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근본적인 죄책감]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4. 19:15

20070429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요한복음 8:1~11)

성경본문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 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 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 우리 사위는 다 좋은데 한가지 흠이 있단 말이야. 아 이 친구가 노름을 할 줄 모르거든. 아니 그게 왜 흠인가. 아 그런데 자꾸 하려고 하니. 어떻게 하겠어. 여러분 노름을 잘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작년에 타짜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저도 그 영화를 보고 알았습니다. 타짜라는 것이 전문 노름꾼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죠. 그 영화를 보니 사람이 망하는 방법도 가지가지 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게 전문노름꾼이 되가지고 돈을 많이 딴다고 결말이 좋은 게 아니 더라구요. 결국은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다 치고 박고 싸우다가 하나씩 하나씩 다 파멸해 가는 이야기더라구요. 듣기로는 서울에만 그런 전문 노름꾼이 300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디 가서 함부로 화투장 내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영화의 실제 주인공 모델이 있어요. 그분이 50대 초반인데 나이 스물에 거기에 빠져들어가지고 서른세 살에 손을 씻고 나왔다고 합니다. 13년간 거기 미쳐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하룻밤에 이억도 따 봤데요. 흥미가 좀 일어나죠. 그러나 그렇게 번 돈 그렇게 다 쓰는 거죠. 술과 여자와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이 리듬 이라는 게 있는데 밤 새워서 노름하고 낯에 쓰러져 자고 밥을 굶고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요. 건강이 다 무너진 것이죠.  그가 처음에 노름으로 큰 돈을 잃고 나서는 이를 악물고 내가 돈 따기 전에는 집에 안 들어 온다. 그거 철없는 짓이죠. 집을 나가서 8개월을 집에 들어오지 않고 노름에 미쳐 그러고 있다가 돌아와 보니 아내야 말로 또 가출했어요. 아내가 어디로 가버렸어요. 딸 둘이 있었는데 큰 애는 시집에 주고 갓난애 작은애는 어디론가 입양을 시키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어요. 그 잃어버린 둘째 애를 아직도 찾고 다닌 데요. 가정이 다 깨진 거죠.

그리고 나중에 그가 손을 씻고 나서 이런 영화가 방영되고 그  얘기가 전해지니까 또 많은 사람들이 자꾸 찾아온다는 거에요. 그런데 뭐 하러 찾아 오냐면 그 기술 좀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는 거죠. 그런 사람을 타일러서 보냅니다 만은 말을 안 들어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저 사람이 한 삼 년 노름한 것 같은데 한 삼 년 노름하면 자기 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자기가 아는 주위의 사람 돈은 다 끌어다가 온갖 친척에다가 다 피해를 준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어요. 자기가 끊으려고 노력해도 끊을 수 없는 그 마지막 길인 그 극단적인 길목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가 하나님을 만난 감격을 가지고 눈물을 쏟으며 돌아서려고 합니다만 자기 처지를 생각해보니 이건 처참해요. 가정은 다 깨졌고 아무도 주위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그를 쳐다 보려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 내가 이렇게 죄가 큰데 어떻게 내가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셨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 큰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잘 하면 된다. 지난날은 내가 묻지 않겠다. 앞으로 잘 하면 된다. 그리고 손을 씻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 가는 거죠.

그런데 그의 얘기에 의하면 그가 손을 씻은 지 20년이 지났어요. <인간극장>에 소개된 장면을 보니까 하도 이 주위에서 말이죠 이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까 심심치 않게 그렇게 솜씨가 좋았다고 하는데 그 솜씨 좀 보여달라고. 가끔 마지못해서 솜씨를 보여주는데 20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도 녹슬지 않았더라고요. 이 화투장을 가지고 숨기고 펴고 하는데 정말 귀신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하느냐 손을 씻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섰지만 지난 20년은 또 한번 쉽지 않은 연단의 시간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내 몸 깊이 뼈 속까지 새겨져 있는 그 못된 습관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로 여자를 만나게 하시고 믿음이 좋은 여자를 만나게 하셔서 흔들릴 때마다 붙들어 주셨어요. 지금은 옛날과 비교할 수도 없이 그저 고기잡고 몸으로 일하면서 그저 그날 그날을 살아갑니다. 옛날에 큰 돈을 벌던 때 하고는 비교가 안되죠. 그러나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20년을 살았는데 그는 말합니다. 이제 좀 그 옛날에 악한 습관으로부터 자유케 된 것 같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이 성전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서 말씀을 전하는데 거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리고 왠 옷 매무새가 다 흐트러진 머리가 다 풀린 그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이 여인을 잡아왔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들렸습니다. 모세는 이런 여인은 돌로 쳐죽이라고 율법에 말하였는데 선생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거기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 아이러니 보세요. 죄가 온 그대로 다 들어난 여인은 죄사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됐어요. 그러나 저의 죄를 드러내고 저를 돌로 치려하고 이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자기 죄를 그래도 안은 채 부끄러워하며 돌아갔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 말은 너희 모두가 다 죄인인데 어찌 이 여자의 죄만 죄라고 하느냐. 그렇다면 기준이 다르다는 거죠.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거기 모인 사람들은 세 그룹이에요. 남을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 이제 남에게 돌을 맞아 죽게 된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는지 우왕좌왕 흔들리는 사람. 예수님 말씀을 듣겠다고 나왔다가 정작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동조하고 부끄러움을 느꼈던 사람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준은 뭐냐. 오늘 이 사건이 끝난 다음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살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준은 세상의 빛 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죄인이에요. 세상의 기준은 도덕과 윤리에요. 그러니까 사람은 좀 고상해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죄인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판결법이에요. 이걸 기억해야 되죠. 그러니까 사실은 어떤 사람이 죄인이냐? 소극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죄인이라고 할 수 있겠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스스로가 어둠 가운데 있는 거에요. 내게 힘이 있고 내게 여력이 있을 때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붙들어서 꺼내 줄 수 있잖아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또 연약한 사람 이죠. 그런 사람이 죄인이다. 하는 것이죠.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빛 되신 하나님을 모르거나 그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그것을 죄라고 말해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느끼게 되요. 왜 그러냐.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그 마음속에 죄책감이 있어요. 스스로 죄를 느끼고 있어요. 이거를 존재의 죄책감 이라고 말 할 수 있어요. 태어난 모든 사람은 불안합니다. 두렵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도 뭔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오늘 남들이 보기에는 사장일 수 있고 학자일 수 있고 상당한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성취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내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인간의 모습이에요. 어찌 보면 두려움과 불안이 있다고 하는 그것 자체는 내가 인간으로 살아있다라고 하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되죠. 이걸 해결해야 되죠. 그게 바로 자유함이에요.

그런데 이런 죄책감에는 세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째는 거짓된 죄책감이 있어요. 그 일곱 살 난 어린 아이가 부모가 그만 이혼하는 바람에. 요즘은 애들을 서로 맡으려고 하지 않잖아요. 그래가지고 이 아이가 그만 보육원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내가 잘못해서 엄마 아빠가 헤어졌다. 이렇게 생각해요. 요게 어린 아이의 생각이에요. 그것이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에요. 나 때문에 엄마 아빠가 헤어졌다 라는 것이. 어른이라면 이런 경쟁사회 속에서 능력이라든지 이러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는다든지 비판을 들을 때 우리는 열등의식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갖습니다. 여기에서 죄책감이 일어나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거짓된 죄책감이에요. 그건 그렇지 않은 거에요. 그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거에요.

두 번째는 억압된 죄책감이에요. 즉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우리 안에는 두려움과 불안함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감추려고 하고 그리고 다른 것으로 자꾸 이렇게 보상하려고 해요. 내가 이룬 학력 이라든지 돈이라든지 이런 명예라든지 이런 것을 가지고 내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을 자꾸 감추려고 해요. 그런데 그게 감추려 할수록 감춰지는 게 아니에요. 나를 더 불안하게 해요. 내 속 깊이 들어가서 그것은 두려움이 되고 불안이 되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가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예리하게 지적하게 되요. 나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춰내는 것이죠.

세 번째 문제는 이러한 죄책감을 우리가 잘못 다루고 있어요. 예를 들어서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떤 눈으로 신앙생활 하느냐. 이게 중요하거든요. 뭔가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얻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을 해야 된다. 이것 잘못 빗나간 거에요. 대가를 지불을 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다면 여러 가지 의식이라든지 이런 것에 열심히 참여하고 헌금도 하고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구원을 해주신다니까 거기에 대해서 내가 뭔가를 응답을 해야 되겠다라는 불안을 가지고 열심을 낸다는 그건 잘못된 거에요. 그게 바로 종업원 의식이죠. 회사에 온 사람은 월급을 받고 월급을 받는 만큼 일해야지요. 일하지 않으면 해고당하잖아요. 요즘같이 구조조정이 심한 이런 사회 속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죠. 그러나 그 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건 완전히 얘기가 다른 거에요. 부모로써 아들이 잘되길 바라지만 그러나 아들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아요. 아들에게 밥값을 요구하는 부모는 없어요. 오히려 건강한 아들 딸이라면 이 집에 태어난 이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내 부모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마음껏 구해야 되는 거죠. 죄책감을 잘못 다루고 있는 거죠.

그래서 누구보다 내가 이 종교의 충실함으로 나는 합격이다 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세상에 사는 저런 죄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들과는 나는 다르다라고 자기 의를 쌓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대가를 지불하고 자기 의를 쌓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예수님 앞에 한 여자를 끌고 나왔어요. 이른 아침에.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그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말합니다. ‘선생이여,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이 여자를 모세는 돌로 치라고 말씀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뭐라고 말씀 하시겠습니까?’ 속에는 칼을 품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선생이여. 라고 말합니다. 이 고상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속 사람의 모습이죠. 또 율법을 갖다 댔습니다만 사실은 신명기 22장에 보면 이 간음하는 사람들의 형벌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거기에 보면 예외 없이 남자에 대해서는 다 돌에 맞아 죽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여자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정황에 따라서 살피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오늘 남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회에서 지극히 연약한 사람을 제물로 삼아서 그에게 모든 죄를 전가하려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 죄책감의 문제야 말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잘 드러내요. 가장 고상하게 믿는다고 하고 자기의 의를 쌓는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결정적인 죄는 뭐냐? 긍휼이 없다는 거에요.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오늘 궁금한 대목이 있어요.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들었을 때 몸을 굽혀 땅에다가 뭔가를 쓰셨다 했어요. 여러분 뭘 쓰셨겠어요? 한참 뭔가를 쓰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주위에 서있는 사람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자꾸 되물었어요. 빨리 우리에게 얘기해 주시오. 이 여자를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랑곳하지 않고 땅에다가 뭐라고 글을 쓰셨던 주님이 일어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쳐라. 그리고는 또 그대로 다시 몸을 굽히셔서 땅에 뭔가를 쓰셨어요. 두 번 쓰셨어요. 도대체 무슨 글을 쓰셨을까. 물론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을 읽어보면 그 주라는 게 있어요. 그 아래 주에 설명이 있어요. 처음에 굽히셨을 때 뭐라고 쓰셨을까. 우리만 궁금한 게 아니라 아마 옛날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다 궁금했기 때문에 어떤 성경 사본에는 요런 내용이 들어갔어요. 그들 각자의 죄목을 쓰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여인에게 죄를 찾는 그 사람들의 죄를 예수님이 땅에다 쓰신 것 같아요. 아마도 그렇다면 그것은 거짓이라든지 아니면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하는 그 어리석음 무지라든지 이렇게 쓰셨겠죠. 그리고 두 번째 다시 땅에 쓰신 그 글은 아마도 오늘 성경을 뒤를 이어서 계속 읽어보면 이렇게 쓰셨을 것 같아요. ‘이 여인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돌로 쳐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사로잡고 있는 그 어둠을 거두어 버리는 빛만이 해답이다 그것이죠. 그러니까 바리새인 서기관들 뿐만 아니라 그 여인뿐만 아니라 거기 주위에 모여있는 무리들의 공통점이 뭐냐. 다 나름대로 자기의 어둠에 메여있어요. 빛을 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거기다가 빛이라고 쓰신 거죠. 자 그렇다면 빛으로 인해서 밝아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뭐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발견하는 것.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나도 너의 죄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 여러분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살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예의 바른 그런 게 아니에요. 세상의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빛을 받아가지고 우리도 다시 빛을 발하는 것 뿐이에요. 상대가 어떤 죄가 있을지라도 그를 넉넉히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마음 그런 사랑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불가능해요. 우리는 달과 같은 거죠. 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햇빛을 받아야만 다시 그 빛을 반사해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학식이나 돈이나 어떤 그런 것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어요. 여러분들 뉴스를 다 보고 있습니다만 재벌회장이 그래 자기 아들 맞았다고 자기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을 총동원해 가서 내 아들 눈을 때렸으니까 너희들도 눈을 맞아라 그러고 눈을 집중적으로 때렸다고 그럽니다. 공교롭게 그 재벌 그룹은 말이죠 새로 이미지 통합작업 해가지고 다 로고도 만들어가지고 막 터트리려고 하는 그 전날 그만 이런 망신을 쓰게 됐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거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거에요. 사실은 우리는 그 사람을 비웃었습니다마는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를 돌아봐야 하는 거에요. 우리는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어떤 허물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풍성한 은혜와 그런 사랑의 비밀을 가지고 있느냐?

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하셨어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아니하고 빛을 보리라.’ 그러면서 그 비밀을 말합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며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고백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가 기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존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죄책감,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을 씻어내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이로부터 인간은 자유하게 돼요. 무엇을 해도 자유하게 돼요. 예수님이 말합니다.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않는다. 의인이 있고 죄인이 있는 게 아니죠. 모두가 다 죄인이죠. 그러나 그들을 판단치 않는다. 예수님의 할 일은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니고데모와 같은 학자는 학자대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같이 삶의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은 진리로, 38년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는 치유로, 각자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고 어둠을 거두어 주고 그를 회복시켜 주는 것. 주님이 말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지라.’

지난 2 26일자 뉴욕의 뉴스위크에는 남성 우울증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의 성공한 남자들 사이에 우울증이 심하답니다. 그러면서 미국 남성들 가운데 600만명은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결국 그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죄책감이거든요. 죄책감이 드러나는 여러 가지 양태중 하나가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 거든요. 그래서 그 남모를 고통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풀어보려고 도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술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약물에 빠지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힘을 가지고 분노하고 자기 가정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고 또는 일 중독에 빠지는 사람도 있죠. 그거 끝내 치료 안 받으면 마지막엔 자살하잖아요. 세상에 성공 지향적인 문화. 또 우리 한국 같으면은 유교적인 남자는 강해야 된다 라고 하는 그 전통적인 의식. 이렇게 권고 합니다. 가면을 벗어라. 그리고 의학적인 치료도 받아라. 그것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는 그런 인간 존재를 아시고 십자가에서 그 몸을 찢으시면서 우리에게 그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덮으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사랑 그것을 주목하고 그 음성을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주님을 따라갈 때 우리 안에 빛이 들어오고 어둠이 사라지고 근본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걷어내고 우리는 자유하게 되고 나아가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자유를 나눠줄 수 있는 것이죠.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죄는 보지 못하고 내 이웃의 허물을 흉보며 탓하며 비판했습니다. 우리의 거짓을 용서하시고 우리 안의 불안과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가운데 다 걷어내게 하시고 자유함을 맛보게 하시고 이제는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하여 손을 펴서 저들을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