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누구의 자녀인가? [예수 믿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3. 11:39

060730 누구의 자녀인가? ( 4:28-31)

성경본문 [개역개정]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어느 여 집사님의 집을 심방을 했습니다. 그 집은 남편은 교회를 나오지 아니하고 그 여자 분만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는 집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요즘 남편 분이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래 남편 분이 교회를 나오시려고 하십니까? 이제 남편 분에게 교회를 나오시라고 그렇게 권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그 여 집사님이 “아, 목사님 우리 남편은요 교회는 안 나가지만 예수 믿는 사람보다 나아요” 이 말에 목사님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여집사님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 내 남편은 술도 안하지, 담배도 안하지, 바람도 안피우지, 뭐 착실하기가 말할 수 없는 사람, 교회 나가는 사람들보다 낫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덕적으로 바르고 깨끗하고 온전하다. 그것은 예수를 믿을 때 나타나는 하나의 표징일 뿐이지 예수 믿는 것의 본질은 아니지요. 예수를 믿는다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재림하실 그분,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살아계신 그분을 고백하는 것, 그것을 예수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기에 우리로서는 믿을 도리밖에는 없는 거예요. 우리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혼동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오해가 많아요. 예수를 믿는다 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해요.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시다. 선지자 중에 하나이시다. 또는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공자 맹자 노자 같은 인물들과 같은 사람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이왕 믿을 바에는 세련되게 예수를 믿자 한다면 이건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또 무엇입니까. 원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죄인을 못 박는 것이거든요. 그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라고 하는 것을 그저 한 죄인이 죽었다. 한 죄인의 죽음이다.’ 통일교의 문선명 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실패자의 죽음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므로 영은 구원했는지 몰라도 육신적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와서 그 나머지 육체의 구원을 이루겠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은 , 예수님이 아깝게 좋은 분이었는데 그만 죽으셨다.’ 한 의인의 죽음으로 말한다면 이건 다 오해입니다. 다 빗나간 거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눈으로 보기에 십자가는 죽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승리가 있다. 그 십자가의 의미는 첫째, 속죄제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원래 유대사람들이 죄를 지었을 때,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제사장에게 와서 자기의 죄를 고합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다 듣고 그 양과 염소 위에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기도함으로 이 사람의 죄가 이 흠 없는 양과 염소에게 다 옮겨집니다. 그리고 그 양과 염소가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됩니다. 제사장은 그 목을 치고 각을 떠서 피를 다 뿌리고 그 몸을 다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죄인은 이렇게 죽어야 하는 거지요. 그러나 내가 죽을 수 없으므로 아무런 흠 없는 양과 염소를 죽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오늘 지은 죄를 해결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일회용 이예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희생제물로 내어놓으시고 그가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once for all' 예수께서 희생제물이 되셨다. 여기에 십자가의 뜻이 있습니다.

또한 그 죽음은 바로 나를 위한 죽음이다. ‘대속(代贖)이라는 표현을 써요. 대신 죽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 그리고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의인으로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율법을 완성하셨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 함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믿는 거예요. 그리고 그가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믿을 때에 나도 예수의 생명과 함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안에서 새사람으로 부활한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 우리가 세례를 받지 않습니까. 세례의 의미는 뭡니까.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거지요. 물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십자가로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물 밖으로 끄집어내야 삽니다. 예수 부활로 다시 한번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비밀이에요. 왜 이런 일을 하나님이 하셨느냐.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야말로 우리가 행복한 인생을 누리기 위하여 추구하는 목적이지요.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지요.

오래 전에 어떤 뉴스를 보고 참 충격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돈을 벌겠다고 밀입국을 하지 않습니까.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밀입국하다가 적발이 되었지요. 그 사람들이 숨어있는 배 밑창을 열어보니까 다 죽었어요. 그 사람들이 이제 단속을 피한다는 게 그만 잘못되어 모두 질식사 했어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참으로 얼마나 가난이 무섭습니까. 그 가난을 벗어 보겠다고 고향을 떠나서, 가족을 떠나서 배 밑창에 숨어서 왔는데 그만 목숨을 잃은 거예요.

이번에 홍수 피해가 엄청 났습니다. 지난 715, 16일 이틀 동안 강원도에 그야말로 물폭탄이 쏟아졌는데 한 해 동안 내려야 할 비의 3분의 1이 이틀 동안 쏟아진 거예요. 평창에는 458mm가 내렸고, 횡성에는 558mm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평창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반해서 횡성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어요. 더 많이 비가 쏟아졌는데도. 왜 그랬느냐, 횡성군에서는 미리 대비를 해놓은 거예요.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에 그 물폭탄 속에서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어요. 그러나 평창은 동계올림픽을 유치한다고 스키장 호텔 식당 펜션 등등 막 개발허가를 내주었거든요. 돈을 더 많이 벌어 보겠다고 개발을 허가했는데 그것이 이번에 고스란히 어마어마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로 나타난 것이지요. 지나친 욕심이 죄지요. 지금 부메랑으로 우리가 잘못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죄에요.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만 의지하고 사는 죄, 그게 가장 큰 죄에요. 왜 그러냐,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몇 년 전 이런 외신보도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한파가 몰아 닥쳐가지고 사람들이 얼어 죽었어요. 그때 얼어 죽은 한 할머니가 발견되었는데 아, 글쎄 집안에서 얼어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까 통장이 나왔는데 거기에 억만금이 있어요. 아니 이렇게 돈을 쌓아 놓고도 얼어 죽었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살면 우리가 영락없이 그렇게 사는 거예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그 비밀을 모르므로 세상 풍파에 떨며 두려워하며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권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신앙의 모델로 세우셔서 말씀하시는 거지요.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어요.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살게 하셨어요.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을 아직 알지 못하는 우상으로 덮인 세상이에요. 미신으로 덮인 세상이에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서는 그 땅에 살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어요. 내가 네게 아들을 주리라.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 이 약속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좀처럼 약속이 이루어질 거 같지 않아요. 기다리다 못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 부인 사라와의 사이에서는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으므로 젊은 하갈이라고 하는 여종을 취해서 아이를 낳았어요. 그게 이스마엘 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셨어요. 그거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의 방법을 가지고 억지로 일을 이룬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불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이스마엘을 향해서 가리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그건 육신의 자녀다. 그건 네가 노력해 가지고 네 방법으로 네 수단을 동원해서 만들어낸 육신의 자녀다. 그렇게 말해요. 그건 내 뜻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고 사라가 구십 세가 되었을 때 아이를 허락하셨어요. 그건 무슨 말이에요. 남자나 여자나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 몰아넣으시고 믿음을 보신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을 주셨어요. 무슨 말입니까. 가나안 땅,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 찬 땅에서 살 때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도록.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었어요. 그렇게 얻은 아들을 약속의 자녀라 말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어떠합니까. 믿음으로 살지 못해요. 오늘 성경이 말해요. 예로부터 지금까지 육신의 자녀가 성령을 좇아 살려고 하는 자녀들을 핍박하는도다. 우리가 온전하고 깨끗한 믿음으로 살지 못해요. 세상과 타협하고 때로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상은 내 능력 내 방법을 동원해서 살고 있어요. 오히려 성령을 좇아 살고자 하는 일들을 말로 훼방하고 마음으로 거부하며 살고 있어요. 오늘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 여종과 자식을 내어 쫓으라.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을 믿고 살 때 철저하게 하나님께 무릎 꿇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라는 말이지요. 자그마한 일이나 내가 할 만한 일은 내 방법대로하고 벽에 부딪히고 절망에 부딪히면 그때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한 신앙이 아니라 크든지 작든지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 고 말하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느냐. 에베소서 2 1절에서 3절을 보면 인간의 조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살고 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조건은 단순히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구나. 그래서 너희는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 풍속을 좇아 살아가며 공중의 권세 잡은 사단에게 매여서 살아가고 있구나. 결국은 진노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구나. 그렇게 살다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구나. 히브리서 215절에 보면 ‘죽음이 무서워서 사망권세를 가지고 인간들을 괴롭히는 사단에게 매여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셨다.’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요. 인생의 조건에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환경이 있어요. 사단의 역사가 있어요. 그걸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 사단의 권세를 꺾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권세로 우리들을 지키시고 구하셨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도 모태신앙으로 자라났거든요. 그러니 늘 찬송하고 예배하는 그런 환경 속에 자라났기 때문에 제가 나중에야 비로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알게 됐어요. 귀신들린 사람을 보니까 아하, 사람이 그저 공부하고 배우고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구나. 귀신들려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현실이 있단 말이에요. 영적 현실이 있단 말이에요. 그것은 예수 이름으로만 쫓아 낼 수 있고 고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 거예요. 그저 내가 열심히 공부해 가지고 내 능력으로 벌어먹고 자식을 낳고 그러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라면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죽기를 두려워하는 인간들 속에 들어와서 사망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단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 방법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오직 예수 이름과 십자가의 보혈로만 물리칠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가정에서 항상 찬송하셔야 돼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예수의 이름을 찬송하고 보혈을 찬송하는 집에는 귀신이 가까이 할 수 없어요. 성경이 말하고 있어요. 요한1 5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악마가 손도 대지 못한다.이 비밀을 알아야 돼요. 이제까지 우리가 모르는 중에도 찬송하고 예수님을 말하고 예수 이름을 부를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우리를 지켜주셨던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영적 현실을 알아야 돼요. 성경은 말합니다. 자유롭게 되려면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하는데, 우리를 얽매는 것이 뭐냐. 죄가 우리를 얽매요.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어요. ,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일하고 바르게 하고 잘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오산이 없어요. 그 열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지 못해요. 오직 나는 연약하지만 예수 이름 권세로 이겨내는 것이지요.

곰 사냥을 할 때, 사냥개들을 쫘악 풀어 놓지요. 그럼 개들이 냄새를 맡고 곰을 몰잖아요. 사실 힘으로 얘기하면 개는 곰하고 비교가 안 되지요. 그러나 개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막 짖어댑니다. 왜 그러냐. 그 뒤에 총을 들고 있는 주인이 있으니까. 우리의 방법, 우리의 능력으로는 우리를 속이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단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예수 권세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저주로부터 진노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사단으로부터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걸 믿고 예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예수 찬양을 하는 거예요.

제가 자카르타에 처음 와서 느꼈던 인상은 너무 깜깜해요. 불이 너무 어두워요. 반면 미국 시카고에 가서 높은 빌딩 전망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면서 창밖을 내다보고 놀랐던 것은 도시가 얼마나 밝은지 몰라요. 대낮같이 밝아요, 밤에도. 바로 그거에요. 예수 믿는 사람은 불을 밝히는 사람이에요. 내 집 앞에 가로등을 환하게 밝혀 놓으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편안하게 갈 수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믿음을 고백하고 찬양을 하는 것은 마치 이 어두운 도시에 등을 밝히는 것과 같아요. 환하게 밝힐 때에 비록 오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그 빛에 의지하여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이 나라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악령의 역사가 강한 거예요. 예수 이름을 부르고 찬양을 하는 도시에는 불이 밝잖아요. 그러나 어두운 시골에 미신과 옛날 전통에 매여 있고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 곳에는 미친 사람도 많고, 귀신 들린 사람도 많고,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도 많아요.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 있느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살아계심을 알고 늘 그 이름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둠의 권세가 물러가는 거예요. 성령의 역사가 늘 내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거예요.

경북 안동 오지에 아흔세 살의 노인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칠십, 육십칠, 육십일세 된 세 딸이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하던 양봉을 배워가지고 이제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니까 세 딸이 양봉을 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거지요. 쉬운 일 아니지요. 그런데 저는 그 아흔세 살 된 아버지를 보면서 , 복도 많으시다.’했어요. 그 연세에도 정신이 말짱하셔요. 날마다 성경을 읽습니다. 칠십이 된 딸이 말해요. 우리가 어렸을 때 추운 겨울에 교회 갈 때 아버지 옷자락을 붙들고 가다가 바람이 너무 세니까 아버지 코트에 얼굴을 감추고 교회를 갔다는 거예요. 그분들의 어린 시절이면 예수 믿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때인데 얼마나 복 있는 가정 이예요. 그렇게 자라난 거예요.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요. 혈육으로 맺어졌습니다만 신앙으로 하나가 돼있어요. 그 늙으신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고 세 딸들이 노래를 하고 재롱을 피우는 거예요. 그게 옛날 중국 고전에나 나오는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현실 속에 있더라고요.

나도 말년에 저런 복을 누렸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소원이 불같이 일어나더라고요. 올바른 신앙을 가질 때 그런 복을 누리는 거예요.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때 하나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날까지 풍성한 사랑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여기에 신앙인의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예수를 믿는다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우리의 삶을 얽매고 깨뜨리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사탄의 권세가 우리 현실 속에 놓여 있는 것을 알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과 그 이름의 권세로만 이 모든 어둠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을 알게 하셨사오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찬송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오늘 주신 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