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후광효과,믿음도 훈련이다]/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1. 17:39

051009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 20:24-31)

성경본문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아주 뜨겁게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 맨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눈물을 줄줄 흘리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은혜 받았구나’ 생각하고 집회를 마친 다음에 가서 물어봤대요.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시냐고. 그랬더니 이 할머니 얘기가 “목사님 얼굴을 보니 지난 번에 죽은 우리 개가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어요.” 하더랍니다. 여러분, 인상이 중요해요.

한경직 목사님이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면접 시험을 볼 때, 방에 들어가니 목사님 두 분이 계시는데, 요즘 같이 그런 시험이 아니라 선배 목사님들이 몇 마디 물어 보시고 안 되겠다고 하면 불합격이지요. 그 떨리는 중에서도 면접을 하는 목사님의 얼굴을 보니까 죄송하지만 꼭 소도둑 같이 생겼더래요. ‘아이구, 저 얼굴로 어떻게 목회를 하실까?’ 그랬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렇게 썩 목회를 잘 하시지는 못했답니다. 그런 얘기를 하시면서, “여러분, 나 어때요? 이만하면 잘 생기지 않았어요?” 하셨답니다.

인상이 중요해요. 그런데 문제는 인상에 함정이 있다는 거예요. 사울왕을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가 키가 크고 준수해서 사람들이 마음을 다 빼앗겼잖아요.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압살롬이 잘 생기고 머리 모양이 멋있어서 사람들이 또한 마음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인상에 함정이 있어요. 사람들이 서로를 볼 때 세 가지 요소를 본다는 거예요. 첫째, 평가의 차원으로 저 사람 좋다 싫다. 둘째, 능력의 차원으로 잘한다 못한다. 셋째, 활동의 차원으로 적극적이다 소극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판단할 때,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좋다 싫다라는 것이랍니다. 아주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첫인상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심리학적 용어로는 초두효과라고 합니다. 정말 첫인상이 중요하지요. 후광효과. 그래서 정치지망생들은 대개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을 하나씩 걸어놓아야 명함을 내놓을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런 사람을 안다는 것이지요. 저 사람의 매력을 자기에게 옮기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곳 자카르타는 아무래도 많은 분들이 오셨다가 사업관계 또는 자녀들 진학 관계로 다른 나라로 가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지막 주 예수의 날에 우리는 너희의 자랑이 되고 너희는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기도한다. 여기서 신앙 생활을 하시다가 다른 나라를 가시고 다른 교회를 가셨을 때, 내가 한마음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을 다시 찾았고 또 내가 한마음교회에서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리고 내가 그 곳에서 신앙의 깊이가 깊어졌다. 그러길 바래요. 여러분이 다른 곳에서 여기를 돌아보고 기억할 때에 내가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되기를 정말 원합니다. 후광효과예요. 또 한마음교회를 다닌다고 그럴 때, 상대방이 속으로 ‘사람은 좀 변변찮게 생겼는데, 오 한마음교회 다니는구나.’ 라며 눈을 씻고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토록 인상이 중요한데 사람들이 인상을 결정할 때 여러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신체적인 매력이래요. 그래서 못 배우고 성격이 못된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못생긴 것은 용서할 수 없대요. 신체적인 매력을 그 사람 인상의 첫 번째 요소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혹시 주무실 분을 위해 미리 결론을 말씀 드립니다. 우리의 인상 결정은 지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이고 틀리기 쉬워요. ‘스키너라는 학자의 연구를 보면 인상을 결정할 때, 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뭔가 자기에게 경제적이나 심리적으로 유익이 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의 결점을 채워줄 수 있는 보상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그래서 부부가 결혼할 때, 저 남자가 매력적이다. 매력적이기도 합니다마는 또 하나 숨겨져 있는 동기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그것이 저 사람과 결혼을 하면 채워지겠구나 하고 기대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둘 다 똑같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하고 나서 나의 이런 결점을 채워달라고 결혼을 했는데 왜 채워주지 않느냐고 하니까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결론을 내리면 우리가 사람들의 인상을 결정하고 형성할 때, 너무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나의 경험, 나의 사고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가지고 있는 숨겨진 그 상처, 그 상처의 틀을 가지고 나의 필요에 따라 판단합니다.

더더욱 어리석은 것은 유사성의 원리. 우리가 서로 사람을 대면할 때, 이렇게 저렇게 얘기를 나누면서 고향을 물어봅니다. 고향이 나와 같으면 마음을 좀 더 열어요. 성씨를 물어봅니다. 또 학교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나와 학교가 같으면 이 사람은 뭔가 나에게 유익이 되고 친근해지고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틀린 생각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인지적인 구두쇠들이다. 이건 무슨 말이냐?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그 일 알어?” “응, 알지.” “어떻게 알어?” “척하면 삼천리지.” 이 ‘척하면 삼천리’가 문제예요. 알긴 뭘 알아요? 뭘 그렇게 안다고 말끝마다 ‘척하면 삼천리’. 이게 틀렸다는 것입니다. 뭔가를 진지하게 찾고 배우고 생각하려 하지 않는, 좀처럼 내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 그 태도.  까닭에 변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붙들어라. 믿음도 훈련입니다. 여기 도마가 등장합니다. 도마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에요. 흔히 의심 많은 사람, 이렇게 말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누구나 다 의심하는 거지요. 다만 도마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어 표현해서 묻는 사람이지요. 옛날에 학교에서 공부할 때, 이 문제가 알쏭달쏭해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선생님께 묻기에는 좀 부끄러워요. 그런데 어떤 친구가 덜커덕 물어요. 그러면 선생님이 이것도 모르냐며 약간 짜증을 내시면서도 문제를 한 번 더 풀어주세요. 그러면 나는 그 옆에서 숨어서 마침 잘 되었다며 그 문제를 그 친구 덕분에 알게 되는 거예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주님은 멀리 다른 곳에 계셨잖아요?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가 죽었으니 빨리 와서 살려주십시오 했을 때, 주님이 일부러 미적미적하다가 늦게 출발을 하셨어요. ? 나사로를 죽이시려고요. 나사로가 죽어야 다시 살리실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때 제자들이 막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바로 그 전에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 했거든요. “아니, 주님 저 사람들이 주님을 기다렸다가 돌을 가지고 또 칠 텐데, 또 그 예루살렘으로 가십니까?” 그 때 주님께서 “가야 한다. 나사로가 죽었고 이제 내가 그를 살리러 가야한다.” 그 때에 도마가 그 옆에서 한 말이 있어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그 상황을 보면 굉장히 믿음 있는 말같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그것은 믿음이 있는 말이라기보다는 고집스럽게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걸음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심사가 틀어졌어요. 지난 번에 돌에 맞아 우리도 죽을 뻔 했는데 또 거기로 우리를 몰고 가시려는 그 의도가 뭐냐며 화가 났어요. 그래도 주님이 나서시니까, 속이 뒤틀려서, “ 야, 우리도 죽으러 가자.” 한 것이죠.

그리고 그 유명한 말이 있죠. 요한복음 14장에 너희는 마음에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제 내가 곧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 앞으로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리라. 내가 가는 그 길을 너희가 알 것이다.” 그랬더니 대뜸 도마가 그 말을 받아서 “아니 주님 우리가 그 길을 어떻게 압니까?” 그 바람에 우리가 기가 막힌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

여러분, 도마를 통해서 우리가 얻은 것이 많아요. 도마는 사실은 남성을 대표하는 사람이에요. 집요하게 파고 들어서 묻고 확인하고 따져보고 그리고 결정하는 사람이에요. 우리 한국 교회를 얘기할 때 너무 여성화되었다고 합니다. 실상이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비교적 남자 분들의 퍼센트가 높은 편이에요. 그럼 한국 교회가 왜 그렇게 되었느냐? 일제 식민지배 하에 있었을 때, 교회가 점점 현실과 타협하면서 개인주의로 감성주의로 신비주의로 부흥회로 돌아섰어요. 그래서 교회는 많이 늘어도 정작 사회에서 일을 하는 남자들의 의식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들어있지 않고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자기 생각만 하고 있어요. 죄송합니다만 여자 분들은 남편하고 아이들밖에 안보여요. 그리고 조금 넓혀본다는 게 자기 구역식구예요. 교회 밖을 잘 생각 못해요. ? 일하는 활동 범위가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요. 보세요. 도마가 그토록 의심이 많은 사람 같고 집요하게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만 그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전설에 의하면 그는 열 두 제자 중에 가장 멀리 저 인도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를 안 가본 사람이 많은데 그 때 벌써 인도를 내다보고 거기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하였답니다.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가 3년이 되어서 위임식, 임직식을 해서 뭔가를 새롭게 하자. 그런데 행사를 거창하게 해서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늘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믿음의 분명한 원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런데 그 제자들이 부활의 소문을 듣고 있었는데도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 때 예수님이 야단하셨어요. 말씀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예수님도 화를 내셨어요. 그러나 그들을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어요. 왜 그들이 더디 믿었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판단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The day after tomorrow>라고 하는 영화가 있어요. 아주 기발한 영화예요. 지구 온난화로 인해서 그린랜드의 빙하가 녹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것이 순식간에 녹으면 북미는 완전히 다 얼어붙는다는 거예요. 뉴욕이 모두 꽁꽁 얼어붙었어요. 사람들이 다 얼어 죽었어요.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다 얼어 죽었어요. 그 중에 일행이 뉴욕 도서관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화로에 넣어 불을 피웁니다. 도서관에 있는 책이 얼마나 아까워요? 그러나 그것을 태워야만 살 수가 있어요. 그런데 도서관에 있는 한 교수가 이 책은 안 된다며 책을 한 권 끌어안고 있어요. 성경책이에요. 한 젊은이가 묻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시는군요?” “아니.” “성경책을 끌어안고 있잖아요.” “이것은 1453년 구텐베르크의 활자로 인쇄된 최초의 성경원본이야. 이것은 내가 양보할 수 없지. 이것은 인간 이성의 놀라운 산물이지. 지구가 멸망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이것만큼은 끌어안고 가고 싶네.” 이게 바로 소위 공부한다는 사람의 병이에요.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발견해야지 인간의 이성으로 최초로 찍어낸 성경은 인류의 최고 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그게 똑똑한 것 같으나 오늘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합니다. 말씀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 말씀 속에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으며 그가 다시 부활하셔야 했는가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며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리는 순간 그들 앞에 계시던 예수님은 더 이상 보이시지 않으셨다. 더 이상 육체로 보이실 필요가 없었어요. 이미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들의 영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이 되고 그 안에서 예수가 왜 죽으셔야 했으며 왜 부활하셔야 했는가 하는 이유를 발견하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서 하신 첫 마디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였습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인상을 가지고 저 사람 좋다 싫다를 판단합니다. 지극히 상대적으로 주관적으로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를 보셨다면 온전히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믿어주시는 주님 끝까지 가르쳐주시는 예수님 그리고 오늘 그 말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행사를 하더라도 오늘 지금 하나님의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이것은 기도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해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하시길 원하시는지, 그 점에서 함께 눈이 열리고 함께 마음이 열리고 함께 생각이 모아질 때, 그 때 하나님이 아름다운 일을 더 펼쳐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만 많이 모이고 우리 교회만 재미있다가 아니라 이 곳 자카르타 한인사회 구석구석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생각이 열리고 은혜를 받고 신앙을 회복하고, 의심 많았던 도마가 신앙을 회복한 후 멀리 인도를 내다보고 말씀을 전했듯이 자카르타와 인도네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갈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과 경험과 상처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상황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들이대며 이렇게 나에게 응답해 달라고 요청했던 우리의 무지와 불신앙을 회개합니다. 다시 한 번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주사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오늘도 우리의 걸음을 주장하시고,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목적을 가지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는 뜻을 발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