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성경의 증거[성경엔하나님만난사람들간증과하나님의열정이있음]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9. 6. 23:27

성경의 증거 ( 5:39-47)  설교집Ⅰ<아침마다 새로우니> 1 No.7

성경본문[개역개정]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어떤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역사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건과 연도를 외워야 하는데 잘 외워지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몇 년입니까? 1592.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래, 그래. 내가 15살이고 할아버지가 92살이니까, 1592년 이렇게 외우면 되겠다.’

이렇게 어려운 연도 외우기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주 경쾌한 리듬을 가진. 첫 부분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토 잡으시고 …’, 그리고 100명의 위인들을 열거하고, 마지막에 역사는 흐른다.’ 정작 학교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도 수고로운 일이지만 노래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모든 아이들이 노래를 외우고 다닙니다.  뭐 일부러 외웠겠습니까마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다 보니 다 외워졌겠지요.

단군 할아버지, 국사에서 우리 민족이 이렇게 우리 민족의 색깔을 띠고 공동체를 이룬 연도가 언제냐? 기원 전 1000년 경으로 봅니다. 그러면 성경으로 말하면 다윗 왕 시대예요. 우리가 단군 할아버지라고 하면 곰하고 연결시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마는 다윗 그러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몇 백 년 전의 모세의 이야기가 있고 더 올라가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기분 나쁘게 왜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워야 하느냐? 특히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거든요. 내 나라의 역사도 잘 모르는데, 이스라엘 역사를 열심히 족보까지 외우더라고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선, 성경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게 없습니다. 자랑하려고 기록한 것 아닙니다.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사실은 숨기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다 폭로하셨어요. 거기에 나오는 개인들도 그렇고 국가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태어나면서부터 형과 갈등을 가진 사람이에요. 그리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도둑질을 했던 사람입니다. 20여 년 남의 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려고 했는데 장인이 단수가 더 높아가지고 야곱을 속였어요. 첫날 밤에 여인이 들어오길래 내가 사랑하는 그 여인이구나.’ 하고 하룻밤을 지내고 눈을 떠 보니까 그 여인이 아니에요. 언니에요. 그래서 장인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장인 왈, ‘아직도 몰랐는가? 우리 부족은 언니가 먼저 시집을 가야 하네. 억울하면 7년 더 일을 하게. 그러면 작은 딸도 주겠네.’

나중에 그의 열두 아들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서 요셉을 팔아버리고 그에게 와서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라고 했어요. 야곱은 요셉을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아들을 잃은 슬픔을 가지고 눈물로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야곱이 바로 왕 앞에 섰을 때에 내 나이 130이 다 되어갑니다마는 그 인생은 너무나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역사는 자랑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숨기려고 했던 것을 하나님이 드러내놓은 것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유대민족의 역사는 참으로 비참합니다. 수백 년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이 크신 능력으로 건져내어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가나안에서도 블레셋과 너무나 오랫동안 싸우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겨우 다윗, 솔로몬 시대에 나라를 세우나 했더니만 이 나라가 또 남북으로 쪼개어져서 서로 같은 민족끼리 200여 년 동안을 원수가 되어서 싸웁니다. 그러다가 앗수르, 바벨론 등의 강대국이 일어날 때마다 영락없이 짓밟히게 됩니다. 끝내는 나라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토록 고통과 고난의 세월을 보냈음에도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너는 완악하며 네 몸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못이다. 너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패역한 자였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예요.

제가 보는 일간지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이라는 사회 유명 인사들이 자기의 지난 일들을 회고하는 연재물이 있습니다. 그 중에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 실은 60여 편의 글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태원 사장은 서편제’, ‘장군의 아들’, ‘취화선 같은 임권택 감독 작품을 제작, 지원해서 꽤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글에 보면 그가 한때 건설업을 할 때, 태평양의 어떤 건설업자 회의에 참석을 했다가 일본사람이 거들먹거리는 것이 보기 싫어서 몰래 불러서 때려줬다는 얘기, 자기가 세금을 좀 덜 내려고 세무 공무원 집에 찾아가 3억을 내면서 흥정하다가 그 사람이 한사코 안 받는 바람에 되돌아왔다는 얘기, 뭐 회개했다는 얘기는 없어요. 계속해서 탈세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다는 얘기 등을 솔직하게 썼어요. 연재가 끝났어요. 그런데 아마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후기를 남겼더라구요.

제가 그것을 읽고서 이제까지의 다른 사람들의 글과 비교를 해보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날까지 오면서 명예와 이 모든 것을 지키려고 이렇게 애를 썼다라는 글을 썼는데 이 사람은 반대로 정말 부끄럽고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이제 내 나이 70에 뭘 숨기겠느냐?’ 며 다 드러냈어요. 그것이 읽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허물을 솔직하게 쏟아놓기만 해도 공감이 간다고 합니다.

성경은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는 역사는 아닙니다. 그 의도는 간증이에요. 내가 만난 하나님, 엄밀히 말하면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의 사건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 소망교회 부목사로 있었을 때, 온누리교회와 부목사들끼리 축구시합이 있었어요. 누가 다리를 놓았는지 그 바람에 비상이 걸렸어요. 한 달 훈련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곽목사님이 큰 돈을 주셨어요. 그래서 완전히 국가대표 저리가라 할 만큼 유니폼부터 신발, , 가방 등을 다 갖추었는데, 하나 모자란 것이 실력이었어요. 그래서 매일 오후에 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훈련을 했어요. 그리고 정보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귀를 기울여서 상대편 교회의 정보를 들었더니 상대편에는 부목사들이 젊고 수도 많고 그리고 그 중에 한 분은 왕년에 축구선수였다는 소리에 긴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쓸 수 있는 모든 실력을 동원해서 마지막 한 주간은 청소년대표 코치를 불러왔어요. 사실 우스운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이 우리들의 실력을 보시더니 딱 계산이 나왔습니다. 마지막 날,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한 가지만 일러드리겠습니다. 이것만 기억하고 시합에 임하십시오. 축구는 공격, 미드필드, 수비 세 파트로 나누는데, 공격수는 공이 날아가고 있다면 무조건 골문을 향해 뛰어가라. 그러다가 공이 빗나간다든지 골키퍼가 공을 잡으면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라. 딴 생각하지 말고 들어갔다 나왔다만 하라. 미드필더는 자기 발에 공이 걸렸다하면 골대를 향해서 공을 무조건 차라. 수비는 발에 공이 걸렸다하면 우왕좌왕하지 말고 공을 밖으로 냅다 차라.’ 딱 세 가지예요. 제가 공격수였거든요. 저도 공만 보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결과는 2 1로 우리가 졌습니다. 지기는 했지만 영패하지 않고 재미있게 했습니다. 역시, 원칙을 가지고 10년을 한 사람은 뭔가 다르다.’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의 수준을 딱 보고 한마디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어 그 게임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구약성경이 복잡합니다만 핵심은 네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 모델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어요. 잘나서가 아니에요. 100세가 되도록 아들도 못 낳는 사람이 무어가 잘났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냥 택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리라. 네게 복을 주리라. 네가 받은 그 복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복을 나누어주고 네 민족이 복을 받고 온 세계가 복을 받게 하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부르심이에요.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내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끌려 나왔든 자발적으로 나왔든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서서히 가족을 이루고 애굽에서 그 민족이 번성하게 됩니다. 그 후에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두 번째로 모세를 준비하십니다.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져내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주십니다. ‘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민족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착각인 것이지요. 왜냐하면 율법의 기능은 율법을 지켜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비추어보는 거울이에요. 그리고 율법에 나를 비추어볼 때, 나의 더러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에요. 율법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착각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발견하고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깨달아야 했는데, 반대로 해석했어요. 너희에게는 없는 이 귀한 것이 내게는 있다. 자랑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신명기 6 4절부터 9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쉐마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그 본문은 이렇습니다.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아도나이 에하드’ –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의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과 몸과 뜻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들은 말씀 상자를 만들어서 이 말씀을 이마에도 묶고 팔뚝에도 묶고 항상 기억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했지만 너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구나.’ 그게 문제예요. 그리고 세 번째로 하나님이 다윗을 보내십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보내어 드디어 번듯한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성전을 짓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솔로몬 성전은 대단한 자부심이었어요. ‘하나님이 바로 여기 계신다. 너희 이방인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러한 허위의식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어요. 종래에 깨닫지 못하니까 이번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하여금 쳐들어와서 성전을 무너뜨리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하나님, 아무리 우리가 잘못했다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무너뜨리시면 어떡합니까? 저기는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까?’

화려한 성전, 화려한 교회와 자기의 신앙을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곳, 여기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여기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그 사람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교회의 본질입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성령의 역사에 귀와 마음을 열고 듣는 자들이 없다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에 다윗의 고백같이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렇게 고백하는 삶, 거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의 두 기둥은 율법과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랑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모두 거두어 가셨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다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마음대로 예배드릴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눈물과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 속에서 이제 새로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너희를 온전히 치료하실 메시야를 보내리라. 바벨론 포로 이후에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커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메시야가 다시 오시면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를 다윗 왕 때와 같이 강대국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되게 하신다 라고 이렇게 기대했어요. 기대가 잘못된 것이죠. 그러나 정작 ㅎ나님이 누구를 보내십니까?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여러분, 뉴질랜드에 가보셨습니까? 뉴질랜드에 가면 마리오족이라는 원주민이 있어요. 그 사람들의 모습은 독특하죠. 얼굴에다가 온갖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춤을 춥니다. 눈을 부릅뜰 뿐만 아니라 혓바닥을 내밀고 상대방을 무섭게 합니다. 그런데 이 마리오족이 현대인들과 같이 살면서 동화되어 점점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Whale Rider’ – ‘고래를 탄 사람뉴질랜드 마리오족은 자기들의 조상이 고래를 타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곰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들은 또 사는 환경이 다르니까 고래를 타고 왔다고 생각해요. 그 조상의 이름은 파이키아입니다. 한 족장이 있어요. 그 족장은 이 위기에 빠진 부족을 구원해줄 새로운 리더, 새로운 인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이 아이를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한 여자가 진통을 겪고 아이를 낳는데, 쌍둥이를 낳습니다만 그만 그 순간 애기 엄마와 남녀 쌍둥이 중 사내 아기가 죽습니다. 아들을 기다리던 족장 할아버지가 실망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아기를 잃은 슬픔에 잠긴 아들을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괜찮다. 다시 하면 된다. 다른 여자를 얻어서 아이를 또 얻으면 된다.’ 그 아들이 분노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떠나갑니다. 멀리 유럽으로 떠나갑니다. 족장의 지위를 다 버리고 떠나갑니다. 아버지는 좌절에 빠져버립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이 부족의 전통을 지켜야 할 이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데 아들은 떠나가버리고 없습니다. 남은 것은 살아남은 손녀 계집아이 하나 뿐입니다. 돌보지도 않습니다. 외면합니다. 그런데 떠나간 아들이 말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파이키아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새로운 리더의 이름을 계집아이에게 붙여주고는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자라서 십여 세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큰 일이 생겼어요. 해변 가에 고래들이 다 나왔어요. 여러분, 고래들이 해변 가에 다 나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중에 죽지 않습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하여 그들을 바다로 돌려놓으려고 하는데 사람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떡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도 할 수 없어 포기할 때, 그 파이키아가 조용히 왕고래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고래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배운 원주민의 노래를 고래의 귀에 불러줍니다. 그리고 고래의 등에 올라탔어요. 고래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해요. 그리고는 바다로 들어가요. 그랬더니 나머지 고래들도 그 왕고래를 따라 바다로 갑니다.

왜 모든 영웅은 남자여야만 하느냐? 그리고 모든 리더는 반드시 힘을 가진 자라야만 하느냐? 이것이 바로 세상의 논리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사고방식이죠. 그러나 부드러운 사랑의 모습, 할아버지의 고민과 아버지의 아픔과 엄마의 죽음을 모두 다 끌어안고 그것을 사랑으로 극복한 한 소녀의 사랑의 노래를 통하여 태산이 움직이는 것이죠. 세상이 변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새로운 메시야를 갈망했지만 힘의 메시야를 기대했던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해답으로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우리를 잊어버리셨다. 이렇게 말하느냐? 여인이 어찌 갓난아기를 잊어버릴 수 있겠느냐? 혹 아기 엄마가 갓난아기를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결코 너희를 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걸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간증,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하나님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 허물과 죄악 속에 있는 우리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열정이 있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냥 불러주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 그날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열심, 그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입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이 말씀을 깨닫지 못해 한낱 지식으로 머물 때가 많고 삶의 지혜가 되지 못하고 은혜가 되지 못하고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또 이렇게 예배하게 하시고 순간순간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다시 한 번 우리의 허물을 덮으시고 어두운 미래를 헤쳐 나아갈 수 있는 희망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늘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