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Lloyd-Jones)목사 설교

창조 질서(엡 5:22-24)[아내의 복종의 의무] / D.M. 로이드 존스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9. 3. 10:52

창조 질서

                                   저자: D.M. 로이드 존스 목사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에게 복종할지니라( 5:22-24)

 

우리는 이제 본문의 결혼에 관한 교훈을 자세히 숙고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교훈은 결혼에 관한 한 신약과 전체 성경의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교훈을 개관적으로 고찰해 보았는데 그것은 사도가 우리에게 교훈을 나타내는 방식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 모든 점을 심중에 간직하는 것은 중차대합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접근하는 정신은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은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은 토론회에서 결혼의 주제를 놓고 특별한 방식으로 토론을 벌입니다. 양면으로 나뉘어서 결혼을 반대하는 측과 결혼을 찬성하는 측이 서로 토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식으로 대처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그처럼 대하는 일이 교회에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 속에 있는 권위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의견을 표현하는데 관심이 있지 않고 우리의 목적은 말씀의 교훈을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함께 그 일을 합니다. 이편 저편이 나뉘든지, 반대 야당과 여당이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함께 성경의 교훈을 발견하기 위해서 갑니다. 또한 우리는 확실한데 원리들이 너무나 명백하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즉시 기독교 교리의 최고 수준으로까지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서나 발견되는 기독교 교회의 본질에 관한 가장 심오한 교훈 중 몇을 대하게 됩니다.

그들 일반적 원리들을 살펴본 지금 우리는 특별한 적용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첫 번째 것이 아내들에게 주어진 명령임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하나의 이유, 즉 사도가 복종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남편들보다 아내들이 앞서 나왔다는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원리는 21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바울은 이 복종하는 문제에 있어서 맨 먼저 아내들아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숙고해야 할 문제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입니다. 사도는 그 점을 아내들에게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내들의 의무임을 아주 뚜렷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차 복종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의 의무이듯이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특수한 일입니다.

아내들아 너희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복종하는 대상이 그들 자신의 남편들이고, 결혼에 대한 전체 문제에 관한 교훈이기 때문에 이것은 더욱 명확합니다. 핵심적인 요점, 여기서 절실한 것은 복종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 점을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다행히도 사도는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던져진 권면이 아닙니다.

바울이 먼저 이 복종에 대한 큰 동기를 제공합니다. 아내들이여 너희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Wives, submit yourselves unto your own husbands, as unto the Lord).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잘못 이해될 수도 있고 또 그래왔습니다. 아내들아 너희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복종하는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복종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모든 아내와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은 하나의 절대적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가지는 관계를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요 노예들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의 노예가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절대적인 것이요 완전하고 철저한 복종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라고 아내들에게 권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주께 하듯 하라는 그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아내들아, 너희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주께 대한 너희 의무의 일부이기 때문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주께 대한 너희 복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아내들아 너희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주께 대한 복종의 일부로써 주께 복종하듯이 하라.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남편만을 위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주님 자신을 위해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21절에서 지적된 일반적인 요점의 반복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은 최종적으로 남편만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은 주께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하고 있어야만 그의 보시기에 기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내들의 그리스도인다운 행실의 일부요 아내들이 지킬 규칙의 일부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유사한 논증을 하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를 위하고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가 우리로 그렇게 하도록 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처음부터 이 문제를 논란의 범주에서 끌어내어 바른 정신으로 접근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만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면, 주님의 부탁과 뜻을 이루길 간절히 소망한다면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이지요. 어느 행동을 하든지 이것보다 더욱 강력한 동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그리스도인 아내는 누구나 이 문단에서 어떤 어려움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 그녀에겐 더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이 갈수록 자신의 모습을 다채롭게 드러내고 있는 오늘 현 세대보다 기독교가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줄 더 좋은 때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삶은 결혼 문제나 기타 다른 모든 국면에서 더욱더 혼돈상태에 빠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 보여줄 영광스런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놀라운 기회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교도나 더 이상 비종교적인 자들이 아니며, 세상에 더 이상 속해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살고 제 고집만 내세우다가 결국에는 그런 삶을 특징짓는 모든 혼란으로 빠질 오만을 부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게 뭐야. 왜 당신들은 그렇게 행하지? 그 이유가 뭐야?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의 대답은, , 천성이 그래라고 말하지 말고,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야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즉시 복음을 전파하고 진술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그 아내들에게 그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 전체 권면의 요점은 우리가 이 장 자체와 앞장 거의 대부분의 내용에서 알아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들 삶의 상세한 국면에서 그리스도인이 일단 되기만 하면 모든 국면에서 달라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삶의 이 위대한 특징은 아내들이 자기들의 남편들에게 복종함으로써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장엄한 동기입니다. 우리가 그로 인하여 감동을 받지 않고 그것에 대해 생기를 되찾지 못한다면, 어떤 다른 논증도 우리에게 부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되지 않거나 무엇보다 그의 이름과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논증은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첫 번째로 놓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처음에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난 뒤에 계속해서 특별한 이유들과 2차적인 이유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성경의 부와 영광을 보게 됩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이들 2차적인 이유들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자신의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창조의 질서로 부를 수 있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관계 권에 속한 것입니다. 두 이유들은 모두 23절에 있습니다. 이는(왜냐하면) 첫째 이유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라. 둘째는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이다.

첫째 이유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경륜과 뜻의 일부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남녀 사이의 관계에 관해 건설하신 바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가르침입니다. 맨 먼저 창조로 돌아가 창세기 2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에 언급한 사실이 어떻게 해서 그곳을 되돌아보게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곳이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특별하게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결혼을 생각하기 전에서 훨씬 뒤로 가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이 여러분을 뒤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로 되돌아가서 창조의 문제에 봉착하게 합니다. 그것은 타락의 문제도 암시해줍니다. 중요한 구절은 16절입니다. 이 구절은 여자가 사탄의 말을 듣고 시행에 빠져 금과(禁果)를 먹은 결과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알려줍니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 이 말씀은 창세기 2장에 첨가한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가장 중요한 결혼문제와 가정문제에 관한 성경 교훈을 요약하기 위해서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우리 앞에 제시된 원리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이 본질적으로 결혼에 관한 것이지, 그러한 여자(혹은 모든 여자들)의 신분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우리는 성경에서 보편적인 여자에 관한 교훈을 연역해내야 합니다. 또한 여자가 직업 전선에 뛰어드는 것 같은 문제 등에 그러한 일반적인 성경 교훈을 끌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난 그것이 아니고 다만 결혼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행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그는 아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는 미혼 여성들은 관설하고 있지 않습니다. 미혼 여성에 관한 교훈이 있습니다만 간접적으로는 몰라도 여기 본문들 가운데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의 강조점은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부단히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에게 본래적인 우선권이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여자가 남자에게서 만들어졌으며 취해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또한 여자는 남자의 돕는 자로서 작정되었으며 남자의 필요를 충족시킬 배필이 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어떠한 짐승도 그 필요를 보증할 수 없습니다.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은 돕는 배필이 없었더라. 모든 짐승들 가운데는 아담을 도울 배필이 없었으므로 여자가 창조된 것입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사도들이 그 점에 강세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남자는 피조물의 영장으로 지어졌습니다. 동물이나 육축을 다스리는 권위가 주어진 것은 남자에게입니다.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명령을 받은 것은 남자였습니다. 여기서 남자가 지도자와 주장자와 권위와 권세의 자리에 올려졌다고 하는 것을 지시해주는 것입니다. 그가 결정을 내리고 판결을 내립니다. 그 점이 이 전체 문제에 대한 근본 교훈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의미심장한 구절에서 이 모든 것을 강조합니다. 그는 남편들에게 이르기를 아내들을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 저를 귀히 여기라고 합니다(벧전 3:7). 여기서 더 연약한 그릇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창세기의 처음 몇 장과 성경 어디서나 아주 뚜렷하게 가르쳐지는 것을 뜻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남 자의 머리 됨과 지도자격의 전체 문제를 의미합니다. 육체적으로 말해서 남자는 본래 여자보다 더 강합니다. 더 강하도록 만들어졌고 더 강합니다. 나는 아주 세밀하게 고찰해 갈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극히 쉽게 정립할 수 있습니다. 해부학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생리학의 입장에서는 더욱 쉽게 그것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니 많은 국면에서 남자만큼 강하게는 지음받지 못했습니다. 여자는 다른 방식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여자는 더 약한 그릇이라 말할 때 가치를 손상시키는 의미로써는 전혀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자란 본질적으로 남자와 다르며, 남자는 반드시 그 점에 명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마치 이러한 면에서 자기와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남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여자란 다르게 만들어졌으며 남자는 그녀를 존귀하게 여겨야 되고, 따라서 여자를 인도하고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자는 아내의 머리이며 가족의 ja리라고 하는 기본적인 근본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그런 식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이 일들을 해낼 수 있도록 기능과 힘과 천성을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여자는 남자의 보조자가 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보조자란 말 자체가 복종의 개념을 나타냅니다. 여자의 주요 역할은 남자 안에 있는 부족분을 채우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보충자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에 대해서, 그의 가족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든 궁극적인 문제에 있어서 책임이 있다는 데 강조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창조세계의 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의 남편을 도와주고 보좌하여 그가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일입니다. 여자는 남자가 영광스럽고 놀랍고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창조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 자체에서 설정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교훈이요,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에 관한 근본적인 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타락 전에 그러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아직 완전했을 때, 아무 죄도 흠도 없이 동산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관계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이 벌어졌습니다. 타락입니다. 그것의 중대함은 아주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2:11-15에서 그 점을 아주 분명히 했습니다. 먼저 유혹을 받아 타락한 것은 여자였지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을 상당히 강조하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타락은 훨씬 다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창세기 3:16은 그 점을 강조합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하리니. 우리는 이 말씀에서 만일 죄와 타락이 아니었다면 아이를 낳는 것이 고통 없이 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 말씀을 인용하는 목적을 잘 말해주는 부가적인 말씀으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 전에 이미 설정된 주격(lordship)과 지도자격(leadership) 수장권(headship)을 되풀이 언급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요소가 나옵니다. 여자의 남자에 대한 복종성은 타락의 결과로 더욱 증가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이 이 이유 때문에 선포되었다는 것은 논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일어난 타락의 진수는 그녀가 마귀의 꾀임과 암시를 받을 때에 마땅히 그가 해야 했었고 그때까지 했던 대로 그의 남편 아담에게 가서 그 문제를 상의하지 않고서 자기 스스로 문 제를 결정하여 자신이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데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을, 아담에게 그 문제를 가지고 가는 대신에 그 상황을 자신이 처리한 결과 그녀는 타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아담을 그와 같이 타락에 끌어내어 결국은 전 인류로 타락하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본다면 원죄란 어느 의미에서 여자가 결혼 관계에서 자기의 위치와 신분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위와 권위와 권세를 찬탈함으로써 혼돈과 참화를 가져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3:16에서만 진술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자가 권위를 가지는 것에 관한 바울 사도의 논증의 전 초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디모데전서 2장의 교훈과 전파의 초석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본질적인 교훈입니다. 그러나 즉시 반대 의견이 제시됩니다. 불행히도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믿으라고 부르짖는 복음주의적인 사람들로부터도 얼마나 자주 그 반대 의견을 접합니까! 사람이 그처럼 자주 대하는 반대 의견은 이러합니다. ,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의 관점일 뿐이다. 바울은 반여성 운 동자임에 틀림없다. 그 당시 아주 관례적으로 여자를 그렇게 취급하던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 당시에는 여자의 가치가 아주 낮게 평가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전 세계에 걸쳐 모든 이들이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자는 솔직히 말해서 상품과 노예에 불과했었다. 이것은 유대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으며, 바울은 단지 전형적인 랍비 투의 유대인에 불과했었다. 논증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 나갑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논할 일이 못 됩니다. 그들은 바울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도 틀렸다고 말하기를 서슴치 않는 이들입니다. 자기딴엔 그들은 권위자들이라고 알고 이해합니다. 나는 그런 이들과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만 그들과는 전혀 토론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의견에 대항해서 내 견해를 피력하는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혀 기독교적이 아니랄 수밖에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을 성경 계시에 전적으로 복종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성경계시(聖經啓示)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전 주장을 들을 때, 그것을 탄식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답변하되 이런 식으로 답변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 주님과 사도 바울 시대의 여성관이 낮게 평가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의 관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성경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관점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1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까? 그러나 주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 대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가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가 동등하며, 구원에 있어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전도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랑했으며 사도 바울보다 여성과 여성의 참된 영광에 대해 섬세하게 말한 이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아내들의 남편들에게 대한 의무만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그의 그리스도인 남편의 여성관 내지 부인관과 아내를 보는 그의 관점은 이제까지 세상이 알았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제 위치로 갖다 놓습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에게 양면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사도는 결코 이것을 자기 자신의 의견으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든지 창세기로 돌아가서 창조의 질서를 알아봅니다. 그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내 의견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바이다. 사도에 있어서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의 진리가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바가 부단히 실제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직 바울의 의견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이 경향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아주 명백해야 합니다. 만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으로 확실히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사도 바울에 관해서 세상이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서신을 쓸 때에 성경을 인용할 뿐 아니라, 또한 영감된[복사 전재자 註: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로서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때는 언제나 매우 조심스럽게 그 일을 했습니다. 만일 그것을 자기의 의견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영감된[복사 전재자 註: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의 편지를 읽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의 말을 ㄷㄹ으라고 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어떤 이들이 바울의 말을 다른 성경들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른다 (벧후 3:16)고 말합니다. 바울이 쓴 것은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비평주의자들은 바울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변론하고 있는 것이므로 성령과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들이 20세기의 산물이라고 믿기에 이른 것과 상충되지 않는 한에서만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는 모순된 처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더욱 어리석은 것이 없는 그 어리석은 반대 의견을 처리해 보았으니, 나는 다시 그 입장을 요약하겠습니다. 교훈에 따라 여자와 아내는 확실한 지위를 부여 받은 것입니다. 그 여자가 자신의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 여자가 그의 노예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순간이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에 이르게 될 때 이 점을 더욱더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여자란 별다른 존재이며 남자의 돕는 배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금하는 것은 여자가 중요하게 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처럼 행동하려고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남자에게 부여하신 자리와 지위와 권능을 찬탈하는 일을 추구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전부입니다. 그것은 노예제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을 깨달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자기의 남편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기능을 도와주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가정을 조성하고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남편을 도울 자이며 그의 안위자 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위로와 용기를 구할 자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돕는 배필입니다. 남자와 자신에 관한 진리를 인식합니다. 그녀도 역시 자신에 관한 진리를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를 보필해주고 도와줍니다. 그들은 다 함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하나의 예화를 드는 것이 이 시점에서 도움을 줄지 모르겠습니다. 지도자격과 머리 됨의 개념은 어떤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 사상은 필연적으로 유전과 본질상의 열등감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남자의 머리 됨의 전체 개념은 결혼 관계에서 군부대의 지휘자들과 많은 면에서 비교가 됩니다. 만일 각자가 취할 행동을 제멋대로 결정한다면 부대는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미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남자가 자기가 지원하는 군에 입대하는 순간, 그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것이 어떻게 생각되든지 간에 그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의무입니다. 그는 그의 상관에게 이 명령권을 넘겨준 것입니다. 비록 자기의 의견이 다를지라도 그 의견들을 포기하고 복종하며 생활해나갑니다.

또는 축구팀에 소속된 선수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주장(主將)을 뽑는 일입니다. 그들 모두가 다 주장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모두 주장이라면 경기에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선수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주장으로 지정하는 것입니다. 그 주장이 그들 가운데서 가장 잘 뛰는 선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선수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그가 통솔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주장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 선수들은 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혼돈이 다시 찾아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주제를 숙고하기 위해서 소집된 한 회합을 생각해보십시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들은 맨 먼저 의장을 선출하는 일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권위자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의를 진행할 의장이 없으면 업무처리를 할 수 없습니다. 의장의 진행 아래서 발언권을 얻어야 합니다. 여기에 전과 같은 열등감의 문제는 끼여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한 리더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하원의원들이 선출되면 먼저 그들은 의장을 선출하게 됩니다. 의장은 의장석에 앉아서 회의 진행과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의장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천만에요! 그들의 지혜로 볼 때 이렇게 하지 않고는 업무를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이를 권위의 자리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 남자를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아내들에게 말하기를 아내들이여! 너희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그것은 남편이 머리로 지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논증은 고린도전서 11:3에서 발견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남자가 아내의 머리이며,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라는 말씀을 접하는 것입니다. 이는 논박될 여지가 없는 논증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머리가 됩니까? 답변은 우리가 흔히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라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등하며 다 함께 영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아버지(하나님)가 그리스도의 머리입니까?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 아들이 그 자신을 아버지께 복종시켰으며, 성령이 아들과 아버지께 자신을 복종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기 위한 자원적 복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구원을 이루기 위한 진수(眞髓)입니다.

아들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는 자원 하셨습니다. 그는 이 동등 됨을 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 아버지의 종이 되셨으며 아버지는 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 사도가 표현한 방식은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 됨과 같이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니라 그러므로 아내들아 너희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상이 유독 진정한 결혼관만을 제시해주고 있는 이 커다란 교훈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입니다. 생각지도 않게 나는 어리석은 변론에 대해 상고해보았는데 이것은 너무나 흔하게 주장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당신 의견은 틀립니다. 나는 아내가 남편보다 훨씬 유능하고, 여러 면에서 더욱더 많은 재질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게 명석하고 유능한 여자가 그의 남편보다 못한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주장에 대해서 대답할 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말을 퍼뜨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변론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경우를 모두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만일 재질이 많고 명석한 여자가 자신을 남편에게 복종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자가 어떠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혼 관계에 있어서는 그녀의 반려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시점에 있어서 두 가지를 논평하려고 합니다. 그 여자가 어떤 재질이 있든지 간에 그녀가 이런 식으로 복종할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어떤 사람하고도 결혼할 계획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복종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복종하신 것처럼 복종하는 자원적인 복종입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용의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자신을 그 남자에게 복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한에서의 그 여자는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여자가 어떤 다른 생각을 가지고 결혼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그 여자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평은 이러합니다. 나는 때때로 생각하기를 나에게 증거하라고 부여된 특권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내가 언급하고 있는 바로 이 일을 실제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여러 지방들을 순방하면서 설교하고, 설교가 끝난 뒤에는 그 교회 목회자 내외와 함께 목사관에서 밤시간을 가져보곤 하였습니다. 내가 그들을 재능의 입장에서 볼 때 남편과 아내 사이는 비교도 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무나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항상 그것을 흥미 있게 생각합니다. 아내는 유별나게 재능이 뛰어나고 명석한 여자였습니다. 남편도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요 은사는 그의 성품에 있었습니다. 정말로 친절하고 자비롭고 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녀와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실로 그들의 학업성적이 그들은 모두 학사 출신이었음 이것을 입증해주었습니다.

부인은 그 당시에 몇몇 여자들밖에는 취득하지 못하고 있는 전문과목에서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그녀는 수석의 영광을 차지했었습니다. 남편은 그보다 훨씬 쉬운 과목에서 그것도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재능에 관한 한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지적인 파악능력, 그녀의 이해력은 즉각적으로 느껴졌고 그것들을 알수록 그것은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여자가 언제든지 그녀의 남편을 진정한 성경적인 신분으로 올려놓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을 전에 본 적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영리하고 섬세하게 그 일을 했습니다. 남편이 해야 할 말을 그녀가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말이 아니라 남편의 말이라고 느껴지게끔 처신하였습니다. 거기에 흐뭇한 면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내가 체험했던 일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일로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그 부인은 유능한 사람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은 머리라고 하는 이 원리를 실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 부인이 많은 이유들을 제사하기는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일은 언제나 남편이 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그를 돕는 배필로서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결하고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를 보충해주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그녀의 남편을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교훈을 이해하고 인식하고 포착하는 것의 중요함을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특별히 오늘날 왜 그러합니까? 왜 국제적인 문제나 정치에 관하여 나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보다 내가 지금까지 말해 왔던 일이 더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행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 세상에서 거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는 권위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혼란은 사람들이 생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든지, 산업사회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나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동일합니다. 권위상실! 그것은 내가 볼 때 가정과 결혼생활에서 전적으로 출발한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경에 이른 정치인은 누구든지 간에 세상 정치문제에 관해 말할 자격이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가장 많은 권한이 부여된 곳에서 실패하였다면 무슨 권리로 다른 일을 말하겠습니까! 그는 공적 생활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진정한 파경은 가정과 결혼 관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2차 대전 후의 이혼의 극심한 증가(그 당시에 약간 이혼 추세가 떨어졌다고 하나 그것은 일시적일 따름임)는 오직 한 가지 일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 결혼과 남편과 아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남녀가 다 같이 이해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나는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해의 결핍은 가정생활과 가족 사이에 있어서의 파탄을 설명해줍니다. 그것은 다시 현금에 와서 아주 뚜렷해졌습니다. 가정이 그전처럼 중심이 되지 못합니다. 가족들은 언제나 밖에 나와 있습니다. 흔히는 밤에도 돌아가지 않고 밖에서 보냅니다. 놀라운 결합력을 가지고 있던 가정 그 가정은 삶의 근본 단위 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녀들 사이에 있어서의 버릇이 없음과 훈련되어 있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 대한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소년 비행을 거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통계만으로도 입증될 수 있습니다. 비행을 저지른 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파탄에 이른 가정이나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듯이 그들에겐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확실한 분위기에서 자라났습니다. 미결상태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가정, 아내가 남편을 향해 대들고 남편이 아내를 구박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던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다른 누구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권위나 지도력이나 보호에 신뢰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그 가련한 아이는 비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 사이의 싸우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던 것입니다.

내가 볼 때 이렇게 나쁘게 보이는 추세에 대한 또 다른 국면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그들의 신분을 포기하고 그것에서 물러나 태만과 이기주의로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갈수록 이행하지 않음이 사실이 아닙니까? 남편은 점점 가정생활의 통제를 아내와 아이들의 어머니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귀찮은 것은 싫어합니다. 피곤하여서 일터에서 돌아오면 자기 아내에게 부탁하기를 아이들을 자리로 데려가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묻는 말도 아내에게 일임합니다. 이런 일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남편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여하신 자리를 일부러 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의 경우에 더욱 심합니다. 남편이 자기의 신분을 버리고 나태함으로 그 신분을 자기 아내에게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다른 많은 방향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더러운 게임이라고 말하면서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주장입니까? 관심을 갖는 것은 그 나라 시민으로서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특별한 결혼의 영역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 다음 여성운동이 아내와 어머니에게 호전성(好戰性)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내나 어머니가 대등한 위치에 자신들을 세워놓고 아이들의 마음 속에서 아버지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전체 문제에 거짓되고 그릇된 접근방식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비평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영국)에서 이것이 증가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정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여가장(女家長) 사회로 불리어지기까지 하는 상황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점점 달러를 생산하는 사람이며 봉급을 타오는 사람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남자는 필요한 돈을 버는 사람입니다. 여자와 어머니는 문화적인 사람이요 가장입니다. 또한 아이들은 어머니만을 바라봅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비성경적인 관점,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비성경적인 관점이 여가장적 사회를 불러온 것입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물론 결과는 그런 나라에서 고심하고 있는 범죄들과 심각한 사회문제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영화와 여러 방면을 통하여 다른 모든 나라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이러한 태세는 전세계에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여자를 가정의 머리와 중심으로 하는 여가장적 사회는 성경의 교훈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 문제가 점점 인식되어 가고 있습니다. 결혼 상담소나 그와 유사한 단체들이 조직된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단체들은 일반적으로 그 문제들을 심리학의 차원에서 접근해 나갑니다. 여러분이 많은 심리학자들의 결혼생활을 시험해보면 여러분은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어떻게 영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충고하는 사람들이 그 교훈을 그들 자신의 결혼에는 적용할 수 없다니! 그들이 그럴 수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것은 심리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상식이나 지혜, 동료의식, 또한 주고받는 것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그 모든 것에 관해 알며 항상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소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권위자가 되고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들이 주께 하듯 모든 일을 할 때까지, 그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위에, 그리스도가 남자 위에 머리 됨과 같은 유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때까지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사회 장애와 문제들이 더욱더 급증하게 된 것은 최근 100여 년 간에 걸쳐서 남자들과 여자들이 점점 성경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혹독하고 강압적이고 독재적인 빅토리아 풍의 남편들이나 아버지가 되라는 말이군요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을 압니다. 그것은 아주 틀린 것입니다. 나는 현대의 많은 문제들이 빅토리아 풍에 대한 반동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빅토리아 풍을 현재 상황만큼이나 혐오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나는 빅토리아 식의 생각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하지 않습니다. 나는 말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라.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라.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계시로 되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을 다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장자와 그를 옆에서 보필하라고 주신 여자에 대한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피차 존경하고 피차 존귀하게 여기라. 두 영역을 결코 혼돈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 교훈을 알게 하실 뿐 아니라, 그것에 우리 자신을 복종할 수 있게 하소서. 그럼으로써 복되신 주님의 이름에 존귀와 영광을 돌리도록 하소서. 주께 하듯 하라.

 

 

저자 소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영국의 남웨일즈에서 출생하였고,

런던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의학을 수련한 후 외과의사로서

실무에 종사하였다. 그 후 1927년에 그는 의학계를 떠나

남웨일즈 에버라본 시의 웰쉬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1938년부터 그는 런던 웨스트민스터교회에서 캠벨 몰간 목사의

후임으로 30년 간 목회에 종사하다가 1981 2월에 82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역자 소개

서문 강 목사는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총신대학교 신학연구원,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D.Min.)를 졸업하였다.

현재 칼빈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중심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다.

 

출처: )기독교문서선교회 발행

     D.M. 로이드 존스 지음,

     에베소서 강해 제6 <영적 생활> 7장 전문을

     복사(複寫) 전재(轉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