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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두아디라 교회(계 2:18-29)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5. 21:16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두아디라 교회(계 2:18-29)

 

할렐루야! 우리는 매주일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를 배우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처음 사랑의 열정과 감격을 회복하는 교회임을 깨달았습니다.

서머나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하는 교회임을 알았습니다.

버가모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교회임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우리 효성선교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처음 사랑의 열정과 감격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이 있다할지라도, 고통과 아픔과 박해가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네 번째로,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긴장하고 조심합니다.

여러분! 좋지 못한 일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한 방법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심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고 믿으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약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만 한다면 사람들은 못할 짓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악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베소 교회에는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느시는 이”로 나타나셨던 주님, 서머나 교회에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나타나셨던 주님, 버가모 교회에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던 주님께서, 오늘 두아디라 교회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오늘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아멘.

 

이 말씀은 주님의 두 가지 모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 눈이 불꽃같다”라는 말은 주님의 “통찰력”을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은밀한 죄, 부끄러운 죄, 부지중에 지은 죄, 의도적인 죄, 게으른 죄, 믿지 않는 죄,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며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도 다 감찰하십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불꽃같은 주님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둘째로 주님을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번쩍거리는 빛나는 청동판을 두른 군인의 발을 연상시킵니다. 누구든지 그 발에 밟히면 뼈가 으스러지고 모든 것이 부서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심판의 주님임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23절 말씀의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와 27절의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은 심판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두아디라 교회의 모든 것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시고, 그에 따라 두아디라 교회를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두아디라 교회가 잘못을 저지른 것만은 아닙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도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신앙이 계속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아멘.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5가지 장점을 가지고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선한 사업에 힘썼습니다. 지난 주 여전도회 헌신예배 드릴 때, 들어온 헌금은 월드비전에 입금시켰습니다. 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티 긴급구호를 위하여 헌금을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가 선한 사업에 더욱더 힘을 쓸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두아디라 교회에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섬김과 인내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5가지 덕목을 모두 갖춘 교회가 바로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교회입니다.

 

사실 점점 갈수록 좋아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출발은 좋았지만, 나중에 잘못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시작은 멋있게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타락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처음에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돈에 눈이 어두워 은 30냥에 주님을 팔아먹는 배신을 했습니다. 데마도 처음에는 바울을 따라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러 다녔지만, 나중에는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여기 두아디라 교인들은 달랐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직장생활, 가정생활, 신앙생활이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까?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성도, 시작보다는 마무리가 아름다운 믿음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신앙과 뜨거움과 열심이 깊어지고,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 안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거룩함과 순결함을 잃어버렸습니다.

두아디라 지역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지역이었습니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에서 동남쪽으로 55km 떨어진 소아시아의 내륙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만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신하 중 한 사람이었던 셀루커스 니카토 1세에 의해서 건설되었고, 그의 딸의 이름을 따서 두아디라라고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 시를 보호하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군사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시는 비록 소도시였지만 양모, 세마포, 의류, 염료, 피혁제품, 청동제품 등을 취급하는 상업이 매우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6:14절에 나오는 빌립보교회의 첫 번째 성도였던 ‘루디아’가 바로 두아디라 출신 비단 장사였습니다.

두아디라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산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비슷한 ‘길드’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길드의 조합원이 되어야 취직도 되고, 은행거래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동조합은 이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더 나아가 종교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 힘이 막강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동조합은 자체적으로 섬기는 수호신(트림나스-Trimnas)이 있었는데, 조합원들은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자기들이 섬기는 트림나스 수호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즐겼습니다.

이때 여인들을 불러 들여 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좋지 못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인들은, 신앙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길드의 조합원이 되어, 돈을 벌 것인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돈을 위해 악한 이세벨의 영향력 아래 빠져들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아멘.

 

주님께서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것을 책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세벨”이 누구일까요? “이세벨”이 누구인지 알아야 이 구절을 정확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6장을 보면,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이었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의 아내가 된 여인입니다.

이세벨은 자기 나라에 있을 때부터,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겼는데, 이스라엘의 왕비가 된 후에도, 과거에 섬기던 우상을 계속해서 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혼돈케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엘리야의 목숨까지 죽이려고 했던 여인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농부였던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고, 심지어는 권력을 이용해서 그를 죽이기까지 한 천하에 둘도 없는 악독한 여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이씨 가문에 먹칠을 한 성경 속의 여인입니다. 그녀는 모략과 정치적 수단이 뛰어난 여인입니다.

그 여인의 입김으로, 이스라엘이 바알 우상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세벨은, 언제나 음행과 술수의 대명사로 불리울 만큼 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 이세벨과 같은 악한 여자가 두아디라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이 여인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은 거짓 선지자인데, 참 선지자인 것처럼 행세하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이 “자칭”이라는 것에 조심해야 합니다.

때때로 과거가 불분명한 자칭 목사, 자칭 장로, 자칭 권사, 자칭 집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과거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불분명한 사람, 현재에도 투명하지 않고 자꾸 숨기려고 하는 사람을 함부로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얼마 전에, 기도하고 싶다고 교회에 온 여자분이 계셨습니다. 대화 중에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알고 봤더니, 자칭 성령님이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저에게 기도 받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저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안수해 주셔야 하는데, 저 보고 성령님께서 기도해 달라고 하셔서, 그런 성령 안 믿는다고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자칭 하나님, 자칭 예수, 자칭 성령님’이 있습니다.

여러분!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썼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달라고 요청할 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거절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진짜가 있기에 가짜들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두아디라 교회 안에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음에도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 여자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들이 그 여인을 한 번 보면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매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그 여자에게 넘어갔습니다.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두아디라 교회는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서 배워야 할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바로 거룩함과 순결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룩과 거리가 멉니다. 음란과 부정과 불의가 팽배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한 순간만 방심하면, 우리는 마귀의 공격에 쓰러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룩’은 ‘구별되다, 분리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세속적인 삶의 가치와 방식으로부터 구별되게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믿음의 성도들은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이 불의할수록 거룩한 삶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힘은 바로 거룩입니다. 깨끗함입니다. 순결함입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순결한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에 앞서 성결의식(할례)을 명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전술이나 무기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승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타락한 문화 속에서, 순결함과 거룩함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할례를 통해, 자신을 성결케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여정을 살아온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중에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창 35: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화는, 가나안 문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속적이고 반(反)기독교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특별한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세 가지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떳떳하게 자신을 밝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에 파묻혀 사는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상당수의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효성선교교회를 다니는 성도입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거룩한 자녀임을 당당하게 밝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No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No!”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용기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절제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말은 아라비아말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유래가 흥미롭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말을 찾아다니던 어떤 사람이, 두루 다니면서 훌륭한 말 1백 마리를 찾아내, 우리 안에 가두고, 먹을 것을 충분히 주되, 물은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아름다운 시내가 흐르는 전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말들은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은 말들이 목이 말라 견딜 수 없는 상황까지 가게 한 다음, 우리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말들은 거의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말들이 거의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 주인은 풀피리를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1백 마리 중 네 마리만 피리소리를 듣고 멈춰 섰는데, 바로 그 네 마리 말의 조상이 아라비아말이었다고 합니다.

절제하는 말이, 명마로 인정받는 것처럼, 육신적인 욕구를 향해 달려가다가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즉시 멈춰서는 사람이 진정한 성도로 인정받는 줄로 믿습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들보다 거룩과 성결로 영적인 순결을 지키는 성도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성도라고 믿습니다. 거룩과 성결을 위해 단호하게 “No!”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서로의 삶에 책임을 지는 소그룹(Accountability Group)을 형성하라’고 합니다.

개인이 혼자 거룩해지려는 노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서로 체크해주고, 서로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22절에서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만약 나의 믿음을 떨어뜨리고, 나의 성결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떨어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주님의 신부로서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 성결의 동역자, 구별됨의 동역자, 믿음의 동역자를 여러분들의 옆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18세기 독일에 조각가 요한 하인릭 다네커(1758-1841)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많은 조각상을 남겨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의 절정에, 어느 날 갑자기 주님과 사랑에 빠진 후, 그리스도상을 조각하기를 열망했습니다.

2년 동안 작업한 후,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시험하기 위해, 한 어린 소녀에게 작품을 보여주었지만, 이 소녀는 그 조각상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시 6년에 걸쳐,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같은 소녀에게 보이자, 단번에 소녀는 “아, 그리스도이시군요”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그때 그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런 직후, 당시의 유명한 나폴레옹 황제에게서, 파리로 와서 루부르 박물관에 비너스상을 조각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깁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의 상을 조각한 이 손으로 더 이상 나는 이방의 신상을 조각함으로 내 마음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그가 세상의 명예와 권세 앞에서,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그의 사랑, 그의 소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다른 어디에서도 그의 만족을 찾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결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흰옷 입은 순결한 주의 자녀들입니다.

아직도 내 안에 해결되지 못한 욕망의 덩어리들이 있습니까?

교만과 탐욕과 시기심과 질투와 욕망이 사로잡고 있습니까?

아직도 내 몸을 의에 병기로 드리지 못하고,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 몸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거룩함과 순결함이 능력입니다. 거룩함과 순결함을 지닌 자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자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믿음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있고, 크고, 화려하다 할지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그 그릇은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깨끗할 때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거룩함과 순결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두 가지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먼저 26절을 보면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권세’란 말의 뜻은 “지배권, 통치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악에게 승리하는 사람은 만국을 다스릴 통치권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28절을 보면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여기 ‘새벽별’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계시록 22:16절에서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벽별’이란 바로 우리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사람에게는 주님 자신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새벽별을 주리라는 것은 눈물과 한숨과 고통과 괴롬과 핍박과 질병과 어둠과 시험과 환난이 물러가고, 기쁨과 소망과 사랑과 평강의 주님께서 내게 찾아오셔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다는 말씀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을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바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거룩함과 순결함을 추구하는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 주신 이 몸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의의 병기로 드리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함과 순결함을 회복하여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권세있는 성도, 광명한 새벽별 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주님 말씀 따라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손에 붙잡힌 바 되어 사용되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를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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