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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인 판단을 의뢰하려면?(고전4:1-5) (3월19일 사순절 삼주차) / 서대장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3. 20. 05:23

최종적인 판단을 의뢰하려면? (3월19일 사순절 삼주차)|말씀………설교원고모음

서대장 | 조회 126 |추천 0 |2017.03.18. 01:04 http://cafe.daum.net/cgsbong/21mg/10950 

 

      최종적인 판단은 오직 하나님께 의뢰하라. 고전4:1-5

주신 말씀 고전4:1-5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신 분이시므로 각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 최종적인 판단을 의뢰해야 한다]는 제목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큰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세우시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3장에서 파당을 지어 분열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지적한 다음 본문에서 세상 지혜로 교회 지도자들을 판단하지 말라 합니다.

여기서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고 선과 악을 가려내며 의와 불의를 판단해야하는 성도의 의무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세속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인 양 최후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으로 성도를 먹이고 돌보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종으로 불러 하늘의 비밀을 맡기고 이로써 교회와 성도를 돌보도록 위임한 자라는 것입니다.

요21:15-17절에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목자의 이미지로 제자들에게 주의 양떼인 성도들을 먹이고 돌보라 합니다.

목회자들이 먹이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 즉 구원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감추어 둔 것으로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알수 있는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밀을 올바로 깨닫고 그 진수를 캐내어 복잡하고 바뿐 세상의 성도들을 먹이고 돌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죄와 사망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과 말씀뿐인 줄 확실히 믿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일에 앞장서는 주님의 기쁨되고 사랑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최종적인 판단을 의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첫째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1-2)

1절에서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말씀을 위임받은 자로 생각하여 목회자를 올바로 예우하고 접대하라 합니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지 세상의 일꾼이 아니므로 교회가 마음대로 고용하고 해고하는 대상으로 대하면 안 되며, 동시에 주술사나 하나님처럼 두려워하고 절대시해서도 안 됩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맡은 자이기에 말씀 이외의 다른 것들을 기대하며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목회자와 사역자들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맡기신 일꾼이요 종들임과 동시에 결점과 약점이 있는 인간이기에 무조건 절대시해서도 안 되고 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비판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와 성도는 서로 분리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모두 한 몸이 되어 함께 천국 길을 가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줄 분명히 깨닫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각자 받은 사명과 은사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꾼(ύπηρέτης)이라는 말은 배의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라는 말로 중죄인이나 가장 비천한 노예들이 감당하던 일로 한번 들어가면 죽기전에 벗어날 수 없었다 합니다. 이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죽기까지 충성하는 일꾼이라는 의미가 된 것입니다. 즉 종이 하는 일이 종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듯 사역자들도 스스로 권리는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2절에서 하나님의 종에게 요구되는 제일의 덕목은 충성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종들에게 가장 먼저 충성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24:14-30절에 나오는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 있습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맡긴 것은 열심히 수고하여 이윤을 남기라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맡긴 그대로 가지고 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꾼과 종에게 요구하시는 충성이란 사명을 받은 후에 이리 저리 재고 생각하며 의심과 불평을 하거나 일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 믿음으로 사명을 받아 기쁘게 순종하며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청지기에 요구되는 것은 세상적 지혜나 웅변이나 학식 그리고 가문과 같이 인간적 판단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그리스도의복음에 대한 신실한 충성을 말합니다.

여기서 충성(πιστός)은 믿을만한, 신실함이란 뜻으로 청지기는 오직 주인 앞에서 신실한 자로 인정받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자로 생각하는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으로 우리는 그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를 박탈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억압했다는 의미는 더욱 아니라,우리의 주인되신 예수께서 자기의 피로 죄의 값을 치르사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되, 다만 주안에서 생명의 종 노릇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되 종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충성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세상의 종들이 하는 태도이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복종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충성의 태도는 주인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줄 알고, 그 일을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하든 말든 불평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이라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 주인을 위해 일을 찾아다니고 적극적으로 순종함으로 , 억지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인정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것이 충성된 종의 자세인줄 믿습니다.

둘째로 주님께 인정받는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3-4)

3절에서 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평가에 안하무인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나 교만함이 아니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할 일을 다할 뿐이요,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진리라는 믿음에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써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과 소신에 대해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어떤 세상의 압력이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받은 사명과 사역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람의 말에 이리 저리 흔들리면 그 교회는 바로 건전하게 성장할 수없기 때문입니다. 말씀보다 세상의 경영학이나 마케팅 논리 등 사람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말씀을 소홀히 하거나 왜곡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을 위해 말씀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부름받은 사명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에 대한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그 뜻과 진리를 세워나가는데 흔들림이 없어야 될 것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스스로의 신앙 양심에 비추어보니 자신을 책망할 그 어떤 결점도 찾기 어렵다 합니다. 그럴지라도 진실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죽도록 충성했지만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의로운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입니다.  즉 자신이 스스로를 생각해서 의롭다고 판단할지라도 주님께서 이를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모든 기준을 주님께 두는 철저한 신본주의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내가 깨닫지(σύνοιδα) 못한 것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한 번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는 일에 있어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한 것은 자연인 바울입니다.

자신은 양심에 비추어 아첨하지도 않았고 탐심의 탈을 쓰지도 않았고 , 자신이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조차 자신은 죄가 없다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아,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모두 교도소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슨 죄를 졌는지 다 알고 있는데 자기 동굴에 갇혀 있어 자기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본능이 있어 아무리 자기가 큰 죄와 실수를 저질러도 얼마든지 이유를 들어 합리화시킬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의 법이나 양심, 혹은 자기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옳은 것조차도 결코 완전하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관적으로 죄 없을지라도 객관적으로 죄가 있으면 공법을 위반한 죄인인 것을 자신만 모르는 사람을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 소녀적 감성소유자라 합니다.

아무리 법과 양심, 혹은 자기 생각에 비추어 옳은 것 처럼 보이는 것들도 가장 밝고 완전한 하나님의 빛과 말씀 앞에 섰을 때 그것이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사람들처럼 인간의 불완전한 기준에 짜 맞추어 스스로 의롭다고 교만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를 완전하게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완전한 의 앞에서 늘 회개하며 겸손해져 나를 추스리는 자세가 필요한 때인 줄 믿습니다.

셋째로 확정 판결권은 오직 주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5)

5절에서 때가 이르기 전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μή 말라 πρό 이르기 전 καιρού 때가 τι아무것도 κρίνετε판단하지)는 말은 일체의 판단을 금지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분명한 판단을 해야하고 할 수 밖에 없지만, 한계를 갖는 인간의 판단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판단과 달라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금지하고 있는것은 교회가 사역자들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판단 즉 자신의 판단이 마치 하나님의 판단처럼 완벽하고 절대적인 양 단정하는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때(καιρού)는 일정한 시간, 한 순간의 시각을 의미하는 카이로스의 소유격으로 약속된 시간 즉 최후의 심판 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인들 같이 자신의 판단기준이 절대적인 양 생각하며 타인에 대해 단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유일한 심판의 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월권행위인 것입니다.

판단하지(κρίνετε)는 판단하다, 심문하다, 조사하다는 크리로(κρίνω)의 현재명령형으로 부정어 매(μή)와 결합하여 합당한 이해와 관찰 없이 계속하여 조급하고 경솔하게 남을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함부로 단정적인 판단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완전하고 확정적인 판결은 최후 심판날 즉 그리스도께서 왕적 권위를 가지시고 다시 이 땅에 도래할 때에 최종적인 판결이 내려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으셔서 각 사람에 대한 최종적이며 완전한 판결을 엄중히 집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 많은 죄악된 일들을 가리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밝혀지지 않고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버린 미스테리한 많은 일들이 있지만, 최후 심판 날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명명백백하게 나타나게 될줄 믿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마음의 뜻(βουλάς뜻을 τών καρδιών΄)은 마음이 계획하고 고안하는 생각들로 인격의 본질이며 , 행동을 유발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나, 아직 그 마음의 뜻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으므로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모두 아십니다.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악을 선이라고 주장한다고 그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나타내다(Φανερόω)는 빛이 비춤으로 모든 마음의 경영하는 바가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는 사람들의 감춰진 행위뿐만 아니라 그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생각까지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마음까지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것을 완전하고도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이웃의 감추어진 깊은 부분을 너희가 알 수 없으니 괄호를 쳐서 판단을 중지하고 그부분은 밝히 아시는 주님께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는 민첩하되, 평가하고 판단하는 모든 일은 주님께 겸손히 맡김으로써, 성급한 판단을 통해 성도와 교회를 흔들려는 사단의 모든 궤계를 이기고 교회의 덕을 세워 나가는 귀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하나님께 최종적인 판단을 의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첫째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1-2)

둘째로 주님께 인정받는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3-4)

셋째로 확정 판결권은 오직 주님만이 가지고 계심을 믿으라.(5)

사도 바울은 세상의 어떤 평가나 판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에 대해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웃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평가조차도 모두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섣불리 이웃을 판단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섣부른 세상의 평가나 판단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사명을 감당하므로 하나님의 진정한 칭찬과 상급을 받는 충성스런 종 주님이 기뻐하시는 백성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