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주를 자랑하라[전적인은혜,Coram Deo=하나님 앞에서]/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1. 20:30

051113 주를 자랑하라 (고전 1:26-31)

성경본문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서 들으셨겠습니다마는 요즘 우리 나라 벤처기업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에 일 세대 벤처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터보테크에서 700억원의 분식회계가 적발이 되었는데, 얼마 전에는 로커스라고 하는 회사가 530억원을 분식회계 했다고 실토를 했습니다. 그 로커스의 김형순 사장은 올해 마흔 넷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벤처 열풍이 일어난 이후에 한 순간에 거품이 빠지면서 투자에 실패하고 매출이 떨어지고 하면서 회사가 무너지게 되었지만 회사에 아무 문제도 없는 양, 자산이 있는 양 꾸미게 된 것이지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 돈을 단 한 푼도 개인적으로 쓴 일이 없다. 그리고 자기의 주식을 모두 담보로 내어 놓았다. 그의 개인적인 어려움은 다소 이해가 됩니다. 그는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MIT공대 MBA출신으로 1990년에 그의 나이 29살에 로커스라는 회사를 시작해서 벤처 업계의 기대주였던 사람이죠. 그러나 경영자에게 있어서 경영의 실패는 가장 큰 죄이지요. 그의 경영 실패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피해가 갔다면 그게 바로 죄이지요. 그 얼마나 어렵습니까? 공부도 많이 하고 시대를 앞서서 회사를 설립하고 먼저 앞서 나갔습니다마는 세상이 이렇게 한 순간에 뒤집어질 줄이야. 누가 알았습니까?

여기 부실경영의 문제가 있습니다.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인간으로서 가정경영의 문제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나 자신의 인생경영, 인격경영에서 과연 어떠합니까? 스스로 분식회계에 속고 있지는 않은지요? 내가 나온 학교와 현재의 사회적 지위와 돈 그것이 마치 나 자신인 양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스스로 속고 있다면 영원히 진정 내 속에서 내 영혼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구호가 있습니다.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과 대면해서 나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죠. 지극히 연약한 인간존재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지난 주간 휴가를 잘 다녀왔습니다. 모처럼의 꿀맛 같은 휴가였습니다. 한국에 가보니 참 아름답더라고요. 그 전에는 왜 몰랐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휴가라고 하지만 나가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발바닥에 불이 날만큼 바빴습니다만 지난 주에 어디에 가서 예배를 드릴까 고민을 하다가, 목사들은 어딜 가서 예배 드리기가 참 어렵거든요. 여러분도 어딜 여행가서 교회를 선택해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목사는 더 어려워요. 그래서 궁리를 하다가 제 마음에 기억나는 장소가 있었어요. 어디냐? 오래 전에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동계훈련을 받으러 철원의 용화동이라고 호수가 있는 동네에 갔었어요. 훈련 중에 수요일 저녁이라고 그 호숫가에 쓰러져 가는 작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기억이 나서 그 곳을 찾아갔어요. 가을 호숫가의 정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환상적이에요. 그 교회는 벌써 폐허가 되었고 그 옆에 그것보다는 조금 더 크게 돌로 새로운 교회를 지었더라고요. 교회 마당에 나무가 한 두 그루가 있는데 단풍이 얼마나 예쁘게 들었는지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많지도 않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노인들이니까 나이 드신 분들만 열다섯 분 정도 앉아 계시더라고요. 그리고 목사님은 30대 초반쯤 되어 보였습니다. 얼마나 뜨겁게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시는지 그 모습 그 자체로 은혜가 되더라고요. 어떻게 연세가 드신 분들을 앞에 두고 저렇게 힘있게 설교를 하시는지. 예배를 마치고 나갑니다. 제가 여러분과 인사하듯이 그 분도 문 앞에서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고 악수를 했는데 손을 안 놓으시더라고요. 그리고는 그대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갑자기 그 분이 기도를 하니까 엉겹결에 저도 함께 머리를 숙였습니다. ‘아 이 분의 방식은 이런 식이구나.’ 아주 구수한 된장 맛이 났습니다. 그야말로 낯 모르는 저를 위해 축복하는 기도를 한참 받은 후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곳을 굳이 찾아가서 예배를 드림으로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철 따라 나무 잎새 하나마저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색깔을 바꿔가면서 길러내셨던 하나님이 허물 많고 연약한 나에게 참으로 인자함과 성실하심으로 그리고 그의 온전한 약속으로 이끌어 주셨구나. 나는 연약하고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구나. 그간의 내 인생을 하나님이 경영하셨구나.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어요.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무 때라도 불러가실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경영자이십니다. 알고 보면 여러분은 월급사장이에요. 하나님이 경영자이십니다.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영원리가 있습니다. 다음 주는 추수감사주일이고 또 세례식이 있습니다. 세례 공부할 때 여러 가지 물음을 써 내시면 제가 그 물음에 대해 답을 드리는데 빠지지 않고 나오는 물음이 있어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그리고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도대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마땅히 나와야 할 물음이지요.

저도 가끔 TV를 보다가 노래를 듣습니다만 요즘 7080 콘서트라는 프로가 있대요. 그 프로그램 방영 시간이 교회 예배 시간과 겹쳐서인지 한 번도 못 봤습니다. 4,50대에게 큰 인기가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음악을 들으면 전 머리가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제발 좀 꺼줄 수 없냐고 해요. 세대가 다른 거지요. 그러나 요즘 주일 학교 아이들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여기 아이들은 또 다릅니다만, 우리의 전통적인 찬송가를 부르라고 하면 입도 안 열어요. 그런 아이들이 한동안 유행했던 랩에 가사를 붙여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서로 사랑하라고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몸을 비틀면서 무대에서 노래하는데 무대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아이들도 모두 일어나서 몸을 흔들면서 찬양을 합니다. ‘, 그렇다. 서로 사랑하라는 복음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문화라고 하는 그 시대에 맞는 그릇에 담느냐도 중요하구나.’ 아이들의 감각에 맞는 문화에 그 내용을 실었더니 아이들이 일어나서 온몸으로 반응을 하는 거예요. 음악에 대한 취향이 다 다른 거지요. 세대가 다른 것이지요. , 저는 그런 것이 머리가 아픕니다마는 그러나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들은 그 음악 표현 속에서 복음을 새롭게 듣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모양은 다릅니다만 그 안의 본질을 잘 이해하는 눈이 꼭 필요한 것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모습은 2000년 전 유대 땅 그 사회에서 일어났던 형식이지요. 그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양을 가지고 제사장 앞에 나오면 제사장이 양에게 안수 기도함으로써 죄가 양에게 옮겨지게 되고 양의 머리를 베어 피를 다 쏟고 그 온 몸을 다 불태웠던 고대의 희생 제사 관습을 십자가로 다시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생각과 문화와는 다릅니다만 그 안에는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있고 그것은 곧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할 때 2000년 전에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섬긴다 했습니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그들로서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들었던 말씀 중에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고 하는 레위기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하는 그 이해를 넘어서지 못했어요.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죽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를 대신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당시의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고 지혜와 철학을 자랑했던 헬라인들이 볼 때에 십자가 사건이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어리석었어요. 그들의 지식으로 그들의 판단으로는 동의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그 당대의 가장 종교적이었던 유대인이나 가장 철학적이었던 헬라인이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말씀을 오늘 이렇게 세속화된 현대인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심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아가페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적인 은혜, 사람의 노력이 1%도 들어가지 않은 전적인 은혜라고 말합니다. ? 사람의 노력이 들어가면 그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이 돼요. 여호와의 증인들을 아실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가서 어머님을 만났어요. 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옷 가게에서 어떤 나이 드신 분을 만났는데 어머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저 분은 여호와의 증인인데 내가 저 분을 40년 전에도 알았는데 아직도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있구나.” 옷 가게에 전도를 하러 오신 것이었어요. 참 그 열심은 대단합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알 것이 있어요. 왜 그러냐? 단순한 열심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구원관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요. 많이 노력하고 열심히 전도해서 점수를 벌어 놓아야 돼요. 그래야 마지막 날에 그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는지 천국에 가는지 아니면 지상에 남는지 이게 판별이 되는 거예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예요. 불완전한 구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한 구원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얻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의 심장에 조그마한 문제가 있어요. 태어나기가 무섭게 수술을 해야 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고 아프겠습니까? 부모 된 자, 누가 자녀의 몸에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는 병이 있기를 원하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때, 생명의 원리를 따라 주셨어요.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선물이에요. 우리는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제가 이번에 나가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많이 친절해졌어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날 때 보니까 예전과는 다르게 참 친절해졌어요. 꼭 인사말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교육을 받았겠지만요. 비행기 티켓을 살 때도 아주 친절하더라고요. 제가 착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참 친절하더라고요. 잘 생긴 청년이 친절하게 해주더라고요. ‘야, 좋구나.’ 서로서로의 자그마한 친절과 호의가 얼마나 우리의 일상을 기분 좋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걸음 더 들어가야 해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사랑이 끓어올라야 합니다.

제가 이번에 나가서 여러분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 한 분이 기억납니다. 그 분하고 헤어진지 7, 8년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지방에서 목회를 할 때, 전도하면서 학교 선생님들과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2년 동안 그 분의 집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이 기도하고 했습니다. 국어 선생님이셨고 사모님은 피아노 레슨을 하고 계셨어요. 그 때 큰 아이가 3살 정도 되었어요. 그 때 제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 년 열 두 달 밤 8, 9시에 모여서 한 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서울로 가는 바람에 헤어져서 전화 연락도 못하고 지금까지 오다가 제가 이번에 한국 나가기 전에 만날 사람들의 리스트를 적다가 보니 그 이름이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수첩을 찾아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가 아무개입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랬더니 “아휴 목사님” 하며 너무너무 반가워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국에 나오면 꼭 뵙자고 해서 그 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서로가 바빠서 단 한 시간 잠깐 만나서 된장찌개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간에 그 집은 변화가 많았어요. 애가 둘이 더 생겨서 애가 셋이 되었더라고요. 그리고 막내가 아직 돌이 안되어서 예전보다 더 정신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학원도 운영을 한대요. 예전보다 더 바빠요.

그러나 그 만남을 통해서 너무나 기뻤던 것은 그 분들이 그렇게 정신 없이 사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분명한 중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고백이 아주 분명해요. 방학 때만 되면 몽골에 가서 선교를 하는 거예요. 심지어는 그 어린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가더라고요. 여러분, 제가 학교 교사로 있었는데요. 학교 교사들도 어려움이 많아요. 그것도 창살 없는 감옥이거든요.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하잖아요. 속을 많이 썩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꿈을 가지고 기도하고 준비하고 방학을 이용해서 다른 세계를 보고 거기서 땀을 흘리고 돕고 돌아오면 내 직장 내 일터가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한국에서 돌아와서 아침에 운동을 다시 하느라고 아파트 뒤뜰을 도는데 예전엔 너무 푸르러서 지루했던 초록빛도 알고 보니 다 거기에 자기 색깔이 있더라고요. 다 신선하더라고요. 제가 그 분을 7년 만에 그 한 시간 만난 것이지만 서로에게 너무나 큰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있었어요. 그래,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지. 일년 후에 만나고 이년 후에 만나고 삼년 후에 만났을 때, 서로 신앙 안에서 주님을 향해 쑥쑥 자라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그 한 번의 만남을 통해서 상대방의 삶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힘있게 하는 것입니다.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삶의 지혜와 죄사함과 의로움과 거룩함이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때, 그 마음에 일어나는 감사와 기쁨이 거룩함의 본질이지요. 거룩한 형식과 옷차림과 예절도 중요합니다만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움 그것이 거룩함의 본질이지요. 그리고 구속함, 즉 자유함 진정으로 삶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그 안에 있더라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 분은 방학을 기다리는 거예요. 열심히 일하고 준비하고 기도해서 방학이 되면 그 짧은 한 두 주간을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계산을 해보세요 우리는 이미 나와 있잖아요. 그 분은 어렵게 준비해서 한 번 나오는데 우리는 날마다 나와 있잖아요. 이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조금만 더 눈을 열고,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연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게 되는지 몰라요. 이거 나 잘나서 된 것 아니에요.

성경이 말합니다. 자랑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오직 주님만 자랑하라. 우리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도 주님, 오늘 여기에 살게 하셨다. 이건 내 생각하고 내 계획이랑 다르다, 다행이지요. 여러분 생각대로 갔으면 어디로 갔겠어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도하심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여기에서 내게 주시는 귀한 일터가 있고 가정이 있고 또 이것을 새롭게 하는 교회가 있고 그리고 그 교회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비전이 있는 거예요. 나눌수록 더 풍성해지는 거예요. 오늘 또 어떻게 살까?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궁리하며 살수록 우리의 계산법으로는 마이너스가 나오는 거예요. 천금을 쌓아놓고도 그 사람의 계산법으로는 마이너스 밖에 안 나와요. 그러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계산법을 따라갈 때, 고통과 눈물이 있는 그 곳이 오히려 하나님이 지금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을 따를 때에만 우리는 항상 감사가 넉넉한 삶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 내 손에 쥐어진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은 오늘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은총 그 사랑 그 은혜로 나를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눈을 열게 하시고,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만 기뻐하는 그런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