 방패삼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어리석은 왕도 있습니다(행12:23). 사람의 칭송을 받기 위해 외식하는 어리석은 무리들도 있습니다(마23:13-36). 이러한 것을 방패삼아 사는 자들은 사단이 쏘는 죄의 독이 박힌 사망의 화살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가장 안전한 방패는 누구인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방패가 되어 막아 주시는데 해할 자가 없습니다. 사43: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할/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을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보호해 주리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주리라' /할/
  여러분! 아브라함이 평소에 하나님을 자기의 방패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믿/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방패로 삼고 싸우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방패로 삼는 자에게 방패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도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의 방패로 믿고 골리앗에게 접근했습니다.
  아브라함도 318명의 적은 군대를 가지고 어떻게 큰 나라 연합군과 싸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자기의 방패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도 삼 백명의 적은 용사로 메뚜기 떼 같은 미디안의 군대를 잔멸시킨 것은 하나님을 그의 방패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할/
  신33:29절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시18:2절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할/
  요즘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매우 약한 하나님으로 만듭니다. 홍해를 가를 수 없는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물 위를 걸어갈 수 없는 예수님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어떻게 베풀겠느냐? 의심하는 신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을 능력의 방패로 삼으시고 어떠한 환난과 역경에서라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할/
  ⑶'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다.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주리라! 내가 너를 높이 세워 주리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리라, 모든 민족 위에 꾸임 받지, 꾸어주는 자의 삶이리라'는 약속입니다. /할/
  또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은 '참된 가치, 사랑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것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시시한 것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롭고 볼품 없고 다른 사람이 외면하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그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씀 안에는 그 분의 상급 되심이 무한하다는 약속입니다. 사람의 상급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부족할수록 아무도 그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상급 되심은 내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영혼까지 채웁니다. /할/
  우리 마음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유한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내 영혼까지 온전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상급은 순간이 아닌 영원까지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의 상급이 되십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자랑하십시다. 예수 믿는 표를 나타내십시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올 때 죄인의 모습으로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믿/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떳떳하십시오, 자부를 가지십시오, 자랑하십시오, /할/


  ②아브라함의 반응은 무엇인가?(2-3)
  ⑴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2)
  '내가 너에게 지극히 큰 상급을 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자마자, 아브라함이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좀 비딱하지 않습니까? '두려워 말라, 네가 너의 방패가 되어주리라, 네가 너에게 큰 상급도 주리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오! 주여! 감사하나이다. 믿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믿음의 조상의 자격이 있지, 하나님 앞에 빈정거립니다.
  '지금 무엇을 주시려고 그렇게 거창하신 말씀을 하십니까? 저한테 재산을 물려줄 새끼를 주셨습니까? 이제 또 주신들 이렇게 늙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돈이 무슨 소용이요, 땅이 무슨 소용입니까? 다 소용없으니 차라리 우리 집에 종 엘리에셀에게나 복을 주십시오, 나는 그를 상속자로 삼겠나이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12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게 부르시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받고 절대 순종하며 갈대아 우르를 나와서 가나안 땅에 갔더니 그곳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애굽의 바로 왕에게 사라를 빼앗길 뻔했습니다. 이런 고생, 저런 고생하면서도 자식을 주신다고 해서 참고 기다렸는데 그때 나이 아마 85-95세 되었지요, 그 나이 먹도록 자식은 소식도 없고, 인간적으로 생각해 봐도 생활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약속을 해 놓고 안 주시니 포기하겠다는 투정입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이 말씀은 '다른 것은 많이 주셨는데 후손이 없으니 다른 것도 다 허사'입니다. 이 말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받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모르십니까?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몰라서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에 맞게 주시려고 그러하십니다. /믿/ 100세에 주어놔야 하나님이 주신 줄 확실하게 알지 젊어서 주면 하나님의 능력을 모릅니다.
  100세에 그 아내 사라가 90세 때 경수도 끊어져 말라버리고 인간적으로 '아 이젠 나는 틀었어'하고 포기했을 때 하나님이 주셔야 정말 하나님이 '능력이로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 손해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러니까 복을 주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절대로 변질되지 않을 믿음이 있을 때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복 받으면 하나님 때에 버리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얻었지만 장가 보내놓고 죽었으니 할 일을 다하고 죽습니다. 아들 이삭이 40세에 장가를 갔는데 얼마나 오래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조금도 늦지 않습니다. 괜히 인간들이 늦다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토라지듯이 '저 다메섹 엘리에셀에게 복을 주십시오' 한다고 해서 '오냐, 네 소원이라면 그렇게 하지'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잘못 구하는 것 절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에라 귀찮으니 이것 먹고 떨어져라'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할/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주'로 불렀습니다. '주'라는 명칭은 본래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인데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원어로는 '아도나이'입니다. 어원적으로는 '소유자, 통치자, 주권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도나이 즉 주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할/


  ⑵아브라함의 투정을 보세요! 후사로 종인 엘리에셀을 세우겠다고 합니다.(3)
  투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입니다. 여기서 씨를 아니 주셨다는 말은 후손을 말하는데, 아들은 제쳐놓고라도 딸이라도 하나 주시지 않으셨으니 이젠 소망이 없다는 자포자기의 말입니다. '이젠 완전히 포기하겠습니다.' 그런 투의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기른 몸종인 엘리에셀이 자기 후사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엘리에셀은 충성된 종입니다. 롯이 아브라함 곁을 떠났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텅 빈 둥지와 같았습니다. 그 텅 빈 둥지에 누가 들어가게 되었는가? 다메섹 출신 충성된 종 엘리에셀입니다.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충성스러웠으면 후일에 아들 이삭을 결혼시키기 위해 선을 보려갈 때 엘리에셀을 보내면서 '너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면 곧 내 며느릿감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창24:7-8).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에셀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을 다릅니다. 4절을 보세요!


  ③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4)
  지금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후사의 공방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 사람(엘리에셀)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정식으로 네 몸에서 네 마누라 사라 몸에서 태어나는 자식이 있을 찐데 그 이름이 진짜 네 후손이 될 것임을 다시 천명했습니다.
  '네 몸에서 날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이삭이 나올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지만 더 크게는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 그리스도가 날것을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⑴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단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툭하면 믿음이 사라지는 사람입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을 때도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에 가서 자기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생각해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애굽 왕에게 넘겼습니다. 어처구니없습니다. 보통 사람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계속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단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한마디의 표현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 표현한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심장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는 사랑의 흐릅니다. 하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흘러 내려 주십니다. 그 사람의 단점은 단점대로 사랑하시고 장점은 장점대로 사랑하십니다. /할/
  ⑵어떤 학자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성적 사랑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다정하게 접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모성적 어머니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49: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 말씀의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이젠 소망도 없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절규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심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이제 영원히 잊어버리신 것은 아닌가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들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 '여인이 어찌 젖먹이를 잊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찌 자기 자녀를 버리겠느냐? 자기 태에서 나온 자기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혹 어머니가 자녀를 버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결코 하나님은 너희를 잊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는 말씀을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것입니다. /할/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늘 자녀를 생각하고, 관심을 갖고, 자녀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그렇게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다릅니다.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자녀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머리와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어머니는 받지 않고 주려고만 하고, 자기보다 자녀를 더 생각합니다. 자녀가 잘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기의지는 별로 없고, 모든 것 내려놓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할/
  ⑶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주님 사랑을 닮은 사랑'입니다.
  ▶일본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아들이 자라서 어떤 여자를 알게 되고 교제하다가 결혼까지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여자가 무서운 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시간을 다투는 병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병을 고치는 약은 매우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산 사람의 간(肝)을 먹어야 낫는다는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자기의 애인을 살리려는 욕심에 그만 어머니를 죽이고 어머니의 간을 꺼내 자기 애인이 있는 곳으로 정신 없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빨리 뛰어가고 있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혼이 나타나서 '얘야, 너무 빨리 뛰어가다가 넘어질라' 그르더랍니다. 이것은 전설입니다. /할/
  여기서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봅니다. 종교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해도 잘 깨닫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할/
  여러분, 어머니와 같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신문고, 해결사, 알부민 주사, 마술사'와 같으십니다. 나의 모든 사정과 고민과 투정을 들어주는 분이십니다. 문제와 난관 앞에 쩔쩔매는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치고 힘든 내 삶에 알부민 주사와 같은 분이십니다. 내 육신과 영혼을 만져 낫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촉촉하게 하는 능력의 손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나를 바르고 참되게 이끄시고, 깊은 깨달음을 주시어 참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할/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그분의 손길 속에, 능력 안에서 길러지고 양육됩니다.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천국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그분만이 영원히 내가 믿고 의지할 대상입니다. /아멘!/
  ⑷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단점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사랑 받은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단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점 때문에 더 잘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야곱은 단점 투성입니다. 다윗도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간음했고, 살인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다혈질의 기질을 가진 그는 실수가 많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점 많은 이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들은 그 단점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로의 단점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점까지도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씨를 우리에게 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맛본 사람입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전가됩니다. 이 사랑을 맛본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도 사랑하게 됩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점을 사랑합니다. 그 단점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 단점을 통해서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합니다. 사랑의 축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사랑하는 곳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할/


  ④실물 교육을 받는 아브라함!(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고 너무 답답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물교육을 시키시려고 하십니다. 방안에서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자고 하십니다.
  중동지방에는 사막지방이므로 별들이 잘 보인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저 많은 별들을 한 번 세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하늘에 별을 다 셀 수는 없습니다.
  ⑴'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창조섭리의 능력을 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솜씨는 인간의 지식과 기술과 방법을 능가하십니다. 사람은 어떠한 능력자라도 자연법칙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아멘!/
  미국의 대통령도, 구 소련의 수상도, 저 막강한 권력이 총대를 쥔 이북의 아바이 수령의 아들 김정일이도, 김정은이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자연법칙을 자기들 죽었다가 깨어나도 무엇 하나 주관하지 못합니다. 하루 24시간을 늘이거나 뺄 수도 없습니다. 오직 대 자연의 섭리 자이신 하나님 그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믿/
  세상 문명문화가 찬란하게 꽃이 피었습니다. 컴퓨터 산업, 위시 경으로 우리 인간의 위장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것은 가능에서 가능을 생산해 냅니다. 유에서 유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불가능에서 가능을 성취시키십니다. /아멘!/
  100세에 아브라함과 90세의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속하는 일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연법칙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힘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역사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에 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시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할/
  ⑵'별처럼 셀 수 있나 보라'는 말씀은 네 후손이 별처럼 번성할 것과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아 저 별들을 다 내가 지었는지 네가 모르느냐? 없는 가운데 저 별들을 만들었는데 너에게 아들 있게 하는 것을 뭐 그리 대수이겠느냐? 분명히 네 후사를 통해서 별처럼 너의 자손이 많아지게 될 것이니라'
  과연 당시는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나 후에 이삭을 통해 그 자손들이 별과 같이 번성하였고, 별과 같이 빛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끈질긴 백성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나치 정권 밑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학대 밑에서도 저들은 나라 없이 2,600년을 살아왔습니다. 2천년동안 떠돌아다니면서도 그들이 가는 곳마다 번성과 축복이 임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해서 세상 도처에서 유대인들이 정계, 재계, 과학 분야를 석권했습니다. 1948년 5월에 비로소 해방이 되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출발할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300만 유대인들보다 훨씬 적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아랍계통의 요르단왕국이 요단강 동편에 자리를 잡으면서 우리나라 강원도만 한 땅덩어리에 요르단 왕국이 또 일부를 정령하자 1967년 그 유명한 6일 전쟁이 발발하는 것입니다.
  전쟁 때는 각처에서 내 나라를 살리자고 외치며 젊은 유대인들이 돌아와 총을 잡고 300만의 인구로 일억 오천의 아랍세력을 물리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별처럼 많아졌고, 별처럼 빛났습니다. /할/


  ⑤참으로 귀한 것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
  '여호와를 믿으니'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언약한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을 믿으니까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될 줄 믿습니다.' 그런 확신에 찬 고백입니다. /할/
  신앙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바라보면 안 되고, 마누라를 바라봐도 안 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별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라면 자기의 자손도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니까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의라는 말은 옳다는 뜻입니다. 또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천성적으로 착하다든지 아브라함이 말을 잘 들어서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했습니다.
  신약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구원론에 쌍벽을 이루는 책입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이신 득의, 이신 득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 기독교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제일 어려운 방해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 남편이라고 합니다. 시부모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에 가장 커다란 방해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믿는다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믿으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자의식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도 업적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힘이 있고, 재능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무슨 공로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자기를 바라보려는 마음,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유혹이랍니다. /할/
  아브라함에게도 자랑할 만한 선행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우선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또 조카 롯과의 싸움에서도 양보한 것, 얼마나 귀한 인격입니까? 그뿐만 아니라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온건 얼마나 용감하고 자랑스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후에 롬4:1-3절에서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할/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은 하박국 선지에게 전승되어 '나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고 고백했고, 하박국의 신앙은 신약에 바울에게 그대로 전수되었고, 로마카톨릭이 병들었을 때에 종교개혁자 루터는 교황청을 향한 95개조항의 반박 문을 비텐베르그 성당에 내걸었던 것이 종교개혁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칼빈은 이 신앙정신을 물러 받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할/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들은 그 행위가 참 아름답습니다. 여기서부터 아브라함의 신앙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말씀 따라 살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할/
  ▶1955년 미국 오레곤 주, 유게네 마을회관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있자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습니다. 영화 내용은 한국전쟁에서 생긴 고아들의 참상을 소개하며 이들을 돌보는 손길을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그 참상이 딱했습니다. 겨울이 다가 오는데 신발도 없고, 옷도 없이 떨고 있는 불쌍한 한국 아이들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넉넉지 못한 한 농부 부부의 마음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농부로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 부부는 함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부는 농장 일부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직접 한국으로 건너가서 8명의 고아들을 양자로 입양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이 사실이 신문에 기사화 되자 여러 사람들이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고아를 입양해 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이 일을 위해 헌신키로 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해리 홀트'(Harry Holt) 부부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홀트 아동복지회'입니다. 복지회는 부부의 정신을 받들어 '사랑을 행동으로'를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믿음의 모습은 행함이 있는 순종입니다. 행동으로 실천된 순종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믿음의 의가 행함을 보인 모습입니다. /아멘!/


  ⑥가나안땅을 기업으로 받은 아브라함! (7)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 후손을 주시고는 후손이 살아간 터전을 안 주시면 어떻게 됩니까? 후손을 주심과 함께 농사지을 땅으로 기업의 땅으로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 그 기름진 땅을 버리고 이곳으로 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은 기름진 땅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농사지을 수 있는 조건은 전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곳으로 불렀습니다. 왜 그곳으로 불렀을까요? 별로 신통해 보이지 못한 곳에서 신통한 것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아!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나님이 지키셨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알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할/
  사실 땅 좋고 물 좋은 곳에서는 농사가 잘 된다면 이것은 의당 그럴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땅도 박하고 하늘을 보면 구름 한 점 없는데 밤에는 이슬로 적시고 그 땅을 하나님의 전능으로 옥토로 바꿔주시는 것을 보면 아무리 영적으로 둔한 사람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환경을 바꾸시는 능력이십니다. 박토를 옥토가 되게 하시고 폐농을 부농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환경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조건은 어떻습니까? 환경이 어렵고 조건이 맞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가나안의 박토를 옥토로 바꿔주신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꿔주신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환경과 조건을 젖과 흐르는 환경으로 조건으로 바꿔주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믿기만 하십시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아멘!/ (2014년 7월 27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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