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부활사건입양,성령을부어주신티모르사례]/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21:54

070408 역시 믿지 아니 하니라 (16:12~18)

성경본문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 하니라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66 8살 나이에 강옥진이라는 여자아이가 미국으로 입양됐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여권과 서류의 이름은 차정희였어요. 고아원 선생님이 “너 가서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네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보냈어요.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가 하면 이미 2년 전부터 미국의 한 부부가 차정희라고 하는 어린아이를 후원합니다. 돈도 보내주고 옷도 보내주고. 그러다가 그 집에 막내딸로 입양을 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수속을 다 밟았어요. 이제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이 기다림이 너무 간절해서 그 아이의 발 치수에 맞는 신발을 사서 보냈어요. 그랬는데 글쎄 그만 그 직전에 차정희의 부모가 아이를 찾아갔어요. 고아원이 고민에 빠졌어요. 이 일을 어떻게 할까. 그러다가 그 아이와 얼굴생김이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한 이 아이를 대신 보낸 거예요. 그런데 이 아이는 영어를 모르니까 당장 내가 누구라고 얘기할 수 없죠. 차정희로 살아가는 거죠. 나중에 그 아이가 자라면서 영어가 되니까 부모님한테 이야기를 한 거죠. 얼마나 놀랐겠어요? 처음에는 부모가 “아니야, 너는 차정희야. 이 서류를 봐라.” 내가 나를 밝힐 수 없어요. 이 강옥진이 자라가지고 대학생이 돼서 한국에서 자기 부모를 찾습니다. 그 고아원을 연락해가지고 드디어는 자기 가족을 찾았어요. 가족사진을 얻어가지고 미국의 양부모님에게 진실이 이렇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그런 혼란은 정리됐습니다마는 그가 미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차정희의 이름으로 돼있어요. 운전면허도 그렇고 의료보험도 그렇고. 더구나 미국가정에서 자라면서 미국식 이름을 가지고 살게 되죠. 한 사람인데 이름이 세 개가 있는 거예요. 세 개의 정체성이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이 자라나서 영화감독이 됩니다. 그리고는 <일인칭복수> 즉 이제까지 살아온 자기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서 발표를 했어요. 큰 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그는 한국에 왔어요.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놓고는 마지막 순간에 사라져서 이 모든 삶을 나에게 안겨주고 간 그 차정희는 어디 있는가. 그는 정작 어떻게 살았는지 너무 궁금하다,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사건은 입양사건이에요. 전혀 하나님과는 관계없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사건이에요. 입양이 되면 친자식이건 입양한 자식이건 법적 권리가 주어져요. 그 부모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권리가 있어요. 그 부모가 주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상속권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사실은 내 이름으로 살아왔습니다마는 영적으로 보면 우리는 우리이름으로 살아온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를 보신 거예요. 우리의 행위를 봤다면 우리는 벌써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신 거예요. 예수 그 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거예요. 여기에 놀라운 은혜가 있는 거죠.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게 복음이에요. 우리가 사도신경 고백을 했습니다마는 그것은 교회가 발전하면서 수백 년에 걸쳐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다듬은 거예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성교회, 그 안에 살아가는 성도, 이 다섯 가지를 신앙고백으로 정리한 거예요. 그것을 압축하면 고린도전서 15 3~4절에 실려 있는 그 말씀이에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복음의 원형이에요.

그렇다면 이 부활의 의미가 뭐냐. 첫째는 대표성이에요.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고난을 받으셨다. 두 번째는 참여에요. 우리가 그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사건에 함께 참여해서 예수의 죽음을 믿는 우리도 옛사람이 죽고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새생명으로 태어난다. 세 번째는 대속이에요. 그저 그렇게 죽고 살아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죽고 살아나는 그 순간에 우리의 모든 허물과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다 용서하셨다. 그래서 이 부활은 예언의 성취죠. 이사야 53 4~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서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이게 바로 십자가와 부활에 담겨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활을 잘 믿지 못하거든요. 믿지 못하지요. 그것을 어떻게 믿겠어요. 오늘 성경을 읽어보니 ‘믿지 못하였다. 또 말했는데 역시 믿지 못하였다.’ 여자들도 믿지 못하였다고 그랬어요. 처음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이 두렵고 떨려서 도망가 버렸어요.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했어요. 시간이 지난 이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용기를 내어서 자기가 본 예수를 사람들에게 얘기했지만 제대로 믿지 않았어요. 또 엠마오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급히 돌아와 가지고 다른 제자들에게 얘기했지만 또 믿지 않았어요.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을 야단하셨어요.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야단하셨어요. 왜 믿음이 없느냐. 마음이 완악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 먼저 본 사람들이 말하고 있건만 그것을 믿지 못한 거죠.

여러분, 만약에 부활이 거짓이라면,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에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부활을 목격한 첫 증인을 여자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자들의 증거는 인정하지 않았어요. 법적인 효력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여자들이 먼저 예수를 만났고 여자들이 목격한 예수를 가지고 부활을 얘기하겠어요. 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 그 메시야가 십자가에 죽는 것을 보고 그만 허탈해진 그 사람들의 집단 망상 속에서 부활이 싹텄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내가 예수를 보았다’ 그런 구절은 없어요.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주체가 예수님이에요.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 그게 죽은 게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거의 죽은 거다. 그러나 무덤에 넣었더니 무덤이 서늘해가지고 그만 잠에서 깨어났다. 그렇다면 얘기가 더 우스워져요. 그러면 피투성이가 되고 창에 찔리고 거반 다 죽은 사람을 죽음의 승리자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또 빈 무덤을 설명하는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몰래 예수님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보고 있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무덤을 옮겼다. 그렇다면 그렇게 죽은 예수를 옮긴 그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라고 그렇게 증거하는,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어요? 진실을 감춰놓고 그렇게 살 수 있어요? 부활이 없다고 얘기하면 얘기가 더 복잡해져요. 제대로 생각하고 공부한 사람이 내린 결론이라면 부활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내가 어떻게 믿고 받아들여야 되느냐 하는 것이죠.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이제 평범한 사람일 수 없어요. 그저 위대한 사람일 수도 없어요.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나중에 뭐라고 말하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얘기할 때에만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사건이 앞뒤가 들어맞기 시작해요. 우리가 믿고 안 믿고는 두 번째 문제에요. 성경 그 자체가 앞뒤가 들어맞는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사랑을 베푸신 분이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면 그 세상은 모순의 극치이죠. 불의와 부정이 가득한 세상이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탄하고 탄식하는 세상의 그 모습 그대로죠. 그러나 예수님이 그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셨다고 얘기한다면 부정과 부패가 가득한 그 세상 속에서도 이제 우리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는 거예요. 설령 죽는다고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한평생 그리고 영원한 소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해주셨어요. 삶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거죠.

오늘 우리 J-TEEN 친구들이 이렇게 예배 중에 연주를 합니다. 이는 새로운 사건이에요. 한국에 있는 학생들이 언제 이렇게 악기를 다루는 여유를 부릴 수 있겠어요. 참 복도 많아요. 부모님 잘 만나가지고 복도 많아요.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안하고는 여러분 문제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참 복이 많아요. 바라기는 거기다가 하나님의 믿음과 은혜가 부어져서 정말 건강하고 멋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사실 부모님들의 간절한 소원이에요. 여러분 잘되는 게 부모님의 소원이에요. 알고 보면 그게 하나님의 소원이에요. 그 소원을 이루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아야 되요. 이게 진짜 잘되는 비결이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십자가 사건이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믿음이 없다고 야단치셨어요. 그러나 성만 내고는 그냥 떠나버리시지 않았어요. 엠마오의 두 제자를 만나가지고는 그 날 저녁 늦은 시간까지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주셨어요. 선지자들이 예언한 구약성경에서 예수가 죽어야 하고 부활해야만 하는 이유를 가르쳐주셨다고 했어요. 여러분 말씀을 들어야 해요. 여러분이 만약에 부활의 현장에 서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어요. 제자들같이 전혀 깨닫지 못하다가 부활을 체험하면 경험하지 못한 일이니까 도망갈 수밖에 없지만 이제 그만큼 들었으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현장에 서있다면 이젠 다른 고백을 해야 되겠죠.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바꿔요. 말씀을 듣다 보면 그 말씀 속에 나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요. 두 번째는 말씀을 듣다 보면 아 그렇구나, 깨닫는 순간이 있어요.

일본의 유명한 엔도 슈샤꾸라고 하는 작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분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 기술이 발달하다 보니 어지간한 것들은 다 밝혀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옛 사람들과는 달리 현대인들에게는 신비감이 없어졌어요. 다 드러난 것 같아요. 여기서 착각해요. 다 아는 것 같아요.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 것 같아요. 이만큼 하면 이제 사람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죽는지 한평생의 모든 이야기를 다 아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게 바로 어설프게 공부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우주과학자들의 체험이야기가 있어요. 달나라를 갔다 온 사람들의 체험을 묶어 놓은 책이 있는데 그 글에 보면 달나라에 가서 섰을 때에 여기 지구에서 보낸 사람들이 볼 때는 그건 인간의 위대한 달정복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마는 정작 그 시간에 달표면에 서서 우주를 보고 예쁜 지구를 본 사람들은 뭘 느꼈느냐, 신비를 느꼈어요. 인간의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우주의 신비감에 충만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과학이건 수학이건 어떤 학문이건 그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에는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 하나님의 신비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부활의 사건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분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인생은 그저 보는 대로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인생은 심오한 것이다.

세 번째는 오늘 다 믿어지지 않아요. 오늘 다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순종할 때 그 부활의 증거가 하나하나 나타나요. 오늘 제대로 믿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감당할 수도 없는 말씀을 주셨어요. ‘너희는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너희가 전하는 그 복음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너희의 말을 듣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너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이런 표적이 따를 것이다. 귀신이 물러갈 것이고 방언을 말할 것이고 뱀을 집을 것이고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오늘 아직 제대로 믿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까지도 주셨어요.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 속에 부활의 능력과 말씀이 들어가서 그들의 삶이 변화되어 그 끝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다 내다보셨기 때문이에요. 여기 부활을 나가서 증거하는 증인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그야말로 초능력 같은 사건들을 약속해주셨어요. 이것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참 오래됐어요. 제 기억에 한 30년은 넘었을 거예요. 신문을 보니까 그만 교회를 나가는 어떤 어머니가 두 딸과 셋이서 ‘성경을 보니까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걸 마셔도 죽지 않는다.’ 같이 나눠 마셨어요. 어떻게 됐을까요. 다 죽었어요.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다 죽어요. 우리는 과학이라고 하는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독을 먹으면 죽게 돼있어요. 어떻게 독을 먹는데 안 죽겠어요.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게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이에요. 인도네시아 서티모르 꾸빵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에요. 하나님께서 그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그런 사람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온 형식만 남은 신앙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부으셨어요. 그들이 모여서 기도하는데 거기에 성령께서 임하셨어요.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그 동네사람들이 교회에 불난 줄 알고 물동이를 들고 막 왔어요. 그들의 눈에는 교회에 불이 붙은 거예요. 찾아왔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온 교인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을 부어주신 거예요. 그들이 이제까지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던 삶을 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부터 이들이 그 주위에 있는 많은 섬들로 복음을 들고 나갑니다. 성경에 있는 지금 여기에 약속한 그 사건들이 그대로 다 일어났어요. 어느 마을에 갔더니 사람들이 이 전도자들이 오는 것을 알고 죽이려고 음료에다 독을 타고 이들을 친절하게 맞이하면서 음료를 내줬어요. 마셨어요. 이 동네의 나쁜 사람들이 이제 이 사람들이 죽겠구나하고 기다리는데 죽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하나님이 지켜주심을 발견하고 온 동네사람들이 다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게 된 거죠.

여러분 이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이 뜻하지 않은 해를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지켜주시는 사건들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헌신한다면 하나님이 이런 증거를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계획을 좇아서, 내가 달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아래서.

오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처음에는 믿지 못했습니다. ‘역시 믿지 아니 하니라’ 그랬어요. 그러나 그들은 결국 부활의 증인이 됐어요. 계속해서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그들의 생각,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어요. 우리도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다 썩어져 없어지고 무로 돌아가는 줄 알았건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못이 박힌 손을 내보이시고 창에 찔린 옆구리의 모습을 보이시면서 나를 보라 말씀하시고 부활의 모습이 이러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 오늘 부활의 그 놀라운 능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오늘 현실의 모든 어려움을 능히 헤쳐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