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20세기최고의수필=헬렌켈러의Three Days To See]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5. 23:39

070101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5:1~10)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이 나라 이슬람사람들은 1년에 한 달 금식을 하며 신앙을 다지는 ‘라마단’이라고 하는 종교습관이 있습니다. 이 나라 TV에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라마단에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물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코란이나 또는 기도하기 위해서 바닥에 까는 깔개인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아직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편안한 소파와 TV 리모콘이 가장 중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 기간에는 TV시청률이 17% 증가한답니다. 또 그 시간에 신자들의 신앙심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토크쇼들이 열리지만 정작 시청률이 높아지는 것은 드라마라고 합니다. 보통 새벽 3시에 식사를 하고 하루를 일찍 시작하게 되는데 그 때 가장 시청률이 높은 프로는 유럽 프로축구 경기라고 하는 것이죠.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무리 얽어매려 해도 마음이 얻지 못하면 결국에는 형식과 내용 둘 다 어그러지게 되는 것이죠. 제 기억에 지금 우리는 신년예배와 제직헌신예배, 밤 예배로는 1년에 더도 말고 딱 두 번 드리는 것 같은데. 나오시기가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면 한국에 있을 때는 어떻게 그렇게 매주일 밤 예배를 드렸는지 아련합니다. 이만큼 우리는 다 편한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거죠.

,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순종을 찾으십니까. 맹목적이고 자유와 개성이 상실된 군대식의 순종, 하나님이 원하지 않아요. 내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따라갈 때에만 하나님이 기뻐하셔요. 간단한 거예요. 사랑하는 마음, 사랑의 관계에 있으면 그것은 명령이 아니에요. 이미 마음을 다 열었어요.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저와 함께 하려고 하는 거죠. 비록 몸은 나뉘어져 있을지라도 그 마음으로는 항상 그를 생각하는 것이죠. 이게 사랑의 관계죠.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까 영국 BBC에서 발표한 ‘올해 새롭게 알게 된 100가지 사실’이라는 제목의 글 중에 하나 참 재미있는게 있는데, 여러분 ‘펠레’라고 하면 그를 따라갈 선수가 없는 대단한 선수가 아닙니까. 펠레는 원래 그 사람의 별명이에요. 원래 이름은 너무 길어서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올해 펠레가 뜻밖에 고백을 했는데 자기는 오랫동안 그 이름을 싫어했다는 거예요. 세상에,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펠레를 외치며 그렇게 좋아했는데 정작 자기는 그 별명을 싫어했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그는 브라질 사람이라 포르투갈 어를 쓰는데 포르투갈 어에는 펠레라는 말이 없어요. 누군가 그를 펠레라고 부르면서 그 긴 이름 대신에 부르기 편하고 쉽고 해서 펠레, 펠레해서 펠레가 됐는데 뜻도 모르는 별명을 가지게 되니까 누군가 자기를 욕하는 뜻으로 부르는 줄로만 알았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최근에 알았대요, 펠레가 무슨 뜻인지. 놀랍게도 구약성서 언어인 히브리어로 펠레가 ‘놀라움, 이적’이란 뜻이거든요.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어요. 한평생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정작 본인은 부끄러워하고 싫어했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바로 ‘펠레의 저주’가 아니라 ‘펠레의 오해’죠.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빗나가고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을 마치 감독관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또는 독재자로 두목으로 이해하기도 해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일일이 잔소리하고 간섭하시기보다는 우리에게 주신 지성을 통해서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라가기를 원해요. 만약에 여러분이 집에서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 모습을 잠깐만이라도 보여주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만사를 제쳐놓고 이 기쁨과 흥분과 감격을 나누고 싶어서 일찍 달려 나왔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보다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게 하셔요.

최고의 행복은 뭐냐. 자기 전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다 드러내시며 피 흘리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 그 사랑에 깨닫고 응답하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셔요. 여기에 지극한 행복이 있어요. 유명한 중세의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그렇게 말했어요. ‘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는 네 마음대로 하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안 되죠. 그 사람 마음대로 하는 거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뭘 결정하는데 깊이 고민하지 않아요. 그 사람의 결정이 곧 나의 결정이에요. 강제가 아니에요. 억지가 아니에요.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거기에 신앙의 비밀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헬렌 켈러’를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시각장애인이요 청각장애인이에요. 또 말 못하는 사람이죠. 이런 삼중의 고통을 가지고 한평생 살다가 죽은 사람이에요. 어느 날 그가 밖에 나갔다 온 친구에게 뭘 보고 왔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친구가 뭐 별로 본 것이 없다고 대답했어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충격을 받았어요. 아니 두 눈이 시퍼렇게 떠 있고 귀가 열려있고 말할 수 있고 감각이 살아있는 사람이 밖에서 꽃을 보고 새를 보고 하늘을 봤다면 반응이 있어야 할 터인데 송장같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거예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그가 쓴 글이 있죠.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는 그 짧은 글을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꼽았습니다. <Three Days To See> ‘내가 사흘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고 하는 짧은 글이에요. 거기에서 이런 내용으로 얘기합니다. “만약 내가 볼 수 있다면 첫째 날 나는 나를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준 설리번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만 만져서 알았던 그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두겠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 나서 서둘러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찾아가서 하루 종일 인간이 발전해 온 궤적을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 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 싶다. 그리고 나서는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서 공연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어느덧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우에 진열돼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일상은 기적의 연속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의 문제죠. 그러기에 여기에 믿음이 요청되는 거죠. 흔히 우리가 믿음을 얘기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을 볼 때 우리는 이런 반응을 보여요. ‘그들은 우리와는 다르다. 그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지만 나는 아니다.’ 그래서 성경 야고보서 5 17절에 엘리야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어요. 하나님께 기도해서 불의 응답을 받은 엘리야이지마는 그는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었다. 어려울 때는 낙담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일을 당하면 분노하기도 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돼요. 만약에 성경을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이해한다면 그 성경이 오늘 나와는 거리가 먼 사건으로 느껴진다면 성경을 뭐 하러 읽겠습니까. 그러면은 두 가지 방법이 나오겠지요. 하나는 성경은 그저 어떤 추상적인 논리나 교리를 연구하기 위한 책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죠. 아니면 교회는 다녀야 되겠고 직분은 받았으니까 마지못해 읽어야 하는, 마치 건강을 위해서 약을 먹듯이 먹어야 하는 그런 책이 되겠죠. 10여 년 전에 제가 어느 큰 교회에서 새신자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나이가 육십이 다 되신 분이 뒤늦게 예수를 믿으셨는데요, 어느 날 성경공부 하러 모였는데 이 분 얼굴이 훤해요. 뭐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얘기했냐면 ‘아 목사님 요즘 성경을 읽는데 너무 재밌습니다.’ 사실 성경이 뭐가 재밌어요.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사실 읽어도 잘 이해가 안돼요. 여러분들이 할 수만 있으면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하나 구해가지고 같이 읽으면 얼마나 쉬울까, 지금 T는 성경이 백 년 전 어투거든요. 그런데도 은혜를 받으면 성경이 재밌는 거예요. , 이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믿는 고백이 있기 때문에 어렵든지 쉽든지 다 아멘이 되고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가장 뚜렷한 표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읽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그런 은혜를 주시면 내가 성경을 읽겠다고 한다면 죽는 그날까지 그런 일은 안 일어납니다. 먼저 성경을 펴서 기도하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이 필요해요. 비록 작지만 믿음의 씨앗을 심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라나게 하시는 거예요.

1885년 언더우드가 26세의 나이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 조선이 어떠했겠습니까.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기도했던 언더우드의 기도문이 있어요.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님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이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저 먼 태평양을 건너 이름도 모르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와서 섰지마는 보이는 것은 어둠과 무지와 답답한 것뿐이죠. 이런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여러분, 언더우드가 이런 기도를 드리고 20년 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게 바로 ‘평양 대부흥’이라고 하는 거예요. 1907 1월 정초에 구정사경회를 했어요. 말씀을 공부하고 부흥회를 했어요. 구정사경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거예요. 1907 1월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1903년 한 자그마한 모임에서 시작됐어요. 한국에 들어온 미국의 여자선교사들 몇 사람이 모여서 한 주간 성경공부 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저 감리교 ‘하디’ 선교사를 초청합니다. 그는 강원도 북부지역에서 선교를 했어요. 이 분을 초청해서 말씀을 공부하는데 이 분이 자기의 교만을 털어놓습니다. “내가 이 나라에 들어와서 선교를 한다고 몸부림치며 애를 썼지만 무지와 교만으로 온전히 일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제 깨닫는 것은 구약성경 스가랴 말씀과 같이 이 일은 사람의 힘으로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된다고 하는 것을 실패를 통하여 깊이 깨닫고 회개합니다.” 이 분의 회개를 통해서 그 한 주일 동안 성경공부 하던 미국의 여선교사들이 큰 은혜를 받았어요. 시작은 이렇게 작았어요. 이것이 마치 불씨가 되어가지고 점점 전염되듯이 퍼져나가서 평양 ‘장대현교회’, ‘숭실학교’, ‘장로신학교’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가 임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성결된 삶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회개로부터 시작했어요. 그래서 ‘쌀교인’이 ‘참교인’이 됐어요. 교회를 통해서 내가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나왔던 사람들을 선교사들이 ‘Rice Christian’이라고 그랬어요. 쌀 얻으러 나온 사람들이다. 그랬는데 이 평양 대부흥을 통해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 앞에서 회개하고 성결을 맛보는 ‘Real Christian’ 참교인으로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이 평양 대부흥은 1907년에 왕성하게 일어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한국교회의 성격이 결정됐어요. 은혜받은 사람들이 나아가서 전도합니다. 늘상하는 전도가 아니라 아예 날을 떼어놓았어요. 날을 작정해가지고 이 날은 온전히 전도만 하겠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리고 온전한 전도가 되기 위해서 그저 동네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는 게 아니라 아예 먼 지역으로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이런 것을 ‘날연보’라고 그래요. 돈도 드리지만 내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 날연보. 또 여러분 성미(聖米)가 뭡니까. 어렸을 때 보니까 어머니가 성미주머니를 부엌에다 걸어놓고 밥을 지으려고 할 때마다 숟가락으로 식구수대로 퍼가지고 주머니에 넣는 거예요. 뭐하시나 그랬더니 주일에 교회 갈 때 그것을 들고 가서 교회 성미함에다 붓는 거죠.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위해서. 이게 다 이 때 시작이 됐어요. 새벽기도도 이 때 시작이 됐어요. 통성기도도 이 때 시작이 됐어요. 그 때 시작된 것이 100년 한국교회를 지탱해 왔던 거죠.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을 인도하신다.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품이 온유하다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사람.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면 그 음성을 들었다는 그 사실이 내가 옳다든지 내가 의롭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죠. 성경을 보면 때로는 하나님이 책망하실 때도 있어요. 또 하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 말씀을 내가 듣는 즉시 올바로 깨달았는가, 그렇지도 않아요. 다만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를 드러내시려고 보여주시고 가르치시고 말씀하신 거예요.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 올 한해 바라는 간절한 한마음교회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욱 진솔한 신앙 갖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거기에 우리의 영적인 생명의 원천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련되고 멋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응답을 얻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죠. ‘건강한 교회’ 날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 기도제목이에요. 건강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실 때에 기뻐하실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이런 은혜로 2007년을 새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해를 보내며 새해를 기다리며 예배를 드립니다. 한 해 동안 부어주셨던 은혜에 말할 수 없이 감사하며 이제 새해에는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열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에 그치지 않게 하시고 나를 십자가에서 사랑하신 그 사랑에 온전히 반응하고 순종하고 헌신하는 그런 신앙이 될 수 있도록 나의 영혼을 다스려주시고 말씀으로 이끌어주시고 주장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