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새롭게 하시는도다[선택의심리학=차별의저주,예수업은당나귀]/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2. 17:13

060219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1-5)

성경본문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제가 논산 훈련소에 입대 했을 때에는 8월 이었습니다. 늦더위가 한창이었죠. 그때 제가 연병장에 나아가서 제식 훈련을 받는 데, 아주 어려웠습니다. 얼마나 덥고 얼마나 땀이 났는지 모릅니다. 한창 그렇게 목이 말라서 힘들어하고 있는데 마침 잠깐 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주전자에 물 한 통을 떠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물을 마시려고 하니 한 사람도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물을 다 바닥에다 쏟게 되었죠. 그것을 지켜보던 교관이 호통을 치면서 다 물러서라. 물을 마실 사람은 한 줄로 줄을 서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가서 줄을 섰습니다. 저도 그것을 보고 물 한 모금 얻어먹으려고 줄을 섰어요. 그런데 교관이 주전자를 드는데 이미 물은 다 쏟아졌어요 물이 없어요. 교관이 오히려 화를 내면서 줄을 선 훈련병들에게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먹으로 한대씩 때리는 겁니다. 저도 한대 맞았죠! 얼마나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던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때의 목마름과 더위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 얻은 귀한 선물이 있어요. 이젠 어디를 가든지 좀 덥다고 해도 그 때 그 생각을 하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여러분, 사람은 도대체 얼마만큼 채워져야 만족 할 수 있을까요? 어느 한 직장여성이 있습니다. 그 직장에서 연봉 4만불을 받아요. 신이 나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같은 업종의 다른 직장에서 그의 능력을 눈여겨보더니 그를 스카우트 했어요. 연봉 6만불을 줄테니 우리와 함께 일하자. 그래서 그 직장을 옮겨 갔는데 아! 글쎄 그 직장이 6개월 만에 부도가 났어요. 직장을 잃어버렸어요. 그런데도 이 사람의 실력을 인정했던지 전 직장에서 다시 불렀어요. 다시 돌아와라. 그러면서 오히려 연봉을 45천불로 올려 주었어요. 여러분! 그렇다면 과연 그 여인은 만족하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이미 자기에 대한 기준이 높아졌기 때문이에요. 난 이제 적어도 육만 불짜리 인생이다 하는 자기 기준이 높아졌기에 좀처럼 만족 할 수 없었던 것이죠.

<선택의 심리학(The Paradox of Choice)>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 행동학 교수인 베리 슈월츠(Barry Schwartz)의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만족을 얻기 위해서 어떤 것을 선택할 때,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은 세 가지 격차에 따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의 격차. 또 내 것과 나와 처지가 비슷한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과의 격차,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과거에 가졌던 가장 좋은 것과의 격차를 비교해 가면서 선택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때 대 부분의 사람들이 소위 차별의 저주에 빠진다는 거예요. 좀처럼 만족하지 못 한다는 거예요. 비교의식에 빠진다는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최고로 좋은 것을 선택하려 하기 보다는 그저 충분히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만족도가 높아진다 라고 하는 결론 입니다. 최고로 좋은 것을 택하려 한다면 그 것을 결정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더 철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또 어떤 것을 결정 했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더 찾아보면 더 좋은 것이 있을 텐데라고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보는 불확실하므로. 그러기에 최고로 좋은 것을 손에 넣어다 할지라도 또는 객관적 기준으로는 그 것이 최고라 할지라도 그의 주관적인 마음은 좀처럼 만족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저 내 형편에 맞는 충분히 좋은 것, 그 것을 선택하라고 하는 얘기에요. 그렇게 되면 결정 과정이 단순해질 뿐만 아니라 만족감도 높아진다는 거죠. 사람에게 있어서는 객관적 기준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정작 사람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것은 주관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또한 이렇게 어렵게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이제 남는 문제는 적응의 문제 입니다. 인간의 보편 심리인 적응의 문제, 이 것은 어떤 것이냐, 어떤 일에 한 가지를 선택했어요. 그렇다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요. 또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곧 바로 실망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아파트를 좀더 넓은 곳으로 옮겨 갔을 때,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러나 단 한 달을 못 가는 것 같아요.

한달 쯤 지나면 벌써 그 공간에 적응이 되어서 나는 마땅히 이만한 공간에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처음 가졌던 그 기쁨을 다 놓쳐버리는 것이죠. 이게 바로 인간의 보편 심리에요.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 선택한 것에 대한 실망. 즉 이중의 고통에 빠지게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제가 얼마 전에 인간극장 굿모닝 필리핀이라고 하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그 것은 해방둥이로 태어나서 이제 육십을 넘기고 있는 부부의 은퇴생활 이야기에요. 여러분, 해방둥이는 얼마나 상징적입니까? 또 해방둥이의 삶은 한국 현대사와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전쟁 통에 태어났고 말할 수 없는 가난 속에 살아야 했으며 경제발전의 일꾼으로 일을 해야 했고, 월남전에 나아가야 했고, 근로자로 일해야 했고, 이렇게 그들의 중년과 장년을 보내다가 IMF를 맞아서 직장에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죠.

여기 한 부부가 나와요. 이 사람 역시 사십대 중반에 중령으로 전역한 이후에 금융기관에 중간 간부로 들어가서 십 년 열심히 일하다가 IMF를 맞아서 회사에서 해고됩니다. 55세에 해고가 되어 그리고 새로운 직장을 찾아서 3년을 열심히 애쓰며 수고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참으로 처참한 현실 참으로 어려운 고비였죠. 그래서 이분이 3년의 어려운 시간을 보낸 끝에 결정을 내리고 이제부터는 은퇴생활을 준비해야 되겠다. 그리고 이제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연금과 모든 생활비를 한 달에 이백만원으로 산정해볼 때, 그 것을 가지고 어디로 가서 살아야 될 것이냐.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이 필리핀의 바기오라고 하는 도시에 가서 자기 은퇴생활을 시작하겠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그저 단순히 월 이백만 원의 수입에 맞추어 생활할 수 있는 곳이 어디냐. 그저 그런 정도의 판단으로 고향을 떠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하죠. 다른 하나를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동시에 다른 하나를 포기한다는 말이죠. 고향을 떠나서 노년을 보내겠다고 한다면 결혼한 자식들과 어여쁜 손주들을 자주 만나지 못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어야 되는 것이죠.

그분은 말 합니다. 자기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 한다고. 그러면서 자기의 은퇴생활을 새롭게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와 같이 자기가 선택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나아가겠다고 말 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죠. 그래서 이 <선택의 심리학>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기대를 통제하라.’

여러분, 집에 아주 좋은 포도주가 있습니까? 날마다 홀짝홀짝 꺼내서 드시지 마시고 좀 아껴두세요. 아주 좋은 날, 아주 기쁜 날, 그 때 귀하게 꺼내서 드세요. 아주 예쁜 실크 블라우스가 있습니까? 아무 때나 입고 다니지 마시고 아주 좋은 날 꺼내 입으세요. 사실 돈이 있고 시간이 있어서 아무 때나 여행을 갈수 있다면 그는 이미 여행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죠. 그 여행이란 게 없는 돈 모아가지고 저축하면서 기다리면서 계획하면서 꿈꿀 때에 여행의 진미가 있지 않습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이미 신선한 기쁨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고 싶지만 그러한 기대를 잘 통제하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의 자그마한 일상의 경험은 신선한 자극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 저자가 정말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선택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것을 그 때마다 선택 할 것이냐? 그렇게 하지 마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결정하고 그것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다 우리가 정해 놓은 규칙에 따르라고 하는 거예요. 과도한 선택에 따르는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 주일마다 예배에 올 거냐 말거냐 그런 것 때문에 시간낭비하고 고민하지 마세요. 그냥 오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내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꼭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 모든 은혜를 잊지 말지어다. 여기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그러고 나머지는 우리가 정해 놓은 그 규칙과 좋은 습관들에 맡기라는 것이죠.

<예수를 업고 가는 아프리카 당나귀>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스티븐 룽구라고 하는 올해 약 65세 된 크리스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 엄마는 14살 이었어요. 그 아버지는 50세 였어요. 아주 무절제하고 혼란스러웠던 아프리카 사람들의 일상을 잘 보여 주는 것이죠. 그나마도 일곱 살에 어린 동생들과 함께 시장에 내버려졌어요. 버림 받았어요. 그는 나이가 스물이 되도록 다리 밑에 흙구덩이를 파고 거적때기를 덥고 날마다 자야 했습니다. 그리고 굶주림과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서 백인들만이 사는 지역에 들어가서 쓰레기통을 뒤져가면서 음식을 꺼내 먹으며 살아야 했어요. 그렇게 살던 그는 십대가 되어서 자기를 버린 부모를 미워하고 원한을 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인생을 저주하면서 스스로 갱단을 만듭니다. 그 갱단 이름이 블랙 쉐도우’ (Black Shadow) 검은 그림자라고 하는 갱단을 만들어서 이제 연약한 사람들을 폭행하고 그들의 돈을 빼앗으며 살아가는 것이죠. 다 버림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서로를 지켜주면서 세상을 저주하면서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때 아프리카가 식민지 독립투쟁의 혼란 중에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회를 혼란시키고 테러를 하기 위해서 어느 날 폭약을 준비 해가지고 은행을 폭파하러 가다가 어느 한 큰 천막에서 나는 음악 소리, 노랫소리를 듣고 룽구가 생각을 합니다. ‘, 저곳은 뭐냐? 저곳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구나! 그렇다. 지금 텅 빈 은행을 폭발 시킬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저 곳에 폭탄을 터뜨리면 사회는 더 혼란스러워지고 우리는 목적을 달성해서 백인을 내쫓고 그들의 집을 빼앗고 차를 빼앗고 잃어버렸던 자유를 되찾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는 부하와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다 텐트 주위에 배치를 시켰습니다. “내가 이제 신호만 내리면 공격해라. 일곱 시에 폭파를 시킬 테니.” 시간을 보니 5분 남았어요, 그래서 도대체 이 안에서 뭘 하는가 하고 폭약을 가득 담은 가방을 들고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뒷자리에 앉아서 저 앞에서 말 하고 있는 사람을 지켜보게 되었어요.

거기에 한 젊은 아가씨가 간증을 합니다. 저렇게 예쁘고 젊은 아가씨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처음 봤어요. 지금 몰두해서 듣고 있어요.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예수님이 나를 구원 해주셨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저를 구원했다고 하는가 궁금증을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아가씨가 내려가더니 자기와 같이 검은 흑인 선교사가 올라와서 설교를 합니다. 로마서623, 죄의 삯은 죽음이다.’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89,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한 자로서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룽구는 주목해서 듣고 있습니다. 들어보니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와 똑같이 가난하고 헐벗고 온갖 고난을 다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와 차이점이 있다면 자기는 엄마 아빠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자신을 증오하고 세상을 저주하고 미워하고 있는데 예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죄에 빠진 모든 사람들을 새롭게 하신다 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던 룽구는 설교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게 그 분에 대해서 말씀 해주세요.”

사드락 선교사가 말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룽구가 말합니다. “나를 이토록 고통과 가난과 눈물과 저주 속에 살게 했던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신단 말이오? 다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한다고 말하지 마시고,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나에게 말씀해주세요.” 그러자 사드락 선교사가 룽구에게 말합니다. “먼저 당신의 형편을 이야기 해주세요.” 룽구가 눈물을 뿌리며 자기의 지난날의 그 아픔과 고통을 낱낱이 다 이야기 합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사드락 선교사가 말 합니다. “형제여, 이제 내 말을 들으세요. 나는 이런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14세 소녀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부모 형제들이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했느냐고 누가 애 아빠냐고 물었을 때, 그 소녀는 어느 젊은 한 남자를 지목 합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부인하면서 도망가버립니다. 그리고 14세 소녀는 아홉 달 후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지 2주 만에 그 아이를 수건에 싸서 변소에 내 던져버리고는 도망가버립니다. 그 아이는 변소에 빠져서 죽어가게 됩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쫓아가서 그 아이를 건져냅니다. 그 아이는 아빠에게 엄마에게 버림을 받고 아빠의 얼굴도 엄마의 얼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섰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시편 2710, ‘나의 부모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신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셨습니다.” 사드락 선교사의 간증을 들은 룽구는 다시 기도 합니다. “예수님 나를 지켜주세요. 예수님 나를 받아 주세요.”

여러분, 이런 가난과 저주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도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하나님이 저를 받아주시고 저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쓰신 것이죠. 왜 이런 은혜를 베푸시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아시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한 줌의 재로 돌아갈 허무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지키신다 라고 말씀 하셔요.

오늘 손 안에 쥐고 있는 것이 많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 합니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자랑은 들의 꽃과 같아서 바람이 한 번 불면 떨어져서 언제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 조차 다 잊혀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인생에게 오늘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이죠. 선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알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놀라운 은혜 속에서 선택하신 거죠.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하사 내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구나! 이 놀라운 은혜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이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시고, 눈물과 고통과 아픔 속에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음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찾고 위로를 얻고 삶에 용기를 얻고 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