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모순된 존재의 헌신[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9. 15. 11:58

100110 모순된 존재의 헌신 ( 26:36-46) 설교집Ⅵ<얼굴과 얼굴로>3No.18

성경본문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합니다. ‘저의 첫사랑은 지금 제 아내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긴장했어요. ‘그는 제 어머니입니다.’ 은혜 받았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마침 휴가를 왔다가 예배에 참석한 어떤 젊은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 다음 주에 자기 교회 가서 설교를 합니다. ‘제 첫사랑은 제 아내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긴장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누구더라?’ 쫒겨났대요.

똑 같은 말을 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방법이 두 가지예요.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은 준비된 사람이에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또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서 자라나고 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섬기려고 몸부림치던 사람이었잖아요. 구도자였어요. 이렇게 준비된 사람은 하나님이 결정적인 순간에 딱 부르셔요.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맡기셔요. 사도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불붙는 열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보는 게 아니라 이것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다른 제자들 보다 뒤늦게 예수님을 만났지만 복음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이해했기에 하나님이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모아 신약성경에 들어가게 하셨어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대문화를 넘어서서 당시 헬라문화 사회에 적용시켜서 증거했어요.

베드로는 좀 다르지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느냐? 일단 먼저 부르셨어요. 데리고 다니셨어요. 그러면서 준비시키셨어요. 보통사람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보통사람이라고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너무나 정확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기질과 성격과 상황과 조건에 맞게 그를 쓰신 거지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베드로를 감동시키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어요. 이제까지 기억하고 외웠던 구약의 말씀에 맥이 통하게 하셨어요. 그날 설교할 때 삼천 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전형적인 유대인이었기에 고정관념을 깨기가 어려웠어요. 로마 백부장 고넬료 한 사람을 만나는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많은 준비를 시켜야 했어요. ? 자기 문화에 갇혀있어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 달라요. 준비된 사람을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준비가 안 된 사람을 일단 부르셔서 하나하나 가르치시면서 결국에는 쓰시는 거지요.

하나님에게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나름대로의 고난이 있지요. 사도 바울에게도 고난이 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겪는 고난은 성격이 서로 달라요. 사도 바울은 이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이게 어떻게 전개될 건가 하는 것을 알면서 겪는 고난이에요. 저 멀리 소망이 있는 것을 알면서 겪는 고난이에요. 오히려 고난 속에서 기뻐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전 베드로는 좌충우돌이에요. 마치 고구마 집사 같아요. 여러분, 고구마 집사 얘기 아세요. 시골 농촌에 어느 농사짓는 집사님이 낮에 밭에 나갔는데 너무 배가 고파가지고 고구마 밭을 지나다가 딱 하나만 먹으려고 뽑았는데 이게 주르륵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지고 온 자루에 쓸어 담아 넣으면서 주님의 뜻이라면 할 수 없지그러고 다 담았어요. 근데 주인에게 들켰어요. 늘씬하게 얻어터졌어요. ‘, 하나님의 뜻은 알다가도 모르겠네하면서 집에 와서 드러누웠어요. 끙끙 앓았어요. 목사님이 그 얘기를 들었어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꼭 맞을 짓을 했지만 그렇다고 심방을 안 갈 수도 없고 해서 가서 적당히 기도하고 위로하고 이제 좀 쉬세요.’ 하고 일어나서 돌아서 나오려고 하는데 그 뒤통수에 대고 집사님이 하는 말이 목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겪는 고난은 우리 주님이 겪으신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러는 거예요. 베드로 같아요. 좌충우돌이에요. 모르니까.

오늘 말씀을 쭉 앞뒤로 읽어보면 지금 유월절 만찬이에요. 그 유월절 만찬이 준비되는 과정을 보면 주님의 예지가 드러나고 있는데도 무감각해서 몰라요. ‘너희 중에 나를 팔리라.’ 말씀하셨지만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몰랐어요. 성만찬을 베푸시면서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못박히는 내 몸이다.’ 잔을 주시면서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 라고 얘기했지만 못 알아들었어요. 또 주님이 안타까운 마음에 오늘 이 밤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셨을 때 오히려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유감없이 무지를 드러냈어요. 주님과 더불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는 피곤했는지 잠이 들었어요. 그리고 주님이 붙들릴 때는 제일 먼저 도망가버렸어요. 좌충우돌이에요. 모순된 존재죠.내가 주님을 따라가겠나이다.’ 입으로 고백했어요. 분명 헛소리가 아니고 그래도 자기의 중심을 이야기한 것이지요. 다만 자기의 처지를 잘 모른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시면서 너희가 단 한 시간도 깨어서 나와 함께 기도할 수 없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표현을 오해하기 쉬워요. 여러분, 여기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라고 하는 말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마음, 또 우리가 생각하는 몸, 힘들게 일을 해서 몸이 피곤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여기서 마음은 프뉴마’, 영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주신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기에 누구라도 자기 속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어요. 뭔가 답답해 하고 있어요. 돈을 많이 벌었다고 만족을 얻을 수가 없어요. 잠깐 자랑하고 기뻐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공부를 많이 하고 애써 얻는 학위가 기쁨을 주는 것도 잠깐이고 진정한 만족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속사람이 알아요. 그 속사람을 프뉴마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럼 육신은 뭐냐, 속사람 외에 모든 것을 육신이라고 표현해요. 우리의 이성, 우리의 감정, 우리의 의지, 이거 다 육신이에요. 그 프뉴마가 싸륵스라고 하는 육신을 다스려야 하는데 그 프뉴마가 죽어 있어요. 시들어가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육신이 방향을 잃고 우리 마음대로 생각하고 우리 느끼는 대로 행하고 우리 계획과 의지대로 행하는 거예요. 그거는 자기의 계획을 이룰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룰 수 없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모순이에요. 베드로는 모순된 존재예요.

그러나 알고 보면 베드로만 좌충우돌하고 모순된 존재가 아니에요. 다 준비된 것 같은 바울도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눈뜨게 됐어요. 자기 본래의 모습에 대해서 눈뜨는 거예요. 로마서 7 19절에 보면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속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따라 나설 때에는 선한 것은 따르지 아니하고 욕심을 따라가고 자랑거리를 따라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따라가는구나하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바울같이 훈련하고 연습했건만 속사람을 자기가 제어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7 24절에 이렇게 말하잖아요.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하나님만이 해결책을 내세요. 스가랴 4 6절에 그랬죠. ‘우리 삶의 모든 일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 20절에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순간 이제 나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만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러기에 여러분, 행여나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지 마세요. 자기 이성을 자랑하지도 마세요. 하나님의 영으로 붙들리고 쓰임받을 때에만 비로소 신앙에 눈 뜨게 돼요. 자칫 도덕적으로 반듯한 사람이 예수 믿겠다고 하면 좀 걱정돼요. 예수 믿는 것을 착각할 수 있어요. 뭔가 교회가 세운 규칙을 열심히 지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걱정돼요. 신앙이 무엇인가를 놓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어요. 우린 다 연약해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에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데려가고 특별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은 더 가까이 부르셨어요. 같이 기도하자고 요청하셨어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몰라요. 그야말로 연약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에요. 원한 게 아니에요. 억지로 끌려왔어요. ‘여기 머물러 깨어있으라.’ 근데 다 졸았지요. 그러나 중요한 건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새해 이렇게 결심하세요. 교회 나와서 조는 한이 있어도 꼭 나오리라. 이거 굉장한 헌신입니다. 어떤 분은 그러죠. 졸 바에는 안 나간다 그거 어리석은 거예요. 애들은 놀면서도 다 들어요. 개구쟁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노는 것 같아도 다 알아들어요. 우리 아파트에 초등학교 1학년짜리 준혁이가 있는데 가끔 던지는 질문을 보면 제가 깜짝 놀래요. 이 녀석이 개구쟁이 장난꾸러기가 아니구나. 다 들어요. 애들은 장난치고 놀면서도 다 듣는다면 그럼 어른들은 어떻게 들을까 졸면서 듣는 것 같아요. 그래도 다 들어요.

주님이 말씀하셔요. ‘깨어있어 기도하라.’ 제가 지난 12월에 딸아이 졸업식 때문에 미국에 2주간 머물면서 두 번 한인교회 예배에 참석했어요. 그런데 기도를 인도하시는 분이 1.5세대예요.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왔대요. 벌써 30대 후반이 되었어요. 기도를 하는데 억양부터 조금 어색하잖아요. 더 어색한 것은 너무 어렸을 때 와서 그랬는지 표현이 낯설어요. 그분이 그렇게 하시진 않았지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분이 한인교회에서 기도했는데 그때가 IMF경제위기 때였어요. ‘하나님 왜 우리를 골탕 먹이시나요?’ 사람들이 왁 하고 웃어버렸습니다. 저도 그분의 서툰 기도를 들으면서 한편으론 웃음이 나면서도 아 그렇게 서툰 기도에도 은혜가 있더라고요. 마음은 간절하더라고요. 여러분, 기도를 유창하게 하는 것 중요하지 않아요. ,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셔요. 생각도 기도예요. 찬양도 기도예요. 언제든지 기도하세요.

오늘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지요. ‘다른 사람은 다 떠날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할 때 베드로야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단이 너를 내어달라고 요청을 해왔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물리치고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가롯유다는 그만 넘어가버렸지만 무지하고 열심뿐인 네가 넘어지지 않도록 너를 위해 간구했다.’ 주님의 중보기도가 있어요. 그 유명한 찬양이 있잖아요.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 누가 기도한다는 얘기예요? 우리 주님이 연약한 나를 위해 오늘도 기도하시는 거예요. 제자들이 잠들었는데 세 번씩이나 가서 피를 토하고 땀을 쏟으며 기도하시는 거예요. 그때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다. 우리를 위하여 변호 하신다. 이게 우리 신앙의 비밀이에요.

그리고 이제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제는 자고 쉬라. 지금은 너희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오리라.’ 주님은 우리가 허물과 연약함뿐이지만 오늘만 보지 아니하시고 멀리 내다보셨어요. 소망을 보셨어요. 후에는 따라오리라.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활짝 열고 들으세요. ,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냥 들어두세요.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지금은 깨닫지 못할 것이지만 성령께서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실 터이니 지금은 들어두라.’ 그러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 들어두세요. 중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거 다 쓸모 없는 거 같지만 아니에요. 다 유용한 거예요. 사실 시나 시조나 다 그때 외운 거 기억나죠. 대학 졸업한 이후에는 별로 기억나는 것 없어요. 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외우고 했던 게 기억나는 거예요. 다 유용한 거예요. 지금은 들어두라는 거예요.

그리고 말씀하세요. ‘일어나라 함께 가자.’ 억지로 이끄는 은혜, 나 같으면 피를 토하고 기도하는데 옆에서 엎어져 자는 사람들을 야단치고 쓸데없다고 화를 내고 갈 것인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오늘 행여나 아내나 친구 때문에 상황에 못 이겨서 교회에 억지로 나오신 분들은 오늘 아주 대박이 난 거예요. 억지로 이끌려오는데 은혜가 있어요. 성경에도 있잖아요. 누가복음 14장에 보니 왕이 잔치를 벌였어요. 초대장을 발송했어요. 시간이 됐는데 사람들이 안 오는 거예요. 종이 가서 물어봤더니 아이고, 나는 밭을 사가지고 농사지어야 해서 못 갑니다, 나는 결혼했기 때문에 지금 못 갑니다.’ 이유가 있어요. 그러나 감히 왕의 잔치 초대를 거절하다니 왕이 화가 났어요. 종을 불러서 말합니다. ‘그놈들은 다 그만두고 지금 밖으로 나가서, 산과 들로 나아가서 아무나 데리고 와라 내 집을 채워라.’ 영문도 모르고 붙들려왔는데 왕의 잔치였어요. 우리가 지혜로워서 하나님을 찾겠다고 몸부림친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셨어요. 저야말로 하나님이 늘 이끌어주셨어요.

제가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집에 내려갔더니 교회 전도사님이 여름성경학교 교사로 꼭 좀 봉사해 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제가 듣지 않았어요. 봉사 안 했어요. ‘, 내가 해야 되나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다음 해 2학년 때 상황이 바뀌어 가지고 교회의 아동부 교사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일을 하다보니 총무가 되었어요. 일을 해보니까 새삼 작년에 일을 하라고 부르셨던 전도사님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몰라요. 충분히 일할 수 있었는데, 시간도 있었는데 그걸 거절했어요. 몰라가지고. 여러분을 위해서 제가 권고하는 거라면 억지로라도 하세요. 이유를 달지 말고 하세요. 하나님이 오늘 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난 주에 그랬잖아요. 골로새서 2 3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감추어져 있느니라.’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어요. 눈뜬 장님이에요. 심지어는 신명기 11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투정을 합니다. ‘하나님 이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저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니, 난 못합니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양보를 하셨어요. ‘그래, 네가 너무 힘든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70인 장로들을 불러모아라 내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겠다. 그들의 잠든 영을 다 깨워주겠다. 저들의 눈을 열어주겠다. 이제까지는 마지못해서 체면 때문에 일했는데 이제는 마음에 불을 붙여 너와 함께 일하게 하겠다.’ 그래서 다 소집했어요. 그 자리에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셨어요. 이 사람들이 다 함께 일어나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이 되어 가지고 조직을 갖추고 같이 일을 나누어 맡으면서 광야의 일을 해결해 나갔어요. 하나님이 역사하신 거예요. 그런데 안 나온 사람이 있었어요.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요. 누가 안 나왔을까? 뭔가 모세하고 뒤틀려서 안 나오고 집에 앉아 있는데 그 사람에게도 은혜를 부어주셨어요. 막 방언을 하고 난리가 난 거예요. 여호수아가 그 소식을 듣고는 모세에게 지금 이 자리에 안 나오고 저기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데 빨리 쫓아가서 잠잠하라고 할까요?’ 그랬더니 모세가 말합니다. ‘네가 지금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말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변화시켜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가시려고 이런 일을 하시는 게 아니냐 아직 깨닫지 못하는 자를 위해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느냐 내버려두어라.’ 전 이 구절에 너무 은혜를 받았어요. 부름에 응하지 않고 집에 있는 사람에게도 은혜를 부으시는 하나님, 억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총.

요한복음 13 36절에 유월절 만찬 이야기를 쭉 설명하면서 놀라운 구절이 나와요. 주님이 오늘밤 내가 가는 그곳에 너희는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죠.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 여러분, 이게 헌신이에요. 매일 물어보세요. 매순간 물어보세요. 베드로가 말합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도 가겠나이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베드로가 터무니없는 장담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장담이 현실이 되게끔 바꿔주셨어요. 아름다운 인생의 종말을 허락해주셨어요. 사도 바울도 주님을 위하여 로마에서 순교하지만 같은 시대에 베드로도 로마에서 같이 순교해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20절에 살든지 죽든지 오직 내 안에 살아계신 분은 그리스도니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뜨거운 마음으로 얘기했어요. 그러나 베드로도 투박하지만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도 주님을 따라가겠나이다.’ 연약한 자의 헌신, 모순된 존재의 헌신을 주님은 귀하게 보셔요. 사람들의 평가 기준을 가지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우리의 중심을 보셔요. 이 은총에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