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북한실상=요덕스토리,책-수용소의노래]/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2. 18:59

060625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11:6-9)

성경본문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지난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손꼽히는 독일의 ‘칼 바르트’‘내가 나중에 죽어 천국에 간다면 모차르트를 꼭 만나보고 싶다.그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모차르트의 음악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가 미국 시카고대학에 가서 특강을 하게 되었을 때, 강연이 끝나고 많은 학생들이 그에게 와서 ‘당신이 발견한 성경의 진리, 최고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 때 칼 바르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411장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누구라고 정의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를 보셨죠? 그리고 그 마지막 부분에 모차르트가 숨을 거둘 때 울리는 음악이 바로 레퀴엠아닙니까? ‘장례미사곡아닙니까? 그 가사에 ‘자비로운 예수여,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저 때문임을 기억해 주소서.’ 이 한마디로 모차르트가 어떤 사람인지는 드러나는 겁니다. 그의 기인 같은 행위를 가지고 얘기할 것이 아니라 그의 고백이 담겨있는 거죠. 아마도 왜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를 만나보고 싶었는가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그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 복음과 문화지요. 저는 종종 드라마를 봅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죠. 드라마를 통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파악하며 어떻게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늘 생각합니다. 최근에 제가 아주 강력하게 추천 받은 드라마가 있는데 제가 거기에 푹 빠졌습니다. 제목이 <부활>이에요. 추리극이니까 아주 긴장감이 넘쳐요. 복수가 있고 용서가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남녀의 사랑이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밑바닥에 복음의 메시지가 쫙 깔려 있어요. 너무 다 드러나면 재미없거든요. 깔려있어요.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이 보통사람들이 아닌데 거기에다가 특별히 복음을 바닥에 깔면서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오늘 사람들이 접하는 이 문화를 통해서 뭔가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그 작가의 창의력과 그 재주에 감탄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Life Again>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언제 나온 거냐 하면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고 작년 이맘때쯤 나온 거예요. 흥행에 실패했어요. ? 그 때, 그만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나와 가지고 사람들이 다 그걸 봤거든요. 이 드라마는 시청률이 4%도 안됐다는 거예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이런 경제용어도 있습니다만 뭐 그렇게까지는 표현하지 않더라도 ‘정말 사람들이 진짜 좋은 것을 놓쳤구나’ 그런데 이제 뒤늦게 그 드라마를 본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 둘 퍼져 나가고 있는 거죠. 그걸 보면서 사람들의 요구와 사람들의 필요는 다르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월드컵 16강’은 우리의 요구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니까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아직 그건 아니라고 보시는 거죠.

지금 한국에서 뮤지컬 <요덕 스토리>라고 하는 것이 잔잔히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1995년 탈북한 ‘정선산’이라고 하는 감독이 자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뮤지컬입니다. 이미 잘 아시듯이 함경남도 요덕군에는 정치범수용소가 있습니다. 수만 명이 거기에 갇혀 있습니다. 거기는 한번 들어가면 참으로 제발로는 걸어 나오기 어려운 곳입니다. 잘 나가던 여자 무용수 가족이 하루아침에 공산당의 미움을 사서 이 수용소로 쫓겨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구마 하나에 여자들이 몸을 빼앗기고 이유 없이 매 맞고 다리가 부러지고 날마다 중노동에 시달립니다. 그러다가 질병으로 쓰러져 죽는 그러한 너무나 비참한 참상을 뮤지컬로 표현한 것이죠. 이미 요덕수용소에 관한 실상은 2000년에 <수용소의 노래>라고 하는 제목으로 ‘강철환’이라고 하는 사람이 벌써 책을 써냈고 미국 부시 대통령이 그것을 보고 작년에 그를 초청해서 만나기까지 했어요. 절망과 분노뿐인 죽음의 땅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지옥 같은 땅에서도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고백하고 예수를 노래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최근 노르웨이에서 북한의 인권, 난민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회의가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사이사이 중간 시간에 잠깐 15분 압축판으로 <요덕 스토리>를 보여 주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들이 전문가인양 북한의 실상을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뮤지컬에 드러난 실상에 대해서 너무나 참혹하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거기에 이런 기도가 나온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남조선에만 가지마시고 여기 요덕에도 오소서. 하나님 제발---.’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오히려 하나님은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그곳에 계시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값싼 은혜인양 그 가치를 모르는 우리 안에 계시지 않은 것은 아닌가?

유다가 사울왕과 다윗 솔로몬 통일왕국 100, 그리고 분열이 됩니다.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로 나라가 분열되어서 200년을 서로 치고 받고 전쟁을 합니다. 그러다가 북쪽의 이스라엘이 먼저 앗시리아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고 또 130년 후에는 남쪽의 유다마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는 그런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북쪽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던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왜 북쪽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을까? 성경은 말합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여러 가지 원인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에는 하나님의 손에 있어요. 전쟁은 심판이에요.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처참한 현장이죠.

하나님께서는 오늘 호세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가장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라. 그리고 그와 자녀를 낳아라.” 어떻게 이런 사람하고 결혼하겠어요?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가장 음란한 여인으로 소문난 고멜과 결혼합니다. 그를 데리고 살면서 자녀를 셋이나 낳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을 스스로 표현하신 거예요. 그토록 구원으로 베푸셨지만 끝내 하나님을 져버리고 떠나는 그 여인을 하나님이 다시 붙들어 그녀와 사시겠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되나요? 고멜은 아이를 셋이나 낳고 살다가 또 다른 남자의 유혹을 받아서 또 집을 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끝내는 그 남자에게도 버림을 받고 또 다른 남자에게 버림받고 결국에는 거리의 창녀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다시 가서 그 여자를 찾아서 그 몸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와라.” 선지자의 행동은 하나님의 계시죠.

예전에 ‘이문열’씨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고 하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거기 보면 시골출신의 법대생 ‘형빈’이라고 하는 사람이 ‘윤주’라고 하는 여자를 대학 캠퍼스에서 만났습니다.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그 여인을 쫓아다닙니다. 그런데 한동안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나누었는데 그 여인이 없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놀랍게도 그 여인은 저 이태원의 미군들을 상대로 하는 그런 영업소에 있는 거예요. 갖은 고생을 다해서 그 여인을 다시 끌어내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삽니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그들은 또 깨지게 됩니다. 헤어진 그 여인이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도 졸업하고 기업에 들어가서 미국의 지사에 파견이 되어가지고는 일도 다 제쳐 놓은 채 그 여인을 찾아갑니다. 다시 그녀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 무너진 옛사랑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마음을 돌이키는 듯 하다가도 또다시 그를 떠납니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됩니까? 잡으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마지막 담판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총으로 쏴 죽입니다. 전 그 때 그 소설을 보고 정말 가슴이 찡했어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도망가는 여인같이 하나님이 그토록 거두시건만 또다시 도망가요. 그러나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다.” 사람은 끝내 그 사랑을 차지하려고 그 여인을 총으로 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셔요. 그 사랑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이 드디어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놓고 몸을 찢으시는 사건이 있는 것이죠.

거 연애할 때 말이죠, 남자들의 심리가 그렇대요. 손에 잡히지 않는 여자를 그렇게 좋아한대요. 거기에 그렇게 매력이 있다는 거예요. 이제 결혼했다면 어떤 사람이 매력이 있겠습니까? 자기발전을 이루는 사람. 흔히 나이 들어서 치매를 얘기합니다만 저는 이렇게 치매를 정의합니다. 자기발전이 없는 사람은 치매에 걸린 거예요. 더 살아 뭐하겠어요. 내일에 대한 아무런 꿈이 없고 자기 꿈은 없고 애에게 모든걸 다 맡겨놓고 너 공부 잘하는 게 내가 잘되는 거다. 그게 말이 좋죠.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이 만들어 가야 되죠. 이제부터 시작이죠.

하나님이 이토록 지옥 같은 북한에도 놀라운 일을 행하셨어요. 마치 이스라엘을 위하여 호세아를 부르셨듯이. 그리고 호세아로 하여금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가를 보여주셨듯이. 언제부턴가 제 이메일에 북한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의 기도편지가 날아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대수롭지 않게 이게 누가 보냈나? 아마도 누가 저를 은밀히 추천을 했겠지요. 그러니까 이메일을 알려줘서 들어오는 것이죠. 며칠 전에는 이런 메일이 들어왔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를 위해서 선교하는 탈북 했던 한 전도자의 간증을 저에게 보냈습니다.

이분은 자유북한인교회의 전도사인데 그 이름은 제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탈북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떠돌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체험합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신앙생활을 하고 자기의 남겨둔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위해 기도하다가 지난 2002 1월에 5년 만에 북한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그리고 산을 타고 넘어서 자기 고향으로 들어갑니다. 5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그 동안 남한에서 이것도 퍼주고 저것도 퍼주고 괜찮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상은 그것과는 달리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캄캄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4명이 한 조가 되어 들어가서 전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넷 중에 자기만 살아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가서 주일 새벽에 몰래 세 가정, 네 가정이 한집에 모여서 숨죽이며 예배를 드리고 밥을 지어 먹고 헤어지곤 했는데 북한이 얼마나 식량난이 심한지 시집간 딸도 자기 집에 오는 걸 반기지 않아요. 나눠먹을 식량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서너 가정씩 모여서 예배를 드리니 신고가 들어갔고 붙들려서 다 잡혀간 거죠.

선교사님은 전기고문으로 죽었고 사모님은 정치범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분은 그 곳에서 자기에게 나오는 그 조금의 밥도 먹지 않고 금식하면서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거기가 얼마나 잔혹한 곳인지, 그 사모님이 밤에 찬송을 부르니까 교도관이 때려죽이라고 눈짓을 하자,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때려서 죽인 거죠.

여러분, 한 번 모여 예배드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지하교회는 지금도 왕성하게 뻗어나가고 있다는 거예요. 비밀집단같이 몰래몰래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이 모여가지고 예배를 드리며 뜨겁게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북한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지만 무당은 많대요. , 도대체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너무나 불안한 나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서 묻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족은 언제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도대체 나는 언제 죽는답니까? 이게 바로 북한의 실상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지옥 같은 곳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예수를 심어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니까 저가 목숨을 걸고 다시 고향에 들어가서 굶어 죽더라도 맞아 죽더라도 예수는 알리고 죽어야 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저는 이메일을 받아보고 또 말씀을 준비하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하나님 도대체 나는 누구이기에 이토록 평안하게 내 맘대로 모여서 예배하고 내 맘대로 기도할 수 있는 이런 자유를 주시고 왜 저들에게는 아직까지 문을 열어주시지 않습니까?’ 흔히 수용소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고생하다가 죽으면 우리가 개죽음이라고 얘기합니다만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지 못하고 사는 삶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사는 삶이라면 그는 이미 죽은 것이죠. 살았으나 죽은 것이죠. 오늘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잠든 이스라엘을 흔들어 깨웁니다. 그러나 또 하나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벌써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그 망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끝내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돌이키시고 구원하시리라는 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또 하나는 남쪽의 아직 멸망하지 않은 유다를 향한 경고입니다. 너희야말로 깨어서 네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를 버리라 말했어요. 골로새서 35절에 보면 우리의 욕심이 우상숭배라고 말했어요. 욕심을 좇아서 사는 것이 우상숭배에요. 제가 예전에 한 20년은 됐습니다. 제가 세 들어 살던 집에 제가 외출하고 있는 사이에 저희 집에 불이 났습니다. 가스가 잘못되어서 불이 붙었어요. 이웃사람들이 놀래가지고 쫓아와서 극적으로 그 고무호스를 끊었습니다. 잘못했으면 그것이 큰 화재가 되었을 겁니다. 왜 이웃이 쫓아와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우리 집이 불나면 그 집도 불이 붙거든요.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이에요. 한자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이 있어요. 입술이 망하면 그 다음에 이빨 차례에요. 북한을 위해서 오늘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훗날 우리를 크게 책망하실 거예요. 오늘 우리를 이곳에서 이토록 평안하게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게 하는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우리가 기억하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어찌 내가 널 버리겠느냐.호세아란 구원이란 뜻이에요. 예수라고 하는 그 이름과 다 뿌리가 같은 말이에요. 예수의 그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 지옥 같은 그런 고통입니까? 그럴지라도 그 안에도 예수를 통하여 생명을 발견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발견하고 기도하는 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6.25전쟁의 그 고통 속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숨을 지켜주셨고 특별히 우리 부모님들의 목숨을 지켜주심으로 오늘 우리가 생명을 얻었고 오늘까지 여기까지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이웃, 우리의 동포들은 예배와 목숨을 맞바꿔야 하는 그런 고통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 게을렀고 불순종했고 오만했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일터를 주시고, 자녀를 주셔서 일하며 살게 하시고 예배하며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우리가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