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일어나라[그리스도=인간의DangerDemonDiseaseDeath를해결]/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5. 23:35

070114 일어나라 ( 5:38~43)

성경본문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윌마 루돌프’라고 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때 스무 살의 나이로 사상 최초 여자 육상 3관왕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서기까지는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섯 살에 소아마비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침대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매주 토요일 대학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습니다. 당시에 흑인은 버스의 뒷자리에 앉아야만 합니다. 두 시간 걸려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돌아옵니다.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엄마와 언니와 오빠, 온 가족들이 들러붙어서 날마다 하루에 몇 번씩 그를 치료합니다.

일곱 살에 드디어 보호대와 목발을 의지해서 서게 되었습니다. 열 살에는 그것을 다 벗어버리고 홀로 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농구부에 들어가서 날마다 연습을 합니다. 처음에는 벤치만 지킬 수 밖에 없었지만 2년 후에는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한 코치가 그에게 육상을 해보라고 말합니다. 육상에 뛰어들었습니다. 드디어 나이 스물에 올림픽 3관왕이 되었습니다. 대단한 사건이죠. 그 한사람이 정상에 우뚝 서기까지 그와 더불어 온 가족이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를 위해 온 힘을 쏟음으로 그 인간승리 드라마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된 것이죠. 가족은 얼마나 소중합니까.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간구하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마을마다 있는 회당의 책임자인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그의 열두 살 난 딸이 깊은 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많은 의사를 불러 저를 치료케 하였지만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하고 드디어는 생명이 위독합니다. 너무나 긴박한 순간이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자기의 어떤 지위나 체면에 매일 수가 없습니다. 젊은 예수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간구합니다. ‘내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빨리 오셔서 내 딸을 고쳐주십시오.’ 자기 딸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눈치를 볼 겨를이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그에게 간청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가 가리라.’ 방향을 돌려서 야이로의 집으로 향합니다. 자그마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 가다가 한 사건이 터졌어요.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고 고통 당하던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사건이 있었어요. 믿음을 가지고 옷자락에 손을 댈 때 병이 떠나가는 일이 있었어요. 그 일은 주위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르는 그 여인만이 아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예수님만이 아는 일이었어요. , 그 여인이 고백합니다. 기뻐합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야이로에게는 갈등이 있었을 거예요. ‘저 여인이 저렇게 병이 나았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내 딸도 나을 수 있겠구나’ 라고 하는 소망이 있지만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는데,’ 급한 마음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서 사람들이 왔어요. ‘이제 다 틀렸습니다. 딸이 죽었습니다. 더 이상 선생님을 성가시게 하지 마시고 이제는 돌아갑시다.’ 자그마한 희망과 동시에 큰 절망이 함께 왔어요. 여기에 갈등이 있지요.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포기할 뻔 했는데 예수님이 한마디 주시는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붙들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집에 갔습니다. 아이가 죽었다고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다 통곡하고 있습니다. 소리쳐서 울고 있어요. 이 ‘훤화’라고 하는 단어는 참 어려운 단어입니다. 시끄럽게 떠든다는 뜻이에요. 성경에만 나오는 단어에요. 통곡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 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야이로는 현실로는 분명히 딸이 죽었지만 예수님이 잔다고 말씀하시니 자기의 판단으로 가늠할 겨를도 없이 그저 예수님 앞에서 기다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일을 행하시기 전에 비웃는 자들과 의심하는 자들을 다 내어보내시고 간절히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그의 부모와 열 두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만을 데리고 죽은 자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어요. 누워있는 소녀에게 말합니다. 달리다굼’ 이게 아람어거든요. ‘소녀야 일어나라. 그 소녀가 일어납니다. 그러니 그 부모의 기쁨은 어땠겠습니까. 뭐 놀라운 사건이죠.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자 이제 딸에게 먹을 것을 줘라.

여러분 우리 주위에도 이렇게 가족이 병들어서 애통해하고 특별히 자녀들이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봐야 하는 부모들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들이 집도 팔고 생계를 뒤로 하고 자녀들이 낫기만을 간구합니다마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살아났다는 소식보다는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찌 보면 야이로보다 더 절박하게 간구하는 부모가 많은데 왜 성경이 말하는 이런 이적은 일어나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에서는 인간승리를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승리도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의 의도는 아버지가 몸부림쳐 기도했더니, 온 가족이 몸부림쳐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고침을 받았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사건이에요. 마가복음 5장 아닙니까.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셔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셔요. 한 농부가 나와서 씨를 뿌린다. 이 씨앗이 길가에 떨어지고 돌밭에 떨어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또는 옥토에 떨어진다. 그 씨앗 중에 분명히 생명이 있건만 그것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면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자그마한 씨앗일지라도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을 때 반드시 30, 60, 100배의 결실을 거둔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스스로 보이시는 거예요. 사건을 통해서 보이시는 거예요.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이젠 그 말씀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시청각교육을 하시는 거예요. 거기에 네 가지가 나와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어요.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는 거예요. 그리고 바다를 건너 갔더니 거기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 당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 주셔요. 그리고는 열 두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병을 고쳐주셔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끝내 앓다가 죽은 자를 그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셔요.

우리 흔히 3D 업종’이라고 그러잖아요. Difficult 힘들고, Dirty 더럽고, Dangerous 위험한 일.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삶에 가장 큰 문제는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네 가지에요. 4D에요. 첫째는 Danger. 풍랑과 같은 재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건지신다. 두 번째는 귀신들린 자를 내쫓으시는 주의 능력, Demon. 귀신을 꺾으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그리고 혈루증 여인과 같이 병을 고치시는 분, Disease. 병을 고치시는 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 Death. 그래서 4D,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시다.

여러분, 삶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 거죠.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가지고 어떤 성취를 이루고 인간승리를 이루는 그것이 주는 감격과 기쁨이 크죠. 중요한 거죠. 그러나 우리 인생의 밑바닥에는 그것보다 더 깊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거죠. 예기치 않은 재난이 있습니다. 어제도 뉴스를 보니까 어느 대학교수 부부가 미국에서 여행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아내는 죽고 남편은 다쳤다 그러더군요. 그 한치 앞에 일어날 일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아마 모처럼 삶의 짓누르는 일들을 모처럼 벗어버리고 부부가 단출하게 우리 한번 여행해보자 하고 행복을 찾아 나섰다가 그런 재난을 당하게 된 거죠. 그게 인생의 문제에요. 또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사단에게 눌리고 고통 당하고 있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에요. 질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피해갔을지라도 끝내 죽음을 피해갈 사람은 없어요. 언젠가 우리는 죽어요. 그러한 근본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 인생에게 주님이 말씀하셔요. 그 문제를 해결할 자는 바로 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주님께 내 삶을 맡겨드리는 것, 그것이 신앙이죠. 내가 인간승리를 이루기 위해서 내 필요를 따라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응답을 간청하고 내 필요를 따라서 내가 주인이 되어가지고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문제를 깊이 깨닫고 겸손하게 주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때와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오늘 내게 주신 삶을 기쁨으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이죠.

여러분,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얼마나 신기합니까. 제가 대학 다닐 때에 저희 고향교회를 내려갔더니 부흥회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흥회 포스터를 붙였는데 뭐라고 써있냐면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간증을 들어보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온다는 거예요. 저는 그 부흥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몇 년 흘러가지고 문득 생각이 나길래 전도사님에게 그 때 일을 물어봤어요. ‘정말 그 때 어떻게 됐습니까.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그 내막을 들어보니까, 아이가 다섯 살 때인가 물에 빠져 죽었어요. 그것을 사람들이 건져낸 거예요. 그 엄마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혀요. 그 아이를 데리고 장례 치르기를 거부하고 자기 집 다락에다 올려놓고 하나님 살려내라고 기도하고 막 난리를 쳤어요. 그런데 왠일이에요, 일주일만에 아이가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응답받아 아이가 살아났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 사람이 커서 어른이 되어가지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하고 부흥회를 다녔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 어떻게 됐나요’ 하고 전도사님에게 물어봤다가 깜짝 놀랐어요. 자살했다는 거예요. ‘아니 왜요?’ ‘그 때 우리 교회 부흥회에 올 때 내가 만나보니까 조금 바람이 들어가 있었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한들 뭐가 변합니까. 언젠가는 또 죽을 텐데. 또 하나,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도 있지만 그저 그 한 가지 사실만 붙들고 사는 게 인생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되고 깨달아야 할 것은 깨달아야 되고 준비해야 되는 거죠. 오늘 열두 살짜리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후에 말씀하셔요. ‘먹을 것을 주라.’ 살아난 감격만으로 살지 못해요. 먹을 것을 주라.

참 오래 전이죠. 20년도 넘었지 않습니까. ‘천만 이산가족 상봉’ 대단한 사건이었죠. 밤에 잠을 못 이루고 함께 눈물을 뿌리고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는 그 장면을 보고 감격을 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뒷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렇게 감격 속에 만났지만 나중에는 그게 집안의 후회가 되고 고통이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기쁨은 잠깐이었고, 또 만나 살아보니 이게 뭐 형제지만 경제적으로 얽히고 설키다가 나중에는 어디까지 갑니까. 만난 것을 후회하는 데까지 가는 거예요. 이 얼마나 인간이 어리석어요. 한 순간의 만남과 감격이 전부입니까. 그것을 끝까지 이끌고 갈 수 있는,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잘 가꾸어가야 하는 거예요. 한 순간의 불 같은 은혜를 받았다고 그것이 언제까지나 가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참 어리석은 거예요.

아이가 태어났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온 가족이 기뻐하지만 그 아이에게 밥을 일주일만 안줘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주 신비한 일이 일어날 겁니다. 아이가 죽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어요.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어요.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신앙을 힘 있게 강건하게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열광 속에 빠져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함께 모여가지고 아주 뜨겁게 뜨겁게, 그야말로 집단 최면에 가까울 정도로 그런 것에 빠져가지고 다른 모든 것은 다 잊어버리는 그런 황홀경을 체험함으로 신앙을 유지하려 해요. 그러나 전통적인 역사적인 교회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잠깐 인간의 감각을 흔드는 것 뿐이에요.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에요.

또는 반대로 어느 한 인물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도덕적으로 아주 아름다운 모범이 됩니다. 참으로 영웅 같은 그런 존재가 되요. 그러나 그건 참 아름답긴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아니에요. 일본 교회가 실수한 것이 바로 그거에요. 일본교회에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다분히 사무라이 정신으로 아주 극단적으로 자기 절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다고 생각했어요. 출발이 틀린 거예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 허물 많은 연약한 죄인이에요. 내가 무슨 나의 인내를 가지고 노력을 해서 모범이 되고 그것을 상급으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려 한다면 착각하는 거예요. 도덕적 영웅주의가 신앙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한 순간도 스스로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는 불교의 승려들같이 생각과 욕망과 감각과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고 오직 신과 일체를 이루겠다고 하는 그런 신비주의도 아닙니다. 신앙에는 신비가 있지만 밤낮 그렇게 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그리고 따라가는 거예요.

<랍비의 선물>이라고 하는 우화가 있어요. 어느 한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도원이 세월이 흐르면서 힘을 다 잃어버렸어요. 수도원이 퇴락했어요.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 버리고 수도원장과 몇 수도사, 나이 들어 늙은 수도사 몇 사람만이 있는 거예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일을 헤쳐 나가야 할지 큰일입니다’ 걱정을 하다가 수도원 바로 옆 숲에 가끔 랍비가 와가지고 오두막에 머물면서 묵상을 하고 명상을 하는 것을 알기에 수도원장이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조언을 얻으려고 랍비를 찾아갔어요. 랍비와 마주 앉아서 얘기를 합니다. ‘그렇지요. 수도원뿐만 아니라 저 아래 마을에도 사람들은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답니다. 참으로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좋은 것을 따라가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수도원장이 말합니다. ‘이제 제가 가야 될 터인데 아직 제가 여기 온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한마디 꼭 조언을 해주십시오.’ 랍비가 말합니다. ‘제가 무슨 조언을 드리겠습니까. 아무 말씀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저 한마디 말씀을 드린다면 당신들 안에 구세주가 있습니다.’ 아 그러고는 돌려보냈어요. 수도원장이 돌아왔어요. 수도사들이 묻습니다. ‘그래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아 글쎄 말이야, 그저 나하고 세상을 한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마지막에 그저 아리송한 말을 한 말씀 하시던데. 글쎄 우리 가운데 구세주가 있다고 그러시더구먼.

수도사들이 각자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생각합니다. ‘우리들 안에 구세주가 있다니.’ ‘우리들 안에 구세주가 있다면 그건 아마 틀림없이 수도원장일 꺼야. 그는 한평생 수도원을 진실하게 지키지 않았는가.’ ‘아니 그러고 보면 토마스 수사일는지도 몰라. 그 사람의 영은 아주 깨끗하고 맑지 않은가.’ ‘아니지 빌립일 수도 있어. 그 사람이 성질은 좀 급하지만 사람들이 뭔가 도움이 필요할 때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사람 아닌가.’ 생각하다보니까 ‘혹시 내가? 아이고 하나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이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 하면 ‘우리들 안에 구세주가 있다’ 서로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합니다. 서로를 존경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 수도원 옆에 숲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놀러 오는데 수도원의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숲을 구경하다가 가끔은 수도원 안에 들어와서 예배도 드리고 묵상도 하는데 거기서 흘러넘치는 분위기는 뭔가 남다른 게 있어요. 고귀한 분위기가 있어요. 사람들이 한사람 한사람 수도원에 자주 드나들다가 뜻을 정한 젊은이들이 수도원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수도원은 다시 그 마을의 영성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나는 누구입니까? 지위는 무엇입니까. 월급은 얼마입니까. 얼마나 배웠습니까. 세상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요. 철저하게 이러한 것을 가지고 사람을 분석합니다. 서열을 매깁니다. 성공한 자, 실패한 자로 나눕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유일무이한 존재에요. 두 번 다시 재생 불가능해요. 나만의 고유한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에요.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기준을 들이댈 때에 헛된 교만에 빠지거나 절망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앙의 출발점이 틀린 거예요.

성경은 증언합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하여 피를 쏟으심으로 너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어 주셨다.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은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2 3절에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 당신 인생의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감추어져 있느니라.’ 주님이 말씀하셔요. ‘달리다굼’ 이제는 내가 일어날 때에요. 허무에서 일어나세요. 쓸데없는 교만에서 일어나세요. 좌절에서 일어나세요. 열두 살 소녀가 일어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부모가 그 딸에게 뭘 더 바랬겠습니까. 오직 생명을 얻어 살아나기를 바랐고 딸이 살아났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만세를 불렀다면 이제 우리 가정의 열쇠는 주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는데 있어요.

요즘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얘기하지만요 더 놀라운 사실을 얘기해볼까요. 114일에 시작됐어요. 오늘이 아주 더도 말고 딱 100년 전 그날 그 시간이에요. 100년 전 114일 낮에 시작됐어요.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명절이라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갔습니다만 이 병자는 연못가에 누워있어요. 예수님이 명절에 그를 찾아가셨어요. ‘네가 왜 여기 이러고 있느냐.’ 그랬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고 다 나를 제치고 먼저 못에 들어가서 나는 여기 이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네 자리를 가지고 일어나 가라.’ 병자에게 문제가 있어요. 장애를 핑계 삼아 나의 인생을 포기해버렸어요. 좀 굴러먹는 게 부끄럽긴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가지고 그것마저도 다 잊어버렸어요. 아무런 책임 없이 세상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세상을 욕하면서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이 일이 편안한 거예요. 여러분, 신앙은 자기를 흔들어 깨우는 거예요. 다이어트 하는 게 얼마나 힘들어요. 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만나는 것은 그것보다 약간 힘든 거예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거저 주어진 생명의 은혜일지라도 그것을 헛된 은혜, 값싼 은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내게도 그 은혜를 주십시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내게 주시는 그 말씀 ‘달리다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이제 일어나라’ 그 음성을 듣고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말합니다마는 오늘 114일 이 낮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깨뜨리셨던 그 시간인데 옛날의 과거의 고색창연한 역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 마음을 만지시고 새롭게 하시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내게 다가와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에 겸손하게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