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Lloyd-Jones)목사 설교

남편들의 의무(엡 5:25-33)[남편의 사랑의 의무] / D.M. 로이드 존스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8. 26. 15:25

남편들의 의무

                                   저자: D.M. 로이드 존스 목사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 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5:25-33)

 

본문의 진술을 숙고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주요 주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남편과 아내들의 관계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대교리를 이해할 때에야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와 교회의 교리를 숙고해 왔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교리를 적용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33절은 아내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주의 깊게 숙고하고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남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 교리의 적용은 이와 같이, 마치~라는 비교사로써 시작이 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같이 하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다른 말로 해서 사도는 우리 앞에 펼쳐 놓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비교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용을 하기에 이를 때 그것을 두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눠 보는 것입니다. 첫째는 남편들과 그 아내들에 관한 원리들이 가르쳐지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두 번째 부분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 두 번째 부분은 구체적인 상황에 그 원리들을 자세하고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보편적인 원리들이란 이러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기타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해서도 그렇듯이 결혼에 관련해서도 성공의 비결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본문을 피상적으로 살펴본다 하더라도 그 점은 명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점은 매우 심오한 원리입니다. 나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대부분은 무슨 일들이 저절로 되어진다고 억측을 부리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되어진 일을 생각하니 나머지 얘기도 간단하다고 하면서, 결국 그들은 이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거야라고 단정하는 반마술적인 중생관을 염두에 두고 나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 이론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여러 난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그들이 고통과 난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정하는 길은 생각하고 이해하고 사리를 철저하게 캐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세상의 고민은 궁극적으로 생각지 않는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생각하기만 했더라면 그들의 거의 모든 문제들은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쟁의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전쟁은 원래부터 어리석고 미친 짓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싸웁니까? 그것은 그들이 생각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합니다. 정욕과 탐욕과 성냄 등 원시적인 본능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 전에 때리기부터 먼저 합니다. 그들이 모두 멈추어서 생각하기만 했더라면, 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휴머니스트의 궤변은 물론 이러합니다. , 자기는 사람들이 할 일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인들인 한에서는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 본질적인 세력들은 이성의 힘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죄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비합리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이 동일한 원리를 강화할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마저도 스스로 생각지 않습니다.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신약성경의 서신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신약의 서신들을 써야만 했습니까? 또한 만일 여러분이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서 만족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서신들이 기록되어야 했느냔 말입니다. 여기 서신들은 논리와 논증, 유추와 변증과 비교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일들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고(思考)는 결혼의 주제에 관련해서 볼 때 진수(眞髓)입니다. 세상은 결혼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봅니다. 세상은 결혼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봅니다. , 결혼을 제1차적으로 어떤 큰 일을 하도록 허락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혼은 소위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란 것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감정에 따른 무엇으로 보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에 푹 빠졌어요. 그 사랑의 강도에 따라서 그들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일단 멈추어서 생각하고 자문해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잘 되어갈 것이며, 그들의 행복은 줄곧 계속되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에 감동되고 도취됩니다. 모든 것은 대중문학과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나 안방극장에서 방영되는 TV극에 의해서 조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문을 읽으면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째서 결혼이 실패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그 문제를 철저하게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생활을 영위함에 따라서 매일매일 찾아오는 권태와 육체적인 피로, 그리고 어려움을 산출하는 여러 다른 많은 일들을 만남으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긴장과 시련에 견뎌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런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결코 파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감정과 충동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그들은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이지(理智)는 전혀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어려움들이 닥쳐올 때 그들이 깨지리라는 생각은 전혀 예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모든 일이 사라져 없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황하여 갑작스럽게 이혼소송을 제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골칫거리의 전체 이유는 이해의 결핍과 사상(思想)의 부족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숙고할 때 이런 것과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각하고 이해하라는 권면을 받으며, 생각하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제공받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위해 제공된 이 교훈의 의미요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러한 교훈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理想) 그런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이 문단을 통해서 상기할 첫째의 일은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상세하게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것이 제1의 원리입니다.

2의 원리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의 결혼에 관한 개념은 반드시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의 결혼을 세상 사람들의 결혼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직 유일한 차이가 있는데 이 쪽은 그리스도인들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데서 기인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결혼에 대해서 아직도 세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위대한 문단을 숙고해 온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 기독교의 결혼관은 세상 사람들의 결혼관과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입니다. 그 점은 우리가 이 문단을 철저하게 연구해 나감에 따라서 뚜렷하게 떠오르는 요점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 밖에서는 가능할 수 없는 결혼관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의 위치까지 끌어 올려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대한 태도는 항상 적극적이어야 하고, 항상 이 이상(理想)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은 그런 의미에서 부정적(소극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동인(動因)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결혼을 끝까지 견뎌내야 합니다. 반면에 비그리스도인은 선뜻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태도는 순전히 소극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을 피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이상(理想), 즉 결혼에 관해 적극적인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추어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봄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언제나 시험해봐야 합니다. 나의 결혼생활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상응하고 있는가?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가? 그것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결혼한 지 몇 개월이 지나면 이런 일들은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그것을 생각해야 하고 갈수록 더욱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혼에 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며 은혜 안에서 더욱더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결혼이란 것이 하늘나라의 본(pattern)에 일치되어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영광스런 이상(理想)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데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내가 전달하려고 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과 비그리스도인들의 결혼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차이는 갈수록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랍고 영광스럽게 나타나야 합니다. , 결혼이 점점 그 이상(理想)에 가까워져야 합니다. 결혼에 대해서 비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차도 아주 일반적으로 공통되는 것에 그것을 적용시킬 때 우리 모두는 그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결혼에 대한 기독교의 개념은 계속 자라고 발전하고 증가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원리는 강한 전체를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결혼이 실패하는 진정한 원인은 언제나 자아이며,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디서나 어느 영역에서나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자아와 자기 중심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가장 큰 괴수입니다. 국가나 정치가의 입장에서 살펴보든지, 산업과 사회 조건 또는 다른 어떠한 입장에서 살펴보든지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주요 난제들, 이 모든 고통들은 궁극적으로 자기 중심, 내 권리, 내가 바라는 것, 그가 누구이든 상관할 것 없어라고 하는 것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자아는 언제나 불쾌한 자기 표현으로 나타나서 고통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자기가 대적하게 되면 서로 충돌이 있을 것은 뻔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언제나 그 자신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원합니다. 그것은 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너의 것이다. 여러분은 즉시 저절로 일어나는 두 세력을 보게 됩니다. 각각 자아에서 충동하여 일어난 두 세력은 결국 필연적인 충돌을 가져오고 맙니다. 그러한 충돌들은 모든 부문에서 일어납니다. 두 사람 개인의 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대 사회나 제국 등과 국가간에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도의 가르침을 자세히 숙고해보면, 그것은 자기로부터 결과되는 참극들이 어떻게 되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줄 것을 목적한 것입니다. 결혼문제를 고찰하기 전에 내가 21절을 그렇게 강하게 강조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그리스도)를 두려워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그것은 이 문단 전체의 열쇠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원리이며 기독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기혼자든 미혼자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사도는 그 원리를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의 특정 경우에 적용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가 그것을 얼마나 명백하게 했던지 아무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결혼에 있어서 진수가 되는 점은 무엇입니까? 그는 말하기를 그것은 이 연합, 이 두 사람, 이 쌍()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을 둘로 보는 것을 멈추고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주장하는 어떤 경향이든지 그것은 즉시 결혼에 관한 근본적인 개념과 마찰을 일으킵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결혼에 있어서 그러한 충동이 야기되는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을 둘로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라고 하는 결혼의 기본적인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한 몸을 이루리라.” 아내는 남편입니다.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자기와 자기를 나타내는 모든 무서운 생각에 대한 최종적인 폐기 통고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자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교리를 실제적으로 적용시키는 데 있어서 밑에 깔린 세 가지 보편적인 원리들은 이상과 같습니다. 이제 남편은 바로 이 원리들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실제 어떻게 이루어져 나가겠습니까? 먼저 남편은 반드시 아내가 자신의 일부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는 이것을 본능적으로는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아야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부분에서 그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남편은 자기와 자기 아내가 둘이 아니란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입니다. 사도는 그 점을 계속적으로 반복해 나갑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 임이라.” 그것은 우리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사실임과 동시에 또한 이 결혼관계에 있어서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곧 우리의 아내들을 파트너로 여기는 것까지도 만족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파트너가 되어서 동업을 하는 두 사람을 생각할지 모르나 그러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비유는 그것 이상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동업정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그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흔히 사용되는 또 다른 용구가 있는데 적어도 그것은 평범하게 사용되어 왔고 훨씬 나은 것으로 기독교 교훈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진술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아내를 나의 좋은 짝”(my better half)이라고 부를 때 쓰는 표현입니다. 바로 그 ”(half)이란 말은 사도가 여기서 정교화시키는 전체 경우를 암시합니다. 우리는 두 개가 합해진 것, 두 완전체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두 짝들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그러므로 이것으로 봐서 남편은 더 이상 자신을 각인(各人)으로나 단수(單數) 개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결혼에 있어서 전혀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차원에서 남편의 전체 생각은 역시 그의 아내를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따로 떼어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는 결혼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깨뜨리고 만 것입니다. 육신적인 차원에서 그런 일이 있을 때 누구나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험은 그 전에 일어납니다. , 지적인 면과 영적인 수준에서 일어납니다.

사람이 자신을 독립적으로 생각할 때 어느 의미에서 결혼을 깨뜨리고 만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아내는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는 그의 아내에 대해서 큰 해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대적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의 생각은 반드시 개별적인 의미에서의 한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는 다만 한 짝에 불과하고 그 짝은 또 다른 한 짝을 필요로 합니다.

그가 소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만을 위한 어떤 소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는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의 아내는 그의 모든 소원에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언제나 이러한 생각에 깨어있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의 임무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다른 말로 어떤 첨가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 표현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 퍽 미안합니다만, 자기 아내를 장해물로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결혼한 사람은 결코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위대한 계명입니다. 물론 아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양편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히 남편들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아내는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복종하는 데 있어서 아내도 같은 원리에 입각해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 문제를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결혼 상태에서 그에게 해당되는 것이 무엇인지 의도적으로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모든 생각과 그의 모든 소원과 욕구, 아니 그의 삶과 행동 전체를 지배하고 통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부단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서 이것을 더욱더 강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2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남편들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그러나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서 사도는 몸의 유추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더 나아가 같은 28절에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29절에서 그것을 정교화시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여기서 교훈하는 바는 우리가 남편과 아내가 하나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함은 물론이고, 남편은 반드시 아내가 실제로 이 몸의 유추에 따라 남편 자신의 일부라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자기 아내에 대한 남편의 자세는 반드시 자기 몸에 대한 태도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추는 바로 그러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유추 이상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창세기 2장에서 어떻게 가르쳐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자는 근원적으로 볼 때 남자에게서 취하여졌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여자는 남자의 일부라는 사실과 연합의 특징을 묘사하는 그 사건에 대한 증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에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지금 여기 같이라고 하는 작은 어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쉽게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남편들도 마땅히 그들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들이 자기 몸을 사랑함 같이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28절의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 자신의 몸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제 몸으로 알고 사랑합니다. 그가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이 아닙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으로, 자신의 일부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취하여진 아담의 일부인 것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녀는 그 남편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사도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명백하게 나타내는 이유 때문입니다. , 성경의 교훈에 의하면 음행의 연고가 아니고서는 깨질 수 없는 불용해적 요소가 결혼에 존재한다는 점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장해야 하는 것은 사도는 남편이 자기 아내로부터 자신을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을 이런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에서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은 자신을 여러분의 아내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내는 여러분의 일부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혼자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떨어져서는 살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인식한다면 떨어져나갈 염려는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어떤 이별을 소원하든지 하고 싶은 생각이나 욕망의 위험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적대감이나 혐오감 같은 것도 훨씬 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 간에 있는 어떤 혐오의 요소는 순전히 미친 짓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편이 결혼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아내는 자신의 육체입니다. 아내는 또한 그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를 자기의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실제에 있어서 무엇으로 인도합니까? 여기서 나는 모든 사람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아주 갈급해 하는 상세한 교훈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상세하게 적용시키지 못함으로써 죄를 지었습니다. 원리를 말하자면 아내는 남편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몸이 아내에게 속한 것임과 같이 그녀도 남편에게 속해야 합니다. 그로부터 사도의 정교한 교훈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나는 먼저 몇 가지 부정적인 것들을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그는 그녀를 모욕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자기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식과 과음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몸을 너무나 욕되게 합니다. 그것은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몸을 학대하고 불친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렇게 하는 남자는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일 몸을 학대하고 욕되게 한다면 그 자신은 고난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으로 자신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몸을 한번 욕되게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아프게 될 것이고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여러분의 생() 전체가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난 내 몸 같은 것을 돌보지 않는다. 난 지성(知性)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방법으로 계속 나간다면 여러분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가졌던 지성을 더 이상 갖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몸을 모욕한다면 여러분이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몸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결혼관계에 있어서도 같습니다. 만일 남편이 그의 아내를 모욕한다면 그는 아내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천성적으로 그가 나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과 상관할 바 없이 그런 남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만일 그가 자기 아내를 모욕한다면 아내뿐 아니라 남편, 즉 둘 사이의 관계를 파괴시킬 것입니다. 이 일은 오늘의 세계에서 아주 다반사로 발생하고 있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의 아내를 모욕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그의 아내를 모욕하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그는 아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그것은 언제나 골칫거리를 만듭니다. 몸을 멸시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그릇된 것입니다. 사람은 몸과 마음과 영()으로 이루어지도록 지어졌습니다. 사람은 서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확실히 의식합니다. 몸의 약함에서 예를 들어봅시다. 만일 내가 후두염을 앓게 된다면 내가 설교하기를 원해도 설교할 수 없게 됩니다. 난 설교할 생각과 소원으로 부풀어 있지만, 나의 목청이 성하지 못하므로 난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내 몸을 무시한다면 그것 때문에 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많은 사람은 그렇게 하려 했고 많은 학자들도 그랬습니다. 몸을 무시함으로 인하여 그의 사역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인(全人)의 여러 부분 사이에 필수적인 연합(聯合)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것은 정확히 결혼관계에서도 같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결혼에 있어서 단지 무시하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주 최근에 어느 신문에 난 것을 읽었는데, 거기엔 어느 의학계의 학자가 조사한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아내들의 대부분이 담배를 계속 입에 물고 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밤이 늦도록 스포츠나 어느 모임에서 게임을 즐기면서 보냅니다. 그런데 가련한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집에 남아서 일을 합니다. 남편은 밤에 집에 들어와서는 그냥 잠자리로 들어 곯아떨어집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나갑니다. 아내를 무시하는 것은 아내로 하여금 무절제한 흡연과 신경과민의 증상들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러한 신경질적인 상황들을 가져오게 합니다. 한 남자가 결혼을 하여 자기 아내를 멸시한다는 것은 애닯은 일입니다. 달리 말해서 여기 결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는 아직도 홀아비인 것처럼 살고 있다니 그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홀로 떨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도 그의 희비를 그의 남자 친구들과 지내고 있습니다.

난 이 점을 아주 쉽게 정교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일들은 우리와 너무 친숙하기 때문에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난 기독교 소위 복음적인 교파에서까지도 이 특별한 요점을 잊는 경향이 있음을 느끼곤 합니다. 결혼한 남자는 더 이상 자기 혼자 사는 것같이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에 그의 아내를 동반해야 합니다. 나는 예전에 어떤 복음적인 단체와 연관을 맺고 있는 사회 행사에 초청장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초청장은 나만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 초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경우에 언제나 같은 식으로 행동합니다. 이것은 이 문제들을 명확히 생각지 않았던 복음적인 단체의 경우입니다. 그리스도인 남편은 그의 아내를 동반하라는 초청이 없는 초청장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법칙으로 전제하기까지 하렵니다.

어떤 모임에 아내를 동반하지 않고 남자들만 모임으로 인해서 결혼생활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친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 번째 원리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모든 일을 함께 해야 합니다. 물론 사업에 있어서는 남편 혼자만이 합니다. 또한 남자 혼자만 갈 행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아내들도 참석할 수 있는 사교적인 행사일 경우엔 아내와 함께 가야 합니다. 아내가 가도 좋은지를 아는 것은 남편의 임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남편들은 동부인(同婦人)을 요청하지 않고 남편들만 오라고 하는 어떤 초청장에도 응해서는 안 된다고 재언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나로 하여금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국면이 있습니다. “복음적인 과부들”(evangelical widows)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해서 부단히 듣고 있습니다. 그 표현은 어떤 특별한 타입의 여자의 남편이 매일 밤 이 모임 저 모임에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의 변명, 아니 그의 논리는 이러합니다. “나는 훌륭한 기독교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결혼한 남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또 다른 극단에 흘러 게으름과 편안한 것만 좋아하여 온종일 집에서 보내는 유의 그리스도인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두 극단들은 언제나 틀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 순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기독교 사업으로 너무 분주한 나머지 자기 아내를 무시하는 자의 경우입니다.

나는 이에 대한 많은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최근 잉글랜드의 북부에서 있었던 한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 집회 저 집회에 나가서 밤마다 강사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귀띔해주기를 그는 그저 같은 일에만 몰두하여 빠져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사람이 입에 올리고 있는 이 사람의 아내를 만났을 때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 가련한 부인은 노예처럼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기진하여 피로에 지치고 불행하고 멸시를 받은 것 같았고 병을 앓고 있는 사람 같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남편의 행위는 지독하게 죄악적입니다. 아무리 그 일이 기독교 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행해진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자기의 결혼 관계를 축소시킬 수 없고 시켜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의 일부이기 때문이요, 그의 좋은 짝이지 노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남편들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자신들을 시험해봐야 합니다. 한 가정은 남자가 잠자러 돌아오는 기숙사가 아닙니다. 가정에는 이 적극적이고 이상적이고 생생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이런 면에 있어서 자신을 간수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지혜(智慧)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결혼한 남자라면 그는 홀아비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기독교 사업에서조차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가 외치고 있는 복음이 교훈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면에 있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이기주의(利己主義)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주로 무분별보다 더 나쁜 것의 결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무분별은 이기주의를 가져옵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은 무분별의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 교훈의 세 번째 실제적인 외적 사역으로 나아갑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욕되게 해서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세 번째로 한편은 아내를 아주 완벽한 무엇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적극적인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한 남자의 아내는 단지 그의 집 지킴이 이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이 적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점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을까요? 사도 자신이 말한 용구를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여러분은 이 말씀을 숙고하였을 때 주께서 우리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방식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이 자기 아내에 대해서도 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보호하고 양육하라.” 여러분은 이 일을 생각함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몸을 미워하지 않고 보호하고 양육한다고 하는 유추로써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간단히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식단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식단 또는 그의 음식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야 하되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남편과 아내의 경우에 있어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무슨 음식이 아내에게 도움이 되고 아내를 강건케 하는 것인지 생각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음식물을 섭취할 때 칼로리와 프로테인과 탄수화물과 지방질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히 과학적인 것만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음식의 문제에 있어서 또 다른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미각에 대해서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것이 즐거움과 기쁨을 주느냐에 따라서도 우리는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아내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접해야 합니다. 그는 무엇이 그녀를 즐겁게 하는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가 결혼하기 전에는 식단을 이런 식으로 짰지만 결혼한 후에는 자주 그렇게 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까? , 좋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멈추어서는 안 되고 계속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욱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가 주장하는 핵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죄를 받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도의 가르침이요 신약의 교훈입니다. 식단 아내의 모든 성품과 그녀의 영혼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놀라운 이 관계 속에서 아내와 그녀의 삶이 발전하고 있는가 능동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연습의 문제가 있습니다. 몸의 유추는 즉시 그것을 시사합니다. 몸을 위한 연습은 진수(眞髓)입니다. 운동은 결혼 관계에 있어서도 동시에 주요합니다. 대화와 같은 단순한 일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단순히 대화가 없다는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을 너무 자주 봅니다. 우리는 모두 변명의 방법으로 말해지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습니다. 남자가 피곤에 지칩니다. 온종일 업무나 사무에 시달리다 피곤하여 지쳐 돌아와서는 편안히 쉬길 원합니다. 그런데 같은 일이 그의 아내에게도 역시 해당됩니다. 아마도 그녀는 혼자서 온종일 아이들과 씨름하고 있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좋게 느껴지든 않든 간에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아내는 이런 의미에서 연단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의 사업에 관해서, 여러분의 걱정거리에 관해서, 일에 대해서 아내에게 말해주십시오. 그녀는 몸이요 당신의 일부입니다. 그리하여 그 일에 관하여 말하게 허락하십시오. 그녀와 상의하고 그녀의 소견을 말하도록 합니다. 그녀는 당신 생명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아내로 하여금 여러분 삶 전체로 들어오도록 하십시오. 당신 스스로가 대화를 만드십시오. 달리 말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모든 구실들을 이해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흔히 얼마나 어렵게 될 수 있는지! 그래서 나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난 그것이 정당한 논리라고 생각한다고, 이 사람은 결혼하기 전에도 똑같이 피곤하고 똑같이 고되게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에는 그가 무엇을 했던지 간에 그의 약혼녀에게 틈만 있으면 말을 걸고 싶고 모든 일을 그녀에게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한 뒤에는 왜 그렇게 하기를 싫어합니까?

사도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보되 자기 몸을 생각하듯이 생각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연단의 요소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의도적으로 아내에게 모든 일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놀랍게 여겨질 것이고 그녀의 발전을 위해서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나감에 따라 결혼생활이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네 번째 요점으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보호의 요소입니다. 몸은 식물과 연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덧붙여서 사람마다 자기 자신의 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는 그 논증을 풀어나갑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러분이 기억하다시피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남편에게 아내는 더욱 연약한 그릇임을 기억하라고 일러줍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몸들은 어떤 것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의미에서조차 모두 다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감기에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등의 걱정거리가 아닌데 한기를 느낍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체질적으로 이런 작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이상한 분위기와 다양한 다른 것들에 굴복하기도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는 그런 일들을 매우 조심합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목도리마저 두릅니다. 그리고 어떤 일들은 삼가 합니다. 그는 자신을 감싸고 생활 가운데서 부딪혀오는 몇몇 장애물들에서 자기의 약한 체질을 보호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내가 체질적으로 특수하게 약한 부분이 있음을 발견했습니까? 그녀의 어떤 특별한 성격이 있음을 발견했느냐 말입니다. 그녀가 신경질적이든지 날카롭지는 않습니까? 또는 너무 말이 많지 않습니까?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녀는 어느 의미에서 약한 어떤 성격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약한 성격들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냅니까? 여러분은 초조해하거나 화를 냅니까? 여러분은 그 약한 성격들을 비난하고 천시합니까? 사도는 여러분의 몸에 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녀를 그녀의 약한 특징들에서 보호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아내가 천성적으로 겁이 많다면 그녀를 거기서 건져내고 보호하십시오.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동원해서 그녀를 그 연약함과 유치함과 견고치 못한 데에 빠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하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몸을 위해서 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아내에게 해주십시오.

물론 큰 전염병, 즉 인플루엔자나 열병이나 기타 수천의 사람들을 죽이는 다른 질병이 유행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결혼생활에도 그에 상응하는 일들, 즉 시련과 고통과 환난 등이 극도에까지 결혼생활을 시험하러 찾아옵니다.

우리는 이 일에 관해 어떻게 행합니까? 그런 질병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의 몸에 어떻게 행합니까? 그런 질병에 걸렸을 때 그만 격하게 성을 내어 그 인플루엔자를 공격합니까? 아니지요. 침대에 편히 누워서 뜨거운 물 찜질을 하지요. 그리고 적당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처리하여 여러분의 몸이 그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나니.” 만일 여러분의 아내를 끝까지 괴롭히는 어떤 특별하고 예외적인 시련과 걱정과 난제들이 있거들랑 남편 되는 여러분은 하던 일을 멈추고 여러분의 아내를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녀는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요점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 예방 접종을 통해서 여러분의 몸을 보호하려 애씁니다. 그것을 결혼 관계에도 적용시키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저항력을 기르시고 여러분의 아내가 생명의 여러 장애물들을 대처하도록 준비시켜주십시오.

여러분은 아내를 견고케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일을 혼자서만 하지 마십시오. 아내를 견고케 하여주면 그녀도 역시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 죽어 세상을 떠난다 해도 그녀는 궁지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밀한 면에 이르기까지 몸을 돌보는 것같이 우리의 아내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질병이 찾아온다면 특별한 배려를 하여 적당한 의약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활기와 행복을 되찾는 역할을 할 이들 특별한 일에 신경을 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정도로 본 장을 끝맺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중요한 큰 원리를 살펴 나왔습니다. 남편은 이처럼자기의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은 아내가 자기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던 것같이 하라.”

 

저자 소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영국의 남웨일즈에서 출생하였고,

런던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의학을 수련한 후 외과의사로서

실무에 종사하였다. 그 후 1927년에 그는 의학계를 떠나

남웨일즈 에버라본 시의 웰쉬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1938년부터 그는 런던 웨스트민스터교회에서 캠벨 몰간 목사의

후임으로 30년 간 목회에 종사하다가 1981 2월에 82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역자 소개

서문 강 목사는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총신대학교 신학연구원,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D.Min.)를 졸업하였다.

현재 칼빈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중심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다.


출처: 기독교문서선교회 발행

        로이드 존스의 에베소서강해 제6권 <영적생활> 제15장 전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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