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아침이 가까웠도다[쓰나미 인니 아쩨지역,어거스틴의 회심]/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0. 10:46

051204 아침이 가까웠도다 ( 13:11-14)

성경본문[개역개정]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대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제가 지난 한 주간 쓰나미로 인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아쩨지역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그 때 제 기억에 위성사진으로 반다아쩨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충격적인 장면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쭉 돌아보니까 1년이 지난 지금 많이 복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해변가에 있는 마을은 아주 통째로 없어지고 지금은 쓰레기더미로 남아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서 보니까 종말이 얼마나 순식간에 닥쳐올지, 아마 그 날이 주일 아침 8시쯤이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순식간에 종말을 맞은 것이지요.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인도네시아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전력회사에서 운영하는 발전선이 있는데, 우리 교회보다도 아마 5-6배 정도 되는 큰 배가 반다아쩨 바깥쪽 바다에 있다가 순식간에 떠밀려 들어와 마을 한복판에 들어앉아 있어요. 마치 노아의 방주같이 마을 한복판에 어찌나 큰 배가 들어앉았는지. 그 배는 못나가지요.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잊는지 재난조차도 잊어버릴까봐 하나님이 마을 한복판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돌비를 세우듯이 그것을 마을 한복판에 두셨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지나가다가 보니 공동묘지가 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어찌할 수 없어서 구덩이를 파서 그냥 묻었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재난이 있었습니다. 망대가 무너져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주님 이번에도 망대가 무너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들은 누구의 죄 때문에 죽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하리라.” 재난이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 재난을 들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쩨뿐만 아니라 이번에 니아스라는 섬도 갔었는데 그 섬도 쓰나미의 피해를 입었고 또 몇 달 전에 지진도 있어서 더 많은 피해가 있었던 곳입니다. 거기는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에요. 무너진 교회들도 많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 교회를 도울 수 있겠는가 해서 간 것이지요. 그것을 보면서 재난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에요. 니아스 섬에 가보니까 해변가에 있는 건물은 다 무너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어떤 모양으로 죽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묻지 않으셔요. 그건 사실 물을 필요도 없어요. 그러나 종말을 맞는 그 순간에 어떤 준비 어떤 자세로 그 종말을 맞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제가 그곳을 둘러보면서 나는 과연 오늘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함을 느꼈어요. 무슨 할 일이 남았기에 오늘 나를 살려두시는가?

아쩨 지역에 많은 구호단체들이 들어왔습니다. 수백 개의 구호단체들이 들어왔다가 이제는 많이 돌아가고 150여 개 정도 남아 있다고 해요. 한국에서도 많은 단체들이 들어왔어요. 지금 선교사님들이 통역이나 그 지역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그 곳의 구석구석으로 들어가서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번에 하나님이 저에게 뭘 깨닫게 하시려고 그랬는지 첫 날 밤에 먹은 음식이 이상해서 혼이 났습니다. 탈이 나서 힘들어 하니까 다들 자기가 가지고 온 약들을 꺼내서 주는 거예요. 그 분들에게 있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한 일들이지요. 낯선 일이 아니지요.

사실은 제가 많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만 우리의 자그마한 도움이 어렵게 살아가는 그 곳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지 몰라요. 기회가 있어서 모두 가서 보신다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인도네시아에 보내셨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이 나올 겁니다.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라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종말을 말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구원은 계속 이루어가는 구원이에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이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에요. 종말이라는 말이 어떤 뜻입니까? 사실 저는 저의 종말을 항상 헤아리고 있습니다. 마땅히 기준 잡을 것이 없으니까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이 제 기준입니다. 얼굴도 비슷하게 생겼고 몸집도 똑같고 성격도 비슷하고, 제가 나이가 마흔이 넘으니까 아버님을 아시는 분들이 저를 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똑같나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마지막도 저의 아버님을 기준으로 합니다. 일흔도 못 넘기셨어요. 그래서 나는 20년 남았다. 20년 남았다라고 생각하면 싸울 일도 없습니다. 화낼 일도 없습니다. 정말로 뜨겁게 사랑하고 나누며 베풀고 살아도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몇 년 남았습니까?

성경이 말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제가 군 생활을 철원에서 했거든요. 그런데 기억나는 몇 가지 중 하나는 어떻게 그렇게 어두운지 모르겠어요. 밤에 부대 연병장에서 막사로 올라가는데 그 넓은 길이 안 보이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깜깜한 어두움을 경험했어요. 앞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낮에는 포차가 건너간 그 나무다리가 밤에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제가 게걸음으로 간 적이 있어요. 그렇게 어두웠습니다. 그 어두움을 지금도 기억하는데 거기다가 겨울에 보초를 서러 나가면 아무리 끼어 입어도 추워서 그 두 시간 동안 오직 기다리는 것은 본부 막사의 불이 켜져서 교대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그 빛이 보이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찬송도 불러보고 기도도 해 보지만 너무 추워서 발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요. 계속 움직이면서 막사의 불이 켜지기를 기다립니다.

오늘 본문에 얽힌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중세의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요 교회 지도자가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에요. 당대에 크게 유행하던 플라톤 철학에 깊이 심취했어요. 그래서 그 철학적 이상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간다 라는 그들의 이론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남자 분들이 그렇잖아요. ‘시시하게 뭐 교회를 나가느냐? 나를 믿어라’ 그러한 철학적 논리에 매료되었어요. ? 당대에 잘 나가던 사람이니까. 많이 배운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의 현실은 성경이 말한 대로 방탕하고 술 취하고 호색하고 그리고 시기하고 다투는 것이지요.

원로 목사님들이 후배 목사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목회를 잘 하려면 세 가지를 조심하라. 첫째는 돈이다. 두 번째는 여자다. 세 번째는 명예다. 오늘 이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돈 없이 술 마실 수 있어요? 술 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번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쓰겠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많은 여자를 상대했다고 자랑하지요. 그리고 나이가 들면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서로 시기하고 갈등하고 다투는 것이지요. 목사에게 있어서도 그것이 목회 지침이 된다면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은 것이지요.

어거스틴이 그렇게 살았어요. 이 사람이 어렵게 교회에 들어왔습니다마는 아직 미련을 다 버리지 못했습니다. 말씀은 듣습니다만 종말이라는 말씀을 들어도 그의 반응은 ‘조금만 더 있다가’ ‘제가 이제 곧 하겠습니다.’ 이제 곧, 이제 곧 하다가 하루 이틀, 일 년 이 년... 미루고 미루는 거예요. 나중에 어거스틴은 스스로 가슴을 찢습니다. 자기 절망에 빠집니다. 하나님 왜 저는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합니까? 이론으로는 다 알면서도 왜 내 마음을 지금 기쁘게 하나님께 드리지 못합니까?

우리말에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예전에 <할렐루야>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가짜 목사를 흉내 내는 사기꾼 이야기였지요. 교회에서 한 삼 년 지내다 보면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 감고도 훤하게 알 수 있어요.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더 잘 알지요. 어떤 분은 이것이 너무 지나쳐서 성경 본문만 읽어도 결론이 벌써 나와요. 어떤 분은 예화까지도 알아맞히는 분이 있어요. 그러지 마세요. 그런 것은 다 잊어버리세요. 그래야 저도 새롭게 준비를 하지요. 그것을 다 외우면 제가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왜 지금 기쁜 마음으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사실 여러분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똑같아요. 왜 나만 그럴까? 그건 아니에요. 다 똑같은 거예요.

오늘 어거스틴이 자기 절망에 빠집니다. ‘하나님 왜 나는 이렇게 많은 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주님이 내게 말씀 하시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지 못하나이까?’ 그가 비로소 자기에 대해 완전히 절망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찢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는 거예요.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오는 거예요. 이건 분명히 노래예요. 무슨 노래의 후렴 구절이에요. 남자가 부르는지 여자가 부르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더니 그것을 들고 읽어라.’ 그런 음성이 들려요. 그 때 마음속에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찾아 읽으라는 것이로구나.’ 그리고 말씀이 있는 곳을 찾아 그 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눈길이 가는 곳을 읽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로마서13 11절에서 14절 말씀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마음에 밝은 빛이 비추어 옵니다. ‘,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구나.’ 그 순간 마음에 확신이 생기고 감사가 생기고 평안함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 많은 지식이 하나님의 빛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의 방탕함과 모든 것을 적당히 포장하고 합리화하는 도구였는데 하나님의 빛을 만난 후 그의 지식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올바로 펼쳐 놓는 진리의 도구가 되었어요. 그가 이제까지 경험했던 삶의 모든 경험 속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자 죄악이 드러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함께하고 자유로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제국이 멸망하는 그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정답은 간단한 거예요. 뭔가를 더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순간,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빛이라고 하는 거죠. 제가 오래 전에 아동부를 지도할 때 이런 율동이 있었어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 105절 말씀’ 주의 말씀은 빛이라. 다시 또 한 번 놀라운 약속이 있어요. 요한복음 1 9절에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곧 우리의 빛이지요.

여러분, 오늘 말씀 듣고 은혜 받았다고 오늘 집에 가서 아침마다 일어나서 눈감고 ‘주님 오늘도 내게 말씀을 주십시오.’ 하며 성경을 펴서 손가락으로 짚어서 그 말씀을 읽고 그러지는 마십시오. 어거스틴 같은 경우도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첫째는 각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다 다른 거예요. 고대 교회 역사에 수도원운동을 시작한 성 안토니우스라는 유명한 인물이 있어요. 그는 부자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읽다가 이 말씀에 부딪혔어요.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셨어요. 가서 네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 그 말씀을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어떤 분이 겁을 먹을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제발 그 말씀만은 제게 주시지 마세요. 그러기에는 여러 가지 형편상 곤란합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모두 우리에게 맞는,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딱 맞는 말씀을 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부담이 되고 걱정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에요.

두 번째는 어거스틴이 마음을 찢고 눈물로 기도드릴 때 말씀을 뭔가 노래 소리로 들었습니다. 그런 어떤 모양 같은 것을 그대로 반복하려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요. 말씀을 맞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날마다 강단을 통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장 건강한 신앙입니다. 워낙 알아듣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무릎을 꺾고 마음을 찢어서 그런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뿐이에요. 정말 건강한 사람이라면 날마다 내 눈으로 보는 것과 내 귀로 듣는 것과 내 마음에 주시는 그 말씀과 내 생각에 주시는 모든 생각이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항상 흐르는 겁니다.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그 모든 것이 거룩한 것이 되는 거예요. 다 쓰임이 있는 거예요. 정말 건강한 사람은 어떤 반찬이든지 가리지 않고 다 먹는 사람이에요.

여기 또 하나 이원론을 경계해야 돼요. 어거스틴 당시에는 신앙에 있어서도 강경파, 즉 극단주의자들이 있었어요. 세례를 받으려면 너의 결혼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 앞에 깨끗이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어요.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부터 시작해서 다들 살아 있을 동안에는 세례를 안 받았어요. 그 어마어마한 짐을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생각을 해서 숨 넘어 가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잘못된 신앙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좋으신 우리의 엄마 아빠와 똑같아요. 믿음의 정도를 보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감사함으로 받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또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기질은 변하지 않아요. 얼마 전에 목사님 한 분을 만났는데 참 재미있는 분이에요.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자기 교회를 나왔어요. 그와 얘기를 하다 보니까 그 사람이 해병대를 나왔어요. 목사님의 말이 해병대식으로 바뀌며 “아니 이 사람아 내가 해병대 몇 기네.”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었느냐? 이 분이 목사님이 차에 타려고만 하면 차문을 차렷 자세로 열어 주었습니다. 목사님도 그것을 받아 어깨 한 번 딱 폈다가 차에 탄답니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해병대의 끈끈한 의리가 신앙과 함께 맞물려 있는 것이지요. 기질이 잘 드러난 것이지요.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지고 신앙을 얘기하려고 해요. 교만하다. 그건 교만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타고난 걸 어떡해요? 그것을 예쁘게 봐주어야 해요.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자세에 나타나서 기질은 살아있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 자세. 그 자세가 중요해요. 여러분 그 자세는 잘 안보이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 시비하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제가 정말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세요. 그 분은 저와 신학을 같이 공부한 분이세요. 저 보다 3-4살 위입니다. 그 분이 폐암 말기라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얼마 전에 교단에서 나온 신문을 보니까 그 분에 대한 자세한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이 분이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소위 비행 청소년들, 소년원에 들어가고 교화소에 들어가는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그 곳을 나온다 한들 딱히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 아이들을 위해 어렵게 집을 하나 구해서 그 아이들을 끌어안고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지 벌써 18년이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평택에서 단독 목회를 하고 있었을 때 그 분을 가끔 보게 되었어요. 그 분은 수원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여기까지?” “ 아, 글쎄 한 놈이 도망갔거든. 그래서 그 놈을 잡으려고.” 부모도 포기한 애들을 끌어안고 사셨어요. 그런 목회하는 분들은 남모를 어려움이 많거든요. 어느 날 넘어져서 뼈가 부러졌는데 그저 넘어져서 뼈가 부러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폐암이 퍼져 뼈 속까지 들어가서 뼈가 약해져서 부러졌다는 거예요. 그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어차피 시한부 아닙니까? 저는 더 살겠다는 집착이 아니라 이제까지 믿었던 하나님, 날마다 어려움 속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오늘도 내게 맡겨 주신 이 일을 하면서 살겠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암 센터를 다니면서 치료를 받으며 일하고 계십니다. 오히려 이 병을 통해서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어려움 속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오히려 나의 가슴은 더 풍성해졌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부르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에 깊이 잠겨서 오늘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를 하나님의 은혜로 받고 살아라. 그 사람이 진정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그 은혜를 잊어 버리고 하나님의 십자가 그 사랑에 붙들려 살면서도 교만하고 때로는 좌절하고 절망하는 불신앙 가운데 있는 우리를 오늘도 놀라운 은혜로 지키시는 주님. 우리에게 주시는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살게 하시고 나누고 베풀며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