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11/9,설교}*신앙인들이 격는 선과 악의 투쟁/로마서 7:14-25*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1. 8. 09:16

{11/9,설교}

 

*신앙인들이 격는 선과 악의 투쟁/로마서 7:14-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1월의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다음주는 추수감사절이니 우리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심에 감사합시다.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복을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감사한만큼 복이 차고 넘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가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소망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꼭 존재하는 '선과 악'에 대한 말씀으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신앙인들이 격는 선과 악의 투쟁"이란 주제로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 선생 안에 선과악이 투쟁하고있는 상태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마음 속에 선과 악이 투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선을 원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러나 한편 원치않는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서로 선심과 악심이 싸우며 오히려 죄가 승리하여 죄의 포로가 될 때가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바울의 솔직 담백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잘한 것, 자기 장점과 강점을 과시해 보려고 합니다. 자기 약점은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솔직하게 자기가 체험하고 있는 영육간 생활 중에서 자기에게 약점이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통 인간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경지에 선 바울의 위대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보통 신자들의 생각은 나는 죄를 일체 짓지않고 산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가 자기 속에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40일 금식했다 하고 욕심도 다 사라졌다. 그리고 천사와 같이 거룩하다 그래야 그 사람이 위대하다 참 주의 종이다 하며 천사와 같이 대접합니다.

 

바울과 같이 솔직하게 탐심도 있다 하고 선을 행하고자 원하나 더욱 죄를 짓는다 하고 좀 소박한 인간성을 보이면 저분은 참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은혜가 없다. 속화 되었다고 비판을 합니다.

물론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바울과 같이 좀 더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세로 서는 것이 좋을줄 압니다. 그렇다고 자기의 덕되지 않는 허물을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며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마음 자세로 살자는 말입니다.

바울은 성령충만한 성자이면서 대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자신 속에 선과 악이 있어서 서로 싸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 경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견해는 잘못된 견해이며 바울이 중생 후 은혜를 많이 받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있으면서 경험한 상태임을 본문의 문맥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문맥의 동사가 전부 현재 동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15절에 "미워하는 것을 함이라" 18절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절 "악을 행하는도다" 등 현재형의 동사들 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실질적으로 신앙생활 속에서 겪는 경험이면서 육을 쓰고 사는 모든 인간들의 공통된 경험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에 들어가서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1. 원하는 것은 율법의 선한 것이지만 육에 속한 나는 원치 않는 죄를 행하며 죄가 오히려 나를 승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4-17절).

 

즉, 율법의 신령한 선의를 따라 살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나는 죄 아래서 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을 알면서도 행치 못하고 악한것을 알면서도 억제하지 못하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육신을 썼다는데 있습니다. 육을 쓴 인간은 죄와 상관없이 살수 없습니다. 육은 죄의 지배를 받습니다. 마음은 선한 의를 원하지만 육은 약해서 넘어갑니다.

① 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데 육신은 말씀에서 빗나간 생활을 하고

③ 마음은 형제를 사랑해야 되겠다고 하면서도 실제 동작은 오히려 미워하고

③ 마음은 남에게 좋은 말만하고 살아야 되겠다 하면서도 육체의 허는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실언을 하고,

④ 마음은 분을 안 내겠다고, 원했는데 언제 벌써 육신의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 해지고, 안 그래야 되겠다 하며 맹세하면서도 맹세를 어기고 술을 안 마셔야 되겠다 하면서도 마시고, 노름을 안해야 하겠다 하면서도 또 하고 그런때가 많습니다.

 

어느 가정에 소매치기 남편을 돌아오게 한 연인이 있습니다. 소매치기 남편이 그 일에 손을 씻었는데 부인이 입원하게 되어 입원비를 마련하려고 또 다시 소매치기를 했습니다. 남편을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이 부인은 가슴으로 울면서 검찰에 고발을 했고, 또 나중에 관계자에게 간절한 편지를 써서 관계자와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게 했습니다.

즉, 우리 육신은 본질적으로 아담의 타락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선을 향하여 나갈 능력이 상실되어 그렇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좋은 일 보다 원치 않는 나쁜 일을 하게 됩니다. 물론 바울의 이 말은 전적으로 죄를 항상 짓고 산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경험을 어느 사이에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전적으로 선과 의만을 행하며 살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원치 않는 죄를 지을때가 있다는 경험을 말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전적으로 죄만 짓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바울과 같은 경험을 공통적으로 가집니다. 이를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죄짓지 않고 산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야 말로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2.  사람은 모순된 존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18-23절).

 

선과 악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죄의 법을 즐거워 하는 것, 이런 것이 동시에 우리 속에 존재해 있다는 것을 바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구조부터 모순된 존재입니다. 육신과 영혼, 이것은 이질적인 것이자만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각도 모순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육신이 있기 때문에 육은 육을 좋게 하기 위하여 나가려고 하고, 영혼이 있기 때문에 영은 영이 좋아하는 것을 위하여 나가려고 하고, 육은 저등한 것을 위하여, 영은 좀 더 고등한 것을 위하여, 육은 물질, 정욕, 본능의 작용, 안일 등등을 위하여 작용하고 영은 진리, 신앙, 신령한 것을 위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이 둘이 상호 자기들의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투쟁하게 됩니다.

영은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육은 그것을 막고 죄를 가져 오려고 합니다. 이런 모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인생은 모순을 품고 있고 모순 속에 사는 괴로운 존재입니다. 괴테의 시 중에도 그런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 내 가슴 속엔 두 영이 살고있네. 그 한 영이 다른 한 영에서 떠나려 하네, 하나는 거센 애욕을 지니고 이 속세를 부둥켜 쥐고 있다. 다른 하나는 억지로나마 이 티끌 세상에서 떠나 높고 높은 조상의 광야에 오르려 한다."

로마의 시인 Ovid는 말하기를 "나는 더 좋은 것을 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나 나는 더 나쁜 것을 따르고 있다".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선과 악의 투쟁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한편의 마음에서는 하나님 앞에 십일조도 드리고 감사헌금도 드리고 특히 금년에 풍년을 감사하여 감사주일 날 감사헌금도 좀 많이 드려야지 하는 마음이 있는데, 다른 한편 마음에서는 인색한 마음이 일어나 그것을 막습니다. 내 한편 마음에서는 주일은 물론 교회 공예배 출석을 성실하게 하고 신앙생활을 좀 더 착실하게 해야지, 새벽기도도 해야지 하는데 다른 한편 마음에서는 교회 출석이나 성실한 신앙생활은 이 다음 50대 넘은 다음에 하고 젊을 때에는 세상 재미 좀 보면서 목사님 얼굴 잊어버릴만 하면 한번식 교회에 나가곤 합니다. 그래서 주일날이 됐는데도 야구 경기장, 낚시터 등에 가고 예배시간이 됐는데도 TV보자 하며 교회에 안나옵니다.

내 한편 마음에서는 젊었을 때 주의 일을 많이하고 교회 일에 충성을 다 해야지 하는데, 다른 한편 마음은 교회일에 관여하면 골치아픈 일이 많으니 시간 없다는 핑계대고 그만두라고 자꾸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서도 바울의 마음과 같이 선한 악이 항상 투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으로 나가려는 힘이 약하고 악으로 나가려는 힘이 강하여 죄에 포로가 되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하여 바울 선생도 선이 악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경험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역시 같은 경험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3.  삶을 부르짖는 절규가 나옵니다(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런 절규가 나오게 됩니다. 오호라 이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사는 나를 선과 악의 투쟁에서 악에게 눌리워 질식해서 죽게된 나를 누가 구제해 주겠는가? 하는 부르짖음 입니다. 이 절규는 "아이고, 못살겠다" 하는 낙망 중의 신음이나 비관이 아니라 살려고 구원을 호소하는 절규입니다. 원하는 선보다 원치 않는 악이 따라 붙어서 선을 방해하고 참된 삶을 이루지 못하게 할 때 인생의 고민은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 고민에서 또 삶을 갈구하는 부르짖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돼지처럼 살고, 죄의 노예로 살고, 육신 중심에서만 산다면 이런 부르짖음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악과의 투쟁에서 선이 승리를 얻으려하고, 뜻을 세워서 살고,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하고, 참된 생명을 얻으려고 하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부르짖음을 발할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하고 그리스도인 답게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부르짖음이 떠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 사실상 인간답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르짖음이 없는 사람은, 이 거룩한 고민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지만, 돼지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한 고민으로 삶을 갈구하는 이 부르짖음을 가질 때 우리의 부르짖음을 듣고 구제해 줄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공자님? 석가모니? 어떤 철학자? 과학자? 아닙니다. 저들은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저들도 역시 우리와 똑같이 문제를 안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지금까지 비명을 지르던 바울은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은 선과 악의 투쟁 속에서, 모순과 갈등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① 내가 죄를 이길 수 없으나 예수님이 죄를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죄를 이길 수 있고,

② 나는 악을 물리칠 수 없고, 세상도 이길 수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성령의 돕는 힘을 힘입어 악을 물리칠 수 있게 되었고, 세상도 이길수 있게 되었습니다.

③ 내가 선을 행할 능력이 부족하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돕는 힘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며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고,

④ 내 자신은 선과 악의 투쟁에서 선의 패배로 영혼이 죽을 수 밖에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는 환희의 찬미를 부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과연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이 모든 악과의 투쟁에서 승리가 가능하며, 예수님 안에서만이 모순과 갈등의 문제가 해결되며, 예수님 안에서만이 모든 삶의 고민이 사라지며, 예수님 안에서만이 죄의 법을 섬기는 죽을 몸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튼튼히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나가는 우리가 되어서 훗날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의 자녀로다!"라는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주후 2014년 11월 8일의 이른시간에

박종태 목사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