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맛보아 알지어다[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속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5. 23:37

070107 맛보아 알지어다 (34:1~10)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구하며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지난 달 15일 홍콩의 부동산 갑부의 아들이 호주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초호화판 결혼식이었습니다. 220억이 들었습니다. 홍콩의 모델이며 여배우인 아가씨를 신부로 맞이했는데, 귀걸이, 목걸이 해가지고 보석 값으로 37, 여러분은 결혼하실 때 얼마짜리 받으셨어요? 보태닉가든을 빌려서 결혼식장으로 쓰는데 120, 그리고 하객들을 호주로 초청한 항공료, 숙박비해서 13, 두 사람 한 달 신혼여행비 12, 그리고 자기 회사 1000명 직원들에게 한 사람당 120만원씩, 이렇게 해서 모두 220. 그리고 신부 가족들에게 별도로 준 선물이 480. , 여러분은 놀라지도 않으시네요. 부동산 재벌이라 그런가요, 이 정도면 돈 주고 여자를 사온 게 분명한 것 같아요. 과연 행복할까요? 또 하나, 아무리 부자라도 그런 잔치를 날마다 할 수는 없겠죠. 그렇게 결혼식을 치르면 그 다음날 아침에 허전하지 않을까요, 너무 밋밋해서?

우리에게는 명절이 있습니다. 똑같은 하루이지만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정하고 또 새해 첫날을 정하고, 마무리를 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이게 다 삶의 지혜죠. 그러고 보면 그저 평범한 하루로 살아가기에 인생은 너무 고달프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명절을 만드는 거죠. 결혼식, 졸업식, 중요한 시합, 시험, 이건 어떤 의미에서 다 명절이죠. 또 온 국가가 지키는 국경일. 자 이것을 기다리며 준비합니다. 또 그것이 지나간 다음에 그 일을 되새기며 기억하며 기뻐하며 위로를 얻고 또 실패했다면 반성하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사는 거죠.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명절로 삼고 사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라이프 사이클은 일주일이에요. 사실 이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억해서 주일로 지키는 거예요. 원래는 안식일이었잖아요,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 직전까지가 안식일이었죠. 그런데 안식일 지난 다음 첫날 새벽에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님으로 섬기는 자들의 예배일이 됐어요. 오늘은 그러니까 부활의 날이에요. 지난 한 주간 세상에 살면서 사람이기에 부딪히고 멍들 수밖에 없어요. 금요일 저녁쯤 되면 쓰러지겠죠.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듯이. 우리도 나 자신에 대해서 좌절할 때도 있고 절망할 때도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겠죠. 자 그러다가도 주일은 어떤 날이냐? 그리스도를 무덤에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의 그 능력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가운데 다가오셔서 우리의 상처를 씻고 어두운 생각을 거두어가고 밝은 빛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힘을 부어주시는 거예요. 부활하는 날이에요. 그리스도인은 이 한 주간을 라이프사이클로 정해서 사는 사람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것을 기억하고 지켜야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세례를 받지 않습니까?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는 것을 말하죠.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합니다. 물에서 건져내는 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을 의미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이죠. 또 이미 세례 받으신 분들에게는 성찬을 베풉니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십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합니다. 은혜는 잘 기억하는데 있는 거예요. 예배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오늘 이 시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재현하는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빌려 말한다면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에요. 오늘 우리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2000년 전 사건이지만, 빛의 속도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2000년 전 사건이나 오늘 이 사건이나 동시에 일어나는 현재적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영적인 눈으로 보면 십자가 사건은 20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건이에요.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주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 서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제 열고 나오실 무덤 문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국경일을 맞을 때마다 아쉬움을 느낍니다. 6.25가 되어도 6.25를 몸소 체험한 분들이나 그것을 기억하지 그렇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그것이 노는 날 밖에 안되요. 얼마나 답답했으면 6.25를 기억하자면서 주먹밥을 만들어가지고 먹이겠어요. 3.1운동을 보니까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아우네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고 뒷산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리고. 저는 그것이 참 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1절을 기념한다고 강당에 모여가지고 기념식을 한 번 하는 것으로는 그 사건을 우리가 체험할 수가 없어요. 가급적 그 현장으로 들어가서 그 현실 속에 들어가서 모든 걸 체험하는게 중요하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날의 많은 사람들이 맨주먹으로 만세를 부르고 총을 맞아 쓰러지면서까지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음으로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그것의 결과로 오늘 우리에게 이런 자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린단 말이죠.

국경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몸을 입고 있기에 2000년 전 십자가 사건을 온전히 제대로 체험하는 것은 참으로 많은 주의와 지혜가 필요해요. 신앙의 위기는 뭐냐? 이적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잘못이죠. 그것은 마치 날마다 잔치하겠다는 것과 똑같아요. 결혼한 부부가 날마다 결혼식을 하겠다는 것과 똑같아요. 그럴 수 없죠. 경제적으로도 그럴 수 없고 그게 아니죠. 결혼식은 한번 있는 것이지만 그 날 맺은 그 약속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잘 살려나가는 의지와 지혜가 필요하죠. 그럼 왜 자꾸 이적만 찾으려 하느냐? 육신을 좇는 거예요.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원리를 잘 캐가지고 그것을 오늘 나의 삶 속에 활용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배운 원리를 실천하면 그 십자가의 은혜가 오늘 내게도 주어지는 것 아니겠어요.

참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수영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아파트에 몇 년을 살면서도 수영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물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어요. , 빠지면 죽을테니까. 수영을 잘 못하거든요. 어린 시절에 동네에서 첨벙거리던 실력으로는 수영장을 왔다갔다 하기가 힘들겠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배웠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을 발견했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 들어가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아주 살 맛이 나요. 그리고 이제 배운대로 자유형으로 왔다갔다하면서 30~40분 운동하면 건강해집니다. 기분도 좋아지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해보세요. 아주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저에게 박태환 같이 수영선수가 되라고 요구하지는 마세요. 그것은 너무 무리한 일이고 그럴 의향도 없고 그것은 스트레스에 눌리는 일이니까. 수영하면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만큼은 전적으로 내 의지를 가지고 아주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고 싶어요. 그렇게까지 되는데 간단해요, 단 한 달밖에 안 걸렸어요. 이거 이적 아닙니까? 저는 이적이라고 생각해요. , 한 달 전에 저는 물에 들어가는 것을 겁을 냈으니까, 부끄러워했으니까. 들어가봐야 뭐 제대로 건너가지도 못하고 허우적대다가 빠질테니까. 부끄러워했어요. 그러나 그 한 달 새에 자그마한 것을 배웠는데 팔 내젓는 방법, 원리라고도 할 수 없는 그 간단한 것을 배웠는데도 그것이 나에게 주는 선물은 너무나 커요. 그야말로 상쾌, 유쾌, 통쾌라는 거죠.

수영도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신앙에 대해 어찌 가르쳐주시지 않겠어요. 당연히 있죠. 그 첫 번째가 바로 성경이고 말씀입니다. 사실 제가 머리가 자꾸 빠져가지고 약을 복용한지 한 5년 됐죠. ‘프로스카’라고 하는 약이 있어요. 저하고 비슷하신 분들은 주목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원래는 전립선 치료제입니다. 남성호르몬을 억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약을 개발하고 써보니까 부수적인 효과가 뭐냐하면, 남성호르몬이 억제되니까 탈모가 줄어드는 거죠. 발모효과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원래 그 약의 일차적인 효능은 전립선 치료제인데 이차적 효능인 발모제로 더 많이 쓰는 거예요. 우선순위가 바뀌어버렸어요. 혹 성경을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는가 싶어요.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수면제로 쓴다 이거죠. 제가 좀 고백할 일이 있어요. 저도 잘 때는 항상 제 설교테이프를 딱 틀어놓고 잡니다. 그러면 두 가지 효과가 있는데요, 잠이 안 오는 날은 그것을 끝까지 다 듣습니다. 그러고도 잠이 안 오면 그것을 뒤집어서 또 듣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30분짜리를 두 번 뒤집은 기억도 있어요. 1시간 30분 동안이나 잠이 안 와서 그것을 들은 것이죠. 그러나 저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잠이 안와도 좋다, 난 말씀을 들을테니까. 그러나 어떤 날은 틀기가 무섭게 찬양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려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왜냐면 잠자는 동안에도 다 입력되는 법이거든요. 또 오늘의 마지막 시간을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채운다는 뜻이 있죠.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셔요. 말씀을 어떻게 읽을 것이냐, 이게 중요해요.

‘프란츠 카프카’라고 하는 소설가가 있잖아요.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버쩍 나는 그런 일이 없다면 그 책을 뭐 하러 읽느냐!” 제가 그 글을 읽고 나서 회개했어요. , 그렇다. 정말로 그것을 읽을 때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그런 충격을 받고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책을 읽는 것도 낭비죠. 시간낭비죠. 하물며 그런 벼락치듯 하는 은혜를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펴려고 한다면 그건 벌써 출발부터가 잘못된 거죠. 아무런 기대감이 없이 예배를 온다면 출발부터가 잘못된 거죠. 어떻게 그렇게 하면서 안 졸겠어요, 신기한 거지. 우리 몸이 완전히 늘어져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제가 그 글을 읽고 나서는 가능한 한 피곤할 때는 책을 안 읽습니다. 그래봐야 졸테니까. 정 그러면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세수도 하고 정신을 좀 말짱하게 하고 단 한 줄을 읽어도 읽어야 되겠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 바짝차리고 읽는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오늘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니까.

‘칼 바르트’라고 하는 21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로마서 주석>, 그러니까 신약성경 로마서에 대한 주석을 썼는데, 그 책은 평가받기를 서구 신학자들의 놀이터 한복판에 떨어진 원자폭탄이었다. 그만큼 세상을 뒤흔드는 충격을 주었다. 뭐 그렇게 충격을 주었느냐. 1916년이니까 1차 세계대전이 한창 일 때, 저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중심으로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독일군들이 하루에 20만 명이 죽어가는 그런 비참한 전쟁 속에 있을 때에 나이 30세의 ‘바르트’라고 하는 사람은 중립국 스위스의 한 시골마을에서 성경을 펴들고 있었어요. 성경 로마서를 읽는 중에 오늘 이 엄청난 전쟁의 비참함과 참혹함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습을 그린 이 성경 그대로구나 하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러니까 계몽주의 이후에 사람들이 이성을 과신하면서 이제 신은 마치 시계와 같이 우주를 만들어 놓고는 물러가버렸다. 이 우주는 시계 작동원리와 같이 자기의 작동원리를 가지고 돌아가고 있으며 인간은 이 우주의 비밀을 다 발견하게 될 것이고 인간은 종래 이 우주를 유토피아로 만들 것이다라고 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이제는 그런 눈으로 성경을 보기 시작했어요. 성경의 오류가 발견되기 시작했어요. 성경을 막 뜯어 헤치기 시작했어요. 연구는 했지만 그 안에서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는 못했어요. 성경을 걸레로 만들어버렸어요.

제가 군에 있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이건 뭐 평생 한두 번밖에 없는 기회죠. 편지를 읽을 때 보니 역시 옛날 분이고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은 아니기 때문에 맞춤법이 많이 틀리더라고요. ‘아이고, 이거 틀렸네 저거 틀렸네. 그럼 이 편지는 잘못됐네’ 이렇게 한다면 그건 어리석죠. 비록 맞춤법은 틀렸을지라도 그 안에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뜨거운 마음이 담겨있었어요.

하나님께서 허물 많은 인간을 들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어요.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 간혹 성경에는 분명 오류가 있어요. 그러나 인간의 부족한 손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과 사랑은 여전히 있어요. 그걸 발견해야 되요.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word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속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성경을 암송하는 것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말씀하신다 이것을 놓치면 헛일이에요. 어떤 분은 글쎄 비싼 돈을 주고 영화를 두시간씩이나 보고나서도 뭘 봤는지를 기억 못하는 분이 있어요. 아무런 생각 없이 갔기 때문에. 이건 안 되는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말씀이 살아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 될 것인가. 그게 바로 기도요, 찬송이에요.

작년 한 해 한국 문화계에서 가장 흥왕했던 부분이 뮤지컬이랍니다. 뮤지컬은 대박이 났는데 다른 부분들은 상대적으로 침체됐다고 그래요. 여러분 <명성황후>라고 하는 뮤지컬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예전에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지 않았습니까. 오래전에 <명성황후>를 보았는데요, 사실 구한말 격동기를 짧게 표현해내는 건 쉬운 일은 아니죠. 외국 사람들은 보기는 봤는데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무지하니까 좀 어려웠다 그런 반응을 보였습니다만 뭐 외국 사람만 어려운 게 아니라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명성황후>의 스토리전개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명성황후>를 보면서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 마지막 장면이에요. 결국 명성황후는 마지막에 일본사람들에게 죽지 않습니까. 칼로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시체는 끌어내어져서 그 자리에서 기름을 덮어쓰고 불태워지지 않습니까. 한 나라의 국모가 왜인의 손에 붙들려가지고 칼에 맞아 쓰러지고 불태워지는 이 처절함은 우리나라의 멸망과 비애를 그대로 잘 드러내는 거죠. 그게 마지막 장면이에요. 너무 가슴 아프더라고요. 그런데 바로 명성황후가 죽은 그 자리에 마지막 노래가 흘러 나옵니다. 죽은 명성황후가 노래를 해요.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아요. 그 노랫귀가 제 귓전에 생생합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죽은 자가 부활해요. 그리고 관객을 향해서 말해요.

알 수 없어라 하늘의 뜻이여

조선에 드리운 천명이여

한스러워라 조정의 세월

부질없는 다툼들

바위에 부서지더라도 폭포는 떨어져야 하고

죽음이 기다리고 기다려도 가야할 길 있는 법

이 나라 지킬 수 있다면

이 몸 재가 된들 어떠리

백성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이천만신민 대대로 이어살아가야 할 땅

(합창)

한 발 나아가면 빛나는 자주와 독립

한 발 물러서면 예속과 핍박

용기와 지혜로 힘 모아

망국의 수치 목숨 걸고 맞서야하리

(웅장한 코러스)

동녘 붉은 해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 흥왕하여라

그 마지막 크라이막스 코러스는 너무 웅장했어요. 사실 그 스토리는 정말로 처절한 죽음과 절망으로 끝나는 듯 했는데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부어지면서 그는 자기의 죽음으로 민족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촉구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야, 참 작가들이 대단하다. 애들을 놓고 초중고등학교 대학에서 국사를 그렇게 가르쳐도 뭐가 어떻게 됐는지 하나도 해결이 안 되고 머릿속에서 엉켜있는 것을 두 시간 뮤지컬로 사람에게 그 흐름을 알려줄 뿐 아니라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안고 그래 내 나라를 사랑해야지, 이런 결단을 하고 나오게 하다니.

이 살아있는 생명력,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있어요. 그 하나님의 생각에 내 생각을 견주고 하나님의 생각에 주파수에 맞추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때 그저 외쳐서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놓고 깊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상상력이 내 생각에 더해지는 것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좁은 내 울타리를 깨뜨리고 우주를 지으시고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의 그 큰 생각에 내 생각이 만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찬송합니다. 찬송은 그 기도한 것을 가지고 이제는 나의 신앙고백으로 부르는 것이죠.

제가 찬송가 494장을 참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오래전 단독목회를 할 때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몰라요. 그런데 이웃교회 목사님이 헌당식을 한다고 초청을 했어요. 그래서 가봤더니 4층 건물에 지하 1층에 예배실을 꾸며놨더라고요. 뭐 어려워서 그랬겠죠. 건축을 했습니다만 상가 건물같이 4층으로 짓고 다른 데를 다 임대를 주고 교회는 아직 지하에 머물러 있는 거죠. 주인이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지하에 있는 것이죠. 예배드리기 전에 494장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눈물을 줄줄줄줄 흘리더라고요. 그러더니 자기 얘기를 해요. 자기가 건축을 하는 동안 너무 어렵고 힘들었지만 이 찬송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얻고 용기를 얻고 드디어 오늘 이렇게 헌당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때 목회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그분이 하는 말이 그대로 다 내 고백같이 알알이 들어오더라고요.

나 죄중에 다녔지만 나 버리지 않으심 믿습니다

나 가는 길 주께서 지키시며 늘 동행해주시네

주 나에게 큰 영광 보이려고 늘 평안한 그 길로 이끄시네

나 주님의 손 굳게 잡으리니 늘 동행해주시네

주 나에게 새 영광 보여주며 늘 나에게 평안함 주시겠네

나 주님의 손 굳게 잡으리니 늘 동행해주시네

그저 평범하게 부를 찬송이었는데 처음 듣는 그날 그분의 간증이 탁 붙어가지고 이게 그만 제 찬송이 되어버렸어요. 이것을 펴서 부를 때마다 그 일이 생각나고 그 고백이 생각나고 그분의 감동이 저의 감동이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보니 다윗이 블레셋에 들어가서 죽을 뻔했어요. 목숨을 구하려 들어갔다가 죽을 뻔했어요. 그래서 미치광이 노릇하다가 쫓겨났어요. 거지가 되가지고 쫓겨났습니다만 오히려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 기가 막힌 구덩이에서 나를 건져주셨다라고 찬송합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다윗의 형편을 보면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를 따르는 자도 없고 가족은 다 흩어져있고 아무런 재산도 없고 거지에요. 그러나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하나님이 오늘 내게 주신 그 생명을 인하여 감격하며 감사합니다. 초호화 결혼식을 하면 그날은 행복하겠죠. 그러나 행복해지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오히려 이전의 평범했던 일상과 생명과 건강과 일터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소중한 것이죠. 오늘 본문을 보면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고 그랬어요.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면 고난이 있는 법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난 속에서 의인을 구원하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신다. 고난이 문제가 아니고 그 고난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복된 기회로 받아들이는 믿음,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새해를 주시고 첫 번째 주일에 하나님에게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인생이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눈물도 있고 아픔도 있고 남모르는 고통도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고난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은 저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을 날마다 찬송하게 하신다 하셨사오니 올 한 해에는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사모하며 찬송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