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주 예수 그리스도(몰입의열정과자신감,체험은계속적용해야)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1. 22:54

2009 5 31 주일예배

주 예수 그리스도

    ( 2:36-41)

  1.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2.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4.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5.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최근 뉴스에 의하면 비디오아트 작가인 백남준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미국의 스미소니언 미술관에서 보존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미술관들이 그 동안 백남준의 모든 소장 자료들을 얻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다. 백남준은 전자미술의 미켈란젤로이며, 20세기 후반기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자료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 석 자 외에 아는 게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뒤늦게 작년에야 `백남준아트센터'를 개관했습니다만, 이번에 우리가 힘이 없어서 송두리째 다 놓쳐버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빛낸 인물, 또는 대중스타의 이미지를 가지고 바라보던 우리들에게 그는 그런 차원을 넘어선 20세기 미술의 혁명아였다, 이런 평가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 왜 꼭 캔버스 위에 그려야만 한다고 얘기하느냐. 나는 TV 브라운관 위에다가 내 꿈을 펼치겠다.”혁명적 발상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은 교회의 시작을 말하고 있어요. 교회 역사 속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에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을 둘, 셋 또 심지어는 한꺼번에 500명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시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그 장면을 목격했던 120명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 지 열흘 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다는 것이죠. 그때 모인 무리들이 다 방언을 하게 되었고 또 그 사건으로 인해서 오순절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게 웬 소동이냐 하고 몰려들었을 때, 사도 베드로가 이것이 무슨 일인가를 설교하는 내용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우선 이 사건에서 눈에 드러나는 특징적인 표징은 방언을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20세기 들어서서 다시 미국의 오순절 교회로부터 방언의 역사가 거세게 일어났고, 그 물결이 몇 번의 파도를 이루면서 우리나라에도 몰아쳐서 순복음교회가 크게 부흥을 했었죠. 그러다 보니 이 방언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게 됐습니다. 우선 오늘 성경본문을 읽어보면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고, 성령이 그들에게 불같이 임하셨을 때 그들이 방언을 했다. 또 이 소동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다 자기 출신 지역의 방언을 듣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우리 한글로는 똑같이 방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을 확인해보면 표현이 조금 달라요. 하나는 `글로사'라는 표현을 썼어요. 이것은 `tongue, ' 라는 뜻이에요. 하늘로부터 주시는 내가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거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지역 방언, `디알렉타' 각 지역에서 쓰는 말로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들이 전혀 알 수 없는 방언을 주셨는데 그 방언이 각 나라에서 모여온 사람들이 각 지역에서 쓰는 언어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체험은 과연 초대교회가 시작하는 이때만 일어났던 사건이냐. 성경을 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약 사무엘 상 10장에 나중에 왕이 되는 사울이 선지자 무리와 함께 어울려서 예언을 하고 도취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 방언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도 알 수 없는 언어로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역해주는 사람이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통역해주거나 본인이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공적인 모임에서는 교회의 덕을 위하여 자제하고 홀로 하나님과 기도할 때 활용하라.' 이렇게 지도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순복음교회에서 방언을 구원과 연결시켜서 해석한 적이 있었어요. 방언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표현이 잠깐 나오기는 했었습니다. 지난번에 노인대학 효도잔치를 가보니까 그날 순서 중에 태권도사범 두 사람이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데,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자리에서 회전을 하면서 사과를 두 쪽 내더라고요. 외국 사람들에게는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일단 태권도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만약 저한테 당신도 한국 사람이니까 저렇게 태권도를 하겠죠. 라고 묻는다면, 군에서 기본 훈련을 받은 적은 있어도 잘 하지는 못합니다. 그랬더니 그럼 당신은 한국 사람이 아니로군요,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아니죠. 여러분,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을 구원과 직결시키는 것은 너무 편협한 시각이죠. 그렇지 않아요.

   또 어떤 분은 그래요.“목사님, 여기서는 건강을 위해서 골프를 하셔야 됩니다.”그러면서 한마디 더 합니다.“저 푸른 잔디밭에 나가서 한번 휘둘러보십시오. 천하를 얻은 것 같습니다.”너무 진지하게 얘기하셔요. 그 분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는지 100%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렇지.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까지 얘기할까.' 그러나 아직은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입시를 실패했어요. 서울 올라가서 시험보고 떨어졌습니다. 그 좌절이 말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한 2년 동안 말을 안하고 살았어요. 그만큼 상처가 컸어요.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느냐 하면 교회에 나가서 친구들하고 탁구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이거 재미있더라고요. 여름방학에 서로 먼저 가서 빨리 하려고, 새벽기도회에 가서 기도시간 내내 졸다가 끝나면 친구하고 부리나케 가가지고 라켓을 손에 쥐고 탁구를 하는데 아침도 굶고, 집에 가서 밥 먹고 오기도 아까워요. 또 한 번 놓치면 좀처럼 차례가 안 올 테니까. 참는 김에 점심까지 굶고 기어코 끝난 후에 기진맥진해서 돌아가는데도 마음은 너무 기쁘더라고요.

   그렇게 한 2년을 했더니 성적은 많이 떨어졌어도 자신감이 생겼어요. 내게도 이런 열정이 있구나. 저는 운동하고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저 구경하는 것으로 족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나중에 대학입시 준비는 뒤늦게 시작했습니다만 그때 그 몰입의 열정과 그때 발견한 자신감, 그것으로 새로운 도전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골프하시는 분들이 그래도 그건 아니다 그러신다면 뭐 할 수 없지만, 다양성을 인정해야 돼요. 본질적 경험은 같은 거예요.

   또 하나,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스스로 경험해가지고 알아야 된다, 그 열심은 대단합니다만 교육의 의미는 간접경험을 통하여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지혜에 있는 거예요. 작년 여름수련회에 우리 J-TEEN 학생들이 방언도 하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한동안 열심을 냈어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하늘을 뒤흔드는 체험과 경험을 했을지라도 그것을 계속해서 삶 속에서 말씀으로 해석하고 공부하고 또 내 의지를 가지고 순종하지 않으면 다 잃어버려요. 왕년에 수영을 잘했다, 그거 좋은 거죠. 그러나 오늘도 계속 하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잖아요.

   한순간의 경험은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그런 일이 있었는가 싶기도 해요. 제가 언젠가 미국 그랜드캐년에 가보니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더라고요. 뭐라고 표현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러고는 한나절 만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오고 나니까 내가 뭘 봤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에요. 분명히 봤는데 한순간의 경험은 그렇게 순식간에 잊어버려요. 그러다가 마침 책방에 갈 일이 있었고 그랜드캐년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까 화보집이 있어요. 그것을 넘겨보니까 내 눈으로 보았던 것과 다양한 사진들을 통해서 감동이 새롭게 밀려오는 거예요. 경험이 있어요. 내 감정이 반응을 했어요. 그것으로 충분한 게 아니에요. 내 이성으로 온전히 해석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계속 공부하고 실생활에 적용해야 되는 거죠.

   고린도전서 12 27절에서 31절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여러 직책을 일으켜 세우셨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 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그 사랑의 비밀로 인도합니다. 여러 가지 은사란 성령께서 그분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고루고루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런 말이에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이 몸의 머리 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손, , , 귀 같은 각각의 지체라고 말해요.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다양하고 우리에게 맡기신 직책이 다양해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거예요.

   저는 어젯밤에도 잠자리에 들면서 눈을 감기 직전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푸근함을 느끼고, 감촉을 느끼고, 듣고, 생각하고, 발가락을 꿈틀거리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생생합니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생생하게 느끼는 것, 이 이상의 기적이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의심하는 것도 기적이에요. 내 뇌가 반응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보니까 마가 다락방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모여든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놀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저게 무슨 일이냐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심지어는 저 사람들 술 먹은 것 아니냐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서,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합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해요. 이것은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그를 사흘 만에 무덤에서 일으키시더니 하늘로 올리우신 사건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다,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한국에 살 때 같은 아파트에 가깝게 지내던 분이 있었는데, 이분들이 아주 늦게 결혼을 했어요. 삼십 후반에 결혼을 한 것 같아요. 노처녀 노총각으로 결혼을 해서 그런지 더 아기자기하게 사는 것 같아요. 어느 날 저희에게 아주 큰 액자 그림을 하나 가지고 왔어요. 자기들은 물릴 만큼 봤으니까 우리보고 한번 걸어놓고 감상하라고 가져왔는데 아주 아름다운 풍경조각그림이에요. 퍼즐같이 조각을 맞춰가지고 만든 그림이에요. 그러면서 이야기합니다. 자기들이 늦게 만나서 연애할 때 너무 좋아가지고 결혼하고 나서 이 조각그림 한 통을 샀어요. 한 달 만에 그 그림을 완성했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속으로 그 남자 분에게 대단하다고 그랬어요.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으면 직장에 갔다 와서 피곤할 텐데도 그걸 머리를 맞대고 한 달 동안 그림을 맞췄을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뭘 가르쳐주셨느냐 하면, 오늘 이 모든 일은 구약의 기록된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오늘 이렇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요엘서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다윗은 선지자였다. 그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멀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내다보고 예언한 것이다. 베드로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이제까지 부지런히 배우고 외우고 했습니다마는 그 총체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그 모든 말씀을 구슬을 꿰듯이 쫙 깨닫게 하셨어요.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 말씀이에요. 이게 해석이에요.

   사건이 있었어요.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다양했어요.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한 말씀의 해석을 깨닫고 나서 베드로가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여기에 우리 신앙의 핵심이 있는 거예요. , 그랬더니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세요. 저들이 말씀을 듣는 순간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자기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저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말씀을 듣는다 하지만 그저 귓전을 때리고 지나갈 때가 너무나 많았구나 생각해요. 제가 대학을 들어가서 대학생활에 실망을 하고 학생회관 로비에 앉아있는데 대학선배가 저에게 다가와서는 저에게 묻습니다.“혹시 교회를 다니나요?”다닌다고 했더니 대뜸,“구원은 받으셨나요?”아니, 이런 환한 대낮에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나.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나는 이제까지 교회를 다녔지만 구원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그랬더니 다시 묻습니다.“그러면 예수님은 믿나요?”그러더라고요. 점점 어려운 질문을 던지네. 내가 믿는 집에서 태어났고 이날까지 살아왔으니까, 내가 예수님을 안 믿는다 라기 보다는 믿는다고 얘기하는 게 더 낫겠다. 믿음은 없지만 내가 예수를 믿는다 그랬더니 성경을 펴라고 그러더라고요. 요한일서 5 11- 13절을 펴서 읽어보라고 그러더라고요.“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참 이상하지요. 저는 그 말씀을 그날 처음 읽었어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것이로구나.“이것을 믿습니까?”“네, 믿습니다.”“자, 그럼 우리 기도할까요?”그날 내 행위가 어떠하든지 내 실력이 어떠하든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임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성령의 인도함에 대해서는 말씀으로는 많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공부를 하다가 더 이상 성령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다, 읽던 성경을 잠깐 멈추고 기도했어요. `하나님, 성령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시고,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분 또한 인격이신데 내가 시험공부 하듯이 이렇게 대할 것이 아니라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순종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무엇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렇게 기도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세례 받는 자에게 하나님이 죄사함을 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이 말이 굉장히 위험해요.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그랬더니 이제까지 한국교회 안에 성령에 대한 약간의 오해가 생겼어요. 성령을 무슨 선물로만 이해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므로 선물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 그분은 인격이에요.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세요. 그러므로 마치 그저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온전히 순종해야 되는 것이죠.

   여기 시내에서 제가 양복을 입고 다니다 보니까 호텔 같은데 들어가면 저한테 일본어로 인사하는 현지인들이 많더라고요. 일본사람같이 생겼나 봐요. 그렇지만 저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걸 더 감사하게 생각해요. 여러분, 일본 분들하고 거래하시는 분들은 잘 알잖아요. 그 사람들은 얼마나 깍듯합니까. 밥값 계산도 철저하게 자기 먹은 것을 계산하고 우리같이 서로 내가 내겠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너무 좀 삭막하지 않아요? 그런데 말이에요, 이것이 신앙에도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을 줘요.

   일본의 기독교역사는 우리보다 훨씬 길어요. 순교자도 더 많았어요. 그런데 좀처럼 교회는 일어나지 못해요. 왜 그러냐? 결정적인 문제가 있어요. 일본은 다신교 사회에요. 신이 팔백만이라고 얘기해요. 절대신이 없어요. 유일신이 없어요. 다신교 사회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건 신이 아니에요. 죄의식이 없어요. 절대신이 있고 그 앞에 가서 심판 받는다고 하는 죄의식이 없어요. 삶의 모든 것은 다 그저 인간관계에요. 사회생활 하면서 서로 다치지 않도록 규범을 만들고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인생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겠어요.

   한국 사람들은 기분에 치우치고 정에 치우치다 보니까 겉보기에 도덕적 기준이나 행위로 보면 더 엉망이잖아요. 제멋대로잖아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빗나갈 확률이 더 높아요. ? 예수 믿는 걸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그리스도를 도덕적 모델로 생각하고 고행하고 선행하고 구제하면서 따라가야지 이렇게 생각해요. 예수를 그렇게 믿는 게 가장 잘못 믿는 거예요. 남 보기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같지만 가장 잘못 믿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은 어느 날 홀연히 죽어요. 그게 우리 인간의 한계에요. 제 아무리 도덕적으로 공을 쌓았다 할지라도 그는 언젠가는 홀연히 이슬같이 사라지는 존재에요.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부어져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거예요. 내 자식이 못돼먹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고 미워해요. 그러나 내가 낳은 자식이기에 저를 도덕적 규범으로 이해하기 전에 피를 흘려 낳은 원초적 사랑의 관계가 있어요. 이게 신앙이란 말이에요. 이 사랑을 알고 감격하며 이제는 나만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이 패역한 세대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하고 느끼며 나누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어제 저희 집에 손님이 오셔서 스나얀시티 쇼핑몰에 나갔더니 토요일 오후라 그런가요, 마치 오순절에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것 같이 자카르타 사람들 다 모였더라고요.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려는데 줄이 얼마나 긴지 몰라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성령강림주일이 되어서 그런가, 웬 사람들이 이렇게 다 쇼핑몰에 모여들었을까. 주말에 아이들 손잡고 나가서 빵도 사먹고, 과자도 사먹고, 이 얼마나 행복해요. 좋죠. 우린 전형적인 현대인으로 그러한 삶을 비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돼요. 기쁘게 받아들이고 즐겨야 돼요. 그러나 또 하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또 다른 삶의 기준이 있어요. 이렇게 호흡하며 살도록 이끄시는 놀라운 은혜를 감사해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가장 멋있게 믿는 사람이냐? 공중에 나는 새, 들판에 피어있는 들꽃을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를 발견하고 노래하는 사람. 그저 자기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에만 매여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그저 자기가 수고하고 땀 흘린 것만 움켜쥐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눈을 들어 바라보고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고 천사의 얼굴을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부족한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아가는 사람, 이게 성령 충만한 사람이에요. 이런 비밀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이끄시고 지키시고 도우시는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고 이제는 밝은 마음으로 눈을 들어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