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하나님의 동역자[그리스도의마음을가진 사람을 동역자로부르심]/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3. 14:47

060820 하나님의 동역자 (고전 3:1-9)

성경본문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우리나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 김환기의 아내로 김향안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또한 수필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산문집을 읽어 보니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40대에 남편과 함께 파리에서 생활하다가 1959년에 귀국을 하게 됩니다. 귀국을 할 때 우리나라에도 우리나라 항공기가 생겼다 라고 하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그때는 KNA라고 했어요. 부러 그 비행기를 타려고 에어프랑스로 홍콩까지 와서 우리나라 비행기를 며칠을 기다렸다가 타게 된 거죠. ‘드디어 우리나라도 비행기를 가지게 되었구나.’ 그런데 공항에서 비행기를 보았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주 자그마하고 너무나 초라한 비행기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마치 추석명절에 서울역에서 기차 잡아타듯이 막 앞다투어 뛰어가는 거죠. 깜짝 놀랐습니다. 또 비행기에 올라 보니 좌석도 지정좌석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들은 맨 뒷자리에 앉아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비행기도 이제 막 시작했으니 초라했지만 비행기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수준도 비슷했던 거죠.

그때 이미 파리에는 지하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활을 하다가 서울에 와보니, 뭐 전차에다가 버스에다가 지금도 그렇지만 아주 무질서한 교통지옥으로 보였던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가 지냈던 파리에서의 생활과 서울에서의 생활을 비교하는 많은 글들을 남깁니다. 특별히 여자들의 삶에 대해서. 파리에서는 여성들이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의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또 그렇게 일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시스템이 준비가 되어 있는데 비해서 우리나라는 전혀 그런 인식도, 사회적인 기반도 없는 것이죠. 흔히 파리 여성들은 사치하다고 말하지만 그것만큼 오해와 편견도 없다고 하는 글을 남겨 놓습니다.

그 글을 읽어 보니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의 안타까움이 송두리째 드러나 있어요. ‘선지자가 따로 없구나. 선진국에서 한 세월 살다가 돌아와 보니 그릇되고 아쉽고 잘못된 것들이 가슴 답답하게 부딪혀 오는구나.’ 오늘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될텐데 하는 그런 안타까움이 글에 잘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사도바울의 편지의 일부분이지요. 고린도교회는 뜨거운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마는 서로 갈등하고 분열하는 교회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라본 고린도교회의 모습이에요.

그는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자연인이에요. 영적으로 무지하기에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깨달을 수도 없고 오히려 그러한 것을 미련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에요. 안 믿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이제 믿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면 하나는 신령한 자, 영적 세계에 대해 깊이 아는 사람들. 그러나 또 한 부류는 육신에 속한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 특징은 이렇습니다. 첫째는 시기와 다툼, 좌우지간 교회에서 일하다가 서로 다투는 사람들과 남 잘되는 것에 대해서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스스로 진단하면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로구나. 두 번째는 사람의 방식을 좇아 살아가는 것. 분명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성령의 이끄심이 있는데 자기의 주장과 고집과 판단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린아이라는 것이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자들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어요. ‘여러분은 아직도 어린아이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젖으로 먹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여러분에게 밥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단단한 음식은 더더욱 먹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음식을 좋아합니까?

<한국의 명수필>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국문학자 유병석 님의 ‘자반을 먹으며’ 라고 하는 글이 있어요. 이것은 1980년대의 글이죠. 그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방 전에 어린 시절에 시골에 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고 삼대가 살았는데 그때 자기 집은 항상 세 상을 차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상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맏손자인 자기가 앉고 두 번째 상에는 할머니하고 삼촌하고 자기 동생 둘째가 앉고 세 번째 상에는 엄마하고 여동생들이 앉는 거예요. 밥상을 대할 때마다 조선왕조의 신분질서가 그 집에는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이죠. 밥상만 다른 것이 아니라 밥상의 질이 달라요. 반찬이 다릅니다. 배추로 말하면 고갱이는 할아버지 상에 올라가고, 그 다음에 푸른 잎은 두 번째 상에 올라가고, 그 다음 찌꺼기는 세 번째 상에 올라가는 거죠. 그런데 그만 자기는 밥을 먹을 때마다 할아버지가 생선의 등허리를 푹 파가지고 살코기를 툭 떼어 자기 밥에 올려놓아 주었기 때문에 자기는 의당 그렇게 먹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말이죠, 한 밥상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자기가 생선을 먹으면서도 손대는 부위가 다르더라는 것이죠. 자기는 살코기를 먹는데 늘 아버지를 보면 생선 배때기나 쑤시고 가시를 먹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물어봤대요. “아빠, 그거 맛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어, 이게 맛있는 거야.

세월이 40년 흘러서 이제는 자기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어느 날 아버님과 아이들과 더불어 상을 대하다 보니 40년 전 일이 생각나는데 그러고 보니 어느새 자기는 생선 배때기를 쑤시고 있더라는 거예요. 가시를 먹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아버지가 자기 아들들에게 생선 등허리의 살코기를 푹 떠가지고는 올려주더라는 것이죠. ‘아, 내가 어느새 이렇게 되었구나.’ 그리고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 지난날 그러했듯이 나는 지금 생선 배때기와 가시를 발라 먹고 내 아내는 할머니가 그러했듯이 우리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생선 대가리를 먹고 있고 살코기는 다 애들에게 주고 있구나.

그런데 말이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먹어보니까 살코기보다 자기가 먹는 것 요게 진짜 맛있는 것이었어요. 단단한 부분이 맛있는 것이었다고 하는 고백이죠. 이것을 발견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이제 또 세월이 흐르면 우리 아이들이 다 자라나서 어른이 되고 나는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서 뒤로 물러나면 우리 아이들은 생선 배때기를 쑤시면서 살코기는 자기 아이들에게 넘겨주겠지 라고 하는 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너희가 예수 믿은 지 벌써 오래되었거늘 너희가 아직도 회개와 세례와 부활과 심판에 관한 그 말씀에 머무르고 있구나. 이제는 너희가 능히 단단한 음식을 먹을 만도 한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여러분, 단단한 식물이 뭐겠습니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 가시는 그 새로운 삶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 여기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의 생각을 보십시오. 여기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 또 게바파 즉 베드로파 이렇게 막 나뉜 거예요. 바울이나 아볼로나 다 한때 고린도교회를 목회한 목회자들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이 목사님이 좋아.’ ‘나는 저 분이 좋아.’ 이러는 것이죠.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도대체 아볼로가 무엇이고 바울이 무엇이냐? 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보내고 너희를 위하여 세운 일꾼이 아니냐? 나는 먼저 씨를 뿌렸고 아볼로가 뒤따라와서 물을 주었지만 결국 자라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 아니시냐?’ 여러분,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아볼로를 볼 때 경쟁자로 보는 게 아니에요. 함께 하나님께 부름 받은 일꾼으로 보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시각이죠. 우리 각 사람을 이렇게 모으시고 흩으시고 보내시고 일을 맡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돼요. 인정해야만 돼요. 그리고 말합니다. ‘이제 아볼로나 나나 각자 일한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일을 맡아서 열심을 다한 다음에 그 수고한 대로 상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중에 다 판단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판단하지 말아라.’ 그건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하나님께 맡겨야 돼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게 맡겨주신 일에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죠.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우리나라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언더우드, 아펜젤러 아닙니까? 1885 4 5, 부활주일 아침에 인천 제물포항에 같은 시간에 같은 배에서 내렸어요.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요,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죠.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먼저 내렸을까? 먼저 내린 사람이 1호일 텐데 누가 먼저 내렸을까?’합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요. 본인들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사실 알고 보면 1등을 다투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질문이기도 해요. 그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참 감사한 것은 말이에요, 두 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선교사로서 한 사람은 장로교 선교사, 또 한 사람은 감리교 선교사로서 그들이 죽음으로 헤어질 때까지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끈끈하게 나누고 있었어요.

언더우드는 물론 장로교 선교사입니다마는 별명이 ‘시끄러운 감리교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만큼 열정이 있었다는 말이죠. 원래 미국의 장로교는 ‘경건’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보다 더 뜨겁고 열정적인 데는 감리교거든요. 아펜젤러도 원래는 감리교인이 아니었어요. 다른 교파였는데 마음대로 ‘할렐루야’를 좀 하고 싶어서 감리교로 간 거예요. 우리는 ‘할렐루야’를 잘 하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뭐 법이 아니죠. 그것은 하나의 문화적인 선택이죠.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는 둘 다 불붙는 열정이 있었어요. 그러했으니까 그 당시에 저 멀리 조선이라는 이름도 없는 나라까지 오지 않았겠어요? , 신앙의 색깔이 비슷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당시 미국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있던 부흥운동의 젊은이들로서 전국신학생수련회에 참석했다가 도전을 받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됩니다. 언더우드는 뉴브른스위크신학교 대표로, 아펜젤러는 드류신학교 대표로 참석했다가 선교에 헌신합니다.

또 그 두 사람은 원래 조선을 몰랐어요. 언더우드는 인도로 가려 했어요. 그것을 위해 기도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조선으로 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누가 조선으로 갈까?’ 그런 음성을 듣고 언더우드가 ‘제가 조선으로 가겠습니다.’했던 거예요. 아펜젤러는 선교를 꿈꾸는 친구와 같이 방을 쓰면서 준비하고 있었어요. 아펜젤러는 일본으로 가려고 했어요. 친구는 조선이라는 나라로 가려고 꿈꾸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만 이 친구가 갈 수 없는 사정이 생겼어요. 이 친구가 말합니다. ‘내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지만, 갈 수가 없게 되었으니 네가 좀 갈 수 없느냐?’ 그런데 그 말에 아펜젤러가 기도하게 되요. 그리고는 조선으로 방향을 돌려서 오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손길의 인도함을 받고 온 거예요.

그리고 같은 배를 타고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들은 한국의 선교의 기초를 놓을 때 서로 교파는 달랐지만 마가복음을 쪽복음으로 공동번역해서 처음으로 인쇄해서 발간하게 되요. 이런 것들이 결국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을 이루는 기초가 돼요.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가 이만큼 중요한 것이죠. 또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 아펜젤러는 정동교회를 세우고 같이 협력하고 나아간 것이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에요?

사도바울은 이제 더 놀라운 얘기를 해요. 아볼로와 나는 하나님의 동역자다. 원래 동업자를 잘 만나야 되잖아요? 동업하다가 나중에 돈 잃고 친구 잃고 얼마나 그런 일이 많아요? 인간이 허물이 많으니까 그렇기도 하지요. 누구를 만나느냐가 얼마나 중요해요? 그런데 여긴 더 엄청난 얘기를 해요. ‘하나님이 그분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나를 동역자로 부르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이에요.

요즈음 말이에요, 오십대, 육십대 실직해가지고 이렇게 지내시던 분들 중에 왕년에 중동에서 근로자로 일하시던 분들이 오히려 해외기업에서 초빙을 받아가지고 일하게 된다는 거예요. 기술고문으로 또는 경영자문으로. 어떤 분이 너무나 감격해가지고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내가 하바드대학 낙제생이었는데 예일대학 장학생이 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물었더니 하바드대학이란 건 ‘할 일 없이 바쁜 사람’을 하바드대학생이라고 해요. 예일대학은 뭐냐고 했더니 ‘예순 넘어서 일하는 사람’이 예일대학생이래요. 해외에 나가서 일합니다. 월급이  문제가 아니에요. 다시 일하게 됨으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다. 여러분, 기왕 일할 바에야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과 함께 새롭게 출발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있잖아요? ‘로버트 기요사키라는 일본계 미국인이 쓴 책인데 유명하지 않습니까? 거기 이런 구절이 나와요.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게 훨씬 쉽다.’ 그러면서 자기가 관찰해보니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두려움이다. ‘이 돈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실패를 관리하는 법을 배워라 이거에요. 두려워하지만 말고. 두 번째는 냉소주의에요. 돈 많이 가진 사람을 비판이나 하지 말고 어떻게 저들은 부자가 되었는지 냉철하게 분석하고 연구하라. 세 번째는 게으름이다. 바쁘다고 하는 핑계대면서 자기의 건강과 가족과 재산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게으른 것이다. 네 번째는 습관이에요. 정말 당신의 필요를 먼저 채우라는 거예요. 당신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채우라는 것이죠. 다섯 번째는 교만이에요. ‘내가 모르는 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야.’ 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을 버리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읽어보니까 영적인 부자가 되는 길도 똑같아요. ‘이만하면 됐지.’ 라고 하는 거짓과 교만을 버리세요. 나의 남은 날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간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어요. ‘누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겠느냐?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아니,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이런 거지요. 사랑하게 되면 상대를 주목하게 되지 않습니까? 집중하지 않습니까? 상대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아요. 그 사람이 뭘 도와달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벌써 내가 먼저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내 마음으로 다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주목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하나님의 뜻이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열려있기에 내 뜻과 생각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폭적으로 따르고자 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하고 일하시겠어요? 여러분 같으면 누구하고 일하시겠어요? 이렇게 마음이 활짝 열려있고 생각이 열려있는 사람,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목하고 다른 사람과 시시하게 경쟁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이 일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면서 오늘을 사는 사람,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시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상을 주실 사람이요, 이 사람이야말로 멋있는 사람이죠. 멋있는 인생이죠.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를 더 살기를 원합니까? 좀 양으로 말고 질로 승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이 주신 이 넓은 마음, 이런 생각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우리 안에 갈등이 있고 비판이 있고 시기가 있습니다.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시고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감동을 주시는 주님,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시고 더 이상 인생을 허비하거나 낭비하지 말게 하시고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로 마무리하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