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낙원에 있으리라[고통이라는선물,천안함침몰과UDT대원의희생]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9. 12. 22:53

100402 낙원에 있으리라 ( 23:39-43)                설교집Ⅵ<얼굴과 얼굴로> 3 No.24

성경본문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통이라는 선물, The Gift of Pai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폴 브랜드 박사는 영국사람으로 인도에 가서 20년간 의료선교사로 일하시고 또 미국에 가서 30년 사역을 하신 분이고 나환자들을 치료하시던 분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고통은 인간의 신체 가운데 가장 정교한 특징이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경험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환자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말초신경이 죽어서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거예요. 얼른 치료해서 고칠 수 있는 것을 신경이 죽었기에 그 손을 불구덩이에 넣어도 감각이 죽어서 고통을 모른다는 거예요. 결국에는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그 아픔을 모른다는 거예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영국인으로 인도와 미국에서 사역을 하면서 고통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영국사람들은 대의명분을 위해서는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에요. 인도사람들은 너무나 잦은 고통 속에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반면에 가장 풍요를 누리는 미국사람들은 자그마한 고통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생이고 또 언젠가 흙과 같이 무너질 인생이기에 우리들에게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그 고통 까닭에 하나님을 찾게 돼요.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지금 천안함이 침몰되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현실을 봅니다. 실종장병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던 많은 실종자 가족들의 눈물과 울부짖는 소리에 우리도 함께 목소리를 합하여 정부와 군당국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마는 UDT대원의 희생을 통해서 현실의 또 다른 면을 보게 되었어요. 뱃속에 갇혀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사람들을 건져내야 되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UDT대원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하고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 그 UDT대원의 희생을 통해서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이해하고 차분히 생각을 모으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죄 가운데 빠져있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도 이렇게 구조작업을 펴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구조작업을 펴시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아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찢기시고 피 흘리시다가 결국에는 그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것이죠. 목숨으로 목숨을 바꾸는 것이죠.

로마서 5 8절 말씀에 보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 선인을 위하여 희생하는 자가 간혹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그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간혹 우리 주위에서 지하철에서 술에 취해 떨어진 사람을 위하여 젊은이가 용감하게 몸을 던져서 그를 건져내고 때로는 안타깝게도 자기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라면 과연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려운 일이죠.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으셨다. 그것도 한 순간에 눈앞에서 갑자기 이루어지는 긴박한 상황 속에 판단할 겨를 없이 몸을 던져서 저를 구해내고 자기는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는 사건이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다가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 가운데 임하시는 새로운 경험을 하시면서 광야에 들어가셔서 40일간 금식을 하며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사건 속에 그에게 부여된 사명을 붙드는 것이죠. 그래서 40일간의 광야의 금식은 그저 배고픈 것을 참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는 시간이고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응답하는 시간이죠. 그리고 나서 공생애 사역이 시작된 것이죠. 자기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죽어야 할 것을 번연히 알면서 나아간다면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에요.

저는 예전에 <로메로>라고 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그게 1970년대 말, 엘살바도르라고 하는 중미에 있는 나라에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군부가 독재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학살하고 억압하는 가운데 로메로라고 하는 카톨릭 주교가 현실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저항하는 이야기예요. 끝내는 미사를 드리던 중에 암살자들이 보낸 사람에 의해서 총에 맞아 쓰러져 죽습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마음 아픈지 몰라요. 그 영화를 다시 못 보겠더라고요. 자기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예감하고 있어요. 그는 강론을 통해서 말합니다. ‘아마도 저는 머지않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죽더라도 여러분 마음 속에 새로 꽃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어요.

우리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참 어려운 고통입니다. 히브리서 5 7-8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몸소 경험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를 드렸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스스로 말하셔요. ‘내가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나를 떠나지 말고 나와 함께 기도해다오.’ 사람이 얼마나 무딘지 다른 사람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 게 오늘의 현실이 됐어요. 내 자식이 죽거나 내 부모가 죽거나 내가 죽을 지경이 되어야 고통을 느끼는 그렇게 무뎌진 우리들이 되었어요. 저도 예외가 아니에요.

저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Jesus Christ Super-star> 중에서 하이라이트인 겟세마네의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비록 그것이 불신자 가롯 유다의 눈으로 본 예수라고 하지만 그 처절한 예수의 기도 노랫말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고통을 능히 이기셨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당신과 함께 3년 동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난 3년은 30년과 같은 어려운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순종해왔건만 이제 나의 목숨을 구하시니 하나님,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것을 내게 알려주십시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온전한 헌신을 여기까지 쏟아 부었는데 아직도 부족해서 내 목숨을 찾으십니까? 도대체 왜 내가 죽어야 합니까?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좀 보여주십시오. 이제까지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고 그 뜻에 순종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죽어야 한다니,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보여주십시오. 끝내 응답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렇다면 어서 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피 흘리고 죽어가는 내 모습을 보십시오. 어서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런 가삿말이에요. 물론 불신자의 눈으로 본 예수라고 했으니까 잘 새겨서 들어야 하겠습니다마는 예수님의 고통을 새롭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결정적 순간에 성경은 말합니다. ‘이 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여러분, 어떤 기도를 드리든지 간에 꼭 마지막에는 이 말을 하세요. 내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내 자녀들의 진로와 학업을 위해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잊어버리지 마세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순종이죠.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실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저를 도왔다. 마지막 열쇠는 순종이에요.  우리가 무엇이라고 기도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다 들어주실 거예요. 그러나 그 기도가 온전한 기도가 되는 열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올라가셔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들리시고 그 밤에 제사장에게 끌려가서 불의한 자들의 재판을 받으셔요. 종교지도자들이 모인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공회에서 불의한 재판을 받으셔요. 그 재판에서 사형 받을 자로 판결을 받고 이번에는 빌라도에게 나아갑니다. 유대인들은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자칭한 죄목으로 사형을 결의한 다음에 빌라도에게 데려가서는 정치적 이유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듭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 외치는 무리들의 폭동이 두려워서 예수를 내어줍니다. 터무니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한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하는 군중들의 요구에 굴복합니다. 저들을 달래기 위해서 바라바를 내어주고 대신에 죄 없으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합니다.

먼저 서른아홉 대의 채찍을 맞게 합니다. 로마사람들이 죄수를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치는 채찍질이 있는데 그 채찍의 끝에는 아주 날카로운 금속이나 짐승의 뼛조각을 매달아서 그 채찍을 맞게 되면 살갗이 찢어져 나가게 되죠. 서른아홉 대의 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끝내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넘어집니다. 쓰러집니다. 다시 일어나지 못해요. 그러니까 구레네 시몬이라고 하는 구경꾼을 붙들어가지고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가게 했어요.

육체적 고통도 말할 수 없지만 누구 하나 올바로 판결하지 아니하고 종교지도자들과 정치권력자들, 군중까지 합세해서 저를 죽이고자 한 거죠.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흔히 종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달래기 위해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할 때 남이 장군의 혼령을 부르잖아요. ? 남이가 역사 속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대표잖아요. 남이 장군 얘기를 아시잖아요? 그 사람이 원래 태종 이방원의 손자예요. 왕족이에요. 세조 때에 아주 탁월한 무예로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거예요. 세조가 너무 기뻐하며 남이를 사랑했어요. 그를 높였어요. 스물여섯에 병조판서를 제수했어요. 국방부장관에 임명한 거예요.

그런데 유감스럽게 다 그를 좋아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그를 두려워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요. 특별히 세조의 세자였던 나중에 예종이 되는 왕자가 두려워했어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왕이 되었을 때 왕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 남이를 참소했어요. 말도 안 되는 모함으로 남이를 엮어 넣었어요. 왕 또한 불의했기에 자기의 경쟁자로 판단했던 남이를 제거하려고 했던 거예요. 왕이 직접 재판을 열어가지고 고문을 하는 거예요. 남이가 억울함을 참습니다. 이 모든 것을 끝까지 견디다가 다시 한 번 공을 세울 기회가 오면 이 모든 것을 떨어버리리라 했는데 극심한 고문을 받다가 그만 다리가 부러졌어요. 그 순간 절망하게 돼요. 장수로서 다리가 부러지면 더 이상 나아가 싸워서 공을 세울 기회는 놓치는 거죠. 이제 포기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거짓 실토를 합니다. 내가 왕을 죽일 음모를 꾀했다고 거짓 실토를 하게 되는 거예요. 꼼짝 없이 죽게 된 거예요.

남이가 말합니다. ‘내가 한 가지 더 고백할 것이 있노라. 이 역모를 꾀할 때에 함께 한 자들이 있다.’ ‘그게 누구냐?’ ‘지금 옆에 서 있는 영의정이다.’ 팔십을 넘은 영의정 강순이 깜짝 놀랍니다.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지만 임금의 의심을 피할 길이 없어요. 영의정도 당장 끌려 내려와서 매를 맞게 됐어요. 팔십 노인이 그 매를 견디지 못해서 같이 역모를 했노라고 고백하게 돼요. 드디어 사형을 받게 되는 거예요. 죽기 전날 함께 옥에 갇혀 있을 때 영의정이 말합니다. ‘네 이놈, 남이야, 네가 무슨 원한이 있어서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얽어 매느냐?’ 남이가 말합니다. ‘나야말로 아무 죄도 없이 이렇게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을 영의정 당신이 번연히 알면서도 어찌 말 한마디 안 한단 말이오. 그러고도 당신이 죄가 없단 말이요.’ 결국 같이 죽었어요.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으면 그랬겠어요.

예수님이야말로 남이보다 더 억울하고 원통하신 분이죠. 그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길에 여인들이 몰려나와서 예수님을 애도하며 눈물을 뿌리고 웁니다. 그때 그 여인들의 눈물이 예수님의 마음을 일깨우신 것 같아요. 그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셔요.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이제 곧 다가올 예루살렘의 심판과 멸망이 어떠한 것을 예수님이 아셨기 때문이죠.

여러분,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확인해야 될 게 하나 있어요. 목숨보다 귀한 사명을 붙들어야 돼요. 이것은 생명보다 더 귀한 거예요. 오늘 예수님이 여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채찍을 맞아 불꽃같이 꺼져가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사명을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오늘 내가 여기서 죽는 것이 헛된 죽음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심판과 멸망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보내심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거죠.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매달렸어요. 울던 사람들도 다 멀어지고 주위에는 로마 군병과 구경꾼들과 비난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에게 외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신 자신을 구원해보시오. 당신이 정말 메시야요 유대인의 왕이라면 당신과 우리 자신을 구하시오. 거기에 참 기가 막힌 얘기가 나와요. 두 강도가 함께 매달려 있어요. 한 강도가 말합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라면 당신과 나를 구원하시오.’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강도가 예수님을 자기와 동격으로 취급해요. 사람들이 억울해하는 게 그거잖아요. 어떻게 당신이 나하고 똑같을 수 있느냐? 당신의 잘못은 분명한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김진홍 목사님을 다 아실 거예요. 70년대 그 어려웠던 시대에 청계천 빈민 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살리겠다고 판잣집으로 활빈교회를 세우고 그들과 함께 어려움과 고통을 다 겪으면서 감옥에도 들어가고 끝내는 정부와 타협을 해서 그 사람들을 인도해서 경기도 화성 남양만으로 옮겨가서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합니다. 마치 출애굽 하듯이 나아가요. 자기 삶을 다 드려 그렇게 한 것이죠. 그러나 그만 거기 가서 하는 일이 한 때 실패한 적이 있었어요. 실패하니까 함께 따라왔던 사람들이 우리가 당신을 믿고 따라왔는데 이렇게 실패했으니 당신이 모든 책임을 져라. 이제까지 저들을 위해서 모든 삶을 다 쏟아 부었건만 재산을 잃은 사람들 눈앞에 보이는 게 없어요. 목사님을 끌어냈어요. 사람들이 다 모여 앉아있는 자리에 끌어냈어요. 온갖 비난을 쏟아 붓는 거예요. 부끄러움을 주려고 옷을 벗기는 거예요. 그때 김진홍 목사님은 차라리 죽고 싶었다고 회고해요. 이제까지 자기의 삶을 다 쏟아 부어서 한 것이 이렇게 실패로 돌아간 것도 기가 막힌 일이지만 함께 고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들이 아랫도리까지 벗기려 하면서 수치를 준 것에 대해 절망했기 때문이죠.

예수님도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시간에 옆에 있는 강도가 부르짖는 얘기에 기가 막혔을 거예요.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라면 나와 당신을 구원하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시간 또 다른 강도를 통해 힘을 주십니다. 또 다른 강도는 함부로 말하는 강도를 꾸짖습니다. ‘너와 나는 우리가 저지른 죄값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지만 이 분은 아무 죄가 없다. 이 분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주소서,’ 그 강도의 마지막 간구에 예수님께서 정신을 다잡으셨을 거예요. 그리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고 고백하기를 내가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인간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보았노라.’ 천국을 가리키는 말이죠.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혹을 당하신 거예요. 네가 메시야라면 유대인의 왕이라면 나를 구원하라.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하늘군대를 동원하실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죽음으로써만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기에 죽음을 감수한 거죠. 하늘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하는, 많은 무지한 인생들을 대표하는 강도의 간구를 들으시고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구원을 선포하셨어요. 은총이죠.

죄송합니다만 저의 아버님이 1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아버님을 늘 존경했습니다. 학식이나 능력이 많아서 존경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시는 분이었지만 제 기억 속에 아버님의 임종의 마지막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간암 판정을 받고 6개월 만에 돌아가셨는데 이제 몇 시간 안 남았어요. 아들들을 부르셔요. 병상에서 몸을 어렵게 일으키셨어요. 아들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기도하셔요. 그때 제 나이가 사십이었는데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어요. 목회도 실패하고 가정에도 어려움이 있고 건강에도 어려움이 있는 정말로 소망이 보이지 않는 때였어요. 모두 제 잘못 때문이었지요. 저를 충분히 꾸짖으실 수도 있었어요. 야단하실 수도 있었어요. 원망하실 수도 있었어요. 한마디 그런 말씀 안 하시고 묵묵히 저를 위해서 있는 힘을 다 해서 기도하셨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귀한 아들이 되고 종이 되게 해달라고.  그리고 돌아가셨어요. 인생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것이라는 고백을 가지고 허물뿐인 아들을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어요. 그 생각만 하면 너무나 감사할 뿐이에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는 그의 모든 신학을 총 정리하면서 당신이 발견한 하나님은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라고 고백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칼 바르트가 생전에 연구하는 방 한복판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요. 한 편에는 모차르트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해요. 그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해요. 임종이 가까웠을 때 내가 이제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겠지라고 했다는 거예요. 모차르트가 어떤 사람이에요? <아마데우스>란 영화를 보셔서 아시겠습니다만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모차르트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람에게 세상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음악적 재능을 부어주셨어요. 참 알 길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요. 여러분,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에게 주목했던 것은 놀라운 음악적 재능이기도 했지만 또 하나, 허물 많은 그 인생 속에 하나님이 부어주신 재능이 있었단 말이에요. 은총이에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작품이 있잖아요. <레퀴엠>죽은 자를 위한 노래에 보면 거기에 모차르트의 신앙고백이 있어요. 이런 노랫가사가 있습니다. ‘자비하신 예수여,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저 때문임을 기억해주소서.’ 허물뿐인 나를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받아주소서 하는 고백이지요.

여러분,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서 고통을 겪으셨어요. 목숨보다 귀한 사명을 붙들고 십자가의 길을 올라가셨어요. 메시야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라는 마지막 유혹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은총을 선포하면서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내어 놓으셨어요.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