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의 시선 영화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 2017, 도로타 코비엘라 등)는 빈센트 반 고흐가 사망한 1년 뒤, 그의 친구였던 우체부 조셉 룰랭이 아들 아르망에게 생전에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시작된다.
이 영화의 묘미는 줄거리가 아니라 표현 기법에 있다. 고흐의 그림은 심란하고도 황홀하게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영화는 바로 그런 붓질의 기법을 재현해 ‘고흐 스타일’을 영화적으로 재현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고흐의 시선’을 경험하게 된다. 끝없이 흔들리며 꿈틀거리는 시선은 초점을 찾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실하게 잡힌 초점에서 달아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느낌은 하나의 감각 경험이 어떻게 사유로 전환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주었다. 혼란스러운 시선은 생명의 느낌인 동시에 고통의 감각을 전해 주었는데, 그 자체가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빈센트가 그린 것 이번에는 고흐가 그린 것을 보자. 고흐의 인물화에는 주변 사람들이 등장한다. 평생토록 영혼의 벗이었던 동생 테오, 애증의 관계였던 동료 화가 고갱, 자신을 괴롭힌 르네, 여관집 애덜라인, 닥터 가셰와 딸 마가레트, 우체부 룰랭 부자, 뱃사공, 동네 농부와 ‘바보(idiot)’라고 놀림 받는 소년에 이르기까지, 고흐는 아를에 머물던 시절에 만났던 동네 사람들을 화폭에 옮겼다. 미지의 인물이나 이상형이 아니라, 직접 보고 만나고 대화했던 사람, 심지어 자신을 괴롭히며 공격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질투를 표했던 이를 화폭에 담은 것이다. 삶이 곧 예술이며, 예술가가 보는 것이 곧 작품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기록하는 것은 결국 일상생활이라는 우리의 경험 장 안에 있다. 더 멋지고 훌륭한 세계를 찾으려고 밖을 향한 시선의 창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이곳, 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 공간을 다시 돌아봄으로써, 나의 감각과 경험을 삶의 자산으로 삼는 훈련도 필요하다.
삶의 문제를 표현하는 데서부터 사회적 사색이 시작된다 우리는 종종 현재에 만족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의 주인은 대개 종교인이나 심리 치료사/상담사, 사회에서 널리 존경받는 분들이다. 현실에 만족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에 다가가는 과정으로서, 우선 현재의 삶에서 불만스러운 것을 명확하게 ‘바라보고’ ‘명명하고’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닐까.
누구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지향한다면,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이나 힘, 대상이나 제도, 사회적 분위기가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보고 표현할 의무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고흐처럼) 직접 표현해야만, 공감의 대상도 될 수 있고, 사색의 대상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서 누구에게 전달해야 할까. 사회의 공공성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일상을 살아가며 겪는 소소하고 또한 중요한 일들은 목소리를 전달할 통로가 막혀있거나, 애초에 출구 따위란 없는 것처럼 단단하게 봉쇄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겉으로 매끄러워 보이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할 사회적 매체, 제도적 출구가 없다는 차단의 신호일 수 있다. 이 시대에 가장 견고한 유리천장은 젠더나 학력이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겹겹이 에워싼 사회적 차단막일지 모른다(이를 ‘위계사회’라고 하며,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성의 문제적 조건으로 지적한 바 있다. 위계사회에서 어떻게 소통의 출구를 만들 것인가가 현시대의 과제다. 일본 학자 이치카와 신이치는 ‘인간력’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는데, 이는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함과 동시에 자립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힘차게 살아가기 위한 종합적인 힘’이라는 뜻이다.*)
비평가이자 현장 운동가인 리베카 솔닛은 최근의 저서에서 희망은 행동을 요구하고, 행동은 희망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희망의 원리』의 저자인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렇게 썼다.
“이 감성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이 속한) 변화하고 있는 것 속으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던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
한 해를 지나보며 주변을 돌아봄으로써, 내가 나에게, 그리고 사회와 현대라는 시대성이 빠뜨리거나 외면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것을 말하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상과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주변을 돌아본다는 것은 어둠을 들춰내거나 동굴에 잠입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사람은 한눈에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존재이므로), 그저 돌아보기만 해도, 의외로 많은 것이 수월하게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저 돌아보는 일 말이다.
* 강중만,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노수경 옮김, 사계절, 2017, 201쪽. ** 리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설준규 옮김, 창비, 2017, 43쪽. |